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서윤 기자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프랑스를 무대로 새로운 미술 언어를 실험해온 김순기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 《김순기: 게으른 구름》(2019. 8. 31~2020. 1. 27)이 진행 중이다. 전시 제목 ‘게으른 구름’은 규정된 틀에 갇히지 않고 일상을 유희하며 창조적이고 철학적인 작업을 펼쳐온 작가의 예술세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그만큼 김순기 작가의 작품은 폭넓고도 깊으며, 가벼우면서도 묵직하다. 초기 작업부터 신작 〈시간과 공간 2019〉을 아우르는 200여 점의 작품은 자연과 호흡하며 일상을 오롯이 예술로 채운 결과물들로, 동시대 미술에서 김순기 작가의 작업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여전히 달나라에 가는 것이 꿈이라 말하는, 자유롭고 경계 없는 예술가 김순기 작가를 만나보자.
그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한국미술 ’95: 질량감》(1995), 《백남준 1주기 추모전: 부퍼탈의 추억》(2007), 《한국현대미술_거대서사 Ⅱ》(2013),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30주년 특별전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2016) 등의 단체전에 참여하신 바 있지만 대규모 개인전은 처음입니다. 전시를 개최하신 소회를 여쭙고 싶습니다.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됐는데, 이번 전시가 우리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아요. 함께 전시를 준비한 큐레이터들의 실력도 좋고 합도 좋았지만, 국립기관이다 보니 행정상의 절차가 복잡하고 체제가 견고해서 힘든 부분도 있었죠. 전람회란 공간에 설치하는 방식에 따라 작업의 의미가 달라지는데, 좀 어려운 점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 국립현대미술관은 전시 개최 3개월 전에 배치도를 제출해야 하는데, 공간도 제대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 배치도에 맞춰 작품을 전시해야 하니 쉽지가 않았습니다. 작업 대부분이 공간과 연결된 것들이기 때문에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저는 항상 ‘작품’이란 단어보다는 ‘작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공간에 따라, 그리고 작업을 설치하는 방법에 따라 작업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설치’라는 말도 그런 의미에서 생긴 거잖아요. 작업을 가져다 놓음으로 해서 공간이 변형되고, 그럼으로써 작업의 의미도 바뀌게 됩니다. 전람회를 한다는 자체가 설치작업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미술관의 체제는 좀 더 완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1969년 초기작인 〈색동2〉, 〈색동 그림2〉부터 신작 〈시간과 공간 2019〉까지 작가님의 작업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작업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요. 연대기적인 방식이 아니라 8개의 주제별 섹션으로 나뉘어 있어 작가님의 작업 세계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논의를 거쳐 나온 구성인가요?
전시 구성은 이수정 학예사의 의견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큐레이터는 전시를 만드는 사람이잖아요. 전람회라는 건 특정 공간 에서 일정 시간 동안 새로운 의미를 열어주는 것인데, 그걸 하는 사람이 큐레이터라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준비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해를 하려고 노력을 했어요. 이수정 큐레이터가 고생 좀 했지요(웃음).
이번 전시에서는 1975년 미국문화원에서 열린 《김순기 미술제》가 담긴 영상도 설치되어 있어 당시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6일 동안의 달력〉과 〈달력, 물방울〉 등 과정형 작업을 선보이는 한편, 슬라이드 필름이나 영상을 상영하고 토론회를 개최한 것도 흥미로웠고요. A.G나 S.T와 같은 아방가르드 그룹이 활동하던 시기에 여성 작가가 ‘미술제’를 개최한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았을 텐데요, ‘미술제’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으셨나요?
