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미술’ 놀려먹기
미술 평문이나 전시 서문에서 가장 자주 보게 되는 어구들이 ‘존재의 의미’ ‘죽음에 대한 고뇌’ ‘동양의 정신성’ 같은 말들이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미술 작품이란 것’을 볼 때면, 아무리 그것이 물감 얼룩이나 잘못 깨진 돌덩이처럼 보이더라도 진지해지고 엄숙해지려고 한다. 뭇 사람들이 그 깊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 ‘예술’이라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정서영의 작업은 예술의 신성성에 대한 날카로운 이의 제기다. 비닐장판에 액자를 끼우고 명조체로 ‘-어’라고 쓴 작품 앞에서 사람들은 “-어”라고 당황스런 감탄사를 떨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작인 ‘전망대’나 ‘수위실’도 마찬가지다. 미니어처도 아니고 실제 크기도 아닌 ‘전망대’나 ‘수위실’은 몸을 불편하고 불안하게 하는 ‘애매한’ 상황을 연출한다.
“미술에 대한 오래된 전설이 있어요. 내 작품은 대개 그러한 전설을 맹목적으로 믿는 태도에 대한 웃음 같은 것이죠. 굳이 내 작품이 말하는 바가 있다면 ‘전설 속에 있지 않음!’이란 것입니다.”
미술을 감상(체험)하게 되는 상황은 마치 만화의 한 장면 같다. 감상자는 만화 그림 속에서 쩔쩔매고 있는 주인공-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의 ‘꽃’은 하얗고 거대한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져 꽃이면서도 꽃의 장식적 기능을 거부하고 있으며 ‘카펫’은 카펫이되 피사의 사탑 같은 모양으로 돌돌 감겨 있다.
“만화에 관심이 있어요. 그림 자체에도 흥미가 있지만 웃기는 상황이 재미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정서영의 작업은 요즘 유행처럼 쉽게 볼 수 있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우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첫 번째 개인전이 열린 1989년부터 정서영의 작업은 고집스럽게 언어와 개념, 물체 자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어긋남을 환기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미술이 가진 신화적 엄숙성을 깨뜨리고 ‘재밌지?’라고 물으면서, 차갑게 우리의 눈과 이성이 얼마나 불안정한 연산을 수행하는지 보여준다. 진지함과 경박함의 지뢰밭을 피해 그가 만든 ‘물건들’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래서 그는 자주 웃으며 “그것도 좋긴 하지만 남들이 다 하는 것을 굳이 할 필요가 있겠어요?”라고 말한다.
이번에 열리는 정서영의 두 번째 개인전은 새로운 형식의 작가 지원을 통해 이뤄지게 됐다. 개인전은 작가가 ‘사재를 털어’ 여는 것이 보통이지만 정서영의 이번 개인전은 지난해 열린 작가 후원회에서 다수의 미술애호가들이 내놓은 지원금으로 열리게 됐다.
작가는 이 후원금으로 전시장의 불빛을 흰색으로 바꾸었다. 창백한 등 아래에서 그의 작품들은 더욱 ‘권태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형광등이 좋은데”라며 여전히 아쉬워한다. 전시장의 노란 불빛이 조각을 ‘예술적’으로 보이게(비싸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상품이 돼버린 미술의 속성을 폭로하기 위해 또 그만한 노력과 자본을 들여야 하는 것, 그것이 현대 미술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김민경 기자 in 주간 동아 2000.04.13 229 호 (p 90 )
http://weekly.donga.com/docs/magazine/weekly/2006/05/10/200605100500019/200605100500019_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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