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한국 현대미술비평 집담회 1부: 그것이 그곳에서 그때

그것이 그곳에서 그때: 김범과 정서영의 글과 드로잉

장지한

저는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그것이 그곳에서 그때―김범과 정서영의 글과 드로잉』1이라는 작은 책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책의 부제에 쓰여있듯이 저는 김범과 정서영 두 작가의 글과 드로잉을 중심으로 책을 엮어 보았습니다. 물론 여기에 작가의 글과 드로잉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책에는 두 작가의 잘 알려진 조각과 회화 작품 몇 점을 비롯해 그에 대한 저의 해석이 두 작가의 글이나 드로잉과 함께 구성되어 있습니다. 김범은 회화에서, 정서영은 조각에서 그 고유하고 매혹적인 사유를 전개하는 것으로 익히 알려졌지만, 동시에 두 작가는 다양한 형식의 글과 드로잉을 발표해 온 작가들입니다. 제가 엮은 이 작은 책은, 그간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그들의 글과 드로잉뿐만 아니라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거나 출판을 고려한 적이 없던 이미지와 텍스트, 또는 작가 스스로 오랜 기간 잊고 지냈던 자료도 포함한다는 점에서 기존에 나온 전시나 책과는 다릅니다. 저는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작가가 약 30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박스를 작가와 함께 열어보기도 했고, 작가가 출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글의 출판을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작가의 글과 드로잉을 소위 아카이빙하고 연도별로 꼼꼼하게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료집은 아닙니다. 저는 접했던 많은 자료 중에서 일부를 선택해서 저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편집해서 수록했으며, 순서도 약 30년의 시간이 뒤엉켜 있습니다.