대학교 때 은사님이셨던 전성우 교수님께서 저에게 전람회를 제안해주셨고, 그분이 미국문화원장을 만나 문화원에서 전시를 할 수 있게 도움을 주셔서 성사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작업을 전람회에서 단순히 보여주는 것에는 흥미가 없었어요. ‘representation’, 즉 표현/재현이라는 건 전통적인 예술의 관점이고, 저는 그 관점에 반대했기 때문에 ‘미술제’라고 썼던 것입니다. 미술제의 상황이 축제도 되고, 제사도 되고, 사건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미술제에 오시는 관람객들이나 다른 작가들과 대화도 하고 싶었고요. 저는 이 미술제가 스캔들을 일으킬 줄 느낌으로 알고 있었어요. 심지어 윤보선 대통령 영부인까지 왔었으니까요. 토론회 할 때에는 마이크 소리가 길거리까지 들려서 군중들이 지나가다 멈추기도 하고, 전시장 안에는 층계를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어요. 그때는 군사정권 시기라 말을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겁도 없이 그랬던 거죠. S.T에서 활동하던 이건용 작가님이 미술제를 보시고 강의를 제안하셔서 일주일 내내 학교, 화실을 다니며 강의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온 작고 젊은 여자애가 하는 이야기를 감탄하면서 쳐다보더라고요. 그때 했던 강의들이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특히 서울대 미대 학생들의 경우 유화, 석고 데생, 모델 드로잉 등 그림만 그리고 있을 때였거든요.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때 많은 에너지를 줬다고 해요. 질문하는 법을 가르쳐준 거죠. 아방가르드라는 건 어떤 상황에 대해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분석과 비판도 하면서 새로운 걸 제시(proposition)하려고 노력하는 거라 생각해요. 그게 앙가주망(engagement)이지, 단순히 사회적인 그림을 그렸다고 해서 앙가주망이 아니에요. 저는 ‘이것이 무엇인가?’보다는 ‘어떻게 이것이 왔나(How have this work arrived)’가 더 중요하다고 항상 이야기해왔습니다. 지금은 제가 많이 얌전해졌죠(웃음).
1971년에 프랑스로 가셨는데, 프랑스를 택하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니스에 위치한 국제예술교류센터(Centre Artistique de Rencontre International)의 초청 작가로 선발돼서 간 것이었습니다. 공부하러 프랑스에 간 것은 아니에요.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싫고, 시간 되면 똑같은 거 반복하는 게 지긋지긋해서 학교도 안 가고 교수도 안 한다고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프랑스에 대한 생각은 어렸을 적부터 늘 지니고 있었어요. 초등학교 1, 2학년 때 즈음 제가 그림을 잘 그리니까 선생님께서 “나중에 너는 화가가 되어야겠다.”고 말씀 하셔서 화가가 뭐냐고 물었더니, “프랑스 파리라는 데가 있는데 거기는 그림 그리는 사람들과 거지들이 같이 산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게 제 목적이었어요. 거지가 되거나 작가가 되거나(웃음). 그 이 야기를 듣고 집에 와서 프랑스 파리가 어디냐고, 지도책을 사달라고 울면서 보채니까 부모님께서 일본에서 세계 지도를 구해주셨어요. 지도를 보면서 여기 간다, 저기 간다 했죠. 그리고 군사정권 시절이었기 때문에 신나게 구름 타고, 기계 타고 달나라 가지 이런데 갇혀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노래처럼 하고 다녔어요.
그러다가 대학교에 들어갔는데, 전성우 교수님과 더불어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던 임영방 교수님을 통해서 프랑스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 제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 나라의 문과, 이과, 예술 부문의 학생을 한 명씩 뽑아서 장학금을 주는 제도였는데, 학교에서 추천해줘서 1971년도에 프랑스에 갈 수 있었어요.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미니 스커트 사 입고 뾰족구두도 신고, 너무 신났죠(웃음). 그리고 가자마자 히치하이킹으로 스페인까지 갔다가 두 달 후에 프랑스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돌아와 보니 보르도에서 불어 연수를 해야 하는데 김순기가 안 온다고, 북한에서 잡아간 줄 알고 난리가 났더라고요. 연수 끝나기 이틀 전에 돌아왔는데, 문제는 시험을 봐야 장학금이 나와요. 그래서 이틀 만에 시험을 봤고, 다행히 공부했던 문제가 나와서 통과할 수 있었던 겁니다.
프랑스 파리가 아니라 니스나 마르세유, 디종 등 남프랑스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신 점도 흥미로웠습니다.
