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럭서스 Fluxus는 라틴어로 ‘흐름’을 의미한다. 1960년대 음악, 미술, 문학, 건축, 디자인 등 각 분야의 아티스트들이 다양한 매체를 접목하는 기법으로 실험적인 예술운동을 펼쳤는데, 플럭서스는 이 운동의 이름이자 여기 참여한 아티스트들의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주요 참여자로는 백남준,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등이 있다.
Performance: time space 11'15
진행자는 관객들에게 “휴대전화기를 끄지 마세요. 통화해도 됩니다”라고 말한다. 아티스트가 제공한 소리와 이미지, 그와 함께 자연 발생하는 소리와 이미지들이 모두 모여 하나의 퍼포먼스가 되고 작품이 되리라. 그리고 시작된 공연. 무대 중앙 화면 가득 존 케이지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명백히 그의 < 4´33˝>를 연상시키는 혹은 그것에 바쳐진 작품 < Time & Space, 11´15˝>의 공연시간 동안, 존 케이지는 화면 속에서 명멸했고, 간간이 피아노 건반이 울렸으며, 승려의 독경, 프랑스어를 모르는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의 낭독이 이어졌다. ‘불행히도’ 누구의 휴대전화 벨도 울리지 않았다.
그 ‘11분 15초’가 지나고, 이번에는 백남준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이어졌다. 이윽고 김순기 작가는 백남준아트센터의 이영철 관장과 대담을 시작했다.
[이영철] 안녕하십니까. 방금 소개받은 이영철입니다. 얼마 전 김순기 선생님이 저희 백남준아트센터에 방문하셔서 오늘 보신 자료들을 소개해주시고 말씀을 나눈 바 있습니다. 오늘 큰 영상으로 보니 초기 백남준 선생의 고민, 그분이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문제들, 그분의 인문학적 박식함까지 느껴지는 소중한 자료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우선 존 케이지, 백남준, 김순기 3자 관계에 대해 제가 일반적인 질문을 하는 것으로 시작할까합니다. 일단 화면의 첫 장면에서 존 케이지의 모습이 아주 건강하고 생기있어 보이는데요. 김선생님과 존 케이지와의 첫 번째 만남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음악을 잊어버린 콘서트
[김순기] 처음 존 케이지 할아버지를 만난 건 아주 행복한 기억입니다. 당시 제가 사귀던 남자가 제 친한 친구와 바람이 났어요. 그래서 몹시 슬퍼서 작업실에 갇혀서 오랫동안 밖으로 나가질 않았어요.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내가 어렸을 적에는 꿈이 컸는데 남자문제 때문에 이럴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마침 존 케이지가 수도원에서 세미나와 함께 아트 페스티벌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무작정 갔어요. 수도원에 도착해서 행사에 참석하겠다 그러니까 행사를 진행하는 분이 “안 된다, 여기는 세계의 작가들이 오는 곳이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얌전히 앉아 있기만 하겠다고 억지로 우겨서 들어갔지요. 하지만 그 행사에 너무나 흥미 있는 작업이 많다 보니 손을 들고 질문도 했어요. 그날 행사가 끝나고 다른 분들은 모두 거기서 묵는데 나는 무턱대고 온 사람이라 방이 없었어요. 그래도 어제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을 만큼 슬펐는데, 오늘은 하늘로 둥둥 뜨는 기분이 들었어요. 하여튼 이제 잘 곳도 없고 해서 혼자 산을 내려가는데, 그게 저녁 8시나 9시쯤 됐을까. 갑자기 누가 어깨를 탁 치면서 저를 부르는거예요. 그게 존 케이지 할아버지였어요. 그러곤 제게 계속 행사에 참석해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게다가 마지막 날에 콘서트가 있는데 그때 발표를 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음악에 대해 모릅니다. 관객 앞에서 할 줄도 모릅니다” 그랬더니, 케이지 할아버지가 묻기를, “넌 음악을 잊어버릴 수 있느냐?”라고 질문했어요. 전 그건 쉽다. 왜냐하면 전 음악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을 잊어버릴수 있느냐?” 네, 뭐든 하다 보면 시간은 까먹습니다. “관객을 잊어버릴 수 있느냐?” 그것도 쉽습니다. 몰두하다 보면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저도 물었지요. “존 케이지 할아버지, 시간은 얼마나 써야 하나요?” 그런데, 그런 건 없다고 하시는 거예요. 정해진 시간이 없다. 열린 시간이 배정되어 있으니 좋을 대로 하면 된다, 이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했죠. 당일 마이크를 잡고 아무 생각 없이 콘서트를 했어요. 케이지 할아버지 말대로 모두 잊어버리구요. 그러다가 갑자기 소리가 나서 눈을 들었는데 관객들이 무지 많았어요. 삼백여 명이 콘서트장에 꽉 찬 거예요. 그러다가 점점 사람들이 줄었어요. 밖에서 불꽃놀이를 하기로 해서 기다리고 있다가 안 끝나니까 지겨워서 나간 거죠. 콘서트가 막 끝날 무렵, 라디오에서 들리는 말이, “교황이 돌아가셨다…”. 뜻이 있는 날이었어요.