이렇게 다소 주관적인 편집의 과정을 거친 이유는, 이 작은 책을 통해 작가들의 지속적이고도 끈질긴 ‘질문’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글과 드로잉에는 평론가가 도전해야 할 흥미롭고도 감각적인 사유의 흔적이 남겨져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은 아직 독자의 손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2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아직 독자에게 도착하지 않은 책의 세세한 내용을 요약해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책에 그 나름의 밀도와 일관성을 부여하느라 책에서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저는 오늘 왜 이 작가들의 흥미롭고도 의미심장한 질문이 그간 주목받을 수 없었는지, 그리고 그 질문의 방향이란 대략 어떤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앞서 말했듯 이 책에는 잘 알려진 작품도 포함되어 있지만, 단 한 번도 발표된 적이 없는 실존적인 성격의 글이나, 아니면 발표되었지만 아마도 당시 소수의 관객만 보았기에 잊혔을 확률이 높은 사유의 파편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작은 책을 거대한 아카이브로부터 발굴해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면―제가 이 아카이브를 주목한 이유는, 역사가 아를레트 파르주(Arlette Farge)의 말을 빌리자면 “역사가의 습관들과 헤어지겠다고 결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이 역사가가 인용한 벤야민의 말을 따르자면, 이는 “우리의 정신세계에서 가장 중시되는 습관들을 꼼꼼하게 흐트러뜨려야”3 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두 작가를 둘러싼 비평적인 담론의 관습이나 역사가의 습관을 말하자면 아마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80년대 후반 대학을 졸업하고, 90년대 초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이 작가들은 한국미술에서 ‘사물’을 ‘개념적인’ 방식으로 다룸으로써 ‘동시대성’을 드러낸, 혹은 ‘동시대 미술’의 시작을 알린 작가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책의 제목으로 선택한 세 가지 대명사는 사물, 개념, 그리고 동시대성과 같은 낱말들이 아닙니다. 책의 제목은 사물이 아니라 ‘그것’을 말하고 있고, 개념미술이 아니라 ‘그곳’을 말하고 있으며, 동시대가 아니라 ‘그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단어들은 제가 자의적으로 제안하는 근사한 표제어가 아닙니다. 이는 두 작가가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글에서 직접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다시 말해 두 작가는 어떤 대상을 마주하면서, 방법을, 시간을, 장소를, 익숙한 어휘를 사용해 명시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그것이나 그곳, 그때와 같은 대명사를 통해 그 불안한 위상을 힘겹게, 아니 어쩌면 오직 그 방식을 통해서만 지시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사물’, ‘개념’, ‘동시대’라는 한 축과 ‘그것’, ‘그곳’, ‘그때’라는 축 사이의 간극이 ‘시대의 요구’와 ‘작가의 사유’ 사이의 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작품’이라는 공간이 작가의 사유가 감각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라고 한다면—이는 시대의 지배적인 담론이 ‘작품’의 내재적인 감각을 드러내는 데 있어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는 너무도 당연하게 습관처럼 말하는, 어느 순간 도래했다고 받아들이는 ‘동시대성’이나, 근대적인 조각과 회화의 어법을 확장했거나 위협했다고 알려진 ‘사물’ 이나 ‘개념’과 같은 낱말들이 실은 ‘작품’의 감각을 관통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좀 더 대담하게 가정해 보자면, 이 두 작가가 소위 한국미술의 동시대성을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음을 고려해 볼 때, ‘동시대성’이나 ‘사물’, 그리고 ‘개념’과 같은 어휘들의 목록은 한 시대의 미술을 이해하는 데 그리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곳에서 그때’와 같은 추상적인 대명사를 전면에 내세우고, ‘시대의 요구’가 아니라 작가의 사유와 작품의 내재적인 공간을 강조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이제는 지배적인 담론에서 잊혀버린, 자율적인 회화와 조각이라는 공간에 대한 미학적인 옹호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즉 이 책이 기획된 의도가 ‘작품’이라는 자율적이고 초월적인 공간이 주변의 환경과 공간 속으로, 더 나아가 작품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장치 속으로 흩어지는 것에 대한 모더니스트의 두려움에 기반한 미학적인 성토의 장이라 하거나, 또는 시간을 뒤로 돌려 다시 한번 화이트 튜브나 블랙 큐브 속의 작품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그 숭고했던 공간에 대한 노스텔지어를 드러내는 것처럼 비추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듯이 김범과 정서영은 그 초월적인 공간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출발한 작가들입니다. 이를테면 정서영은 일찍이 자신의 작품을 조각이 아니라 ‘물건’으로 명명하면서 그 익숙한 물질적인 표면을 강조하기도 했고, 김범 역시 캔버스를 자르거나 꿰맴으로써 지속적으로 평면의 세속적인 위상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근대적인 미학에 대한 전면적인 ‘해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그들에게 ‘작품’이라는 공간은 어떤 ‘사건’을 일으키는 장소, 또는 형이상학적인 것과 형이하학적인 것 사이의 ‘경계’로서의 ‘장소’였습니다. 저는 발표 후반에 다시 이 문제로 돌아오겠지만, 그들에게 작품은 정신적인 무엇, 혹은 추상적인 내면을 담아내는 자의적으로 닫힌 공간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 사이의 구분에 도전하는 ‘사건’을 일으키는 장소 혹은 경계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지배적인 담론 속에서 바로 그 ‘경계’ 혹은 ‘장소’로서의 작품에 대해 사유할 공간이 있는지에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너무나 당연하게 ‘동시대’를 가정하는, 즉 ‘동시대성’ 혹은 ‘동시대 글로벌 미술’을 습관처럼 말하는 담론의 질서 속에, 작가들의 감각적인 투쟁의 장소였던 주체와 객체 사이의 경계로서의 작품이라는 인식론적인 질문이 들어설 자리가 있는지 말입니다.

앞서 인용한 한 역사가의 말처럼, “습관들을 꼼꼼하게 흐뜨러뜨리기 위해”, 습관을 하나하나를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소위 ‘동시대 미술’에 관한 복잡한 논의, 이를테면 여기서는 다룰 수 없을 그 시점이나 정의에 관한 두텁고 지난한 논의를 괄호치고, 가장 지배적인 담론으로서의 ‘동시대 미술’을 요약한다면 아마도 서동진 평론가의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인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이란 범세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미술이란 말과 같은 뜻일 것이다. 세계 전역에서 개최되는 비엔날레와 아트페어, 도쿠멘타와 마니페스타 등은 세계 전역의 미술가들과 비평가, 전시기획자, 관람객을 끌어 모은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연결 혹은 그 연결을 통해 만들어지는 ‘범세계성(globality)’이란 어떤 세계일까. 미국과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프로젝트는 세 개의 세계를 소멸시키고 하나의 평평한 세계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점에 ‘모던 아트(modern art)’를 대체하는 동시대미술이 등장했다. 이 미술이 작용하는 공간은 세계화를 통해 만들어진 또 다른 상상적 공간인 세계(the globe)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동시대 미술을 또한 ‘글로벌 아트(global art)’라고 지칭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4

즉, 동시대 미술은 하나로 연결되어 평평한 동시에 상상적인 공간일 그런 세계를 전제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상상적인 공간을 전제하는 순간 마련되는, 바로 그 세계 속 미술의 자리일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한 번 더 서동진 평론가의 문장을 인용해 보고자 합니다.