임영방 교수님께서 남프랑스에 아방가르드 그룹들이 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리고 니스 국제예술교류센터가 생긴 게 1970년대 초반인데, 미술센터라는 이름의 현대미술관이 프랑스에 처음으로 생긴 게 니스였습니다. 플럭서스(Fluxus) 멤버였던 벤 보티에 (Ben Vautier)의 작업실도 니스에 있었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작가들을 초청해서 토론회를 열면 파리에 있는 작가들이 오토바이 타거나 히치하이킹으로 남쪽으로 내려와서 함께 토론을 했어요. 다니엘 뷔랑(Daniel Buren)이 속해있던 중요한 그룹 ‘B.M.P.T’ 멤버들도 남쪽에 내려와서 발표를 했고요. 그만큼 1970년대에 아방가르드 분위기는 남프랑스에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파리는 아카데믹하고 구닥다리의 답답한 장소처럼 느껴졌고요.
회화과를 졸업하셨고, 초기 작업인 〈색동2〉, 〈색동 그림2〉에서도 동양적인 색채를 사용하여 추상 회화를 그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고민은 무엇이었나요? 이후 〈소리〉나 〈조형상황〉과 같이 설치, 퍼포먼스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기록하는 비디오와 핀홀 사진 등 다양한 매체로 확장된 것도 회화 작업 당시의 고민과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캔버스 밖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요. 전통에 관심이 많으셨던 전성우 교수님의 영향을 받아 원색을 작업에 활용했고, 색의 의미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하면서 색 자체가 사각형을 뛰어 넘는 작업을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원래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림을 오래 그렸기에 자연스럽게 나온 질문이었다고 봐요. 영상 작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해체하고, 거기서 나오는 것들에 대해 질문하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 데리다(Jacques Derrida)를 만날 수밖에 없던 것 같아요. 1975년도에 저에 대해 글을 썼던 한 철학자도 제 작업이 시간과 공간을 ‘해체(Deconstruction)’하는 것이라 언급했으니까요.
김순기, 〈색동 2〉(1969), 〈색동 그림〉(1969)
캔버스에 유화 물감, 128×128, 90×72.5센티
<색동 2 / 색동 그림 2>는 김순기가 프랑스로 가기 전에 제작한 것으로, 색면 분할이 나타나는 추상 작품이다. 그는 서양화과 재학 당시 전성우(全晟雨, 1934-2018)의 수업을 들으면서 만다라, 오방색 등 동양 미학과 전통 색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설치 작업을 시작하기 전 단계로서, 그 후에 등장하는 설치 작업의 방향에 대한 근거가 되는 회화 작업이다. 이후 작가는 공간 속에 형태를 만들어나가는 ‘조형상황’ 연작으로 나아가게 된다.
https://www.mmca.go.kr/collections/collectionsDetailPage.do?menuId=0000000000&wrkinfoSeqno=9450&artistnm=%EA%B9%80%EC%88%9C%EA%B8%B0
무명, 1995. 단채널 영상, 컬러, 무음,
2분 10초- 김순기는 한국에서 우연히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수기를 읽은 후 그 이야기들을 수화로 소개하는 영상 작품 <무명>을 제작하였다. 수화를 하는 여성 뒤로 위안부 자료 사진이 간헐적으로 등장하고, 화려하게 치장하고 자유롭게 명동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 현대 여성들의 영상이 병치된다. 이 작품은 완연히 대조되는 이미지들을 통해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고통을 겪었던 여성들을 주제로 다룸으로써 작가의 사회에 대한 관심이 드러난다.
- https://www.mmca.go.kr/collections/collectionsDetailPage.do?menuId=0000000000&wrkinfoSeqno=9267&artistnm=%EA%B9%80%EC%88%9C%EA%B8%B0
무명, 1995. 단채널 영상, 컬러, 무음,
〈조형상황〉 시리즈는 상황의 우연성, 우발성, 유동성 등을 작업의 구성 요소로 삼고 있어 작가님의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변모하는 ‘상황’ 속에서 ‘조형’을 이끌어내는 것도 흥미롭게 살펴볼 지점인데요, ‘상황’의 개념을 어떻게 설정하고 작품을 구상하게 된 것인지요?
