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질만한 조각



깊이에의 혐오, 정서영 탈원근법
글: 윤난지


"나는 '깊이' 싫어요."
정서영을 그녀가 가장 반복한 이다. 그녀의 작업은 원근법적 '
' 지향하는 시선이 시야의 변방으로 밀쳐낸 것들에 배려에서 시작된다. 그녀
소실점을 향해 직진하는 시각, 진리를 좇아 분석과 종합거듭하는 사유층계,
가의 아우라를 지하기 한 정서적 심연 은 것들이 품고 위의 폭력
느낀. 그리하여 그녀의 작업은 모든 종류의 위계를 무너뜨리는 쳐진다.
그 깊이를 표피어올려 그 얄팍함드러내고 그 서없이 누비
서 그것의 허구적 권위를 비껴가는 것이다.
정서영의 작업은 모든 것을 위계적 표 속에 위치시키는 원근법적 지도 그리기를
나려는 제스쳐다. 보르헤스의 우화처럼 뒤덮리거나 심지어, 보드리야르가
하였듯이, 땅을 삼켜버린 지도가 아닌, 땅과 동등하게 의미를 교환하는 로운 지도
를 그리기 위한 것이다. 려진 많은 들이 그려지고, 여러 가지 적이 뒤섞이고,
면도와 시도가 출몰하는, 심지어 이야기마저 담긴, 그리고 영원히 완성되
것이 연한 지도를.

.
장님이었던 주인공이 시력을 되찾자 시각적 거리감에 적응하지 하여 히려 혼란
지는 영화를 적이 있다. 촉각에 드화된 감각에 익숙한 사람에게 시력은 오히려
방해 요인이다. 그는 결국 수술 실패로 다시 눈이 게 되는데, 그때야 비로소 익숙한 감
각 속에 안주하게 된다. 우리의 눈은 과연 전능한 것인가? 우리의 눈은 마나 많은 것
들을 치고 있는가?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바깥으로 몰아내고 있는가?
미술에서 시각중심주의의 폭력은 원근법의 발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시각 이
의 모든 감각을 미술로부터 방하면서, 오직 시각을 가능케하는 과 그것이 가로질
러 가는 공간적 깊이만을 배하게 . 미술가들은 저 멀리로 장되는 진공 상태
차디찬 공간들을 만들어내었고 보는이들은 그것을 자신들이 사는 진정한 땅으로 믿
. 시각적 '일루젼' '사실'로 믿게 되었던 것인데, 이런 '시각성(opticality)'에의 숭
배는 모더니즘에서 에 이른다. 모더니스트들에게 시각적 일루젼은 미술을 일상적
계로부터 구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으며, 라서 진보의 기준이었다. 땅을 뒤
덮기 시작한 원근법적 지도의 그리드가 추상미술의 그리드에 이르러서는 땅을 삼켜버
리게 된 것이다.
정서영의 작업은 시각중심주의에 대한 력한 이의제기이다. 유리 위에 엣칭된 자동차
는 마르셀 뒤샹의 주기구(Glider Containing a Water Mill, 1913-1915)처럼 깊이의 
일루젼을 실재로 오인하게 한 평면 버스에 대한 패러디로 읽힌
유리는 그 투명성으로 인하여 그림의 바탕이 일상세계에 속한 평평한 물체임을 주지시킨다
그리하여 그 위에 원근법적으로 그려진 자동차는 유리의 촉각적 평면성과 이미지의 시각적 깊이 사이에서 방황한다.
정서영은 한 시각중심중의에 의해 으로 버려져 것들을 주워 모은다.
암흙속에서의 손맛, 결 같은 것들이 그것들인데, 그것들은 이미 일베르티의 선원
근법에 대기를 우고자 한 오나르도에 의해 구제되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가 수증
기가 지로 가득찬 대기를 그리고자 했다면 정서영은 그 속을 진정 고자 한다. 그녀
는 원근법적 그림이 밀쳐냈던 을 적극적으로 려낸다. 발을 땅에 인 채 멀찌감치
서서 관망하는 대신 사물이 살고 있는 공간 속으로 몸을 밀어 고 그것들과 촉감을 교
환한다. 그녀는 사물의 질을 더듬으면서 그것을 투명한 채로 놓아두기를 한다.
직각으로 깊숙이 히는 시선의 스로부터 사물을 구함으로써 그것의 살아있는 모호
함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작을 이와 같이 주체와 사물간의 시각적 거리의 위계가 무너진 일종의 촉각적 풍경화이다. 드로잉과 실물이 서로를 지시하는 이 공간에서는 시각과 촉각이 감각을 공유한다.
드로잉 자체만 들여다보아도 그녀가 시각중심주의에서 멀리 어져 나왔음을 읽어낼
수 있다. 고층 물들과 험산 준령이 서로 붙어 있고 전망대는 이블처럼 작아졌으며,
가로등은 공중에 서 같은 기로 반복되고 있고 과 선인장은 그런 풍경 속에 제멋
대로의 크기로 가되어 있다. 느닷없이 등장한 에펠탑은 이 드로잉을 더 어색한 것으
로 만든다. 게다가 두 의 기둥은 연한 원근법으로 그려져 있다. 이런 모순은 그림이
실물화됨으로써 더 두드러진다. 꽃은 전망대보다 크고 전망대는 풍경이나 탑보다 크다.
아주 작은 선인장은 그림 속의 선인장을 배반한다. 아주 가까이 본 꽃, 아주 멀리 있
는 선인장, 중간 의 전망대, 더 멀리 있는 오아시스(꽃꽂이 재료)풍경과 카펫탑이 뒤
섞여 있는 이 풍경에서 사물들은 모두 원근법적 그물망에 빠져나가고 있다.
얼려진 한 순간을 전제로 한 공간의 원근법이 무너지면 시간의 순서도 뒤섞이게 된다.
따라서 정서영의 작품에서는 시간적 원근법도 와해되고 있는데, 그것은 나아가 제작과
정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드로잉에서 실물로'의 순서가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망대는 서 사진의 것을 실물로 만들고 그것을 드로잉하는 순서로, 스티로폼 꽃이나
선인장은 각과 드로잉을 왕래하면서 제작한 것이다. 각각의 이미지들도 일정한 순서
없이 서로를 참조하고 이루어진 단편들이 모인 것이다. 그녀는 마치 제임슨이 말한 분
증적 모드의 시간경험을 실천하는 것 같다. 제작과정의 순간순간은 과거가 미래로 연
결되는 에서 각된 영원한 재들인 이다.

