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6일 - 5월 5일
인사미술공간 Insa Art Space
기획: 이한범
리서치: 권태현, 이민주
그래픽 디자인: 신신
공간 디자인: 김동희, 박준영
인사미술공간 Insa Art Space
기획: 이한범
리서치: 권태현, 이민주
그래픽 디자인: 신신
공간 디자인: 김동희, 박준영
예술가는 왜 출판을 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여기서 출판이란 단지 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콘텐츠를 드러내고 유통시키기 위해 또 다른 시공간을 만드는 행위와 관련된 총체적인 선택을 이른다. 그리하여 출판물은 콘텐츠에 대한 하나의 특수한 경험 양식으로 기능하는 사물이며, 당대의 기술, 문화, 사회적인 조건에 대한 반응을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형식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술가들이 출판을 통해 그 조건을 어떻게 넘어서려 했는가를 질문하는 일일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아티스트 퍼블리싱과 능동적 아카이브(Active Archive for Artist’s Publishing)> 프로젝트는 한국의 동시대 예술가들이 다루는 미학적이고 실천적인 매체로서의 출판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시작과 함께하는 이번 전시 《픽션-툴》은 예술가들이 글을 쓰고, 인쇄를 하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잡지를 발행하고, 심지어 스스로 출판사가 되는 행위의 근본적인 의지가 바로 현실과 현실의 바깥을 가로지르는 픽션을 사유하기 위한, 혹은 획득하기 위한 것이라는 관점을 제안한다. 즉, 예술가들에게 출판은 저마다의 픽션을 위한 도구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출판은 미술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나, 분명 수많은 예술가들이 출판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특히 한국의 미술사에서 출판이 중요한 예술적 매체로 탐구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이후였다는 점에서 그것은 동시대 미술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 중 하나가 된다. 이 전시는 예술가의 출판을 새삼스레 특권화시키려 한다기 보다는 개별적인 실천을 발견하고, 분류하고, 엮어 내어 역사적으로 이해해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아티스트 퍼블리싱과 능동적 아카이브> 프로젝트는 무언가를 제작하고 시험해본 수많은 노력들에 빚지고 있으며, 그것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경유하고자 한다.
리서치의 결과가 목록으로 정리된 웹 아카이브 페이지가 만들어지며, 이 목록 중 250여점의 출판물을 전시장에서 볼 수 있다. 전시 중에도 리서치는 계속 진행되어 웹과 전시장에 시차를 두고 결과물이 추가될 것이다. 전시가 종료된 이후에는 웹 페이지만 유지된다. 이 아카이브의 전제는 존재했던 모든 출판물을 포함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완전한 목록을 만드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 그보다는 역사적 내러티브를 끊임없이 재조정하는 데에 소요될 수 있는 잠재적(사실적) 재료의 집합으로 기능할 것이다. 즉 이 아카이브의 재료는 고유하지 않지만 아카이브 자체는 언제나 고유한 것으로 작동할 개연성을 지니며, 퀑텡 메이야수의 표현을 빌자면 “권리상(en droit) 예측 불가능하고 모델화할 수 없는 궤적”을 그리는 장치가 되기를 상상한다.
한편 이 아카이브는 언제든 그 규칙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불안요소를 포함한다. 예술가의 출판물이라는 집합을 어떠한 방식으로도 완벽히 분류하기 힘들다는 특성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그 도구적 용법에 따라 5개의 카테고리로 나뉘어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임의적인 구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아카이브의 재료들은 끊임없이 아카이브를 의심할 것이고, 벗어나려 할 것이다. 비물질적인 것을 재현하기 위해 fldjf studio라는 대리인을 통해 출판의 매체를 사용할 수밖에 없지만 그 또한 독자적인 서사와 규칙 안에서만 유지되는 박보마의 작업, 그리고 어딘가에 기생하면서 작동하는 민구홍매뉴팩처링의 신제품 등 전시장에서의 두 커미션 작업은 이를 잘 보여줄 것이다.
또한 《픽션-툴》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중요하게 마련되었다. 다섯 번의 토크와 한번의 워크숍은 개별의 사례에 대한 더욱 미시적인 논의를 이끌 것이며, 미술과 출판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아카이브 혹은 전시와 겹쳐지고 어긋나는 관점을 환기시킬 것이다.