상황에 대한 개념이 선행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작업을 하다 보니 상황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이것을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죠. 대학원 시절 학교에서 〈소리〉를 작업하는데, 하루는 헝겊에 물을 들인 후 바깥에 걸어 놓고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나가보니 작품이 기가 막히게 보이는 거예요. 바람에 날린 천의 색들이 다 해체돼서 서로 만나고, 거리 풍경도 있고, 먼지도 있고, 하늘도 있고, 바람도 있고, 사람도 있고, 새도 있고. 진짜 ‘상황’이 된 거죠. 그림에 틀이 있다면, 〈소리〉에서의 틀은 바로 우리 삶이었어요. 열린 공간. 어떻게 제목을 지어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결국 ‘소리’라고 지었더니 작업의 맥락과 의미가 그 안에다 들어가더라고요. 소리는 경계가 없으니까요. ‘소리’라는 것은 제목이고, 그러면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어떻게 부를까 생각하다가 ‘상황’이 나왔던 겁니다. 상황이라는 말을 사용한 건 프랑스에서부터였어요. 니스 국제예술교류센터에서 〈소리〉를 발표했을 때,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했던 프랑스 예술운동 ‘쉬포르 쉬르파스(Supports/Surfaces)’를 이론적으로 지지했던 비평가 자끄 르빠주(Jacques Lepage)와 그의 동료들이 제 전시를 보고는 그들의 작업과 비슷하다며 함께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쉬포르 쉬르파스의 경우 캔버스의 요소들을 분석한 후 사각형 틀이나 색만 가지고 작업을 하는 등 캔버스 안에만 머물렀다면, 저는 삶으로 나아간다는 차이가 있어요. 그 이후에 플럭서스 작가들을 만나게 된 거죠. 그들 역시 삶에 대해 이야기했으니까요.
작가님의 작업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나 늘 사용하는 언어를 가지고 놀이를 하시는 듯 보이지만, 단순히 즐겁다는 개념의 유희라기보다는 본래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이나 사유의 틀이 작품을 통해 깨어지는 순간 쾌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거든요. 작가님의 작업에서 유희가 지니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지금 이야기 다 한 거예요 (일동 웃음). 저는 사람들이 제 전시를 보고 나오면서 ‘아, 즐거웠다.’ 하면 좋겠어요. 어린 아이들이 고맙다고 인사하더라고요. 왜 고맙냐고 물었더니, 재미있었다는 거예요. “행복했어요.”라는 말이 제일 좋습니다. 논다는 것 안에는 행복이 들어있어요. 행복은 아름다움을 포함하지만, 아름다운 것이 반드시 행복을 포함하지는 않죠. 저는 장자(莊子)나 노자(老子) 같은 도가 사상을 좋아했는데,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을 읽는 순간 장자가 보이더라고요. 장자에게서 ‘유희’ 개념이 나옵니다. 유유히 강을 건너가면서 논다는 ‘유(遊)’인데, 그것은 ‘천락(天樂)’, 즉 하늘의 기쁨이에요. 그게 예술의 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자를 통해 동양미술의 근본을 배울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장자의 철학은 경계를 터놓는 게 있어요. 무식(無識), 무위(無爲)가 그렇죠. 비트겐슈타인은 ‘Jeu de Language(언어 놀이)’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단어들을 가지고 노는(game) 것이 언어유희라고 하잖아요. 거기서 장자와 비트겐슈타인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작가님의 작업에서 ‘무(無)’나 ‘무위(無爲)’도 중요하게 보입니다. 이러한 개념들은 작업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작업이라는 것은 그 과정에서 자신을 찾아가고 발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르는 것, 무식(無識)이 유식(有識)의 근본이 되는 것이죠. 자신이 공부한 것을 차근차근 깨나가면서 밑바닥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식(有識)을 통해서 무식(無識)에 도달하는 것. 무식하다, 식이 없다는 것은 깨달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고, 식이 없다는 건 무엇이든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에요. 꽉 차면 아무 것도 안 보이잖아요. 비우면 이것도 보이고 저것도 보여요. 그릇에 물이 꽉 차있으면 더 이상 넣을 수 없지만, 비어 있으면 아무거나 다 넣을 수 있죠. 