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협업자들’ ‘쭈뼛쭈뼛한 대화’ ‘2의 공화국.’ 작명 센스가 영화판에 버금가는 이 이름들은 한국 미술계에서 어떤 의미로든 일정한 지분을 갖는 미술기관 세 곳에서 2013년 6월과 7월 사이 개막한 기획전들의 제목이다. 먼저, 오랜 기간 주류 언론사의 사립미술관으로 역할을 해온 일민미술관은 “다양한 협업체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동시대 미술 창작 환경 중 “저자성의 영역을 새로이 질문하고자” <탁월한 협업자들>을 기획했다고 한다. 다음, 아마도 자타 공히 90년대 말 이후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선구안적인 시각예술을 선보여왔다고 인정할만한 아트선재센터가 외부기획전 공모사업(“오픈 콜”)을 통해 두 번째로 선정한 전시가 <쭈뼛쭈뼛한 대화>다. 당선된 기획자의 말을 인용하면, 이 기획의 목적은 “시대와 역사, 예술과 삶에 대해서 타인이나 사회와 소통하는 데 몰두했던” 젊은 작가들이 “그 소통의 대상에서 누락시켰던 부모들과 예술로써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럼 세 번째 <2 span="">의 공화국>은 어떤 전시인가? 이에 대해서는 우선 작년부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이 “시각문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전시”를 대외 공모를 통해 선발 지원해왔으며, <2 span="">의 공화국>은 올해 사업으로 선정된 전시라는 사실이 전제된다. 기획의 변을 참조하건대 이 전시는 “시각예술 전반에서 흥미로운 협업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는 2인 체제에 주목하고, 이들의 창작방식을 통해 그 내밀한 과정을 조명”한다는 방향이 심사과정 중 크게 어필했을 것이다.2>2>
자, 이렇게 관련 배경과 정보만 소개하는 데도 한참 걸린 이 세 개의 전시를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는 왜 셋을 같이 놓고 봐야 하는가? 별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세 기획전이 각자의 조건과 맥락으로 만들어졌다고는 해도, 하나같이 미술(작품)의 내용(미학)이 아니라 미술(행위)의 구조(비평)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풀어 말해서 이 기획전들은 ‘우리는 이러저러한 작가의 작품으로 이렇고 저런 미술을 보여준다.’ 같은 전시의 일반 문법을 지나친다. 대신 ‘현재 우리가 주목하는 어떤 미술의 이러저러한 상황에서는 이렇고 저런 일들이 실행되고 있는데, 그 상황 및 실행은 이제까지 미술을 구성해왔던 것들과 구조적으로 다르다. 그 차이의 논리가 전시 의의다’ 식으로 각자를 내세운다. 이 후자의 입장에서 강조하려는 동시대 미술의 현상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창작의 단독 주체로서 작가의 해체. 둘째, 작품이라는 독립적이고 배타적인 범주의 흐트러짐. 셋째, 미적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작업 과정 중 관계 맺기로 미술의 관심이 이동함이다. 전시를 기획한 측의 의도, 그런 기획을 채택한 미술기관의 예술정책 방향, 그리고 막상 뚜껑이 열린 세 기획전의 양상을 종합해보건대 아마도 이들은 그 같은 동시대 미술 현상을 ‘최첨단(cutting-edge) 미술의 지표’로 간주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가장 실험적이고 진보적이며 의미의 최전선에 선 미술이라고 말이다. 충분히 가능한 생각이다.
