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유쾌한 씨를 보라 : 주재환 Joo Jae-Hwan 展

아트선재센터 Artsonje Center, Seoul 
2000_Nov. 25 ▶ 2001_Jan. 21
주재환 선생의 작업은 그가 걸어온 삶의 다양한 면모만큼이나 다채롭고 복합적이다. 화가로서의 그의 경력을 채워야 할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그 숱한 삶의 궤적들은( 행상, 외판원, 방범대원, 한국민속극 연구소 연구원, 월간「미술과 생활」기자, 월간 「독서생활」편집장, 도서출판 미진사 주간,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 등등) 그의 작품 모양새를 얼마간은 짐작하게끔 한다. 그것은 선생의 작업 속에 담긴 시대와 사회의 목소리를 놓지 않으려는 어떤 태도이며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의 작업은 다소 경직된 톤의 민중미술로 보기엔 어려움이 따른다. 오히려 그를 뛰어넘을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기에 선생의 작품은 지금 시점에서도 여전히 곱씹어 읽혀진다. 선생의 작업 바탕은 지지고 볶는 삶의 한 복판 속에서 몸소 체험하고 실천한 것들을 작품이라는 걸러진 형식을 통해 표현해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삶으로부터 얼마간의 긴장과 거리를 갖고 있는 선생의 작품은 언뜻 보기에는 매우 유머러스하고 경쾌하다. 그러나 곰곰이 살펴본다면 그것이 단순한 유희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선생이 몸소 체험하고 가까이서 지켜본 현실의 갖가지 겹을 작가 특유의 혜안으로 승화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생의 작업을 읽어낸다는 것은 그의 삶과 그가 온몸으로 부딪치고 고민했던 시대의 숱한 풍경들과 맞닿는 것이기도 하며 그 속에서 가질 수 있는 유유자적함과 유쾌한 거리감을 맛보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이런 배경 위에서 주재환 선생의 작품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 선생은 1960년 홍대 서양화과를 입학한 후 한 학기만 다닌 후에 그만두었다. 당시의 불안했던 사회상이 그를 얌전하고 고상한 미술학도로만 머물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생활전선에 뛰어든 선생은 갖가지 직업들을 전전하면서 제도의 안자락이 아닌 그 바깥에서 미술을 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그의 풍부하고 깊이 있는 사회에 대한 시선들은 오히려 미술 외적인 온갖 경험, 그 지지고 볶는 삶의 한복판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언제나 사회에 대한 긴장감 있는 시선과 사유를 잃지 않았던 선생은 1979년 현실과 발언의 창립동인으로 참여하게 된다. 엄혹하기만 했던 80년대를 관통하며 시대와 삶에 대한 비판의 끈들을 잃지 않았던 현실과 발언 그룹은 당시 뛰어난 시대의식과 시각문화 전반에 걸친 앞선 문제제기로 이후 다소 우직하기만 했던 민중미술의 궤적을 더욱 풍부하게 했던 토양으로 자리하게 된다. 이 시기에 선생의 이력을 채워놓은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 80-87 군사독재정권 미술탄압사례발간, 고 박종철 열사 추도 반고문전 등의 경력은 그의 참여적인 기질을 얼마간 설명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선생이 그 시대를 그렇게 몸소 실천하려 했던 것은 상식 이하의 혹은 무원칙한 시대와의 동화를 거부하려는 그의 기질과 천성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선생이 생각했던 어떤 작업의 가능성, 곧 관제 미술, 국적불명의 미술 대신 그가 몸소 엮어가려 했던 긴장감 있고 생생한 미술, 삶과 시대를 아우르는 시선이 담겨있는 미술을 실천 하고자 했던 데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태풍아방가르드호의 시말_종이에 펜_1980
선생은 그 격랑이 지나고 난 90년대 들어서야 처음으로 개인작업실을 갖게 되었다. 먹고살기 바빴던, 그리고 이리저리 삶의 결을 누비기 분주했던 7, 80년대는 선생이 화가라는 사실을 간간히 확인할 만큼의 작품만을 남겨놓았다. 근대미술의 차갑고 격조있는 정신성을 표현한 몬드리안의 격자를 꿀꿀한 러브호텔의 야릇한 방으로 둔갑시킨 몬드리안 호텔과 모더니즘의 대부격인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를 계급사회의 권력적 위계를 풍자하여 오줌발 세례 이미지로 형상화한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 몇몇 걸작들이다. 촌천 살인의 세태풍자와 화단에 대한 비판을 유머러스하게 결합시킨 몇몇 작품을 만들던 이 시기를 지나 선생은 94년부터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 그가 택한 매체가 유화였다. 나이 50이 되서야 처음으로 써본 유채물감은 '정신의 지저분한 때를 씻어내는데 적합한 매체'로 선택되었다. 선생은 유화라는 매체를 통해 시대의 갖가지 겹들을 칠하고 지우고 또 다시 덧칠해나갔던 것이다.

