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그림과 보이지않는 형태

안규철(조각가)

나는 처음에 그런 상태를 도무지 이해할 없었다. 상을 다 묘사하기에는 무니 없이 부족하다고는 해도 세상에는 언어라, 그것을 남들만큼 사하면서 남과섞여 해서 그처럼 오랫동안 학교여 지냈으며, 을 것을 사거나 거나 기억을 보존하거나 그것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하필이면 그 언어로부터 정녕 나기를 꿈꾼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어지는 한 사람이 우리가함께 살자고 만든 그 약속의 언어로 세상을 하지 으려는 것을 나는 명백한 도피라고 정해보기도 었다. 우리는 한 미술작품 에서 그것의 피를 하나하나 들추어가며 찬히 그 속에 담겨있을 작가의 고의 흔적들을 어가기 이전에, 습관적으로 우선 그것이 무엇인지를 고 있다. 이 나 있지 않은 벌판이나 이를 처럼 여겨지곤 하는 선 작품 앞에서 사람들은 그것에 자신을 내맡기기 이전에 먼저 그것이 무슨 인지, 무슨 이야기를하자는 것인지, 최소한 그것이 어떤 부류에 소속되는 작품인지를 려고 는 것이다. 자기 야에 펼쳐지는 은 들판이나 구름의 풍경, 어린아이의 미소에 음을 빼앗기기 전에 그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겠다는 것이다. 질문은 언어로 구하는 질문이다. 그림을 의 언어로 번역하는 이다. 그림 속에는 그렇다면 언제나 이러한 언어의 그물로 건져지기를 기다리는 하나의 문장, 하나의 시지가 은 그림(숨은 글)처럼 전히 들어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언어의 그물로 아지지 않은 부분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메시지 전달에 속되는 부차적인 부분, 메시지를 장하는 상자, 미술가의 명에 과한 것일까?


미술작품이 제공하는 희열은 관객이 작품 앞에서 스로의 수성과 지혜로 어내는 모종의 "아하!"의 체험이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말로 명될 수 있겠지만 언어화되지 않는 체험들을 당연히 포함한다. 우리의 문제는 이러한 지적, 감성적 희열의 게임이 시각의 말초적 족이나 수공업적 묘기로 대체되면서 미술작품에서 아예 여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다 해도,흔히 무도 상투적이고 의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이다. 경품이 걸린 신문광고의 괄호 퀴즈처럼, 그 게임의 해답들은 '관객 의 이해를 돕느라고' 친절하게도 작품 에 나란히 어 있다. 관객은 짚고 헤엄치는 이 게임의 관을 자기 자신이 었다고 각하고(혹은 그러한 미술이 제시되는 지적 도전의 시시함에 실망하고), 작가는 자신의 친절에 의해 다행히도 관객과의 소통이 이뤄졌다고 믿으려 한다. 이 작품은 대인의 위기의식을 현했다, 생태계 파괴를 고발했다, 어버린 아이덴티티와 동양의 정신성을 기시켰다. 원초적 자연에의 동경을 다루었다, ...
우리 미술가와 관객이 고 받는 메시지의 록을 열거해 보라그것은 거의 사지선다형에 가깝다. 서로가 아는 이야기들만을 되풀이 하여 진술하고 청취하는 이같 폐쇄회로 속에서 백미터 달리기 식으로 이뤄지는 '소통'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일까? 
이들 알려진 정답들의 목록에서 들어 는 해답이 아지지 않을 '문제'-작품이-잘못된 것으로 된다. 이럴 때 관객은 스스로 아무 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썰렁낭패감을 느끼며 수상기의 전원코 드를 빼버림으로써 그 낭패를 보상받고자 한다.
이러한 수신자의 채널은 하나 뿐이고, 이 채널이 제공하는 모든 모범답안들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우리 미술의 가난함이다. 미술이 글의 언어와 구별되는 자적인 언어체계라는 말은 그저 떠도는 소문일 뿐, 그 이미지의 이야기를 읽어들 일 정교한 문법과 세한 어휘가 통용되는 채널은 거의 없다. 그리하여 미술은 실은 스트의 언어에 의해, 목소리 리적이고 유창하나 구멍이 숭 나 있는 말주변들에 의해 대변되고 지배되고 있다.
경험하는 것처럼 단편단편 겨진 그림들로 하나의 낯선 정경,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사건을 구성한다. 언어의 그물, 사지선다형의 거창하고 상투적인 문학들을 피해가면 서 그 작품의 '해답'은 그들 사이의 여백에 들어 있다. 그 행간의 메시지들은 언어 이전의 '내면의 '으로 읽혀지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 언어 이전의 상태는 이미 지들을 되는대로 이어 붙인 패치워크가 아니다. 무의식에 을 맡기는 초현실주의나 포스트모던의 Anything goes의 해방적 제스처나 선문답적 초월의 제스처로부터 이 작업들을 뚜렷이 구별짓는 것은 정제된 내적 질서의 체계이다. 그녀의 작업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 대부분의 에너지와 시간이 이미지들 간 의 섬세한 뉘앙스를 구별해 내고, 그렇게 선택된 사물들의 관계를 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는 어떤 적인 정점들에 멈춰 세우는 일에 쳐지고 있다. 얼핏 하잘 것 없어 보이는 덤한 물건 들의 낯선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그 조각적 에는 질적인 형태를 찾는 전통적 조각가의 엄격성과 정교함이 담겨져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형태를 이루고, 그것이 이 작품들에 독특한 장과 혹의 간들을 부여한다. 이러한 일들은 관객의 장에서 보면 오른손잡이들에게 손을 도록 주문하는 일처럼 불편하게 여겨질 일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 불편함을 덜어주려는 어떠한 장치도 작품 속에 마련해주지 않는다. 마디로 어지는 그럴싸한 설명, 사지선다형의 모범답안, 사람의 정서를 사로잡는 감각적이고 극적인 형태들을 만들 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할 때 그것은 다시 지배언어의 폐쇄회로로 아가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정서영은 자신의 작업을 현실적인 것에서 일상적인 것, 아주 추상적인 것에서 아주 구체적인 것 사이의 왕복운동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추상적인 어떤 개념에서 발하여 그것을 아주 구체적인 사물의 상태로, 다시 일상 속의 구체적 언어나 도형 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아주 비일상적인 어떤 상태로 고 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언어와 그림 사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왕복운동이라는 말로 바꿔보았다. 지점 사이를 왕복하면서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 그러다보면 그사이에 길이 만들어질 것이다. 매한 선문답의 미술이 행하던 시대에, 허황됨에 진저리를 치면서 그길의 한 에 서서 미술을 시작했던 나같은 사람, 정서영의 이런 생각을 도무지 이해할수 없었던 사람이 이만큼이나마 발을 들여놓고 그 길이 어디로 을까를 궁금해하도록 만드는, 작은 길들이 겨날 것이다.
다만 시간이 걸릴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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