정서영의 호두 조각을 보고 내가 생각한 것들


정서영의 호두 한 전시장에서 그 호두들과 만났다.

What the HODU! 

정서영 개인전 〈공기를 두드려서(Knocking Air)〉에 전시된 〈호두*〉. 바라캇 컨템포러리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정서영의 〈공기를 두드려서(Knocking Air)〉 전시에서 문제의 호두와 만났다. 그 호두들은 1층 안쪽 전시실의 빨간 나무 장 안에 드문드문, 가끔은 옹기종기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온전한 호두도 있었지만, 잘린 면을 드러낸 호두는 좀 더 쓸쓸해 보였다. 소재가 유토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거푸집을 만들어 캐스팅한 플라스틱이었다. 이게 대체 뭐지? 왓 더 호두! 그 장의 빨간색이 또 내 머리를 간지럽혔다. 호두가 앉아 있는 장의 색이 1970~1990년대에 지은 옛날 집에 많이 쓰인 빨간 벽돌, 딱 그 ‘산업화’의 색이었다. 집에 와 ‘정서영 호두’를 검색해봤다. 온라인으로 창작물과 미술품을 판매하는 ‘취미가’에서 정서영의 다른 호두를 팔고 있었다. 그 호두에는 보통의 호두라면 사회가 쉽게 합의해주지 않을 엄청난 가격이 매겨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유리컵 안에 놓인 그 호두는 진짜 호두였고, 껍데기 틈으로 종이가 비집고 나와 있었다. 취미가에 전화를 해보니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이 유리잔 속 호두는 지금 구찌의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정서영의 호두가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보통의 호두 껍데기도 조각이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언제 될 수 있는가? 플라스틱으로 호두 형태를 캐스팅하면 조각이 될 수 있는가? 일민미술관에서 정서영의 거의 유일한 단행본 형태의 도록을 사서 찬찬히 읽었다. 이 책에서 그는 말했다. “형태는 분명히 선택된 생각”이고 또한 “사물에서 조각까지 가려면 사물에 대한 합의를 깨야 한다”고. 나는 작가가 던진 수수께끼에 낚였다. 이 찌를 빼내려면 호두 껍데기라는 사물에 대한 사회적 합의인 가격을 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저 호두를 사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바나나를 먹어치운 행위예술가 데이비드 다투나처럼 쫙 하고 쪼개버린다면? 그 순간 뭔가가 한 번 더 깨지지 않을까? 사물이 합의를 깨고 조각이 되었지만, 조각 역시 사물이니 다시 깨질 수 있다. 나는 용감하게 나의 견해를 정서영 작가에게 알렸다. 작가는 바라캇 컨템포러리를 통해 “그렇습니다. 당연히 조각은 ‘깨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두 껍데기로 만든 작품을 사서 실제로 쪼개도 별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고, 바나나를 먹어치웠다는데 (그것도) 별일 아니었습니다”라고 밝혔다. 와, 멋있어. 

취미가에서 판매하는 정서영의 호두. 사진 제공 취미가.

ESQUIRE 2020.07.02

https://www.esquirekorea.co.kr/article/47427

명당 바로보기

 

민정기_주재환_최종현展 

2022_0812 ▶ 2022_0918자하미술관 ZAHA MUSEUM, Seoulwww.zahamuseum.org

완만하게 펼쳐진 넓은 들판에 서서 따뜻하게 내리쬐는 볕과 함께 눈앞으로 길게 연결된 물길의 소리, 그리고 그 뒤로 울창하게 뻗어있는 산세를 보고 있는 상상을 하니 한껏 심신에 생기가 든다. 

● 예로부터 흔히 모두가 선호하는 공간의 기준으로 평탄한 땅, 산수의 조화와 함께 따뜻한 기운이 도는 곳을 지리적으로 배산임수의 형태인 풍수지리에 해당한다 하였고 지금까지 이는 가장 기본적인 '명당'의 전통적 개념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공간은 인간이 누리는 가장 기본적인 영역의 한 부분으로써 단순히 생존을 넘어 시각적인 정경과 심리적인 안정감, 그리고 더 나아가 길과 복을 향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결국 인간에게 공간이라는 영역이 가지는 의미는 그 장소 자체만이 아닌 주위를 둘러싼 전체적인 환경까지 포함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풍수는 명당을 의미하는 하나의 자연관으로, 그것이 미신이거나 비과학적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인류의 삶 속에서 자연환경은 절대 배제될 수 없는 부분이고 그 기운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상적인 입지 즉 명당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좋은 에너지를 느끼고, 살기에 편안하고, 향후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 같은 곳을 정해 집을 짓고 묘를 써서 좀 더 좋은 기를 받고자 함일 것이다. 

