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하여 막대한 논의에 강요당하기도 했고 또 한편으론 자발적으로 수용하느라 발품깨나 팔았던 우리다. 그러나 그것은 모더니즘이라는 대적적 지대에서 자기역량을 확장하다가 진정한 질량을 확신하지 못한 채 세월의 풍파를 겪은 것 같다. 시간과 역사를 직선적으로 파악하는 한, 발전적 사관에 자기 역사의식을 맡기는 한, 모더니즘은 당연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지고 포스트모더니즘은 또 다른 명칭의 장식으로 치장되어 새롭게 도래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 식민주의다 알터 모던(Altermodern)이다 글로벌리즘이다 갈피를 못 잡고 시간을 보내는 형국이 지금의 모습이다. 그 기세양양했던 옥토버 그룹이나 네이션지는 더 이상의 담론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 파이낸셜타임즈의 피터 에이스프던(Peter Aspden)은 ‘서구의 가치(Western Value)’라는 컬럼을 통해서 영화, 미술, 문학에서 더 이상 신화를 창출하지 못하는 미국의 이미지를 개탄하기까지 한다.
본래 포스트모더니즘이 프랑스의 포스트구조주의를 미술계의 복식으로 우스꽝스럽게 갈아 입힌 애매한 논의였고 포스트모더니즘에 찬동하는 친미 성향의 프랑스 학자들에게 막대한 연구비를 제공하며 그럴듯한 마법적 언어를 수입한 것이었으니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안도의 한숨도 나온다. 새로운 가치와 신화 창출이 이어지기까지 동아시아, 중남미, 중동 작가의 소개 전시회나 서구권의 특정 스타 개인전으로 당분간 미술관의 일정을 채울 것이라 예상된다. 이러한 시기의 ‘(불)가능한 풍경’이라는 이름은 새해 벽두에 아시아의 대표적 공간으로 자리잡아가는 플라토에서 내놓은 전시라서 몹시도 기대되고 흥분되었다.
첫 번째, 제목부터 마음에 절절이 와 닿는다. ‘(불)가능한 풍경’이 그것이다. 제목만으로도 풍경과 주관의 의식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과 화해를 현대 한국의 대가들이 어떻게 고민했는지 보여주는 기획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을 수치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화면 안에 정확히 재현시키는 방법은 화면을 단순히 캔버스라는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신화적 내용이나 성서의 내용을 담았더라도 객관적 규칙 내에서 인간화하였다는 점에서 재현에 그치는 감이 있다. 19세기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Jose de Goya y Lucientes, 1746-1828)에 이르러 심상과 내면의 괴물이 객관적 자연과 풍경을 내면화시켰다. 그것이 최초의 현대적 징후였다. 동양에서는 이사훈, 이성, 곽희, 범관, 장택단, 미불, 동원, 오진, 예찬, 동기창으로 이어지며 안견, 강희안, 정선, 심사정, 김정희, 장승업, 변관식, 김은호, 허련으로 이어지는 정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능한 풍경으로 불가능한 풍경을 이루려던 맛과 멋이며 가능태로 불가능의 사유의 경계까지 다다르려는 경지추구였다. 단순한 재현은 아시아 미술에서 장택단의 ‘소상팔경도’로 족하다. 풍경을 논하는 산수화는 단순한 재현을 초월해서 인식과 내면의 덕성을 수련하려던 인격도야의 광대무한한 길이었다.
이번 메가급 전시에서 빛나는 전 스탭의 노력은 동양적 인식론의 중요성에서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풍경을 이렇게 논한다면 충분히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으로 하여금 현대미술이라는 장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풍경이라는 키워드로 알아가게 하려는 배려는 상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가장 좋은 글이란 어린 학동이 보아 어렵지 않으면서도 대학자가 보아도 유치하지 않은 글이라고 했다. 전시를 보는 어린 학생들의 활기와 성찰의 자세로 음미하던 전문인들의 열의가 눈에 선하다.
이번에 참여한 작가들은 각 장르에서 거의 정점에 이르거나 세계적 명성을 확보한 분들이었다. 회화, 장소특정적 설치의 강렬한 콘트라스트나 사실회화와 사운드 설치의 조화, 개념적 미술과 정서적 미술의 화합, 신구의 조화 등 만점의 즐거움이 있었다.
공성훈, 이불, 정서영, 김소라, 이세현, 김홍주, 문범 등 평소에 좋아하고 아끼는 작가들의 대거 참여해서 더욱 좋았지만 그래서 말을 함부로 발설하기 곤란하기까지 하다.
