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화제전 '이 유쾌한씨를 보라'의 작가 주재환씨를 만났다. 작업을 시작한지 40년만에. 그리고 나이 회갑에 비로소 첫 개인전을 열었지만 그는 늦깎이 작가도 기인도 아니다. 80년대 민중미술을 주도한 민족미술협의회의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던 그는 쉼없이 작품을 생산했으며, 우리 미술을 이해하는 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작가다. 80년 당시 잘나가던 예술가들을 '씹어버리' 사건에서, 지금 폐품을 소재로 선보이고
있는 '전원 미술'에 이르기까지 그의 풍자와 독설은 여전히 프루고 날카롭다.
혹시 유화 물감으로 알 수 없는 무늬를 반복해서 그려놓은 그림 앞에서 당황한 적은 없으신지. 속으론 ‘딱 벽지나 하면 되겠다’ 싶으면서도 그 말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는 게 보통의 우리들이다.
한 술 더 떠서 작가와 미술평론가라는 사람이 ‘존재와 죽음에 대한 성찰’ 운운하면 내 무식을 탓할 수밖에.
이처럼 보통 사람들의 눈에 벽지와 다름없어 보이는 추상화만이 ‘고귀한 미술’로 존경받고 있던 시절, 감히 그 천박함을 신랄하게 폭로한 작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주재환씨(61)다.
“그때 심술 좀 부린 거지, 뭐. 그런 그림들이 못마땅했던 거지.
그래도 대놓고 항의한 사람은 없었어. 그때나 지금이나 미술계는 조용하잖아."
첫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아트선재센터에서 만난 주재환씨는 20년 전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 듯 허허 웃었다.
‘유쾌한씨’(그룹 삐삐밴드의 노래 ‘유쾌한씨의 껌씹는 법’에서 따옴)란 이름이 썩 잘 지어졌다는 느낌이다.
60, 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선 작가들도 그림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다 보니 작가들은 자신의 내부로 눈을 돌렸고 그림은 가능한 한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마침 그때 서구로부터 모더니즘이란 사조가 수입됐다.
한국과 서구에서 모더니즘의 출발은 전혀 달랐지만 미술이 어떤 의미도 갖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선 군사정부의 입맛에 딱 맞았다.
더구나 외국에서 유행하는 모더니즘을
따르는 작가들은 뭔가 고상해보였고 추상화의
그림값도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미술을 점점 더 이해할 수 없게 됐고 미술은 작가와 일부 돈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래되는 수집품이 돼버렸다.
미술계 내부에서 ‘이래선 안되겠다’는 반성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말에 이르러서였다.
주씨가 80년에 발표한 펜화 <태풍 아방가르드호의 시말>은 벽지 그림을 그리며 자기 만족에 빠져있던 제도권 모더니즘에 대한 첫 번째 경고였던 셈이다.
“현실에 주목하자는 거였지.
미술이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거였고.
그게 80년 <현실과 발언>이 시작된 이유이기도 하지.
아마 문학판의 <창작과 비평>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거야.
<창작과 비평> <현실과 발언>, 글자수가 같잖아."
그는 당시 작가가 아니라 <미술과 생활>이란 잡지사 기자였다.
<미술과 생활>은 최근 광주 비엔날레총감독으로 선임된 성완경 교수(인하대)가 편집위원을 맡았던 미술전문지였다.
“뭐, 무자격
기자였지.
사무실이 관철동에 있어서 교통이 편하니까 작가들이랑 평론가들이 많이 드나들었어. 그들과 어울려 술 마시다 ‘현실과 발언’ 그룹에 끼게 된 거야.
‘현실과 발언’이 창립전을 한다기에 작품을 내야 했고.
그때 낸 것이 <태풍 아방가르드호의 시말>
<몬드리안 호텔> 이지."
<몬드리안 호텔>은 몬드리안의
차가운 추상화를 여관방으로 바꾸고 그 안에서 섹스하고,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사람들의 살아있는 삶을 그려넣은 것. 지금도 그림 앞에 서면 미소를 짓게 되는 작품이다.
