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il on canvas, 60×73 cm
주재환 작가의 유화 작품 <건곤실색 일월무광乾坤失色 日月無光, The World Has Lost Its Colors; The Sun and the Moon Have Lost Their Light>(1994)은 동아시아 시각적 조건을 빗대어 문화적 아수라장을 시사하고 있다. 이 아수라의 장은 난장판이 되어가는 정경을 말하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아귀 정령 도깨비들이 창궐하는 현실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할테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인용된 글귀는 “빛의 오브제가 제 기능을 잃으니, 색채론적 조형의 질서 역시 소멸한다”는 의미로 전용되기도 한다. 이는 시각 작가가 기존의 텍스트에서 탈맥락화시켜 자기전용과 재코드화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성립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텍스트 <선가귀감>에서 이 글귀가 어떤 맥락인지 아는 것도 필요하다. 왜? 탈맥락화는 단순히 비환원적인 작동으로 이어지기도 함과 동시에 기존의 권속이 가진 잔존하는 영향을 희미하게 드러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선 저 乾坤失色 日月無光, 즉 “하늘과 땅이 색을 잃었다,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라는 구절은 순서가 바뀌었다. 빛을 잃은 연후에 색을 상실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빛과 색의 연동 조건이 살짝 엿보이는데, 16세기 중반 저자인 서산대사로서는 관용적인 표현임에도 그 조건은 지금의 관점에선 괴테의 색채론이나 슈타이너의 색채론과 나란히 음미해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이 충동의 작용인은 단지 이 구절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많은 절집에 내걸린 노사나불도의 괘도와 탱화들이 더 크게 걸려 있다. 수많은 존재들의 삶 낱낱들이 끊임없이 윤회전생 — <본생담>이야말로 어쩌면 현재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불가의 텍스트일지 모르겠다 — 을 거듭하면서 소위 “나 안해본 것 없어” 하는 짬밥을 내세우면서 법신불의 무량광명을 내공의 우주적 표현으로 가져가는 그림에서 이 땅의 색채론은 기이할 만큼 명확하게 만개한다. 삶의 밑변에서 죽어본 놈이 세상에 색깔 있는 빛을 던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산대사의 경우, 그러한 빛의 부처보다 조사의 타고난 내면에서 꿈틀대는 빛이 더 우세하다. 여기서 배냇 감각으로서 꾸밈/꿈 없는 내면의 빛과 연동되는 방식이 뭐냐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것이 그 유명한 ‘소소영령’[昭昭靈靈]이다. 밝고 밝으며 신령하고 신령하다. 어쩌면 나중에 수운 선생이 ’내유신령 외유기화’[內有神靈 外有氣化]이라고 할 때, 이러한 사정을 살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왜? 요즘 동경대전 강의 중에 이런 구절이 출현한 것에 주목하게 되면서.
* 余亦無功, “나 또한 별 볼 일이 없었다”(<동경대전> 중에서, 도올 역)
* 佛祖無功能, “부처와 조사들이 쓸데없이 나왔다”(<선가귀감> 중에서)
그러면서 이어지는 것이 ‘무풍기랑’[無風起浪]이다. 그 뜻은 두 갈래이다. 하나는 “공연한 풍파를 일으켰다”이고, 또 하나는 “바람없이 파도를 일으켰다”이다. 보통은 전자의 ‘헛소동’설이 우세하지만, 여기서는 후자의 가능성을 탐문해봐야 한다. 즉 원인 없이 일어난 사건, 무인과의 사건으로.
소소영령하다.. 라는 것은 이 후자가 맞지 않을까. 수운의 경우에 빗대면, 저 “나 또한 별 볼 일이 없었다” 그 다음 이어지는 하늘님의 대사는 ‘생여세간’[生汝世間] 즉 “너를 세상에 생겨나게 하겠다”이다. 이 역시 무인과의 뚱딴지다.
<선가귀감>에서는 ‘불조출세’[佛祖出世] 즉 “부처와 조사들이 세상에 나왔다”로서 거의 똑같은 흐름이다. 다만 “바람없이 파도를 일으킨다”는 것은 ‘본지풍광’[本地風光] 즉 “본래의 내 터자리에 이는 바람과 비치는 빛”을 염두에 둬야 한다. 소소영령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한 소동이건 원인없는 기적이건 바람 없이 파도를 일으킨 것으로 乾坤失色 日月無光이 갑자기 나타난다는 설명은 놀라운 수사학이다. 과장이요, 만담이다.
별 볼 일 없고 쓸데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그 짓을 하는 것, 문화적 아수라장을 통해서 도깨비짓을 하는 것.. 참 병이면서 예술이면서 개소리[bullshit]다.
https://www.facebook.com/weaktier/posts/4257848184307813
* 『선가귀감』은 조선 중기의 고승휴정(1520~1604)이 금강산 백화암에서 편찬한책이다. 책 제목 그대로 선가, 즉 참선 공부를 하는수행자들이 귀감으로 삼을 수 있도록 선종의 요긴한지침을 모아 놓았다. [편집자]절대 진리(一物)는 본래부터 신령스러워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스스로 지극하다. 이를 망각한 부처가 나와 설법했지만 그 공덕이 부질없어 공연한 풍파로 그쳤다. 그러니 하늘과 땅도 빛을 잃고 해와 달도 어두워졌다.
서산대사, 『선가귀감』(禪家龜鑑, 1564)*
[주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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