● 전시 『명당 바로보기』에서는 작가 주재환, 민정기, 최종현과 함께 어쩌면 명당이라는 그 의미가 조금은 달라져 버린 현재와 명당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를 바르게 다시 이해해 볼 수 있는 계기를 가져보고자 한다. 세 작가의 작업은 모두 고지도의 형태를 기본으로 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명당을 풀어내고 있으며 면면촌촌 무수한 답사와 조사를 통해 우리의 민족사와 인문학적 의미를 지리적 요소와 결합하여 그려지고 있다. 

● 지금의 서울인 조선의 수도 한양은 한국의 대표적인 명당으로 꼽히고 있다. 조선의 새 도읍지로 선정된 한양은 풍수지리상으로 완벽에 가까운 구조를 보이고 있는데 그 당시의 현실적인 여러 방면에 잘 부합하는 이점들이 많다. 주변으로는 4개의 산을 잇는 도성이 있어 겨울에는 찬바람을 막을 수 있었으며 남쪽으로 한강을 끼고 있어 교통에 유리했다. 현재 서울의 사대문 안 지형을 보면 전형적인 명당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서울의 도심이기도 하고, 현재의 주요 관청, 기업이나 대학들이 위치해있는 의미 또한 명당의 상징성을 보여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재환_목판음각 수선전도_MDF 음각, 락카 바탕 단청 마감_지름 500cm_1988

● 주재환의 「목판음각 수선전도」는 김정호의 「수선전도」를 기본으로 목판에 음각을 하여 옛 한양의 모습을 체험할 수 있도록 바닥에 설치한 작품으로 일반적인 평면의 지도와 비교하여 직접 보는 이들에게 현재의 서울과 비교해볼 수 있는 재미가 있고 명당을 거니는 기분을 느껴볼 수 있어 당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민정기의 「서울의 얼」은 최종현과의 공동작품으로 대리석에 19세기 지도인 경강부임진도를 바탕으로 유교의 5개 덕목인 인, 의, 예, 지, 신을 상징화한 벽화작품이다. 조선은 성리학의 기본 가르침을 강조하기 위해 인의예지신을 각각 한양의 사대문인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과 보신각에 새겨 넣었는데 민정기의 「서울의 얼」에서는 인의예지신을 각각 인정전과 영조의 청계천 준천 모습, 해치, 문표와 악공, 규장각과 서당, 보신각과 선비들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고 그림의 양쪽 끝 각각에는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열차분야지도와 천하도가 그려져 있다. 이는 조선을 대표하는 도상들과 의미를 배치한 형태로 동쪽으로는 충주로, 서쪽으로는 강화로 이어지는 서울 전역의 모습을 디테일하고도 웅장하게 담아내고 있다. 최종현의 「1481 한양」은 한양의 모습을 목각에 형상화한 작품으로 한양도성과 성문, 궁궐, 종묘, 도로와 물길 등 한양의 상징들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작품에서 보여지는 지명들을 비교해서 읽다 보면 과거와 현재가 하나의 서사로 연결되고 있다.

민정기_서울의 얼_캔버스천에 디지털 프린트_120×600cm_2022

민정기는 지리적 특성이 있는 장소를 연구하며 그곳의 역사적인 사실과 인간으로서 지향해야 할 사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이를 명당도의 형태로 풀어내고 있다. 「1939년」은 서울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인왕산 암벽에 일제가 우리 민족을 전쟁터에 동원시키기 위해 새긴 구호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해방 이후 글씨들이 삭제되어 현재는 그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림 속의 뚜렷하게 새겨진 글씨들은 아직도 바래지지 않는 시린 역사의 실재이다. 「장릉에서 본 왕릉뷰 아파트」는 김포에 위치한 장릉 앞에 아파트단지가 문화재청의 허가 없이 새워지면서 논란 중에 있는 사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유네스코로 지정되어 있는 장릉은 계양산과 김포 장릉, 파주 장릉을 이어주는 풍수지리적 입지에 있지만 현재는 계양산 대신 고층의 아파트 단지가 그 시야를 가려버린 모습으로 쓸쓸하고도 애석한 기운이 감돈다. 이는 공간과 공간 사이의 배려가 사라지고 자연과 인문환경의 조화가 무시된 예로 '왕릉뷰 아파트'라는 아이러니한 단어 조합에서 조악함이 느껴진다.