제도권 작가들에게 ‘심술’ 부리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가 ‘뭔가 그로테스크한 삶’을 살게 된 건 격동의 한국 현대사
덕분인 듯하다. 집에서 창씨개명해 준 이름으로 중학교에 다니다 해방을 맞았으며 전쟁통에 피란을 다녔는가 하면 홍익대 서양화과 1학년이던 1960년
4·19가 일어났다. 그는 4·19 혁명이 일어나던 해 ‘객기와 생활고’로 학교를 그만뒀다.
“어릴 때라서 학교에 대한 아쉬움 같은 건 없었어. 생계를 위해 직업전선에 나섰는데 학력도 없고 배경도 없으니 발가벗고 뛸 수밖에. 그런 일이 오래 갈 리도 없고. 그래서 이런저런 일을 다해봤지."
행상, 방범대원에 외판 영업사원을 하는가 하면 아이스크림도 팔고 ‘오뎅’도 만들어 팔았다. 그의 작품에 동원된 온갖 잡동사니들, 쇼핑백, 비닐끈, 단추, 씹던 껌, 약봉지 등등에서 삶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도 그의 과거에서 연유한 듯 싶다. 미술대학을 그만두고 돈벌이에 나섰기 때문에 작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지만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던 것 같다.
“73년쯤 됐을 거야. 그땐 모두 다 어려웠기 때문에 아프리카 기근 지역인 비아프라의 이름을 따서 ‘비아프라
시대’라고 부르지. 그 ‘비아프라 시대’에 갑자기 작품을 하고 싶은 거야. 그래서 고등학교 동창생 10여명에게 미리 ‘작품값’을 걷었어.
그래 몇십만원쯤 모은 걸 가지고 청계천 헌 책방을 뒤졌지. 잡지 사진들을 오려붙여 ‘사진콜라주’를 만든 거야. 그때 광화문에 주점들이 많았는데, 거기 ‘쪽샘’이라는 주점에 그걸 걸어놓고 개인전이라고 했어. 그림 보면서 친구들이랑 술 마신 거야.
어쨌든 돈 낸 친구들에게 그림 하나씩 나눠줬지."
아쉽게도 그의 첫 번째 ‘쪽샘’ 전시작을 볼 수는 없다.
이번 개인전을 앞두고 당시 그림을 가져갔던 동창들을 수소문했지만 술값 대신 받은
작품을 보관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초기작도 대부분 원본이 분실돼 복사작품이 걸려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미술책에 도록으로 자주 실리는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는 “뺑끼로 그린 건데 이사하다가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주재환씨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 후배작가 고승욱씨가 인터뷰 장면을 촬영하다 “누가 횡재했겠네요” 하자 주씨는 “인마, 그런 걸 누가 갖고 있겠냐”라고 한다.
미술에 대한 엄숙주의, 혹은 상품으로서의 미술에 대한 개념을 그에게선 도통 찾아볼 수가 없다.
80년 ‘현실과 발언’ 전 이후 각종 단체전에 그는 당일치기 작전으로 작품을 만들어냈다. 한국자수박물관 연구원, 도서출판 미진사 주간 등 월급쟁이 생활을 하면서 전시가 있으면 잠깐 작품 제작에 매달리는 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도시와 시각전’, 고 박종철 열사를 추도하는 ‘반고문전’,
‘현발 10년전’ 등 굵직굵직한 전시에 작품을 내왔다. 처음부터 현실참여적인 성향을 보인 그는 85년 민중미술운동의 중심축이 된 민족미술협의회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했고 87, 88년 이 단체의 공동대표로 미술운동의 맏형 노릇을 해냈다.
“그땐 매일 성명서 내고 시위하는 게 일이었는데, 그때 손장섭이 최루탄을 맞아 손에 박혔어. 그걸 수술해서 뺐는데 장섭이가 병실에서도 그림을 그리더라고. 시절도 지독하고 장섭이도 지독했지. 그때 비하면 지금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민주주의라는 큰 이상을 향한 발전은 1백년 단위로 봐야지, 짧은 시간에 이뤄지는 건 아닌 것 같아."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가 80년대 내내 민중미술운동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흔히 시위현장의 걸개그림으로 기억하는 ‘무섭고’ 끔찍할 만큼 리얼한 민중미술의 대표작에 그의 그림은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87년 그가 발표한 <미제껌
송가>는 자그마한 성조기에 노란색 주시후레시 껌종이와 씹던 껌을 붙인
작품으로 유머와 위트가 넘친다. 당시 민중미술작품에 비하면 좀 ‘튄다’고나 할까.