헌데 그렇다면 기획 주체가 아니라 감상자인 우리에게는 무엇이 두드러져 보이는가? 먼저, 비슷한 시기 동시다발적으로 그 같은 전시들이 입안 및 실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국내외 현대미술 담론과 실천의 한 경향내지는 유행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유행 경향을 특정화하는/따르는 한국 현대미술 기획의 현재 수준에 대해 우리가 아직 후한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이는 기획안에 담긴 시도(본질적으로 잠재적이고 미완인 그것)의 가치가 이를테면 낡고 통념이 된 미술로부터 탈주하는 어떤 미술(급진적으로는 미술이라는 이름을 벗어나도 좋은 것)로 미처 현실화되지 못한 채 전시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낯설면서 친숙한 이들
일민미술관의 <탁월한 협업자들> 기획에서 무엇보다 주목할 만하고 높게 평가할 부분은 명명하자면 ‘뒤집기 전시공학’이다. 작가의 주인공 자리를 뒤집어 그 자리에 작품 제작 배후의 협력자들 세우기. 하나의 미술작품을 뒤집어 그 안에 요소로 짜여 들어갔던 안무, 음악, 사운드, 디자인, 영상, 건축, 퍼포먼스 등을 단독화하기. 관행상 작품이라는 파사드 뒤에서 작가가 조명 받는 미술관을 뒤집어 다수의 익명적 창작자가 유동하는 멀티플렉스로 변형하기가 그것이다. 비유컨대 양말에 손을 넣어 쑥하고 일거에 뒤집듯 미술관측은 그런 기획의 테크닉으로 미술중심주의(art centrism)를 탈주하려 했다. 해서 ‘미술 감상자(혹은 미술계 종사자들)’ 입장에서는 김범, 임민욱, 김성환, 이주요, 서도호 등 현재 한국의 중요 현대 미술가로 익히 알려진 이들의 작품을, 시점을 바꿔, 그보다는 상대적으로 낯설고 예술적 이력을 잘 모르는 이들의 다른 장르 작품으로 재조정해보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된다. 예컨대 임민욱의 <포터블 키퍼>는 2010년 작가의 개인전을 비롯하여 여러 전시를 통해 알려진 싱글 채널 비디오다. 하지만 <탁월한 협업자들>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비디오 속 퍼포머 권병준의 행위예술로 바라볼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2010년 미디어시티 서울전에 나왔던 이주요의 <한강에 누워> 설치작품은 뮤지션 데이비드 디그레고리오의 작곡과 노래로 다시 이미지화되고, 서도호의 <함녕전 프로젝트>는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덕수궁 프로젝트>의 커미션 설치작품에서 안무가 정영두의 무보(舞譜) 예술로 안팎 또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바뀌어 제시되는 양상이다. 이렇듯 헤게모니 관계의 전도 혹은 정체성의 전위가 기존 미술계, 미술작품을 기준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탁월한 협업자들>은 애초 그 전시기획의 약속을 반듯하게 지켜낸 듯 보인다. 어쨌든 ‘탁월한 협업자들’이 전시의 전면에 나서고, 그들의 ‘탁월했던 협업’이 독창적 작품으로 상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획의 약속 중 “저자성의 영역을 새로이 질문”하는 문제는 바로 그 반듯함 때문에 다시 주체로서 작가의 영토에 수렴된다. 전시장은 익명의 다원적 장으로 변모하기보다는 어느 날 미술계를 통해 ‘작가’로 호명된 이종 예술가들의 개별적 성과가 전시되는 미술관에 머문다. 미술가에서 안무가로, 뮤지션으로, 퍼포머로, 건축가로 작가의 직함만 회전문처럼 이동할 뿐 거기서 “협업체제가 형성하는 집단적 창의성”으로서 저자성(authorship)을 고려할 겨를은 없어 보인다. 때문에 감상자는 의심 없이 ‘저자성=저자’라는 순진한 도식, 속성을 곧 주체로 동일시해온(미술=화가?) 순진한 예술 관행을 그곳에서 재학습하고 있다. 또한 어느 때부턴가 ‘모든 것이 다 되는(anything goes)’ 현대의 미술관에서 여하한 경우 ‘모든 것을 미술로서’ 받아들이게 된 감상자에게 <탁월한 협업자들>은 비엔날레와 규모의 차이 말고는 큰 차별성을 찾기 힘든 전시로 비춰질 것이다. 물론 광의의 의미로 작가 정영두는 자신의 안무 노트가 개념미술작품처럼 전시되는 흥미로운 경험을 했을 것이고, 어어부 프로젝트의 장영규는 1992년부터 현재까지 작곡한 자신의 음악을 물질적 아카이브로 마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시에서 협업에 기반을 둔 미술의 저자성은 여전히 일인칭 미술 주체로 친숙하게 분리, 환원된다. 거기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미술을 기준으로 달리 볼 여타 아티스트들이지, 집단적 창의성을 근간으로 달리 볼 새로운 아트는 아니었다.