그걸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릇의 의미가 달라지는 겁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바로 삶이고요. 동양에서의 ‘혼돈’은 단순히 무질서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 라, 음(陰)과 양(陽),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의 가능성, 만 개가 나올 수 있는 가능성, 즉 최초의 가능성을 뜻합니다. 혼돈 자체는 굉장히 원시적인(primitive) 조건이죠. 최초의 조건인데, 항상 혼돈이 있어야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저는 ‘창조’라는 단어를 사용 하지 않습니다. 동양에서의 창조는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고 그렇지’의 개념에 가깝습니다. 그걸 잘 표현한 것이 바로 『주역(周易)』이에요. 『주역』에 보면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고, 계속해서 갈라지잖아요. 하나라는 것은 하늘과 땅의 만남인데, 만남의 상태가 바로 혼돈인 것이죠. 그게 갈라지면서 세계가 생성되는 겁니다. 장자에게는 그 상태에 도달하는 게 천락이에요. 그리고 그 천락은 유유히 했을 때에 찾을 수 있어요. 그걸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무식의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고요. 식이 오기 전의 상태, 이름이 오기 전의 상태,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의 상태, 모든 것을 포함하는 상태, 빈 그릇인 것이죠.
작가님의 작업에서 비디오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회화 작업을 하시다가 비디오를 작업에 도입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더불어 비디오가 작업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설명 부탁드립니다.
〈소리〉 작업 당시 작품이 밖에서 펄럭이는데, 찍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움직이는 상황을 잡아야 하잖아요. 비디오 작업은 프랑스에 가서 본격적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업을 기록으로 남기는 도큐망(Document)도 좋은 아이디어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찰나의 상황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가가 왜 기록해야 하는가를 많이 고민했죠. 대신 카메라로 찍는 걸 작품의 요소로 동등하게 생각하고, 기록이 아닌 작품으로 비디오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진이나 슬라이드, 필름처럼 네거티브 필름에서 포지티브로 인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빛을 가지고 직접 작업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고민하다 보니 비디오가 생각난 것입니다. 예전에 이영철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비디오라는 것은 빛과 시간을 가지고 짜낸 빈 그릇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빛과 시간으로 짠 이미지를 담되,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떤 의미에도 열려 있는 그릇인 것이죠. 기록도 할 수 있고, 리얼 타임을 보여줄 수도 있고, 백남준 작가처럼 비디오로 조각을 만들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가지는 빈 그릇이 비디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작업을 했던 것이고요.
김순기, 〈주식 거래〉, 2005
비디오 조각설치
김순기(1946- )는 1970년대 작업을 시작한 이래 시각과 인식, 사물과 언어, 조형언어와 일상언어의 경계, 그 주변에서 자극되는 정신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그러한 컨셉의 구체화를 위해 글쓰기와 설치, 사진과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왔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김순기는 멀티미디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는데, 작가에게 멀티미디어는 장자(莊子)와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석도(石濤)의 화론과 선불교 연구를 통해 형성된 ‘무위’, ‘우연’, ‘변화’, ‘혼돈’, ‘영원한 현재’, ‘자유’의 관념을 상징하며 실천하는 이상적인 매체이다. 다시 말해 작가에게 비디오는 Vide & O(空과 시초 이전의 가능성인 제로)이며 Vide et l’eau(空과 무형의 물)인 것이다.