최종현_도산서원 지도_종이에 실크스크린_38×110cm_2005

최종현은 일평생 도시연구에 매진하여 왔으며 이와 관련된 많은 공공프로젝트에도 참여해왔고 수많은 답사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고지도 형태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최종현의 작업을 보면 건축물 자체만이 아닌 나무, 물 등 자연의 모습이 하나의 전체적인 풍경으로 그림 안에 표현되고 있고 이는 흐트러짐 없이 아주 세밀하고도 정확하게 그려지고 있다. 산속 산사를 그린 「두륜산 대흥사산도」, 「반용사 명당도」와 「도산서원 지도」에서 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도산서원 지도」를 보면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앞으로는 물이 흐르고 뒤로는 산이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태로 그림 전체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고 길게 뻗은 강의 전경과 초록빛의 산의 조화는 아름답고도 고즈넉한 절경이다. 「고려 숙종조 남경 산수지도」, 「조선 세종조 한성부 산수지도」, 「조선 성종조 한성부 산수지도」, 「조선 고종조 한성부 산수지도」에서는 서울의 고려 말부터 조선까지 궁궐이 변화하는 위치를 나타낸 그림으로 지난한 세월에 따라 궁의 변화를 자세히 관찰해볼 수 있으며 이는 작가가 얼마나 서울 도시 모습의 위치와 변화에 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해 왔는지 알 수 있다. 

● 땅 위의 인간은 인간이 누리는 삶 속에서 끊임없이 주변 환경에 대한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며 땅은 인간의 욕구를 자극하고 때론 인간을 위한 땅이 되기도 한다. 땅은 인간과 자연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의 역할을 하며 인간은 자연을 배제하고는 살 수 없다. 지나온 역사와 현재의 우리가 지켜보는 것처럼 땅, 건축, 주변 환경이 갖는 가치와 의의에 대한 모두의 관심과 호기심은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다. 

● 땅을 두고 누가 무엇을 먼저 소유하려 하거나 서로를 구분 지으려 하지 않는 의지를 보인다면 우리가 발을 내딛고 있는 그곳이 비로소 좋은 땅, 명당이지 않을까. ■ 유정민

https://neolook.com/archives/20220812c

잡동사니가 예술을 만났을때

작가 주재환씨(59)에게 작업 중인 모습을 촬영하고 싶다고 하자 그는 완성된 작품의 ‘오브제’를 뚝 떼어내 정말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당황한 기자에게 “괜찮아, 내용만 전해지면 되니까”라며 태연했다. 그러니까 그의 작품은 컬렉터의 리스트에 오를 만한 ‘물건’이 아니라, 그냥 저냥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시비 걸기’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존재론적인 물음 대신 가라앉은 기억을 휘저으며 “어이, 이거 잊었나?”라고 묻는다. 
요절한 민중화가 오윤이 한때 살았던 벽제의 농가로 그는 넉달전 쯤 옮겨 왔다. 요즘 그는 내년 7월 열릴 첫 개인전을 준비중이다. 그가 민중미술의 한 시발점이 된 ‘현실과 발언’ 창립 동인으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 온 것을 고려한다면 너무 늦은 데뷔전이다. 
“개인전 한번 했지. 73년 쯤 광화문에 있는 ‘쪽샘’이란 민속주점에서 사진콜라주 한 50개 했지.”
당시 반응은 어땠을까.
“반응이고 뭐고 없는 거지. 학교 동창들이랑 술 먹으려고 한 거니까. 동창들한테 미리 ‘작품값’을 걷어서 그걸로 청계천 고서점에서 재료 사서 작품 만들고 다 나눠줬는데, 요새 다시 찾아보려니까 없네.”
그는 1960년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으나 ’객기와 생활고’로 한 학기만에 그만뒀다. 그리고 행상, 외판원, 방범대원 등 안해본 것 없이 다 해봤다고 했다. 월급쟁이 생활도 해봤다. 월간 ‘독서생활’ 편집장, 한국자수박물관 연구원을 거쳐 83년에서 96년까지 그는 도서출판 미진사의 주간을 지냈다. 
“뭔가 삶이 그로테스크해졌지. 집에서 창씨개명해 준 이름으로 중학교에 가고 해방되고 피란다니고 대학 1학년 때 4·19를 맞았지. 그리고 유신,  80년대가 있었어. 내가 쉰살이 넘어서야 유화물감 갖고 작업을 했는데, 젊은 작가들이 형상 작업하는 것과는 아주 달라. 무의식 속에 딱지처럼 덕지덕지 붙어있는 온갖 삶의 기억들을 끈적한 물감으로 녹여내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올해부터 다시 가벼운 매체들 갖고 작업하기 시작했지.”
80년 ‘현실과 발언 창립전’ 이후 그는 각종 단체전에 ‘당일치기’ 작전으로 작품을 만들어 낸다.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시가 있으면 작품 제작에 매달리는 식이다. 그렇게 해서 ‘도시와 시각전’(81) ‘반고문전’(87) ‘현발 10년전’(90) 등에 작품을 냈고,  87, 88년에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를 맡으면서 민미협 전시에도 계속 참여했다. 결국 80년대 내내 민족 민중 미술운동의 태풍 한 가운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언제나 그 중심 밖에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참 웃기지. 민미협 대표까지 했는데 내가 한 것 중에 민중미술의 대표작이 없으니까.”

