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과 과학을 섞은, 대학원생들과 교수 참여 실험극 '라면 앙상블'
"남성 집단문화가 선호하는 '라면의 남성성' 과학분석으로 밝히다"
라면.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가 라면을 먹는 게 아니라 산업생산 시스팀이 우리에게 라면을 먹이는 겁니다. 라면은 제품이 아니라 프로그램입니다. 이에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자연과학의 여러 분야와 인간에 대한 통찰을 한 데 융합하는 새로운 학문, ‘라면과학’을 제안합니다.”
무대에 선 자칭 ‘비평과학자’(이영준 계원예대 교수 역)는 짐짓 선언적인 말로 이렇게 말하며, ‘남자들이 집단을 이뤄 먹기를 즐기는 라면의 남성성’을 분석할 것을 주문한다. 남자들의 라면 집단 소비는 동물행동학으로 볼 때 어떤 진화 전략에서 비롯했을까? 뇌과학과 분자생물학의 측면에서는 또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비평과학자에 이어 동물행동학자, 뇌과학자, 분자생물학자가 차례로 무대에 올라 자신이 이룬 라면과학의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27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서계동에 있는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백장극장)에서 열린 이색 과학연극 ‘라면 앙상블’(연출 김나영·이영준)의 리허설을 하던 임소연(35·서울대 과학사·과학철학협동과정 박사과정)씨는 “라면과학의 이야기는 당연히 허구이지만 허구와 사실을 뒤섞어 사실처럼 관객에게 보여주려는 게 이 연극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과학학과 분자생물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4명과 이 교수가 지난해 여름부터 준비한 실험극이다. 프랑스 파리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한 작가 김나영씨가 공동 연출을 했으며 함께 작업해온 독일 작가인 그레고리 마스(Gregory Masas, www.nayoungim-maass.com)와 함께 예술감독으로도 참여했다. 국제다원예술축제 ‘페스티벌 봄’의 참여 작품으로 28·29일 두 차례 공연한다.
가볍고 일상적인 라면의 이야기가 어느날 갑자기 엄격하고 정밀한 과학적 분석결과로 이야기될 때에 느끼는 낯섬 또는 당혹스러움 때문일까, 아니면 그런 발상의 엉뚱함 때문일까? ‘라면 앙상블’은 단순한 줄거리로 이뤄져 있는데도, 독특하고 파격적인 형식으로 눈길을 끌었다.
‘라면의 과학’이라면 대체로 식품영양학 분야의 관심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연극에서는 라면과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동물행동생태학, 분자생물학, 뇌과학에서 라면과학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허구는 그럴 듯하게 이어졌다. ‘동물행동학자’(임소연)는 남자들이 혼자서 먹을 때의 이득을 포기하고 함께 모여 라면 먹기를 즐기는 것은 남자들의 진화적 적응 전략 때문임을 게임이론의 수학적 모형을 통해 입증하고, ‘뇌과학자’(장하원)는 남자가 라면 자극을 받을 때 활성화하는 뇌 부위는 성적 자극 때의 활성화 부위와 일치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의 연구결과를 내놓는다. ‘분자생물학자’(김연화, 온봄)는 라면에서 남성호르몬과 관련 있는 성분을 찾아냈다고 말한다.
사실 이건 다 지어낸 얘기다. 그런데도 무대 위의 배우들은 치밀하고도 천연덕스럽다. 갖가지 과학 이론과 방법론, 그리고 선행 연구를 소개하고, 이어 정량적 분석결과를 유의미하게 입증할 수 있는 연구·실험의 설계와 방법을 제시하고, 또한 연구결과를 수식과 그래프, 데이터, 뇌영상물로 제시한다. 연구결과에 담긴 의미를 강조하지만, 그 실험의 한계도 이야기하고, 후속 연구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한다. 이런 과정은 무대 위의 과학자를 신뢰하게 하며, 가공의 라면과학 이야기는 실제 상황처럼 받아들여지는 착각과 연극 상황임을 알아차리는 실제를 오가며 전개된다. 이들은 “몇 달 동안 연구논문들을 찾아 읽으며 대본을 만드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며 “라면과학의 이야기는 가공이지만 여기에 쓰인 과학 이론, 방법은 실제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말했다(실제 상황처럼 꾸민 연극적 장치는 오해를 낳기도 했다. 이번 공연에 앞서 지난달에 발표한 작은 무대에서는 라면과학의 연구결과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해프닝이 벌어졌으며, 한 언론사의 기자가 ‘남성호르몬 관련 물질이 라면에서 검출됐다’는 내용을 취재하려고 연락을 해오기도 했다고 한다).
