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 AN IRON IN THE FORM OF A RADIO, A KETTLE IN THE FORM OF AN IRON, AND A RADIO IN THE FORM OF A KETTLE


차례

김범

이설희 / 김범의 가정법
야코브 파브리시우스 / 기들만 과효시착—김범의 흑백화와 단어, 그리고 다른 작업들
기혜경 / 변신 이야기
장지한 / 제의의 장소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 김범 인터뷰, 2022년 11월

작품 목록
작가 약력
필자 소개

145 × 215밀리미터 / 296쪽 / 무선 소프트커버 / 2024년 10월 31일 / 27,000원 
ISBN 979-11-94232-02-5 03600
  • 김뉘연 편집
  • ,
  • 전용완 디자인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는 미술가 김범의 작품 세계에 대한 책이다. 일상적인 사물의 형상과 기능에 대한 인식에 질문을 던지는 제목은 김범의 동명 작품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2002)에서 빌려 왔다. 책의 1부에 해당하는 「김범」에서는 1987년부터 활동해 온 김범의 작품 중 82점을 선별해 정리했고, 이어 이설희(제60회 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 공동 예술 감독, 쿤스트할 오르후스 수석 큐레이터), 야코브 파브리시우스(제60회 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 공동 예술 감독, 아트 허브 코펜하겐 관장), 기혜경(미술사가, 예술 기획자), 장지한(미술평론가)이 가정법, 착시효과, 물활론, 이미지의 타자성 등을 키워드 삼아 다각도로 김범의 작품을 다뤘다. 책의 말미에는 여러 예술가들과 장기간 인터뷰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서펜타인 갤러리 예술 감독)가 김범과 진행한 인터뷰를 실었다.

이미지

미술과 이미지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김범 역시 미술가로서 기본적으로 이미지를 다룬다. 그런데 김범이 다루는 이미지는 눈에 보이는 현실의 표면적인 이미지와 더불어 경험, 기억, 가정, 연상 등을 통해 머릿속에 그려질 법한 이미지를 포함한다. 대상을 묘사하는 재현 대신 인식을 통해 다르거나 새로운 실재를 바라보도록 유도해 온 작가는 이미지를 다루면서 이미지의 실재성(actuality)에 질문을 던진다.

“저는 인간의 삶이 주로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체로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실체의 세계를 살고 있는 듯하지만, 어떤 의미에 대한 기표는 경우에 따라서는 꼭 어떤 특정한 모습이 아니어도 되며, 심지어 이름이나 기호만 있어도 됩니다. (…) 때때로 저는 제가 무엇을 주시하며 바라볼 때조차 제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제 작품에는 이러한 질문들이 종종 담겨 있습니다.”(김범, 「김범 인터뷰, 2022년 11월」, 241쪽)

“기본적으로 ‘이미지’의 문제는 김범 작업의 핵심이다. 그는 관람자의 ‘마음’에 ‘이미지’를 만드는 데 관심을 가져 왔다. 김범은 ‘마음에 품은 시각적 이미지’는, 사실 이미지를 보지 않고도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미지를 ‘시각적 현실’이 아니라 ‘실재적 현실’로 접근하는 태도. 즉 김범에게는 ‘어떻게 보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볼 수 있도록 만드는가’가 화두이기에, 궁극적으로 그는 ‘시각’이 아니라 ‘시각성’의 문제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이설희, 「김범의 가정법」, 136–137쪽)

보는 이가 스스로의 인지 작용을 돌아보게 만드는 가정적인 상황을 제시해 시각적 눈속임을 만드는 작가의 ‘다르게 보기’는 한눈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냉소적이거나 부조리한 유머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러한 ‘다르게 보기’를 통해 “인간의 지각이 기본적으로 의심되는 세계”(7쪽)를 다루는 김범의 작품은 그가 “거꾸로 생각하게 만드는 작가”이자 “거꾸로 걷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야코브 파브리시우스, 「기들만 과효시착」, 152쪽)임을 보여 주며, 나아가 “평면에 대한 부정과 긍정 사이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타자”에 가까운 회화의 이미지를 “‘이따금’의 시간성”으로 드러낸다(장지한, 「제의의 장소」, 216–218쪽).