‘현실과 발언’ ‘민미협’ 등 참여 민족민중미술 이끌어
미술운동이 정점에 달한 80년대 말 발표된 ‘미제껌 송가’(성조기 앞에 ‘쥬시 후레시’ 껌종이를 붙임)나 ‘몬드리안 호텔’(차가운 몬드리안의 추상에 군중을 그려넣음)에는 당시 ‘금기시’됐던 유머와 유희(!)적 감각이 넘쳐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오늘의 작가와 비평가들이 그를 다시 발견하게 된 이유다. 그래서 ‘포럼A’같은 미술 담론지는 그를 ‘민중미술-한국 모더니즘 대립의 틀로는 전혀 담을 수 없는 작가이며, 반대로 양자 모두의 핵심에 닿아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작가이자 미래의 작가’라고 설명한다.
“미술 사조든 무슨 주의든 정의도 잘 모르고 관심도 없지만 자본주의가 욕망을 가진 인간들의 한계겠지. 자장면은 배고플 때 먹음직스럽지만 먹고 난 그릇은 혐오스러워. 그렇게 먹고 싸고, 계속 반복되는 거지.”
자본의 소유에 저항하는 몸짓으로 제도권 미술의 사랑을 받는 젊은 미술인들에 비하면 그의 반권력적인 성향은 체질인 것 같다. 그는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도시와 영상전’에 ‘칼 막스’라는 작품을 냈다. 그는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지는’ 미술계를 거슬러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 분리수거통에 누가 자본론 원서를 버렸더라구. 그런 거 이제 필요 없어진 거지. 액자도 하나 주워서 거기에 책을 붙인 거야.”
그는 요즘 자신의 작업을 ‘천원 미술’이라고 부른다. 재료는 광고전단지, 쓰레기통이나 길거리에서 주운 잡동사니들이고 풀, 본드, 종이같은 것만 돈 주고 산다. 그의 ‘잡동사니 사랑’은 길에서 주운 옷핀, 망가진 압정, 명함광고 등 “난지도에도 못가는” 잡동사니를 어여삐 여겨 의상대사의 법계도에 맞춰 견출지에 붙인 작품으로 1000원밖에 들지 않았다. 

“생활? 정기적 수입은 없지. 이젠 깡으로 버텨.”
미술 기자였던 부인 성금자씨가 작은 미술학원을 운영하므로 그가 “깡으로 버틴다”고 한 것은 생활이 아니라 예술일 것이다.  그는 팔아보겠다고 작품을 해본 적이 없다. 또 그의 작품 대부분이 잡동사니로 만든 것이라 팔릴 리도 없다.  얼마전 그는 ‘미학’ 3부작을 완성했다. 유화 작품이라서 컬렉터들의 눈길을 끌 만도 했지만 작품이 워낙 시니컬해서 그 역시 ‘장사’와는 무관한 작품이 될 듯하다. ‘미학’의 첫번째는 외계에서 바라본 지구, 두번째는 지구의 인간 무대다. 세번째는 작품을 전시 중인 조물주. 그는 “조물주의 작품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 것 같아?”라고 묻고는 쿡쿡 웃는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조물주도 버린 것들 뿐이다. 벽에는 그가 쓴 시가 붙어 있다. 
‘하늘엔 밤하늘엔 샛별들이 총총/ 바닥엔 길바닥엔 잡동사니 총총/ 버림받아 길바닥에 버림받아/ 내가 버린 네가 버린 그가 버린/ … 길바닥에 눈길 주어/ 꿈을 찾고 소망담아 사랑으로/ 범블래기 범블래기 하하하/ 징글래기 징글래기 찰찰찰.’(주재환, ‘잡동사니 사랑’)