글로벌 아트는 모던 아트가 사라지고 난 이후 동시대 미술을 가리키는 것으로 모든 지역의 예술적 실천에게 자신을 대표/재현(representation)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다원주의적 세계의 예술을 암시한다. 그러나 글로벌 아트가 품고 있는 환상, 서구와 비서구의 식민주의적 위계를 무너뜨리고 세계의 모든 지역과 정체성이 자신을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는,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글로벌 아트가 전유하는 자유주의적 대표/재현의 환상은 백화점 지하의 푸드 코트(food court)에 도열한 세계의 음식들과 비슷한 것이다.5

즉 평평하게 연결되어 있을, 바로 그 상상적인 공간으로서의 “세계”를 전제하는 각종 제도적인 장치는 미술에게 바로 그 “세계”를 재현하고 대표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저는 여기서 “푸드 코트”에 대한 비유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상상적인 세계에서 중요한 동시대 미술 작품의 존재론은 안으로부터는 한정식에, 밖으로부터는 퓨전 한식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김범과 정서영과 같은 작가는 그 기만적인 기회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원주의의 환상에 기반한 상상적인 공간은 그들에게 언제나 지금, 여기, 이곳에 기회가 있다고, 어서 당신의 장소를 재현하고 대리하라고 요청하지만, 그들은 그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무관심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그들에게 세계가 그런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 세계는 상상적으로 합의하고 구성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작품은 그 세계를 대리하고 재현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정서영, 〈세계 World〉, 연도미상. 연필, 약13.3 x 20.5cm, 개인 소장

이를테면 정서영의 드로잉 속의 세계는 그들에게 세계가 어떤 장소였는지 말해주는 것만 같습니다. 세계는 평평하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그래서 우리가 드디어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그런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세계는 세계라고 쓰는 동시에 지워져 버릴 것만 같은 장소에 가까웠습니다. 세계는 동시적으로 연결된 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비동시적으로 작동하는 상이한 힘이 경합하는 장소였습니다. 말하자면 세계라고 쓰고자 하는 힘과 그 세계를 지워내는 힘이, 또는 작가가 힘을 주고 의식을 집중해 쓰고자 하는 의지에 반해 그 의지를 벗어나 평면 위에서 번져버리는 연필의 물질성이 서로 경합하는 장에 가까웠습니다.

누군가는 쓰임과 동시에 지워지고 번지게 만드는, 그 세계를 구성하는 다른 힘, 바로 그 힘이 네이션(nation)이나 로컬(local), 혹은 전통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힘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이브리디티라고 말할 때, 또는 다원주의라고 말할 때 그 한 축을 담당하는, 바로 그 힘 말입니다. 하나로 연결된 세계 속에서 어서 당신의 정체성을 재현하고 대리해보라고 요청하고, 명령하고, 권유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바로 그 힘의 한 축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는 그런 이데올로기적인 힘과 무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씀에 대항하는 지워짐이, 주체의 의지에 팽팽하게 맞서는 객체의 바로 저 힘의 벡터가 서동진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인적, 심리적인 기억으로 환원할 수 없는 역사적인 시간의 자율성과 물질성”6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추상화되고 육화된, 공간화된 시간으로서, 그래서 정확히 그 이름을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공간, 즉 “역사적 시간의 추상성” 같은 것 말입니다. 바로 이 존재 혹은 목소리를 두고 김범과 정서영은 자주 ‘유령’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책에 수록된 다음과 같은 글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이따금 한 번씩,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해치고자 하는,

육신 없는 것들이 찾아와

자신들의 육신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거절한다고 해도 그들의 대부분은 결코

돌아가지 않고 유령처럼 내 주위에 머문다.