언어

미술가 김범은 언어를 작업의 주요한 도구로 사용해 왔다. 작품의 내용에 따라 회화, 조각, 설치, 영상, 책 등 여러 유형의 매체를 다뤄 온 김범은 “‘문장’을 통해 가상 상황을 설정”하는 “‘가정’의 방법론”(49쪽)을 구사한다. 작품에 문장이 적혀 있는 김범의 초기 ‘지시’ 작업은 지시의 내용에 따라 가정해 보면서 이미지를 심상으로 재현하도록 이끈다. 이렇게 글과 언어로 미술의 영역을 확장한 김범의 작업은 『변신술』(1997), 『고향』(한국어판 1998/영어판 2005), 『눈치』(영어판 2009/한국어판 2010)와 같은 ‘책’이라는 실물로 이어졌다. 『변신술』은 인간을 가변적인 존재로 상정하고서 인간이 나무, 문, 풀, 바위, 냇물, 사다리, 표범, 에어컨으로 변신할 수 있는 방법을 지시문 형식으로 구성한 지침서이다. 『고향』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있는 운계리라는 마을”에 대한 안내서로, 이 가상의 마을을 누구든 자신의 고향으로 삼을 수 있도록 글로써 이미지를 만들어 간다. 『눈치』는 “인식 대상으로서의 어떤 개”를 그린 이야기책으로, “허구의 이미지를 현실적 차원에 구현해 나가는 행위를 은유”(김범, 「김범 인터뷰, 2022년 11월」, 243쪽)한다. 한편 2016년부터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무제 석판화’ 연작에서는 검은 색면 아래에 원판의 역(逆)으로 찍히는 석판화의 특성을 이용해 거꾸로 드러난 텍스트가 자리하는데, 거꾸로인 데다 내용마저 추상적이고 모호해 역시 추상적으로 보이는 색면과 연결시키기 어려운 이 작업은 인간의 인식의 허술함을 드러낸다.

이렇듯 미술가 김범의 작품 세계에서 ‘이미지’와 ‘언어’는 이미지의 실재성에 질문을 던지면서 이미지의 타자성을 환기시킨다. “이해하는 내용보다는, 이해할 수가 없기에 계속 생각하게 되는 내용에 대해 더 많이 작업”(238쪽)해 온 그에게, 그리고 그처럼 무언가를 만드는 이들에게, 언제나 “현실화되어 가는 대상”(230쪽)이 함께한다. 작품이라는 대상은 그렇게 계속 존재하는 것이 되어 간다.


발췌

무언가 ‘존재함’에 있어 이것이 ‘미술’이 되는 주요한 특징은 작가가 재료를 직접 사용하여 시각적인 작품을 만드는 데 있다. 예술가가 간직한 심리적인 현상은 작품에서 구체적인 사실 혹은 사물과 결합된 정신성과 물질성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는데, 김범은 이 관계를 지속적으로 왕래할 수 있는 가정적인 상황을 만드는 작가이다. (이설희, 「김범의 가정법」, 123쪽)

김범은 회화에서 출발했기에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한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회화의 실존, 즉 ‘평면’과 ‘표면’에 흥미를 가졌다. (이설희, 「김범의 가정법」, 128쪽)

‘기들만 과효시착’은 존재하지 않는 두 단어를 연이은 말로, 헛소리의 범주에 든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기들만 과효시착은 존재하는 말이기도 하다. ‘착시효과 만들기’란 말을 뒤집은 거울 이미지일 뿐이므로. 우리의 눈은 두 단어로 구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제목을 인지하지만, 이 말이 실은 단어 각각의 음절을 거꾸로 썼을 뿐인 아주 간단한 속임수로 만든 말임을 우리 뇌가 알아차리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김범 작가를 일컬어 단어를 거꾸로 쓰는 작가라고 하는 건 바른 말이 아닐 테지만, 그가 우리로 하여금 거꾸로 생각하게 만드는 작가라고는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거꾸로 걷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다. 나아가 관람하는 우리의 뇌도 덩달아 거꾸로 가게 만들어 우리 눈에 보이고 우리 눈이 읽는 것을 다시 보고 다시 생각하도록 이끈다. 당신이 보는 게 당신이 보는 게 (또는 보인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인지 작용을 돌아보고 되돌려 봐야 한다. 김범은 간단한 유희나 속임수로 착시효과를 일으키는, 익살 넘치는 작품을 만들어 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작가다. 언어적, 시각적 함정을 이용해 관람자의 호기심과 보는 이의 마음[정신]을 자극한다. (야코브 파브리시우스, 「기들만 과효시착—김범의 흑백화와 단어, 그리고 다른 작업들」, 151–152쪽)