1999년 김민경 기자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s_plus/news200/np200kk010.html

GCC Open Studio 2011 경기창작센터 오픈스튜디오

 

2011 경기창작센터 오픈스튜디오 
 2011_0507 ▶ 2011_0508  
참여작가 강상우_강소영_릴릴_가옥_구민자 김나영+그레고리 마스_김보중_김월식 박용석_손소영_안네 홀트로프_이기일 이순종_이데 레크만_전윤정_최기창 크리스틴 라케_피아 란징거_한석현_홍남기 
 2011 GCC Open studio 
 Sat. 7 ~ Sat. 8 of May 2011 10:00am ~ 7:00pm 
Opening reception: Sat. 7 May 2011 at 3:00pm 
 Nayoungim+Gregory Maass Kang Sang Woo Soyoung Kang_liilliil Ga-OK Kim hwayong_Ga-OK Sim Jaekyung_Ga-OK Minja Gu Bo-Joong , Kim KIm Wol Sik Park Yong-seok Shon Soyoung Anne Holtrop Kiil Lee Soon-Jong Lee Iede Reckman Chun yun jung Kichang Choi Christine Laquet Pia Lanzinger HAN SEOK HYUN Hong Nam Ki



190 hours

2020년 예술인 <문화기획자> 문화기획활동 긴급지원 <190 시간>

published by 서울문화재단 

Dec. 2020

In Praise of Inaction 무위예찬(無爲禮讚)

 

May 13 - Jun 12, 2016

Kukje Gallery, Seoul

www.kukjegallery.com

국제갤러리는 한국의 대표적인 중견작가인 우순옥의 《무위예찬(無爲禮讚)》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지난 2011년 국제갤러리에서의 개인전 이후 5년 만에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으로 신작을 포함한 드로잉, 영상, 텍스트, 설치작품 등 12점을 K1에서 선보인다. 작가의 관조적 세계관과 예술관으로 ‘무위사상’을 재해석하는 《무위예찬》전은 과잉과 성과주의가 만연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본질에 관하여 질문을 던진다.
 
우순옥은 시간이나 공간과 같은 비물질적인 개념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현하는 작업을 한다. 작가의 재현으로 소환된 사라진 장소와 기억, 부재하는 대상 등은 관객에게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과거에 했던 작업이나 과거 전시 장소였지만 현재에는 사라지거나 잊혀진 공간을 불러오는 작품을 선보인다. 예를 들어, 1983년작 유화 <침묵의 바다>는 세월의 흐름을 담은 오브제 <시간의 그림>(1983/2016)이 되었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된 구(舊) 기무사에서의 작업 <온실>(2009)은 작가의 지난 예술적 여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시간과 공간을 순환하는 개념으로 인식하는 작가의 ‘무위사상’을 드러낸다.   
 
작가가 재해석한 ‘무위사상’은 이번 전시를 위한 신작에서 다양하게 변주한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발췌한 문구인 “Form is emptiness, Emptiness is form (色卽是空 空卽是色)”을 갤러리의 창문에 붙인 텍스트 작업 <무위의 정원>(2015/2016)은 안과 밖의 경계를 넘나들며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탐구한다. 또한 2008년 폐쇄된 후 개발하는 대신 시민들을 위한 공원으로 사용되는 베를린의 템펠호프 공항의 모습을 담은 <파라드로잉>(2014/2016)은 있는 그대로 두면서 발견할 수 있는 무위의 자유를 나타낸다.    
이번 전시는 이외에도 각자가 오롯이 감내해야 하는 인생의 여정 속에서도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따뜻한 메시지를 전한다. 영상작품 <무위의 풍경>(2014)에서 보이는 페터 춤토르의 브루더 클라우스 경당으로 이르는 구불거리는 길은 누구나 어딘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굴곡진 과정을 겪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경당의 내부에서 촬영된 (2014)는 명상의 개념이 건축으로 구현된 공간에서 작가가 경험한 감동을 관객들과 공유한다.