.
원근법의 신화는 그 시선에 내재된 '거리'에 대한, 그 거리가 보증하는 관성에 대한 신
화이다. 보는 주체를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투명한 진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러나 실상은 원근법적 좌표에 이미 보는 주체가 내장되어 있다. 점차 아지는 간격이
함축하는 상대적인 거리 자체가 바로 주체의 지표(index)인 것이다. 그러므로 크라우스
의 지적처럼, 원근법과 그것의 연장인 시각중심주의에는 '주체'를 전제로 한 '객관적'
각이라는 모순이 전제되어 있는 셈이 된다. 원근법적 좌표 위에 적으로만 은 주체를 되살려내어 그로 하여 말하게 하는 정서영의 작업은 그러한 모순을 폭로한다.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관념의 전능함을 연기하는 근대적 주체가 아니다. 그는 의 임의성에 맡겨진 모호한 존재이며 따라서 그가 어 또한 불투명하다. 그녀에게 세계의 모습을 명징한 사유의 사다리로 틀지우고자
하는 투명한 언어는 껍데기의 은 언어인 것이다지극히 피상적이고 건조한 정서영의 말투는 언어의 불투명성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그녀는 꽃, 자동차, , , 조각 등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소재들을 선택하고 그것들의 표면을 스쳐가는 말을 중얼거린다. '다른 꽃 두 개' , '꽃병에, ' , '고무줄 린 조'
우 당연한 말들, 사유의 깊이를 차단하는 맥락없는 언어들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사물의 표면을 고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그녀의 언어는 사물의 깊숙한 어떤 을 지향하기보다 그 주변을 무심하게 맴돌고 있는 것이다여기서 물질은 언어의 그늘에 종속되지 않으며 오히려 언어를 도하기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림, 유토, 도자기, 유리엣칭 등 다양한 물질로 만들어진 유령들은 '유령'이라는 하나의 말로 환원할 수 없는 복수의 물질적인 감각들을 나열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가끔 삐딱하게도 말한다. 오아시스 풍경은 결코 오아시스가 아니며, 스포츠식
꽃꽂이는 예, 체능이라는 조합의 기이함을 환기시킨다. 그녀는 이런 블랙 유머보다 더
엉뚱하고 썰렁한 말을 내뱉기도 한다. 비닐 장판이 "유령은 더 아질꺼야"라고 한다든
, 구겨진 스폰지가 '조각적 신부'를 자칭한다. 이런 비약은 때로 투명한 언어로는 불가
능한 신선한 탈출구가 된다. 그림 속의 꽃이 스티로폼 꽃으로, 풍경은 오아시스 풍경으
, 에펠탑은 카펫탑으로 비약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정서영이 사용하는 언어목록은 자언어 아니라 이미지와 오브제까지를 포괄하며,
이들은 의미를 교환하거나 때로는 서로를 배반한다. 예컨대 이번 전시에서 유리에 엣칭
한 문장은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거구의 남자를 사한 인데, 그것은 드로잉과 조각
으로 이루어진 풍경의 한 부분이므로 글로 풍경화인 셈이다.
그녀가 만들어낸 공간에서 드로잉과 화는 조각과 연계되고 조각은 또 가구이기도 하
고 그것에 문자가 첨가되기도 하고 전체가 모여 하나의 실내장식이 되기도 한다. 언어
들 사이의 구획이 지워지고 그것들이 섞임으로써 각각의 기호는 장르적 아이덴티티를
벗어나 자유롭게 떠돌아다닌다.
따라서 그녀의 언어에서는 기표와 기의간의 일대일 대응관계도 무너진다. 기차역의 사
진은 조각의 그림자이기도 하고, 가질만한 조각은 사람으로도 물방울로도 보이며,
, , 파도가 하나의 태로 합된다. 실재와 상상의 세계를 나드는 그녀의 언어는
다중적이며 비결정적인 채로 남아 있다. 경험과 판단 사이의 공간에 위치한 -어라는 의
성어는 그런 판단 보류의 상황에서 발화되는 기표이다. 언어의 모호성에 대한 그녀의
집착 TV에서와 같이 글씨의 해체에까지 이른다. 해체된 글씨들은 임없이 의미가 유
보되면서 떠도는 기표가 한낱 껍질임을 확인시키는 파편들이다. 여기서 진지함, 또는
예술스러움의 기표인 서체는 그런 수사가 허구임을 자인하는 패러디이다.
정서영은 건조한 지시어로부터 사회적인 공간이나 예술에 대한 언급, 그리고 유아시절
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색깔과 무게와 촉감을 가진 언어들의 세계를 섭렵
. 그녀의 언어적 유희는 관념의 된 심오함에 조소를 보내면서 언어를 원근법적 사
유의 사슬로부터 어주고자 하는 해방의 제스쳐다.