나는 그들에게 “왜 무엇을 위해?”라고 묻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7

이는 90년대 중반 김범이 작성한 짧은 글입니다. 이 짧은 텍스트에 등장하는 유령은, 알 수 없을 어떤 존재는, 이따금 자신을 찾아오는 존재이며, 무엇보다 자신 외부의 타자로서, 존재의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돌아가지 않고 그의 주위에 머무는 존재입니다. 마치 주체의 의지에 반하는 객체의 매질처럼 존재의 이유를 말하지 않고 존재하는, 그래서 다른 이름은 지어줄 수 없을 그 추상적인 공간 혹은 존재가 바로 세계라고 불리는 상상적인 공간이 제안하는 영원한 현재로서의 그 세계를 씀과 동시에 지워내는, 그런 세계 아닌 세계를 구성하는 반대편의 자율적이고 물질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세계 혹은 현재를 두고 작가들은 다른 힘에 의해 온전히 지워져 버리는 세계, 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유령이 아니라 쓰여지면서 지워짐, 또는 묻지만 대답 없이 머무름과 같은 바로 그 경계면을 그려낸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세계’나 ‘동시대’와 같은 역사가의 습관을 흐트러뜨리고 ‘그때’와 같은 대명사를 통해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시간과 시간 사이의 경계면을 지시해야 하는, 즉 세계와 유령 사이에, 주체의 선언과 객체의 주어짐 사이에, 지금 여기와 그때 거기 사이의 경계 혹은 순간을 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세계가 그렇게 자신 있게 동시대적인 세계를 선언할 수 없는 곳이라면, 작품은 어떤 공간인지, 그리고 비평은 그 내재적인 공간을 어떻게 읽어내야 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세계’를 생각할 때 그들은 애초에 그런 자유주의적인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동시대적인’ 세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유령과 같은 어떤 추상적인 시간의 자율성과 물질성을 지각한다면, 즉 세계는 세계라고 말하려 하는 주체와 반대편에서 그 세계를 지워내는 유령과 같은 객체가 비동시적으로 경합하는 추상적인 공간이라면, 작품은 더 이상 상상적인 세계 속의 정체성이라 할 만한 것을 재현하고 대리하라는 요구에 응답하는 공간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이때 그들에게 작품은, 서동진이 아도르노를 경유해 말했던, “창문 없는 단자”와 같은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도르노의 말을 인용하자면, “예술 작품은 창문 없는 단자로서”, “작품의 내재적인 역사성이 외부 세계의 역사성과 동일한 본질을 가질 뿐 아니라 그것을 모방하지 않고도 자체로서 그와 유사해진다는 점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을”8, 그러한 공간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씀과 동시에 지워질 그런 세계 속의 불확실한 주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 그 자체가 작품의 내재적인 공간 속에서 떠오를 바로 그런 공간 말입니다. 즉 작품이라는 공간을 대하면서 우리는 주체가 현재 속에서 지각하는 하나의 연결된 세계를 가정하면서 스스로를 재현하는 가장 적합한 대표를 가려내는 일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불확실한 관계가 작품이라는 내재적인 공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이것이 ‘세계’나 ‘동시대’가 아니라, ‘그때’, ‘유령’을 마주하는 김범과 정서영의 작품에 등장하는 무엇을 그저 ‘사물’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한 이유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김범과 정서영의 작품을 다룰 때 ‘사물’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를테면 정서영의 작품을 서술하는 ‘조각이 된 사물’과 같은 수사는 ‘사물’의 위상을 전통적인 ‘조각’이라는 장을 지탱하거나 확장하는 하나의 물질적인 구성 요소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정서영에게 ‘사물’은 두 가지 통약불가능한, 일견 모순적인 존재론에 걸쳐 있습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사물은 주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객체로서, “어느날 갑자기 맞닥뜨리는”9, 즉 불안한 대상이면서 동시에 그의 “무의식적이면서도 필연적인 가치 부여”10를 위한 대상입니다. 즉 그에게 사물은 전통적인 회화와 조각의 내부와 외부를 교란시키거나, 또는 매체 특정성의 논리를 해체하고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인식을 둘러싼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 도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물이 문제 삼는 공간은 회화사나 조각사와 같은 선형적인 서사가 가정하는 근대적인 조각의 공간이 아니라 세계 속의 주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입니다.




정서영, 〈무제〉, 1991. 복사, 잉크, 21x29.7cm. Ⓒ정서영.