The Garden of Inaction, 2015/2016
Text on the window, Dimensions variable


The Landscape of Inaction, 
2014
Video,10 hr 26 min
Painting of Time, 1983/2016
Oil on canvas, thread, wrinkles by time, 142 x 121 cm

Untitled, 2016
Drawing with golden thread, 160 x 100 cm


Exhibition catalog
U Sunok: In Praise of Inaction















초연(超然) 풍경

우순옥 작가의 회화 작품 <침묵의 바다>(1983) 우연히 발견되어 이번 전시에 <시간의 그림>(2016)이라는 설치 작품이 되어 놓여 있다화폭의 주름으로 누적된 33년의 시간은 문득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작품은 덧붙여진 것이 없으므로 아무런 새로운 의미도 갖지 않거나또는 기나긴 시간을 관통해   작가의 지난 삶과 나란히 병치되면서 해독불가능한 깊은 비의(悲意) 얻게 된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아무런 말도   없다우리와 같은 시간 동안 저기에 무언가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아득해지는가.

중요한 일은 의지에 상관 없이 일어난다탄생과 죽음이 갑자기 도래하듯풍경과 만남도 그렇게 찾아온다내가 목격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지각과 정서가 우리에게 사건처럼 일어난다말하자면사람은 주격(“I”)이라기보다 여격(“to me”) 것이다인간을 주체로 내세웠던 지난  세기의 유럽을 제외한다면 사실은 대부분의 시기에 대부분의 인류에게 당연한 일이었다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사실을 긍정하는 것으로 우리의 삶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는 것일지 모른다성숙해지는 인생의 후반부에 우리가   있는 일은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있는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있다그런데 이러한 긍정의 이면은 무엇인가우리의 현대 문명이 공인하고 있지는 않지만각자에게 은밀한 비밀처럼 찾아오는  이면을 우순옥 작가의 <무위예찬> 가리킨다.


초월론적 풍경

사람들이 이별의 고통을 서로 토로하고 위로하는 장면을  적이 있다인상적인 것은 어떤 대조였다모든 사람들이 개별적이고 환원불가능한 고통을 호소하는 반면이들이 겪은 사랑과 이별의 과정 자체는 냉정할 정도로 서로 유사했다이처럼 사단칠정의 혼란스러운 일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처럼 지구  여기저기에 쏟아지고 있었다개별적인 경험들 너머에 보편적인 정서가 차가운 폭탄처럼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내가 길을 걷고 말을 하고 빠져들기 위해서는풍경 자체가 있고언어 자체가 있고사랑 자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후자가 펼쳐지는 장소를 “초월론적 ”(champ transcendantal)이라고 부르자우리의 삶이란 이러한 초월론적 장의 이곳 저곳을  십년  여행하는 일이다그래서 우순옥 작가는 이전 전시들에 이어 이번 전시에 다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다(이번 전시, <잠시 동안의 드로잉>(2011), <Empty Space Moving>(2007) 작품들). 그녀가 말하는 여행은 여행사에 위탁할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문학이나 철학이 그런 것처럼예술도 경험적인 것에서 이러한 초월론적인 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이다

작가의 예술론이 성립하는 지점은 이곳이다그녀에게 예술은 이런 초월론적 풍경을 발견하는 작업이다그녀가 작성한 텍스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을 꼽자면 아마 이런 대목일 것이다. “나는 그림이 (…) 우리 마음 속에 이미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지각이라고 생각한다”(<잠시 동안의 드로잉>, 2011, 90). 우연히 어떤 공간을 마주치고 애써 어떤 장소를 찾아가는 일은 중요하지만그것은 이런저런 흥미로운 사물과 정물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작가에에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원초적인 풍경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메를로-퐁티(Merleau-Ponty)처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인간과 풍경은 아득한 옛날에 함께 태어난다 갈래로 갈라지는 분수의 물줄기처럼 말이다인간은 누구나 원초적인 풍경을 가슴에 담고 태어나고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풍경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다그래서 작가는 작품을 통해 이렇게 설득한다. <예술은 이미 당신의 마음속에 있다>(<잠시 동안의 드로잉>). 삶과 예술의 공외연성을 함축하는  정언명령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고현대예술에서 그다지 새로운 말이 아닐지 모른다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자기만의 중요한 함의를 덧붙인다근원적인 풍경을 배태한 채로 삶은 시작되고예술은 그러한 삶이 품고 있는 풍경을 멀리에서 불러와 다시 펼쳐놓는 것이다우리는 자연(自然너머에 있는 그러한 풍경을 <초연(超然) 풍경>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이것은 상관적으로 목격자에게 초연한 자세를 요구하고 그러한 태도 안에서만 피어 오른다.