● 98년도에 들어서 선생은 새로운 작업을 시도한다. 이때부터 그가 자칭 1000원 예술이라 칭한 갖가지 소재의 작업들이 펼쳐지게 된다. 비닐끈, 쇼핑백, 은박지, 밤송이 치즈, 캡슐, 신문, 잡지, X-ray사진, 색종이 모눈종이, 도화지, 트레이싱 페이퍼 등을 가지고 찢고 오리고 붙인 바탕 위에 다시 볼펜, 형광펜, 싸인펜 등으로 그리기고 하며, 3M, 견출지, 스티커, 프라모델, 장난감 등이 꼴라쥬되고 설치된 잡다하기 이를 데 없는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여기서 그의 레테르라 할 수 있는 체험미학의 산문정신이 발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선생의 오랜 체험미학은 이 비루하고 남루한 문방구 재료들이자 일회용품, 폐품들을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동력으로 거듭나게끔 해왔다. 그것은 단순히 키치니 반 미술이니 하는 현대미술의 그 숱한 조류들과도 구별되는 것일뿐더러 환경미술이니 정크아트니 하는 범주와도 상관없는 것들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다만 일상의 작은 구석조차 날카로운 시선을 잃지 않은 그의, 삶과 분리되지 않은 체험이, 혹은 천성적으로 고상하고 무게감 떠는 것들에 대한 반골 기질이, 그리고 시적인 압축과 절제로 의미를 생성시키는 그의 산문정신에서 비롯되는 것들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선생은 이 남루하고 요란한 시대의 견자(見者)이며 구체적이고 사소한 일상으로부터 의미를 일구어내는 시인이며 가장 값싼 재료로 작품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저예산, 로우테크 예술의 최전방에 서있는 작가이다. 그의 시선 속에 세상의 온갖 잡다한 사물들이 새로운 조형 질서를 부여받고 각별한 의미로 세상에 내던져진다. 

쇼핑맨, 쇼핑백_꼴라쥬_1998, 210x90cm

● 선생의 작업은 언뜻 보기에 가볍고, 엉뚱하며 기발해 보인다. 자세히 눈을 치켜 뜨고 봐야 그것이 가벼움으로만 그치지 않는 것이란 사실을 알고나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는 선생이 다룬 갖가지 소재와 내용의 작업들, 그 변화무쌍한 폭과 넓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구체적이고 사소한 일상으로부터, 그리고 구체적인 사회와 일상의 문맥으로부터, 혹은 삶의 어떤 태도와 지향을 마치 날카로운 핀셋으로 이미지를 채집하듯 화폭에 담아놓은 선생의 작업은 그런 면에서 몇몇 일관된 스타일로 정의할 수 없게 만든다. 작품의 표현형식 또한 개념적 드로잉, 만화, 사진 및 인쇄물 꼴라쥬, 텍스트, 오브제, 유화, 페인팅, 설치 등 다양하기 이를 데 없으며 여기에 자동 기술법적인 즉흥성과 우연성, 풍자와 메타포, 초현실적 면모와 S.F.적인 유언비어, 퀴즈, 속담과 수수께끼, 우화 등 선생이 겪은 삶의 양상만큼이나 다채롭고 복합적이다. 치열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둔탁한 무거움과는 거리가 먼 듯 느껴지기도 하고, 유쾌하지만 가벼운 유머 이상의 무게와 진정성으로 뭉쳐있는 작가 주재환. 지글거리는 삶의 한복판 위에서 평생을 지내왔지만 그는 여전히 변방과 주변을 거닐고 있는 유유자적한 몽상가의 모습이 더 어울리며 아직은 몇몇 아는 이들 사이에서만 소리 없이 아우성 되는 이름 없는 화가이다. 그리고 선생이 즐겨 사용하는 패러디와 패스티쉬 등의 감각은 단순히 시각적인 재료로만 향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는 언어로 내뱉는 유머이자 독설이자 비판으로 되살아난다. 혹은 고결한 자유를 느끼게 하는 긴 여운을 담아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호흡을 다시 가다듬게 한다. 전방위의 삶을 살아왔듯 선생은 최전방 관측소에서 예리한 시선으로 그 앞에 마주한 것들을 관찰하고 사유하고 끄집어내고 다듬어 왔다. 그러나 그렇게 치열한 삶의 전장에서도 선생이 놓지 않았던 것은 그를 뛰어넘는 삶에 대한 느긋함이자 어떤 여유스러움이며 따스한 몸짓들이다.
■ 아트선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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