<주식거래>(2005)는 프랑스의 탄광도시 살로민(Sallaumine)의 시청사 모형, 그 건물의 안에 설치된 프로젝터(Projector)에서 벽으로 투사되는 주가 현황표, 그리고 또 다른 공간에 설치된 9개의 모니터 구조물로 이루어진다. 살로민은 석탄산업의 몰락과 함께 쇠퇴한 프랑스에서 실업률이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지만, 시 예산의 10%를 문화(현대미술)에 투자하며 1992년 시청 맞은편에 거대한 ‘예술과 커뮤니케이션의 집’을 짓는다. 김순기는 경제가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경제논리에 좌우되지 않는 현재와 미래의 희망으로서의 문화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살로민 시청사 건물은 주식처럼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이 구입한 화려한 색채의 복권들로 도배되어 있다. 벽에는 매일 매일의 주가지수가 보이며, 다른 편의 비디오 구조물에는 다양한 영상들이 나타난다. 이 영상들은 주가지수의 변동 데이터를 계산하여 컴퓨터에 있는 인터페이스(Interface)가 이에 맞는 프로그램을 택하고, 선정된 프로그램이 3개의 DVD플레이어와 3개의 CD에 전달되어 보이게 된다. 작가가 1990년대에 촬영한 총 20종류의 짧은 비디오 영화(총 60분 정도)는 9개의 TV모니터를 통해 자유자재로 순서를 바꾸면서 반복하며 돌아간다. 일상적인 길가 풍경, 사람들 등 재료에 지나지 않는 장면들은 종합주가지수의 상승과 하락에 따라 대상의 동작이 느려지거나 가속화된다. 작가가 체험한 여러 시간과 공간은 혼합되고, 매 초당 들어가는 이미지의 양이 편집을 통해 조작되면서 이미지의 단위들은 우연적으로 만들어진다. 이 작품은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주가지수와 새로운 기호-언어로서의 새로운 테크놀로지(Technology)의 관계 속에서 미술과 사회, 경제, 삶의 가치의 변화 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https://www.mmca.go.kr/collections/collectionsDetailPage.do?menuId=0000000000&wrkinfoSeqno=5523&artistnm=%EA%B9%80%EC%88%9C%EA%B8%B0
작가님의 경우 정치적이거나 특정한 사회적 사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주식 거래〉(2005)나 ‘위안부’ 문제를 다룬 〈무명〉(1995), 서예로 작업한 〈편지-컴컴한 동쪽 바다에〉(1997-2005), 〈편지-슬슬슬 안개 소리에〉(1997) 등은 당시 변화하고 있는 사회 모습을 은유적으로 담는 한편 신자유주의 시대 예술이 나아갈 길을 묻는 등 사회적으로 확장된 시선을 살필 수 있었습니다. 변화의 계기가 있으셨나요?
그 당시에 저도 모르게 잔소리가 하고 싶더라고요. 자본주의가 돈으로 인간들의 마음을 도망가게 만들었잖아요. 그게 그렇게 싫었어요. 텅 비어있는 자신의 마음을 찾을 때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데 말입니다. 1991년도에 프랑스 정부 연구 장학금을 받고 작업을 위해 배낭에 비디오 카메라만 짊어지고 중국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어요. 한국에 왔다가 일본에 가서 전람회 하고, 중국에 가서 한 3개월 돌아다니다가 태국, 인도에 갔다 다시 중국으로 오는 6개월의 시간 동안 완전히 자본주의로 탈바꿈한 동양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걸 주제로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얌전하게 노는 방식이 아니라 욕을 하고 때려주고 싶다는 감정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 같아요. 장 뤽 낭시 (Jean Luc Nancy)와 편지로 왕래할 때였는데, 낭시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럼 주식에 관한 작품을 해야겠구먼.”이라고 농담한 이야기를 듣고 이거다 싶어서 작업을 했죠. 그래서 〈주식 거래 (Stock Exchange)〉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편지-슬슬슬 안개 소리에〉 마지막에 ‘똥강아지가 멍멍멍 울고 있을 적에 조카들이 달려 와서 요즘 달라가 올라서 피씨(PC) 가격이 반으로 떨어졌다는데 포터블 하나 사왔느냐 하길래 내가 가지고 온 건 마음뿐’이라고 했어요. 그런 말이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 작업을 하셨던 1990년대 초반 이후 근 3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자본이 삶의 모든 가치를 잠식하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 예술의 의미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그 질문은 데리다와 대화했던 주제이기도 해요. 저는 유럽이 통일(EU)되는 것, 그리고 세계가 글로벌화되는 것에 대해 반대했던 사람입니다. 문화 때문도 아니고, 정치 때문도 아니고, 돈이나 경제 때문에 통합되는 거잖아요. 중요한 건 만남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만나기 위해서는 다름이 있어야 하고, 다르기 위해서는 존중이 필요합니다. 