작가에게 형태를 수립하기 위한 의지가 거의 없는 것은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앞서 말했듯이작가에게 그림이란 우리가 선택적으로 바라보는 사물의 형태를 옮기는 일이 아니다차라리 그녀는 창밖을 미술관으로 끌어들인다(<무위의 정원>).  나아가 집을 미술관처럼 사용했던 이전 전시에서 벽에 캔버스처럼 구멍을 내기를 선택한다이를 통해 도시를 오래 전부터 내려다보고 있던 산의 풍경화를 제공한다(<Hanok Project – Warm Wall 2>, 2000).  산들의 이미지가 언제나  바깥에  닿고 있었지만마치 우리의 의식이 집의 오래된 벽과 같아두꺼운 습관에 둘러싸여 우리는 그것을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일상적인 의식을 멈추어 세울 수만 있다면우리는 언제든 근원적인 풍경을   있을 것이다우리는  작품의 그녀를 ‘() 세잔(Cézanne)’이라고 말할  있을까.


근원적인 그리움

어떤 그리움이 작가를 끊임없이 초월적인 추구로 몰아가는 것은 분명하다작가는 “근원적인 그리움”(<잠시 동안의 드로잉>, 91속에서 초월적인 풍경비의적인 문장들비인칭적인 정서를 찾아 떠난다그것은 그리움이지만직접적으로 다른 사람을 향해 있지 않다는 점에서 구체적인 그리움이 아니다오히려 (희망적으로는타르코프스키(Tarkovski) (비관적으로는안토니오니(Antonioni) 영화에서처럼 인간의 밀도가 극소해질 때에만사람들 사이를 연결하는 순수한 정서와 풍경을 겨우 되찾을  있을 것이다사람들로 되돌아오기 위해서 사람들을 헤치고 떠나게 만든다는 점에서그것은 작가의 예술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인” 정서이다우리 역시 문득 그리움에 밀려 사람 없는 풍경 속으로 떠날 때가 있다면작가의 말처럼 “예술은 이미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작품 <Microhome – !>(2006) 그리움의 목소리들로 가득하다하지만  작품은 발화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최소화하고 풍경 속의  점으로 밀어넣으면서 정서의 개별적이고 인칭적인 측면을 지운다목소리들은 비개별적이고 탈인칭적인 것이 되면서 화면과 공간을 전방위적으로 채운다스크린 안에서 발화의 지점(point of sound) 모호해지는 그만큼 관객은 그리움의 순수 정서들이 만들어내는 장으로 더욱더 이끌려들어간다.

그리다라는 우리말이 ‘그리움이라는 정서와 ‘그림이라는 작업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미술이란 현존의 재현이 아니라 부재의 기억과 관련된다는 데리다(Derrida) 유명한 분석을 언급하지 않더라도우리말의 어원은 이러한 사정을 이미  보여준다우리는 그리운 것을 그리는 것이다또는 마음 속에 그리는 것이  그리운 것이다작가의 시선이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사물들을 넘어 수평선 너머의 풍경을 그리워할 그녀의 작품은 이러한 예술론과 조우한다.

이러한 관점에  이번 전시를 관통하고 있는 조형적 구도를 이해할  있다이번 전시에서 더욱 뚜렷해지고 있는 구도는두세개의 수평선과  개의 수직선이 교차하는 것이다. <시간의 그림>, <Microhome – !>, <Empty Space – 우리는 모두 여행자많은 작품들이 이러한 구도를 공유하고 있다아마도 이러한 시선은 작가가 세계를 종합적으로 지각하는 방식일 것이다 너머의 수직선은 작가가 도달하고자 하나 무한히 지연되는 초월적인 지점을그리고 이편의 수평선들 사이의 공간은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유희하고 분투해야 하는 여정을 나타낼 것이다. <무위의 풍경> 여정의 체험 자체를 무한히 연장하면서 사이의 시간을 현시하고, <Empty Space – 우리는 모두 여행자> 수직적인 지점에 텍스트를 기입함으로써 초월적인 도약의 의지를 드러낸다.