“맞아, 맞아. 좀 튀었지. 그때도 지금 작품과 비슷했으니 민중미술계에서 비주류라고나 할까. 민미협 대표까지 했는데 내 그림은 민중미술의 대표작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니 내가
생각해도 참 웃기지."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젊은 작가들은 한국 미술사에서 그를 다시 발견하게 됐다.
그가 작품을 시작한 지 40년이 다 돼서야 비평가들이 그를 알아보고 ‘민중미술과 한국 모더니즘의
핵심에 닿아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2, 3년 전부터 포럼 에이라는 젊은 평론가와 작가 그룹에서 내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쪽과 교분이
있는 김선정씨(아트선재 부관장)가 작년부터 개인전을
한번 하자고 하더군. 그래서 1년 넘게 준비를 했고 작품 설치도 후배 평론가들과 작가들이 와서 밤새 상의하며 직접 했어. 내가 했으면 일렬횡대로 했을 텐데, 후배들이 아래에도 걸고 위에도 걸어 준 거야. 너무 고맙지. 무명화가를 주목해주고 이렇게 좋은 공간에서 전시를 마련해줘서. 내가 이렇게 큰 데서 전시하게 될 줄 알았나."
개인전을 위해 그는 지난 1년 동안 요절한 작가 오윤이 살았던 벽제의 농가에 세를 들어 준비를 해왔다. 여름이면 모기와 빈 소주병이 아주 많던 집. 그는 돈이 필요해서 일산의 살림집으로 다시 들어갔다고 한다.
“일산이 신도시라 정비가 안됐기 때문에 쓰레기나 분리수거물건들이 많이 나와. 거기 뒤지면서 작품에 필요한 소재들을 찾아내지.아침에 동네 한바퀴 돌면서 줍기도 하고. 폐품으로 작업하니까 한계가 있기는 해. 필요한 걸 바로바로 주울 수는 없으니까. 돈 주고 사는 건 테이프, 풀, 색종이 정도. 그래서 내 미술이 ‘천원 미술’이야."
그의 ‘천원 미술’ 중 하나인 <칼 막스>는 작은 액자에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원서와 플라스틱 바나나가 붙여진
그림이다.
“누가 분리수거하는데 <자본론>을
버렸더라고. 이제 <자본론> 같은 건 읽지 않는 시대가 된
거지. 바나나는 먹고싶으면 먹는 기호식품 같은 것인데, 말하자면 이데올로기가 바나나 비슷하게 돼버렸다는 의미지."
그의 작품은 미술 용어로 말하면 ‘혼합매체’지만 영락없이 폐품과 잡동사니 모음이다. 쇼핑백, 박스, 전단지, 약봉지, 장난감, 교과서, 버린 액자 등을 모아두었다가 자르고 붙여서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그를 보노라면 사전속에서 필요한 단어를 하나씩 찾아내는 시인이
떠오른다. 그러나 물건을 줍지 못한다고 이 유쾌한씨의 상상력이 제한받는 법은 없다. 써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중에는 펜으로 ‘내 돈’이란 글자를 가득 쓰고 <내돈>이라고 한 것도 있고 ‘하’‘하’‘하’란 글자를 캔버스 가득 쓰고 <웃음소리>란 제목을 달아놓은 작품도 있다. 그래서인지 언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그의 작품은 때로 한편의 소설이나 시처럼 감상되기도 한다.
<일기>란 그의
작품 아래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이 그림이 완성되면 그림 판 돈으로 세계 명승지 유람이나 해야지 하는데 갑자기
파리 한 마리가 나타나 여기에다 똥을 누지 않겠어.
얼떨결에 쓰레빠를 벗어 쥐고 냅다 후려쳤으나 녀석은 잽싸게 토껴버렸어.'