이불_ 나의 거대서사 - 바위에 흐느끼다..._ polyurethane, foamex, synthetic clay, stainless-steel, aluminum rods, acrylic panels, wood sheets, acrylic paint, varnish, electrical wire and lighting_ 280 × 440 × 300cm_ Collection HITEJINRO CO. LTD_ 2005
이번에 특히 인상적인 작품은 단연코 이불의 ‘거대 서사’ 시리즈였다. 선생의 근래 작업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듯 한데 호불호를 떠나서 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너무도 기쁜 마음이다. 나는 이 ‘거대 서사’를 볼 때마다 논어 ‘옹야’편의 저 유명한 “문질빈빈”의 원전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타고난 야성을 배워서 익힌 문화가 이기면 재수가 없고 타고난 야성이 너무도 격렬해서 배운 문화를 앞지르면 동물처럼 야하다는 뜻이다. 여태껏 한국의 작가들은 타고난 야성으로 승부해왔다. 소위 “세다”라는 인식으로 미술가를 바라봐왔다. 시대를 관통하는 내밀한 역사적 추진력이 내재한다는 관점의 네러티브론은 위험하지만 세계를 인식하고 성찰하는 더 할 나위 없이 깊은 방법이다. 서구 제국주의의 압제의 고통부터 앞으로의 희망의 예시, 과학기술과 인문정신의 조화를 동시에 구축시킨 작품임에 틀림없다. 선생의 문(文)과 질(質)이 대등해지는 느낌이다.
김홍주_ 무제_1994
또 김홍주의 서예를 연상시키는 과거작을 다시 보게 되어서 반가웠다. 나는 그것이 봄철의 밭고랑을 재현시킨 작품인 줄 몰랐다. 그제서야 작가의 치밀함과 감수성에 탄복하고 말았다. 나도 언젠가 시골의 봄날 소와 인간이 갈아놓은 밭과 논의 동선을 기묘한 선 드로잉이라고 느꼈던 기억이 있다. 인간의 생존조건에서 고도의 문화적 경지를 읽는 작가의 마음으로 해석하고 스스로 감동했다.
공성훈_ 모닥불_ oil on canvas_ 181.8 x 227.3 cm_ 2010
풍경의 격정과 마음상태의 격정이 일치되는 경험을 일생을 통해서 한 두 번쯤은 겪었을 것이다. 공성훈 작가는 본래 물의 작가이자 격정의 풍경 작가였다. 거센 화필의 속도는 마음의 상태를 보는 것 같고 우리의 거주지를 성난 외부의 생명체처럼 느끼게 해준 작가였다. 이번에도 그 스산함은 죽지 않았다.
정서영_눈덩이_ resin, acrylic_ 100 cm round each_ 2011
눈덩이의 역사는 어느 정도일까? 아마도 눈이 내린다는 사실을 인간이 인식하고부터 눈덩이를 뭉쳤을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농번기가 끝난 농한기의 사람들의 여유로운 유희이다. 극지방 사람들의 가혹한 처지에서 눈은 투쟁조건일 뿐이며 유목으로 방랑하는 민족은 눈덩이를 뭉칠 여유가 없다. 그것은 내년에 또 다른 생명의 순환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의 산물이다. 눈덩이는 따라서 문명의 활황지대(活況地帶)의 현상이다. 작업실 근처, 가벼운 산책에서 얻은 영감으로 예술의 본의를 묻는 정서영 작가에게서 분명한 내공의 드라마를 느꼈다.
이세현_비트윈 레드-141_oil on linen_ 300 x 300cm_ 2012
이 하얀 성찰의 개념체로부터 붉은 산하의 뜨거운 성장통이 전시장의 콘트라스트를 극화시킨다. 이 아프고도 아름다운 우리의 역사체는 또 다른 차원으로 보는 이를 승계시킨다. 이세현의 그림은 아파하면서 이 대지를 떠난 모든 이에게 바치는 대속(代贖)의 레퀴엠(requiem)이다.
이번 전시는 최고의 작가들로 대중과 안목이 성숙한 사람들을 동시에 즐겁게 해준 더 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현재 유럽의 미술관은 ‘에로스’의 상승의지, ‘아게페’의 보편적 확산 의지라는 구분법으로 이원론적 대중 전시를 많이 하는 편이다. 풍경이라는 사유와 인격방법으로서 일원화되는 동양적 사유에 가까웠던 바 많은 여운을 남긴 전시였다고 긍정하고 또 긍정한다.
이진명-독립 큐레이터
http://www.theartro.kr/arttalk/arttalk.asp?idx=35
http://www.theartro.kr/arttalk/arttalk.asp?idx=35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