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금 퍼포먼스 릴레이 2011 (19 Performance relay)




체험을 사랑하는 체험으로 순간의 공동체를
by 김남수 Namsoo Kim

in Article 아티클
#5
a journal of contemporary art
Dec. 2011

체험을 사랑하는 체험으로 순간의 공동체를, <19금 퍼포먼스 플레이>


예술이 징후 자체는 아니지만 징후가 없다면 예술이 아니다. 이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지만 감정이 없다면 사랑이 아니다”의 변주처럼 들릴 텐데, 결국 징후는 아직은 판단불가능한 지대에서 새로운 감응을 위한 계기 같은 것이다. 이질적인 퍼포먼스들의 집합으로 세워지는 네트워크, 이것이 <19금 퍼포먼스 릴레이>(11월 11일 대안공간 루프)의 정체라고 할 때에는 유보적인 시각 혹은 신중한 시각으로 대하게 된다. 왜냐하면 다원적으로 개방된 퍼포먼스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사회적 틈을 통해 그 전략적 기능을 파악하기는 아직 힘들기 때문이다.물론 <19금 퍼포먼스 릴레이>의 기획 의도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요약될 수는 있다. “대한민국이 당신을 빼놓지 않도록”이라는 ‘예외상태’로부터의 탈주가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라는 ‘미시 공동체’ 혹은 ‘순간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가. 2010년 첫 번째 행사에서 표명되었던 “대한민국이 당신을 빼놓지 않도록”이란 모토는 당시 인구 센서스의 참여독려용 문장이었지만, 이는 교묘히 변용되어 ‘벌거벗은 인간’의 상태에 처하지 않을 만큼 예술가의 자기 실천의 수행문으로 작용했다. 확실히 이 변용적 작업은 이태원이라는 해방구의 공기와 화학적으로 맞물려서 기대 이상의 가능 세계로 열려졌다.


그런데 이번 두 번째 행사에서 기획자 홍성민씨는 여전히 우발적이고 지각적이며 참여적인 토대가 유효하다고 주장하면서 “미술/퍼포먼스/공연예술의 분할을 고분고분 받아들이는 우리의 모습”으로부터 이탈하는 잠재성을 탐문한다는 식의 취지를 밝혔다. 이는 그의 랑시에르 독해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몸이 느끼는 감각의 문제”라는 층위에서 생각해야 한다. 즉 그는 “감각적 세계 안에 몸이 기입되는 방식”이라는 체험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몸이 세계를 느끼는 방식이란 토대 위에서 기존의 장르적 분할 체제를 재분할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과연 이 제안은 충분히 실현되었을까. 탈전문화된, 항상 이미 해방된 예술가=관객이라는 전제는 사실 현실화되기는 힘든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관객이 그 신체적 존립 자체를 주장하는 것으로써 사회적 틈을 벌리고, 아니 사회적 틈이 된다는 복선이 깔려 있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미 플럭서스 등에서 선취된 이러한 미덕은 항상 이미 “이론으로서는 낡았으나 실제로 해보면 의외로 신선하다”(가라타니 고진)라는 선상에서 새로운 실상으로 실현되곤 한다. 또한 다른 복선을 깔고 있는데, ‘의외로 신선한’ 퍼포먼스가 “사회적 친교”라는 관계 미학적 시공간으로 체험되고 ‘미시 공동체’ 혹은 ‘순간의 공동체’를 촉발한다는 것이다.


결국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클라스트르)라는 정치인류학적 표현은 예술 실천을 통해 우리 시대의 공동적인 것이 구축하는 길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몸이 느끼는 감각의 문제”라는 가장 기본적인 차원이 급진성의 분할로 작용하게 된다.대충 이러한 시나리오인데, 첫머리에 말한 것처럼 과연 징후 이상의 감응적 상황을 연출한 것인지는 관점에 따라 다를 것 같다. 그 이유는 <19금>에 개입한 정치미학과 관계미학의 연합, 기존 영역의 분할 체제와 그 체제에 대한 재분할 사이의 차이, 무엇보다 퍼포먼스의 강도와 ‘불화’가 어떤 감응 세계를 낳았는지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명제에 기대어 일련의 징후들을 적극 옹호하고 싶다: “영혼의 신비한 새인 ‘소문’은 호모 사피엔스가 만들어낸 최초의 ‘라디오’다.”(백남준)