초월을 향한 부단한 여정이란 표현은 평범하거나 심지어 진부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의외로 분명한 예술적 방법론을 함유하고 있다작가의 화두라 할만한 반야심경의 “색즉시공공즉시색 실체론적 형태가 모두 해체되는 극단적 지점을 보여준다작가가 자주 꺼내보는 틱낫한 스님의 해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종이  장에는 햇빛나뭇꾼구름이 모두 들어있다왜냐하면 종이  장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있어야만 하고그렇지 않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이런 의미에서 종이는 비어있고그것은 자기 아닌 다른 모든 요소들로 가득차 있다.

작가의 작품들이 형식적인 측면에서 겨우 존립하거나인간의 밀도가 극단적으로 낮거나바깥의 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안팎이 뒤바뀌어 있거나작가의 인위적인 작업보다 시간이 만들어내는 무위의 몫이  커보이는 이유는 이러한 방법론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다작품들은 모두 바깥을 끌어들이기 위해 놓여 있다예술은 삶을미술관은 풍경을목적지는 여정을화폭은 습기를밝은 목소리는 견뎌온 시간을 향해 놓여 있다.

 나아가반야심경의  구절은 근본적인 존재론적 평등성에 도달할 것을 요구한다어떤 사물이든그것은 다른 모든 것이 모여드는 비어 있는 그릇과 같은 것이고따라서 모든 것은 자리를 바꿔가며 스며드는 동등한 것이기 때문이다작가는  생각을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작품으로 만들었다. <사물의 질서>(1989/2016)라고 부제가 명명된 제목 없는 설치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이질적인 지점을 형성한다이차원적인 평면으로 구성된 다른 작품들과 달리삼차원의 공간 안에서 무질서하게 사물들이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런 이질성은 사실 관객에게 하나의 문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길 암시하고 있다 수수께끼의 답은  지점이다어떤 지점에 관객이  매달린 사물들은 서로를 가리는  없이 이차원의 평면 위에서 놓인 것처럼 동등한 위상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현재완료형의 깨달음

색즉시공의 설법은 실천적인 깨달음으로 이어진다종이  장이 사실 햇빛나뭇꾼구름이었다면마찬가지로 각각의 모든 사물이 그것 아닌 모든 사물들이 모여드는 자리라면 역시  아닌 다른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이런 의미에서 작가가 이전 전시에서 보르헤스(Borges) 인용한 것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칼날이었다나는 강의 물방울이었다나는 빛나는 별이었다… I have been a sword in the hand / I have been a drop of water in a river / I have been a star…” 이렇게  작가의 작품에서 반과거 시제의 지표(index) 떠올리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오히려 그녀의 작품들은 현재완료형의 깨달음을 함축한다나의 모습이 과거 어느 때부터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관계와 흐름들 속에서 형성되어온 존재라고 깨닫는 것이다이것이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개의 시간 사이에 우리를 위치시키는 이유이다우리는 작가가 대학원 시절에 그린 그림과 최근에 새로 찾아간 경당 사이에 위치하거나(<시간의 그림> <Silence, Please>), <Microhome – !>에서 자연 안에 묻힌 발화자들에게서 십수년간 견뎌온 시간들이 있있음을 듣게 된다그러므로 이것들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사진론처럼 어떤 형태가 거기 있었다는 흔적이 아니다우리 스스로가 어떤 시간을 견뎌온 존재들이고 시간 속에서 생각치 못하게 여러 요소들이 흘러들어와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그동안 저멀리 있었던 그런 것들이었구나하고 깨닫는 것이다.

아니 글의 시작에서 주저한 것처럼다시   주어를 고쳐 적어야겠다 모든 것들이 모든 시간들이 나로 모여들고 흘러 나가는 것이다이리하여 그리움은 나의 근원에 흐른다모여들고 흩어진 것들과의 관계가 나를 지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나의 깊은 곳에서사라져간 모든 것들을 그리워하면서도딱히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말할  없게 된다우리가   있는 일이란사물들을 모아 그것들이 평등하게 보이는 지점에 서기 위해 노력하거나 개의 시간 사이에 놓여 망연자실하거나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기억 불가능한 지각을 되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뿐이다. <무위예찬>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우순옥 작가의 작품들은 이런 작지만 깊은 행위들을 우리에게 전달한다예술과 삶이 일치하는 소실점 안에서 작품의 형태가 거의 사라져간다 해도세계의 계절을 바꿀 어떤 지각을 예찬하는 태도만이 고요히 남는다.

이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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