.
'깊이'에 대한 오는 재료와 기법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정서영은 나무, 스티로
, 스폰지, 유토, 유리, 석고, 헝겊, 심지어 하사탕 같이 아주 가볍고 고 부서지기
라하기까지 한 재료를 사용한다. 이면에 어떤 것도 감추지 않은 뻔한 모습의
재료들은 작품의 깊숙한 내부에 들여 있다고 믿어 온 축축한 정서의 재를 깨끗
지워 버린다. 모조 장판지나 인조보석 같은 재료는 그녀의 말대로 '당당한 이미테이션'
이다. 정서영이 키치에 전염된 재료를 하는 것은 키치적 감각 그것의 말초적 복제
성 때문이다. 그녀에게 키치는 고급문화에 따라 다니는 진지함의 수사들을 치기 위한 수단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녀는 때로 그런 수사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검붉은 색을 러진 모 기둥처럼 깊은 서정성의 기표를 노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키치화하고 그 정서적 깊이의 허구를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재료 뿐 아니라 제작 과정에 내장된 키치적 국면은 소위 예술적 ''의 심오함을 무색
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정서영은 이미 알려진 이미지들이나 오브제를 차용하거나 복제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작품끼리도 서로를 참조하게 한다. 드로잉과 조각, 조각과 조각 또
는 그림과 그림이 서로를 베끼는 것인데, 예컨대 지 드로잉은 자신의 드로잉을 먹지
를 대고 모사한 것으로 자발적인 드로잉과 판화 사이의 것이다. 그것은 오리지날한 창
조라는 것이 예술가 정신의 은 곳에서 길어 올린 어떤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따라서
예술적 창조와 복제적 기술 사이의 위계와 간극이 신화일 수도 있음을 실천에 긴 것
이다. 더욱이 서투른 손으로 주저하듯이 베껴간 어설픈 형태들은 예술가의 천재성과 그
아우라를 불신하게 한다. '불시에 분출하는 영감이 예술가의 손을 통해 실현된'‥‥‥
등등의 창작의 레토릭에 대한 뒤집기인 것이다.
정서영에게는 '예술적' 형태와 '기능적' 형태간의 위계도 거북하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
의 표현대로, '요에 의해서 생기는 형태'를 예술작품에 버젓이 수용한다. 조각적 신부
나 스폰지 집을 버티고 있는 다리는 무엇보다도 조각을 세워놓기 위한 것이다. 제작 공
정도 반드시 의도하는 형태를 실물화하는 방향으로만 진행되지 않으며, 기능이 형태를,
형태가 의미를 기도 한다.
그녀는 모뉴먼트 또는 작의 개념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가고자 한다. 예술과 비 예
, 고급문화와 키치를 구분 는 어색하고 불편한 틀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술가의 아우라라는 이름으로 치장된 소위 '진지한 예술'보다 가볍고 건조한,
그래서 지루한 '물건'들이, 훨씬 더 진실에 가까움을 말하기 위함이다.
. 깊이 속으로 평행하기