첫 번째 행사의 나비효과는 두 번째 행사의 흥행성공으로 이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사회적 친교를 맺기에는 공연간의 배치가 너무 촘촘했고 관객들은 너무 많았다. 그래서 가능한 만남들을 고안해낼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은 부족했고, 주어진 공연들을 지켜보기에 다소 바빴다. 어쩌면 이러한 불평은 공연 큐레이팅의 문제나 공연 자체의 문제보다 오히려 전체의 통찰로서 장소성의 문제로 향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대안공간 루프가 풍기는 공간적 권능과 분위기는 홍대 문화의 쇠락이나 제도 공간의 비평으로 이어질 정도였다. 반면, 공간 해밀톤이 연접해 있는 이태원 공간의 채널이 그리워질 만큼 보다 넓은 사회적 틈으로 회고되었다. 이것이 <19금>의 가장 활발한 기호라고 한다면, 어쩔 것인가.흥미로운 점이 없지 않았는데, 데뷔와 함께 88만원 세대의 감각을 노래한 그룹 ‘빚과 세금’의 오프닝도 그랬다. 그들의 노래는 합의할 수 없는 현실의 촉지로 이어졌다. 이런 부분은 LIG 아트홀이나 국립극단에서 자신들의 노래를 전개한 어어부밴드 프로젝트의 공연과 비견할 만하다. 촉지적 감응보다 더 센 것이 있을까. 직접적이며 위협적이거나 수동적이며 방어적이건간에 ‘감정이 있는 사랑’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정금형 작가의 <금형 신제품 시연회>는 ‘러닝머신과의 신체적 교류’라는 매우 잘 계산된, 자연화된 타입이라 제한적이었지만, 이는 본래 공연을 앞두고 벌인 시연회의 성격이 빚은 결과이기도 했(다고 한)다. 정금형 작가가 천착하는 '금형'이란 개념은 기계의 욕정이 사이버네틱한 감응으로 일어나는 구도를 의미한다고 봐야 할 듯하다. 그의 '금형' 페티시즘은 절정의 순간 "와락" 껴안으면서 완성되거나 죽음을 맞이하는데, 거의 정사(情死) 수준임을 재확인했다.


길종상가의 박길종 작가와 현시원씨가 진행한 <송창식 골든 제3집>은 송창식의 뇌와 실시간 연결된다는, 일종의 ‘존 말코비치 되기’ 식의 송창식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특이한 기계의 발표회였다. 그러니 여기서 "골든"은 실제로 "골이 들어있다"는 의미가 되겠다. 척 보기에는 코팅한 양은 찜통처럼 보이는 단순한 외관의 기계가 송창식과 심오하게 연결시켜준다니... 과연 풍자적 상상과학의 끝은 어디까지인가.홍성민 작가의 <영화>는 홍상수의 <극장전>에 나오는 한 장면의 대화를 전혀 다른 맥락의 영화들에 더빙하는 작업을 진행하는데, 실시간 연극으로 보여주는 퍼포먼스였다. 코드의 재맥락화는 홍성민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데, 이번 경우에는 카오스의 경련을 기존 필름에 입혀갈 때 발생하는 그 간극이 비논리적인 경험으로 인도했다. 좌우간 웃음은 순간의 공동체를 이루는 아교였다.


디르크 플라이슈만의 <예술아카데미에 대한 퍼포먼스>는 비엔나 액셔니즘의 작가 헤르만 니치에게 오마주를 바치는 렉처 퍼포먼스였지만, 액션 없이 지나치게 평면적이었다. 킴킴갤러리의 는 반복되는 드로잉 이미지들과 음악 사이의 선율적 풍경에 랜덤 액세스(random access)의 효과를 추가했지만, 그 예측불허는 다소 예측가능했다. 그러나 <19금>은 개별 작품들의 호오나 평가로 볼 수 없는 기획이다. 무엇보다 관객들이 참여하는 관계적 구조 내에서 사회적 틈을 생산하는 프로젝트였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회적 틈이란 협력적인 체계로서 예술 실천이 출현하는 장이며, 그 실천들의 관계망 자체이다. 디지털 네트워크가 실시간 일파만파로 전파되는 사회, 네이션=스테이트=자본의 공모가 가속화되는 통제 사회에서 지금 여기, 오늘의 현장에서, 함께 예술의 공동적인 것의 체험을 구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 내의 감성 체제에 요동을 가하는 일이다.

글 김남수(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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