케이지, 선불교, 아나르키
[이영철] 서구뿐 아니라 동양의 많은 예술가들은 존 케이지 하면 전위적인 음악, 전자 음악, 그리고 선불교를 먼저 떠올립니다. 문제는 존 케이지나 동시대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선불교는 명상적인 측면이 먼저 와닿는데, 어떻게 보면 한없이 지루하고 썰렁하고 재미가 없어서 끝까지 보기가 되게 힘든 작업인 것 같습니다. 백남준 선생도 초기에 참으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작업을 하신 것 같은데요. 사실 저희들이 옛날 그 자리에 없어서 더 더욱 알 수가 없는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작업들이 너무나 주관적이고 사적이고 뭔가 알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만다가가게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김순기] 동양사상과 존 케이지의 관계는, 사실 동양사상에 대해 그 분만큼 오래 공부하신 분이 없어요. 예를 들자면, 존 케이지 집에몇 번 갔는데, 비트겐슈타인과 젠 관련 책들이 많았어요. 또 젠zen에 불교buddhism를 붙여 젠부디즘zen buddhism을 만든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한테 몇 년 동안 배우고 일본에도 가서 또 공부하셨지요. 존 케이지가 생각한 음악의 개념도 다분히 불교적입니다. 그분 생각에 음악이란 화음, 즉 '도미솔'하는 법을 가지고 있는데, 그 법(즉 한계)을 떠나서, 삶의 환경 자체를 음악과 동등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거였죠. 음악과 소음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거예요. 그리고 지루함의 문제... 그렇죠. 존 케이지 입장에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놓은 마음을 음악인의 작곡 요소로 화용하는데, 이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어요 그런데 사실은 그 지루함이란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루하고 지저분하고 우연적이고 그런 게 중요하다는 말이에요.
[이영철] 그것은 끊임없이 공통적인 생각, 상식이나 사람들이 소통하기 위해 경영해온 시스템이나 기본틀에 맞서는 사회적인 저항의 뜻으로 이야기 할 수도 있겠죠.
[김순기] 그렇죠. 예술과 사회문제. 제 좁은 생각으로, 예술은 그 자체로 저항이다. 예술을 가지고 무엇을 한다가 아니고 예술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저항이다, 라고 생각해요. 어떤 사회에서는 예술한다는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 태도를 받아들이기에는 그 사회가 모자란 거지요. 하지만 우리 예술인들은 해야만 해요. 가치가 없는 것 같은데 사실은 정말 가치가 있는 일들을 하는 거죠. 쉬운 일은 아니에요. 많은 경우 우리의 직관 역시 기존 사회체제에 물들어있기 때문이지요. 저항을 말씀하셨는데, 존 케이지는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아나르키를 좋아한다. 빨갱이도 아니고 파랭이도 아닌, 뭐도 아닌 아나르키.” 아나르키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경찰이 몽둥이로 때릴 때 안 때리게 하는 것, 다른 하나는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다른 걸 함께 할 수 있는 조건이 아나르키입니다. 후자가 되면 누가 뭘 하지 말라고 할 필요가 없는 거죠. 누가 존 케이지에게 이렇게 물었어요. “당신 작품에 정치적인게 뭐가 있느냐. 정치적인 앙가주망engagement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재미없다.” 케이지가 대답하기를, “예술하는 것 자체가 저항이다.” 그래요, 예술할 때는 너무 고독하고 힘들지만 계속 앞으로 나갑니다. 누가 이해해주지도 못하니까 더욱 힘들어집니다. 그래도 관계없다. 계속 앞으로 나간다. 그런 태도가 예술가의 자세라고 생각해요.