Photos via instagram
'예술가의 출판'이 이 시대 미술을 바라보는 방법
‘나무가 되는 법’, ‘문이 되는 법’ 김범 작가가 1996년 출간한 ‘변신술’에는 이렇듯 각 페이지마다 무언가로 변신하는 방법에 대한 작가의 비법이 담겨있다. 내용도 신선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점은 책이 구성된 방식이다. 책장을 앞에서부터 넘기면 국어와 영어로 진행되지만 뒤에서부터 읽으면 일본어와 중국어 책이 된다. 각 언어는 점차 섞이다 결국 가운데 지점에서 마주치게 된다.
서울 종로의 인사문화공간에서 다음 달 5일까지 열리는 ‘픽션-툴: 아티스트 퍼블리싱과 능동적 아카이브’ 전은 책의 물성에 참신하게 접근한 김범 작가의 변신술에서 착안해 기획됐다. 전시를 기획한 이한범 큐레이터는 “이 책은 김범 작가의 다른 전반적인 미술 작업과 비슷한 전략을 사용했다. 그런데도 책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다른 이들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예술가의 출판’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 3개층으로 이뤄진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작품은 단연 ‘책’이다. 허구적 세계를 구축하는 도구로서의 출판물을 경유해 동시대 미술을 바라보려는 의도다.
전시의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공간은 지하 1층이다.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지하층 전시장은 좌측의 ‘책을 통해 정보 등을 보여주는 작업’과 우측의 ‘책을 경험하는 것 자체로 종결되는 작업’ 등 두 가지 카테고리로 구성돼 있다. 좌측 카테고리에서 출판은 완전한 허구를 구성하기보다는 일정한 현실에 대한 매개적 역할을 수행한다. 세 개의 책자가 만들어지고 그와 연동되는 영상, 회화 등이 함께 전시되는 임영주 작가의 ‘돌과 요정’ 프로젝트가 단적인 사례다.
2층 전시장은 콜렉티브, 잡지, 퍼블리셔 등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돼 있다. 콜렉티브는 2000년대 이후 활동해오며 주로 도시사회와 정치 문제에 반응하는 미술 집단을 의미한다. 콜렉티브 섹션은 이들이 사회정치적 문제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나온 시각 인쇄물이 전시돼 있다. 이 큐레이터는 “현실을 재현하는 전략으로서 출판이 얼마나 중요한 도구인지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덧붙였다.
아예 출판물을 만든 콜렉티브도 있다. 두 번째 섹션은 출판이라는 행위 그 자체를 예술적 실천의 한 가능성으로 여긴 결과물을 모아 구성했다. 퍼블리셔 섹션에서는 ‘AC퍼블리싱’의 작업을 만나볼 수 있다. 직접 인쇄기까지 구입해 출판을 고민했던 이들은 콘텐츠보다 책이 만들어지는 제작의 문제에 특히 몰입했다.
마지막으로 잡지 섹션에는 인사미술공간에서 10호까지 출간된 시각예술비평지 ‘볼(BOL)’이 소개된다. 2000년대 초 기관이나 단체를 중심으로 작가들이 모여 잡지를 만들고자 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포럼A’도 진열돼 있다. 잡지는 이를 정기적으로 만드는 네트워크와 받아보는 네트워크를 일시적 공동체로 만드는 매체라는 설명이다.
1층 전시장에 설치된 큰 TV 화면은 이번 전시가 프로젝트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화면에는 예술가들이 만든 출판물의 사진과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된다. 이 큐레이터는 “이번 프로젝트는 전시 조직에 더해 아카이브를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며 “미술에서의 출판이 도록뿐 아니라 다양한 방식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약 250개 리서치 결과물 가운데 현재까지 80개 가량이 업데이트된 상태다. 아카이브 목록이 완성되면 앞으로 ‘2000년대의 웹 작업’ 등 보다 구체적인 주제를 설정해 전시를 구성할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시각예술분야에 참여한 큐레이터 가운데 전시지원 대상자로 최종 선정된 이한범 큐레이터가 기획했다.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2016년부터 차세대예술가육성사업을 확대 개편하며 운영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번 전시는 아카데미의 시각예술분야 성과보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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