사실 1968년 저 유명한 텍스트 「저자의 죽음」에서 롤랑 바르트는 저자(작가)를 유일하고도 동일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작품의 기원이 아니라, 다중이고 지속적으로 타자에게 빚지는 글쓰기(작업)가 실행되는 다차원적 공간이라고 주장했다. 일정 시간이 흐른 후 사람들은 그 주장에서 저자의 속성을 정의한 부분, 즉 유일하고 동일하냐 아니면 다중이고 다원적이냐에 초점을 맞췄다. 해서 1990년대 초부터 문화 예술계에서는 이름 있는 한 명의 작가가 행한 창작의 산물로서 명작이라는 미학적 틀 대신, 일상의 누군가가 직물을 짜듯이 파편들을 그러모아 짜깁기한 행위의 부산물이라는 텍스트론이 만능 자처럼 작동했다. 또 선언적이고 상징적인 의미에서, 저자를 죽이고 독자(감상자)의 독재를 예술계가 대중에게 자청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헌데 최근 우리가 사회정치적 의제부터 미술관의 기획전 주제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올바른 태도로서 중시하는 덕목에 주목하건대 바르트식의 미학에서 파생되는 의미의 지점이 변화하고 있다. 요컨대 저자가 ‘인간’이 아니라 ‘집합적이고 다중 참여적인 노동/실천/즐김/행위의 장’이라는 관점이 현실이 되고 실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사고 습관이 여전히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처지에 저자를 사람이 아닌 행위가 전개되는 다차원의 공간으로 상상하고, 창작하고, 수용하고, 문화적으로 순환시키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말하자면 표현만 그럴 뿐 여전히 어떤 예술 행위의 주체로서 저자/작가를 상상하고, 그 주체들이 다수이며 그들의 활동이 다양하게 이뤄진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기획력의 좁은 고리를 이탈하기가 무척 어려운 것이다. <탁월한 협업자들>이 시도의 참신성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논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요인 또한 여기서 멀지 않아 보인다.
무조건적 관계 또는 2의 관계
스위스출신 작가 토마스 히르슈호른(Thomas Hirschhorn)은 2010년 잉크로 <평가의 공포(Spectre of Evaluation)>라는 드로잉을 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도표처럼, 세 개의 원 안에 미술계의 여러 주체들을 나눠 표기하고 화살표로 서로의 작용 양상을 나타낸 그림이어서 담고 있는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렵지 않다. 이를테면 거기서 우리는 사람들이 쉽게 떠올리고 동의할 수 있는 미술계의 일반적 구조를 보는 것이다. 가장 크고 가장 위에 그려진 원 안에는 “미술기관장, 비평가,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미술사가, 컬렉터, 교수”가 한 집합으로 묶여있고, 그 오른쪽 원에는 “타자; 비전문적 관객(THE NON-EXCLUSIVE AUDIENCE)”이 들어 있다. 마침 그 두 원은 작은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화면 맨 아래 뚝 떨어져 있는 나머지 한 원에는 “아티스트”가 써져있다. 히르슈호른은 이 드로잉으로 각 원들 속의 주체들 간 헤게모니적 관계를 논평하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미술기관장” 등이 들어있는 가장 큰 원에서 “아티스트” 원으로 향한 화살표에는 “평가”가, “아티스트”에서 “타자”로는 “작품”이, “타자”에서 “아티스트”로의 화살표에는 “판단”이 굵은 글씨로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히르슈호른은 그 삼자(三者)가 각자의 기제를 가지고 미술의 세계에서 서로에게 작용하는 양상을 “공포”라는 키워드 아래 풀이해낸 것이다.