"에 지평선을 향해 쳐져 있는 길을 보고 있을 때, 나는 그 길의 양쪽 면들이 점

차 서로 근하는 것으로 나에게 주어졌다고도, 평행하는 것으로 주어졌다고도 단언할
수 없다. 그 양 측면들은 '깊이'속으로 '평행'한다… 깊이라는 것은… 길에 대한 원근법
적 투사나 실제의 길 어느 한 쪽으로도 정하지 않으려는 의도에 있는 것이다." (모리
스 메를로-, 지각의 현상학, 1962)

정서영의 작품 중에 길을 그린 것이 있다. 꽃병에, , 길 등은 마치 정지된 평면 위의
유클리드 기하학을 벗어나려는 듯이 움직이는 면에 그려져 있다. 지구가 둥글고 움직
인다는 것을 염두에 곡면기하학자들처럼 곡면 위의 움직임을 제안하는 것이다. 원근
법적으로도, 평행하게도 그려져 있는 나무공 위의 고속도로들은 원근법적인 깊이와 실
제적인 평행함이 상호 배타적인 명제가 아님을. 관념적 사유와 신체적 경험 사이의 구
분은 임의적인 것임을 환기하게 한다.
정서영에게 눈과 더듬이는 양자 택일의 것이 아니다. 그녀는 눈의 포를 비껴가는 일
이 눈을 포기하는 일이 아님을, 더듬이만을 취하는 것도 변방을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폭력에 다름 아님을 알고 있다. 단지 눈을 조건 지워 온 직선적 '깊이' 라는 미신을 벗어
나기 위하여 더듬이를 같이 동원할 뿐이다. 정서영은 하나의 중심을 지향하는 시선,
것의 압을 피하기 위하여 어정쩡하게 양다리 걸치고 빈곳들을 들여다본다. 그것은
음과 어두움이 교차되는 세계, 깊이로 평행하는 세계에 이르기 위함이다.
결국 정서영이 혐오한 것은 '깊이'라기보다 그것을 미는 과다한 수식어들이다. 너무
당연한 '깊이'를 치장하는 것이 역겨운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작업에는 "깊이가 없
"라는 말보다 "깊이를 피한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얄팍함과 가벼움, 유치함 등
은 원근법적 시선, 진지한 언어, 엄숙한 고급문화의 무게에 려가지 않기 위한 비틀기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녀는 시각과 촉각, 진담과 , 조각과 가구 사이를 맴돌면서 그 경계를 지우고 그것
들이 아닌 것들을 만들어낸다. 그녀의 드로잉에는 고정된 눈과 움직이는 몸이 함께 있
. 그녀가 말하는 어휘들은 썰렁하면서도 의표를 찌른다. 그녀의 키치 감각은 결코 '
난이 아니다.' 그녀는 스폰지를 질끈 어 꽃 두 개를 만들기도 하지만 전통 조각가다운
치밀함으로 파도를 조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정서영은 원근법적 좌표 사이의 빈 공간을 서성이면서 그 좌표 위에 을 내리지 않고
떠도는 기표들을 가지고 유희한다. 그것들을 만나게 하거나 멀리 떨어뜨려 놓으면서 길
을 그려 넣거나 그려진 길을 지우기도 한다. 그 무한한 만남의 가능성, 그것이 '깊이를
피하는' 정서영의 '심오한 깊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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