라면의 남성성이라는 허구가 왜 엉뚱하게 무대에서 엄정한 과학과 만났을까?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허구인지 헛갈려요. 사실과 허구가 뒤범벅이 되어 있군요.
[임소연] 가상과 사실이 뒤섞여 있다는 게 이 연극의 포인트입니다. 인식론적 권위를 갖추고 있는 과학에 대해, 과학자의 경험에 대해 연극 무대를 통해서 한번 돌아보자는 뜻도 있는 거지요.
[장하원] 그렇지만 일단은 진짜 과학의 모습을 관객들한테 보여준다는 의미도 있어요. 이번 연극의 기본 틀은 충분히 검증해서 만들었거든요. 해당 분야의 연구방법론과 이론, 선행 연구들을 조사하고 연구하면서 만들었습니다. 과학적 방법론과 이론의 모습을 될수록 그대로 관객들이 보고 경험할 수 있게 하자는 거지요.
관객이 연극을 보면서 많이 헛갈릴 것 같아요.
[임소연] 이번이 사실상 첫번째 무대입니다. 그런데 지난 2월18일에는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과학쇼’라는 이름으로 지금보다는 덜 완성적인 작품을 무대에 올린 적이 있어요. 그 때에 관객들의 반응이 그랬습니다. 극중의 연구성과 발표 내용을 너무도 진지하게 보시고는, 청중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에 “연구결과가 내 개인 경험과는 너무 다르다”고 반론을 펴는 남자 관객들도 있었으니까요. 그날 공연을 마친 뒤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한 언론사 기자가 전화를 걸어와서 “라면에 남성호르몬과 관련한 성분이 검출됐다던데, 그 내용을 기사화하고 싶은데 좀 더 얘기해줄 수 있나요” 하고 묻더군요.
과학적 사실의 엄숙주의를 강조하는 분들은 과학을 이런 연극의 소재로 삼은 것에 대해 뭐라 비판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온봄] 저는 지금 대학원 실험실에서 실험하며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발표도 한 적이 꽤 있고요. 그런데 사실 어떤 실험결과를 발표할 때에는 이 연극에서 보여주는 것 같은, 그런 마음도 들거든요. 그러니까, 발표할 때에는 내 연구는 정말 가치 있다고 얘기해야 하고, 한계가 있어도 아주 당당하게 얘기해야 하고, 사실 널리 세일즈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거든요. 좋은 연구자도 자기 연구의 한계를 잘 드러내지 않는 게 당연지사이겠지만요. 그걸 반복해서 발표하다보면 스스로 자신감도 생기고요. 이 연극에는 뒤늦게 합류했지만 대본을 보면서 제 모습을 스스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서 좋았어요.
[임] 과학 하는 사람들도 이 연극을 봤는데, 대체로 재미있다는 반응이었습니다. ‘내가 하는 과학이 이렇게 연극의 소재가 될 수도 있구나’ 하는 점에서 신기하게, 좋게 생각해주시더군요. ‘어디 과학을 이렇게 놀려’ 하는 반응은 아직 없었어요.
[장] 희화화는 아니고 비판적인 관점은 섞여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런 비판은 과학계 안에서도 상당히 일반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뇌과학 안에서도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의 몇몇 실험방법에 관해서는 내부 비판이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 일반적인 비판적 시각의 수준이 이 연극에 반영됐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어찌보면 아주 일상적인 언어와 관심사를 가장 엄격한 과학의 언어와 형식으로 얘기했을 때의 그 모습을 이번 연극이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임] 그게 우리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 중 하나죠.
과학의 언어를 엄밀하게 담으려면 대본을 쓰는 데 노력을 많이 기울였을 것 같습니다. 대충 과학을 흉내내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과학자들이 실제의 연구성과를 발표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로 연출을 하려면요.