그러나 미술사가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이 연구한 것처럼 1990년대 초부터 미술가들의 관심은 “일 대 일의 상호작용 관계에 대립해 많은 사람들의 관여를 함의하는”(Artificial Hells: Participatory art and the politics of spectatorship) 참여와 협업의 미술에 쏠리고 있다. 해서 히르슈호른의 드로잉을 걸고넘어지자면, 아티스트의 원은 이제 얼마든지 불규칙한 형태를 띨 수 있고, 그 원의 주체 또한 얼마든지 예측 불허로 구성 및 배치돼 작용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거기에 들어갈 아주 색다른 주체를 정의한 전시 사례가 있는데, 바로 작가의 부모가 협업 아티스트로 참여한 <쭈뼛 쭈뼛한 대화>가 그것이다.
제목에서부터 벌써 어색함과 거북스러움이 묻어나는 이 전시에서 핵심은 협업 또는 참여, 대화 또는 관계 맺기가 현대미술 전문가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리 호혜적이지도 공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쭈뼛 쭈뼛한 대화>는 “예술을 업으로 살고 있는 우리”와 그 우리에게 “가장 밀접한 존재인 부모”조차 여타 사회 체제속의 사람들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맞선 존재들이며, 갈등과 봉합, 경쟁과 타협, 긴장과 해소, 주장과 설득의 지난한 과정을 반복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협업과 참여의 미술에 깔린 미술 내적 전제가 유토피아적 담론임을 일깨운다. 이는 전시가 특히 부모자식의 애착관계가 깊고 오래 가는 한국의 경우, 그것도 사회 구조로나 가족 안에서나 하나의 공적 직업으로 객관화하기 무척 힘든 ‘작가’를 업으로 택한 자신들과 부모를 프로젝트의 대상이자 실행자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구민자, 박형지, 이소영 이렇게 삼십대 젊은 작가 셋과 젊은 기획자 이성휘가 각자 자신의 부모님을 “예술가로서, 협업자로서, 또는 미술재단의 이사장으로서 참여”시켜 수행한 프로젝트는 전시장을 기이한 공간으로 만든다. 비전문성과 미성숙이 서로 고만고만한 수준에서 마찰을 일으키거나, 사적으로 내밀한 취미활동 및 과거의 반추가 ‘흔한 현대미술’의 일부로 귀속되거나, 혈연관계가 입법적 관계를 모방하는 현장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화가 박형지는 은퇴 후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어머니와 ‘회화’를 공동의 화두로 삼아 진행한 프로젝트 결과물을 내놨다. 헌데 자막만 있는 비디오에서 둘의 대화는 쭈뼛거릴 뿐만 아니라, 현대회화의 미학을 옹호하는 딸이든 세속적 회화론을 펼치는 어머니든 그 어느 쪽도 상대를 설득하지 못한다. 재미있게도 그 둘이 동일한 소재를 각자의 예술관에 입각해 그린 그림은 정작 엇비슷한 차원에서 서로를 닮고 있는데도 말이다. 전시를 기이한 장으로 만드는 데 명시적으로 기여한 작업은 구민자의 경우다. 이 작가는 그간 미술 제도를 메타 비평하는 식으로 작업해온 방식을 살려 이번에는 자신의 부모를 사설 미술재단으로 제도화했다. 헌데 여기서 작가-자식에 의한 부모의 정체성 및 기능의 전도도 기이하지만, 더한 점은 그 부모가 놀라울 만큼 헌신적으로 구민자의 이 작업에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왜 이 점이 놀랍고 기이한가? 그것은 자식의 일이라면 물에도 불에도 뛰어드는 한국 부모들의 면모가 독창성을 근간에 둔 미술창작에도 유감없이 발휘되는 그 상황의 웃지 못 할 역설 때문이다. 노부모는 작가-자식을 위해 카메라 앞에서 해괴한 체조를 하고, 기묘한 공문서(재단 정관)를 작성하는 데 기꺼이 동의한다. 이는 겉으로 드러난 양태는 갈등과 반목, 마음에 들지 않음과 몰이해로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박형지, 이소영, 이성휘의 프로젝트에도 바탕에 깔려있는 부모의 아이덴티티다. 이를테면 어쨌든지 간에 내 자식이 하는 일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뭐라도 대신해주려고 하는 한국의 전형적 부모상이 미학적, 삶의 경험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작가에 협력하는 비전문적 동업자 관계를 낳은 것이다. <쭈뼛 쭈뼛한 대화>가 협업과 참여의 미술에 누구도 예상치 않은 관계를 정의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 근거는 전적으로 거기서 나왔다.