백남준은 날개 없이 우주를 유영하는 사람
[이영철] 백남준 선생이 재미있는 말씀을 남겼는데요. “마르셀 뒤샹이 비디오아트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이루어놓았다. 그는 입구는 커다랗게 만들어놓고, 출구는 아주 작게 만들어놓았다. 그 조그만 출구가 바로 비디오아트다. 그 출구로 나가면 우리는 마르셀 뒤샹의 영향권 밖으로 나가는셈이 된다.” 대단히 확신에 찬 큰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의 발언이라고 해버리면 간단하겠지만, 문제는 마르셀 뒤샹이 아닌가 합니다. 20세기 서양 미술의 역사에 있어 뒤샹은 마치 큰 우산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비서구권에서 온 한 젊은 아티스트의 꿈과 상상력과 열정과 발명에의 의지 이런 걸 통해 비디오가 비디오아트가 됐는데, 이것이 여러 개의 아트에 또 하나의 아트가 추가된 것이 아니고, 20세기 서양 예술의 신화를 깨버린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요. 저는 백남준 선생 당신이 그렇게 했다고 믿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런 발언을 했겠지요. 그런데 비디오아트를 오랫동안 해오신 김선생님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비디오아트란 “시간과 빛으로 짜인 유동적인 그릇”이라는 멋진 정의를 내려주셨는데, 백선생과의 관계, 그러니까 처음에 어떻게 만났는지, 느끼신 점, 또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백선생님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김순기] 백선생은 날개 없이 우주를 왔다 갔다 하는 분이지요. 어떤측면에서 보면 순위를 매기는 걸 좋아하셨지요. 피라미드를 만들어서 꼭대기에 앉으려 하는 욕심도 있었구요. 그런데 막상 백선생님 작업을 미학적으로 분석해보면 그걸 반대해요. 그건 그렇고, 존케이지가 저를 만난 후 미국에 갔는데 우연히 백남준 선생을 만났답니다. 그래서 어떤 한국 여자가 파리에 있는데 아느냐 했더니 모른다고 하더래요.
그 다음 해 파리에서, 88년인가, 백남준 선생이 퍼포먼스를 하는 곳에서 만났습니다. 인사를 드렸더니 그렇지 않아도 존 케이지가 이야기해서 만나려고 했다고 하시더군요. 다음 날 저녁을 하자고 해서 또 만났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무척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지요. 특히 시간에 대해 약간의 논쟁이 있었어요. 어느 순간 우리z의 단어가 변하더라구요. 시간이 ‘때’로 변했어요. 그때 제가 “선생님 그러면 비디오는 색동이에요. 때때옷이니까 색동이죠. 만다라도 색동이고” 그렇게 말했던 게 기억나요. 그 이후 선생님이 미국으로 떠나셨는데, 미국에서도 제게 편지를 보냈어요. 한마디로 “나는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죠. 그래서 저도 “선생님, 그렇지않습니”는 편지를 보냈죠. 대화를 한 거죠. 그러다 몇 년 있다가선생님이 저를 뉴욕으로 부른 거예요.
예술은 짧고 삶은 길다
[이영철] 간단하게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예술가로서 사회제도의 여러 측면들에 대해 구체적인 책임감을 갖고 있는 것인지, 또 사실상 모든 것이 더욱 상품화된 소비자본주의 세상에서 지식인 예술가로서 산다는 것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인지, 라는 평범한 질문을 함께 드리고 싶습니다.
[김순기] 어떤 중국 사상가가 “도道는 예술을 포함하고 있지만 예술은 도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해석을 덧붙이 자면 삶은 예술을 포함하지만 예술이란 삶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라는 고전적인 생각을 말한 것 같아요. 제 생각에 예로부터 동양사상에는 예술과 삶이 함께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술하는 사람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뭐를 계속 찾아다니는 게 고독하죠. 작품을 하다가 뭐가 탁 막히면 그걸 해결하기 위해 몇 개월 걸릴 때도 있고, 10여 년 걸릴 때도 있고… 하지만 행복할 수 있어요. 내가 작업하고자 하는 것을 안 하면 그것은 난린데 작품을 할수록 작품에 대한 욕심이 점점 없어진다는 걸 배웠어요. 그런 점에서 행복해요.
[이영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란 말이 있잖아요. 하지만 백남준 선생은 “삶은 길고 예술은 짧다”라고 하셨죠. 나이 들어보니 그 말이 맞는 것 습니다. 그런데 왜 예술이 길고 삶이 짧은 것처럼 오랫동안 이야기해왔을까, 삶이 작게 보일 만큼 예술이 커진 세상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또한 각자에게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예술은 너무 빨리 변하고 자체폭발의 상황에 있는데 삶을 등한시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백남준 선생과 존 케이지 그리고 많은 분이 삶을 소중하게 여기고 자기를 배려하는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존 사회의 모든 문제를 의문시하고 전복하려고 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요즘에는 오히려 그런 게 참 어려워진 것 같아요. 오늘 김순기 선생 모시고 이야기 나누면서 무척 즐거웠습니다.
대담정리 곽동훈_문화평론가 | 사진 김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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