변신은 이전의 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것 ‘되기’를 의미한다. 하지만 김범이 의도하는 변신은 형태적인 변화보다는 내면적인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그의 작품이 제시하는 변신은 말 그대로 어떤 것으로 변신하여 도달한 상태(being)가 아닌 변화의 과정(becoming)을 의미한다.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로 변해 가는 과정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 변화의 과정을 거치는 것만으로도 이미 떠나온 이전의 존재와 차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이성이 주도하는 사회체제, 그리고 그 사회 속에서 학습해 온 위계질서와 그에 근거한 권력관계로부터의 탈주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는 사물, 동물, 식물 등과 같은 주변의 것들을 인간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것에서 벗어나 인간과 동식물, 인간과 사물, 인간과 대상을 나누는 경계를 다시 설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혜경, 「변신 이야기」, 197쪽)

작가는 자신의 수행적 행위가 이미지를 수동적인 대상으로 고정시킬 위험을 피하기 위해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회화의 이미지가 관조를 위한 그림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 이미지가 자신만의 몸을 지닌 실제의 객체로 지각되기 위해, 즉 사각의 프레임을 초과해서 몸의 차원으로 넘쳐흐르기 위해, 작가의 수행은 붓으로 인식의 관점 하나를 그려 내는 일에 그쳐서는 안 된다. 김범의 회화에서 그의 수행은 물질의 흔적을 넘어 평면에 가해지는 일종의 물리적 충격과도 같다. 이를테면 작가는 종종 문자 그대로 캔버스를 자르고 꿰맨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회화의 물성 등등을 운운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작가의 물리적인 수행은 평면에 물성을 부여하는 것을 넘어 평면성 그 자체를 부정한다. (장지한, 「제의의 장소」, 213–214쪽)

전반적으로 제가 미술가가 되어 온 과정은 거기에 특별한 순간(epiphany)이 있었다기보다는 천천히, 복잡한 상황과 심경을 거치며 진행된 것 같습니다. 물론 제게도 예술의 의미는 아주 중요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커다란 바위 속에 띄엄띄엄 퍼져 있는 듯했으며, 긴 시간에 걸쳐 그것을 캐내듯이 조금씩 조금씩 접해 온 듯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조금씩 느껴 온 그런 작은 순간들이 결국 저를 작가로 만들어 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김범, 「김범 인터뷰, 2022년 11월」, 229쪽)

저는 미술가들이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이유는, 혼자가 아니라 현실화되어 가는 대상이 함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범, 「김범 인터뷰, 2022년 11월」, 230쪽)

저는 비관론자로서, 인간의 삶은 한정적이며 또한 비극적인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통해 가급적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싶다는 기본적인 의도는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김범, 「김범 인터뷰, 2022년 11월」, 231쪽)

사실 저는 밥 로스를 좋아하고, 그가 지속적으로 보여 주는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과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사랑을 존경합니다. 밥 로스의 그림이 지니는 주제와 의미는 방법상으로나 미학적으로 오래도록 일리가 있어 왔으며 인간의 본능적인 시지각(視知覺)을 이해하는 데에도 유용합니다. 저도 미술을 공부할 때 인상주의풍의 풍경화를 즐겨 그렸습니다. 자주 방향을 바꾸어 온 제 작업의 맥락이 혹시 언젠가 저를 풍경화가가 되도록 이끌어 주는 일이 생긴다 해도 저로서는 큰 불편 없이 기쁘겠습니다. (김범, 「김범 인터뷰, 2022년 11월」, 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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