아르코의 <2 span="">의 공화국>전시가 <쭈뼛 쭈뼛한 대화>에 견줘 기획이 단순하고, 시각적으로든 의미상으로든 전시 주제에 피상적으로 접근하는 데 그쳤다는 평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무엇보다 ‘관계의 정의’에 있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이 전시는 현재 시각예술 전반에 ‘협업’이 대세임을 읽어내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정작 그 협업이라는 것이 어떤 관계에서 어떻게 벌어지는 일인지, 그것이 최근의 창작 방식이라면 무엇이 그로 인해 출현하거나 변화하는 지에 대해서는 모르쇠다. 전시는 다만 둘 이상의 사람들이 함께 패션을, 디자인 컨설팅을, 미디어 장치를, 심지어 프로젝트적 프로젝트(그러니까 프로젝트처럼 보이나 정작 프로젝트의 외부가 없는)나 공작품을 급조한 상황을 “단단한 공화(共和)적 관계와 전시라는 우발적 사건”이라는 말로 도금한다. 그럼 전시란 “우발적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 감상자는 종이학을 접어 박스 위에 늘어놓는 순진성 또는 방만함에서도 “단단한 공화적 관계”를 상상해내야 할까? 아니, 실제 전시를 보건대 그런 관계는 기획자들의 상상 내에만 있다. <2 span="">의 공화국>에서 ‘2’는 둘, 짝, 파트너, 집합 등이 만들어내는 어떤 관계 체제, 미적, 윤리적, 노동 관계적 층위를 매개하거나 형상화하는 일과는 별 관련 없이 그저 순서나 등위를 나열하는 아라비아 숫자 2로 보인다. 대신 전시는 최근 미술계를 떠도는 현상들, 그러니까 디자인 사무실 풍경을 닮아가는 창작방식, 작가 개인보다 더 배타적이 되어가는 미시적 창작 공동체, 사물을 기분과 형편에 따라 여기저기로 삽입시키는 태도를 추종하는 2차(secondary) 기획의 현장이다.2>2>
<쭈뼛 쭈뼛한 대화>에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인 ‘부모자식관계’ 또한 문화 예술의 맥락으로 전이되면 언제든 세컨더리 오브제가 되고 스테레오타입이 될 수 있다. 또 <탁월한 협업자들> 전시가 흥미롭게 구사한 ‘뒤집기 전시공학’은 그저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이름과 자리를 바꿔보는 시도로는 ‘저자성’이든 ‘예술’이든 그 형식과 의미의 해체/생산을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 이들 세 기획전시가 착안했듯, 현재 시각문화 현장에서는 협업을 통해, 다자적 네트워크를 통해 탈 미술(post-art)의 새로운 지도가 마련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지도는 옛 지도에서 지명이 바뀌고 위치가 서로 교환된 정도에 멈춰있다. 전시기획이 그 지도그리기의 다른 말이라면 아직은 미완의 수준에 있다는 뜻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