차이를 없애버린 채 모든 것이 비슷하게 되어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한국에 와서 작가들의 작업을 좀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 예전보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생겨서 해외여행도 많이 하고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빨리 습득하다보니 비슷비슷한 작품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주목받는 것에 초점을 맞춰 작업하면 인기도 얻을 수 있죠. 이 역시 돈과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신자유주의라는 틀 자체가 작품을 만드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너무 싫어서 도망가고 싶을 정도에요. 시장화된 작품들이 양산되는 지금 시대에는 빈 마음을 다시 찾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태도에서 작업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이번 신작 〈시간과 공간 2019〉에서는 과학 기술의 요체인 로봇과 과학의 정반대편에 위치하는 초자연적인 존재인 무당이 등장하여 다른 영역의 이질적인 것들이 교차하는 모습을 선보이셨습니다. 작품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나요? 로봇 ‘심심바보 영희’가 작가님 자신의 페르소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옛날부터 ‘바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어요. ‘심심바보 영희’에 나온 글을 다시 읽어보니 저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일동 웃음). 어찌 되었든 ‘심심바보 영희’는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친구입니다. 평소 AI 같은 뉴 테크놀로지에 관심도 많고, 그런 것들이 가져올 미래의 가능성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로봇을 만들어 낸 이유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인간이 절대적인 힘을 얻기 위해서잖아요. 그걸 거꾸로 사용하고 싶었어요. 바보같이 시나 읽고, 경치도 바라보고. 그런 로봇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미래의 언어와 무당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봇과 무당,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서 교환하는 게 참 좋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자가발전 자전거에서는 숲속의 벌레 소리나 아마존 인디언들이 제사를 지내는 사운드가 흘러나오죠. 제가 생각하는 훌륭한 우주의 모습을 만들고자 한 작업이었어요. 그 우주에는 무당도 있고, 과학기술의 총체인 로봇도 있는 등 생태, 전통이 다 담겨있습니다.
지난번 프로필 사진 촬영을 할 때 관객이 참여할 수 있도록 마련한 〈오늘〉(1975, 1998)을 가리키시면서 의도한 바와 결과가 다르다며, 작가님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신 말이 뇌리에 남아서 생각한 질문입니다. 불확실하고 다양한 세계를 드러낼 수 있는 인터랙티브 작업에서 그렇게 의도하지 않은 상황도 작업의 의미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특히나 고정되지 않고 항시 열린 의미를 지향하는 작업을 해오신 작가님이시니까요.
그래서 굳이 다시 제작하지 않고 내버려 둔 거예요. 2008년에 예맥 갤러리에서 개인전 《김순기, 2008 Platform Seoul》을 진행할 때에도 이 작업을 열심히 손으로 그려서 만들었는데, 그 다음날 되니 사람들이 설명서와 상관없이 자기 이름이나 낙서를 해놓았더라고요. 그때는 글자가 많지 않아서 다시 흰색으로 칠했는데, 이번에는 생각해봤더니 사람들 낙서하는 장소를 하나 마련해준 것이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얼마 전에 지인으로부터 전시 잘 봤다고, 자신이 쓴 글씨를 봤냐고 연락이 왔었어요. 무슨 글씨냐고 물었더니, ‘내일은 뭐하지’라고 썼다는 거예요.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간단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전 원래 계획을 세우지 않아요(일동 웃음). 그런데, 며칠 후에 프랑스로 돌아가는데 친구한테 전화해보니 텃밭에서 기르는 야채들이 쑥대밭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비가 안 와서 연못이 마르고 진흙도 갈라졌다는 거예요. 잡초도 무성하게 자라고 과일도 말라서 썩어 있고. 집으로 돌아가면 이제 그런 것들을 돌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거의 먹을 것도 없대요(웃음). 그리고 내년에 미국에서 책이 나올 예정인데, 번역도 해야 하고 할 일은 아직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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