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의 물질성 극복과 미학의 실현

동시대 시각문화를 통한 인문, 문화적 담론을 만들고 소통하는 미학적 가치에 주력하는 일민미술관에서 작가 정서영의 개인전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전이 열리고 있다. 

정서영은 1990년대 초·중반부터 한국 미술계에서 본격적으로 ‘동시대 미술’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미술적 변화의 증후를 보여줬던 작가다. 형식에 대한 근원적인 사유를 보여주는 작업을 조각, 설치, 드로잉, 퍼포먼스 등의 다양한 방식을 통해 지속해왔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는 올 1월 출간된 작가의 책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와 동명이며, 이번 전시는 책에서 다루고자 했던 작가 정서영의 조각가로서의 사유와 그 면모에 집중하려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정서영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는 총 15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신작 조각 작품 외에도 3 채널 퍼포먼스 비디오 영상 설치, 드로잉, 포토콜라주, 사운드 베이스 퍼포먼스 등 매우 다양한 방식의 작업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작업들을 관통하는 것은 모두 조각적 차원과 영역에 대한 사유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전시의 제목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문장에서 얼마나 크고 작은지, 얼마나 넓적한지, 속도는 어느 정도 빠르고 느린지 등 어떤 물리적인 움직임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혹은 심상의 움직임인지 정의는 모호하다. 이는 개인에 따라 기준이 다르고 상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물리적인 차원의 단위와 숫자로서 크고 작음이나 속도를 알 뿐이다. 그러나 이것을 작가의 작업 환경에서 생각해본다면, 어떤 크기의 물체가 만들어지는 속도 속에 놓인 상황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조각’이 이루어지는 상황이자 순간을 표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조각’은 정적이고 물리적이다. 영상이나 퍼포먼스처럼 시간과 소리, 움직임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시 제목과 같이 속도를 가지려면 움직임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조각은 어떻게 움직임과 시간을 가져 속도감을 가질까.

이러한 조각적 한계를 작가는 퍼포먼스, 사운드설치, 그리고 텍스트 드로잉, 포토콜라주 등을 통해 극복하려 노력한다. 기존의 일반적인 조각적 제작방법을 탈피하고 조각적 사고를 확장시켜 나아가니 ‘이게 과연 조각인가.’라고 의문을 가질 정도로 조각의 물질성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나는 어떻게 나의 작업이 지금의 이 시간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이 시간을 어디까지 더 흐르게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이 세계에서는 더이상 농담만 할 수도, 정의로울 수만도, 날카로울 수만도, 아름다울 수만도, 죽을 수도 없다. 그래서 구분하고 구분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이것과 저것, 이것들 저것들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은 위계의 무의미함이 드러날 때까지.
권력적 언어로부터의 자유를 얻어내려는 노력과 내가 사는 세계의 불투명함, 그리고 불쾌하고 못생기고 위험하고 때로는 무자비한 그곳, 그 시간을 통과하면서 선택하고 선택하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그 선택을 위해 중요하게 살펴보는 것은 작품에, 그리고 작품과 더불어 등장할 모든 물질적, 비물질적 요소의 역할과 소비이다. 새로이 찾아낸 역할과 흥미로운 예술적 소비를 위해서는 현재를 세분화하고 비약하는 것이 필요하다.
–작가의 말 중에서-


어쩌면 이미 터치와 영상 플레이가 일상이 되어버린 감각의 극대화를 원하는 관람객들에게는 전통적인 조각에 비해 훨씬 더 친근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처럼 정서영 작가의 조각적 영역에 대한 사유와 매체 한계에 대한 극복은 전통적인 조각 장르를 현시대에서 새로이 살필 수 있는 기회다. 요즘처럼 쾌청한 가을날, 새로운 미학적 경험을 위해 일민미술관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전을 관람해 보는건 어떨까.




글│구선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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