행상, 방범대원, 오뎅장수를 거쳐 대표적인
민중미술 작가로
글을 읽고 나면 그림 하단의 ‘쓰레빠 자국’의 정체가 드러나고 어쩐지 파리의 잔해도 보일 것 같다. 가난한 작가의 삶이 이처럼 리얼하게 전달되기도 힘들겠거니와 더 중요한 것은 끝내 그가 웃음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자장면 배달>이라는 유화는 자전거 바퀴 위로 뭔가 불길한 공기가 스쳐가는 듯한 그림인데 제목을 읽고 나면 그 상황의 절묘한 표현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주재환씨가 유쾌하게 자기 세계를 지켜온 데는 부인 성금자씨의 후원이 절대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정기적 수입없이 깡으로 버티는” 주재환씨 대신 집에서 아이들을 모아 미술을 가르치며 살림을 맡아온
부인 주씨는 동료로 주씨의 작업을 돕고 있기도 하다.
홍익대 미술대학 10년 후배로 역시 작가이기도 한 부인 성금자씨와는
<미술과 생활> 잡지사 시절 만나 주씨 나이 마흔 되던
해 결혼했다. 성씨는 앞서 말한 성완경 교수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성완경 교수가 우리 결혼에 결사반대는 못했던 거 같고, 밀어줬겠지(웃음). 부부란 인연이 억지로 되는 게 아니라서 지나고 나면 참 신기한 거다
싶어."
올해 대학입시를 치른 큰아들과 고2인 둘째 아들이 있는데 둘째가 미술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의 전시작 중 <전쟁교본>이 둘째 아들이 갖고 놀던 장난감을 모아 만든 것이라고.
“가끔 전시장에 가보면 과소비 작품이 많은 것 같아. 액자도 그렇고 기계도 상상을 불허할 만큼 엄청난 것들이 있더군. 문제는 그게 필연성이 있는가 하는 거야. 젊은 작가들이 돈이 많아서 그렇게 하겠어? 부모님 돈 받아서 하는 거잖아. 그저 과시욕 같아. 미술계도 쓰레기 문제 좀 생각해야 해."
그는 말 끝에 “나는 간단해.그냥 쌓아놓으면 되거든. 기분 나쁘면 좀 버리면 되고”라며 또 허허 웃는다.
그는 한 공모전 심사위원으로 가서 출품작가에게 전시 끝나면 이 작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먼저 물었다고 했다. 물론 작가는 얼굴만 붉혔을 뿐이다.
“예술이란 게 착한 마음을 추구하는 건데, 자기 작품을 왕이라고 생각하니까 예술하는 것이라도, 과하면 독재가 되는 거야. 작가들도 환경에 대해 생각을 해야지. 먼저 교수들이 그런 걸 좀 가르쳐야 해."
언젠가 한번 인사동의 자그마한 화랑에서 전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는 그는 첫
번째 전시장이 생각보다 너무 넓은 곳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작품생활 40년을 정리하는 1백30점의 작품이 놓여진 전시장은 전혀 넓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주책이 없는 거지. 첫 전시에 이렇게 많이 쏟아냈으니…."
작가 주재환에 대한 명성을 듣고 아트선재미술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혹 ‘이게 뭐야’ 소리가 먼저 나올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천원 미술’이라면 미술 작품의 가치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묻는 데서 우리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가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씨는 “‘천원 미술’이라고 소문이 나서 컬렉터들이 천원짜리 들고 오면 어쩌나”하며
또 웃는다. 그런 주씨에게 시인 박시교씨가 전시장에 이런 시를 남겼다.
‘…(중략)단언컨대 이 세상에 유쾌한씨는
없다/ (중략)…회갑에 겨우 철이 나서 첫 개인전 열며 폐품만 잔뜩 모아 붙이고 쓰잘 데 없이 대문짝만한
홋수로 만용을 부린 ‘夢設夢設掛圖’ 앞에서 또는 60년대식 싸구려 여인숙 천장에나 매달려 있음직한
30촉짜리 백열등이 대롱거리는 ‘몽드리안 호텔’앞에서 아, 나는 분명히 말하건대 유쾌한씨는 없다, 씨발/ 周大兄, 제발 좀 삽시다/이 환장하게 푸르른 날’ 1월21일까지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
가면 이 유쾌한씨를 만날 수 있다.
| ||
■여성동아, 김민경 기자
■ 2001.1
Seoul
http://www.donga.com/docs/magazine/woman_donga/200101/people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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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에 첫 개인전 연 작가 주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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