[임] 라면과학의 연구성과에 관한 것은 허구이지만 이야기의 기본 틀은 실제에 기반을 두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관련 연구논문들을 찾아 읽었고, 동물행동학, 분자생물학, 뇌과학 분야의 저널에 실린 논문들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또 무대에 오르는 분들이 모두 다 각 분야를 직접 공부하거나 연구했던 적이 있지요. 한 분은 현재 실험실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중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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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연극 같습니다. 이 교수님은 이번 연극에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신가요?
[이영준] 지적인 재미인 것 같아요. 책을 쓰고 강연도 하지만, 연극이라는 다른 포맷을 취하면 지적인 접근도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지적인 재미 때문에 이번 연극에 참여하게 됐어요.
연극의 기본 틀은, 과학이라는 사실적인 주형에다가 라면에 관한 가상적인 내용을 부어 넣어, 사실과 허구를 버무린 것으로 볼 수 있겠네요. 왜 이런 형식을 취했을까요?
[이] 과학은 정말 엄밀한 것이다, 다들 언제나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과학에도 인간 활동의 모호함이나 주관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연극에서는 과학을 살짝 비틀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그게 과학에 반하는 반과학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과학을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믿어요. 실제 과학 활동에는 우연성의 요소가 많이 있지만 정식으로 발표할 때에는 그런 우연한 요소들이 다 제거되지요. 그 과학의 실제 모습을 연극이라는 소프트한 플랫폼에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관객이 어떻게 반응해주기를 기대하시는지요.
[이] 사실 좀 심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공연 무대에 올려지는 것이니까 아무리 사실적으로 보여주어도 이것을 과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저 웃고 호기심을 보이는 수준이 아니라, 저런 모습의 과학은 우리가 알고 있던 과학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이 연극는 왜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가, 이런 점들을 생각하며 무겁고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면 하거든요. 가볍게 웃어 넘기지 않았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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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그밖에 : 라면 앙상블 준비 과정은?
이번 작품을 준비한 주체가 ‘뮤즈 에스(S)’ 그룹과 이영준 교수인 걸로 알고 있는데, 뮤즈S는 어떤 그룹인지요.
[임] 서울대 대학원원(과학사·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과학사회학(STS)을 공부하던 사람들 몇몇이 모인 그룹입니다. 저희가 원래 과학 전시, 과학 대중화 재현 등에 관심을 갖고 함께 공부하자며 2009년 쯤에 모였는데, 2010년에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에서 받은 '과학과 예술의 융합'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만들면서 과학과 예술의 융합 문제에 관심을 더 갖게 됐어요. 이것저것 같이 공부도 하고 일도 하면서, 그러다가 무대 공연까지 준비하게 된 거죠.
얼마나 준비했나요.
[임] 2011년 여름께부터 준비했습니다. '라면'이라는 소재를 잡기는 쉽지 않았고요. 일단 라면을 소재로 잡은 뒤에는 각자가 자기 분야에서 관련 연구논문들을 찾아 공부하고 대본을 작성했는데, 정말 어려운 작업이었죠. 정말 힘들었던 대본입니다. 처음에는 갖가지 아이디어들도 나왔고, 라면송을 만들자 하는 얘기도 나오고 했는데,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많이 단순화했지요. 결국에 세 과학자의 연구결과 발표라는 형식으로, 정통의 발표회 분위기로 가자는 데 의견이 모아지게 되었지요.
오래 준비했는데, 공연은 이틀만에 끝나는 게 아쉽게 느껴지겠군요. 앞으로 계획은? 라면의 본고장인 일본의 무대 공연도 생각하시지는 않는지?
[임] 다른 무대에서 더 공연할 마음은 있어요. 하지만 당장 계획은 없고요. 다시 무대에 오른다면 연극 내용이 이번과는 또 달라질 걸로 봐요. 직업 배우가 하는 연극이 아니고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실험적인 무대이다보니 여러 실험적인 시도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번 공연 이후에는 일단 <라면 앙상블>과 관련한 책을 하나 낼 계획입니다. 실험극의 준비 과정과 연극 내용을 담아보려고요. 일본 진출이요? 그건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야 있지요(웃음).
[수정] 본문 중에 "프랑스 파리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한 작가 김나영씨가 공동 연출을 했으며...그레고리 마스와 함께 예술감독으로도 참여했다"라는 문장을 추가했다. 2011년 4월2일 오후 20분.
http://scienceon.hani.co.kr/32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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