90년대 초 정서영이 마치 과녁과 같은 형상 위에 무언가를 그려 넣은 일련의 드로잉 시리즈는 사물이 조각의 물질적인 구성요소가 아니라 주체와 객체 사이에 도전하는 무엇이었다는 의미에서, ‘사물’이 아니라 ‘그것’이라는 대명사를 통해 지시해야 할 대상이었음을 말합니다. 그 일련의 드로잉 중 몇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과녁이 무언가를 수로 환산해서 대상을 인식 가능한 장 속에 위치시키는 기술적인 장치라면, 그는 과녁과 함께 마치 소용돌이를 연상시키는 다른 인식의 체계를 동시에 인지하고 있습니다. 즉 과녁과 같이 닫힌 장치가 순수한 주체의 명징한 인식을 대변한다면, 소용돌이처럼 열린 차원은 그들이 유령이라고 말하는, 혹은 서동진이 “자율적이고 물질적인, 추상적인 시간”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주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객체로서의, 또는 존재로서의 위상을 표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드로잉을 살펴보면, 그에게 어떤 〈꽃〉은 이렇게 과녁과 소용돌이가 겹쳐지는 장소, 즉 주체의 인식과 객체의 자율성이 겹쳐지는 장소에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대상을 사물이 아니라 ‘그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즉 근대적인 조각의 장을 확장하는 기호로서의 사물, 혹은 하나의 세계에서 정체성을 대리하는 그런 사물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 사이에 구분에 도전하는, 바로 그 불확실한 위상으로 인해 그저 대명사를 통해서 그 불안함을 지시할 수 있을, ‘그것’ 말입니다.

정서영, 〈Two Different flowers 다른 꽃 두 개〉, 1997. 스폰지, 나무, 150x210x100cm, 작품 소실

이렇게 ‘동시대’가 아닌 ‘그때’를, 사물이 아니라 ‘그것’을, 즉 역사가의 습관을 벗어나 다른 언어로 말해야 한다면, 작품이라는 공간을 대할 때 비평은, 서동진의 말을 빌리자면 “개별 작품에서 작용하는 형식이 곧 내용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즉 상상적인 세계가 어떻게 재현되는지 작품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가 서로를 밀어내는 바로 그 세계 속의 불확실한 관계가 작품 속에서 어떻게 형식적으로 숨겨져 있는지 살펴야만 합니다. 서동진이 아도르노를 경유해, “사회 속의 예술의 내재성이 아니라 작품 속의 사회 속의 내재성”을 밝혀야 한다고 말할 때, 비평의 역할은 바로 이런 식으로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11을 읽어내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범, 〈부정(否定)Neither〉, 2008. 캔버스에 잉크, 22.5x30.5cm, 매일유업 소장

만약 그들이 마주한 세계가 주체와 객체가 마주하는 경계면과 같은 장소였고, 그들의 작품 속의 ‘그것’이 바로 그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불확실한 관계를 증언한다면, 우리는 이런 작품을 두고 ‘개념 미술’과 같은 역사가의 또 다른 습관에 더 이상 의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매우 거칠게 말해 개념미술이 미술사에서 단일한 매체의 역사를 뒤흔드는, 즉 물질보다 우위에 서는 번뜩이는 생각을 가리킨다면, 김범과 정서영에게 작품이란 공간은 주체의 생각과 객체로서의 물질 사이의 우위를 가려내는 일이 아니라, 그 위상의 높낮이를 분별해 내는 일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사건’ 혹은 ‘경계’로서의 장소에 가깝습니다. 이를테면 김범의 회화 작품 〈부정〉에서 주체는 이것이 캔버스가 아니라고, 그림이 아니라고, 영어가 아니라고, 잉크가 아니라고, 그런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그런 주체의 선언은 부정할 수 없을 객체의 물질적인 조건, 즉 캔버스나 그림, 잉크나 영어와 같은 객체의 단호한 부정을 마주합니다. 주체의 부정과 그 부정에 대한 객체의 부정으로서의 공간은 단일한 매체의 역사 안에서의 단순한 전복과 해체의 풍경이 아니라, 자신이 인지하는 세계와 유령과 같은 객체 사이에서, 주체의 언표와 객체의 부정 사이의 경계로서의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짧은 시간에 쏟아낸 방만한 논의를 이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의 상상적인 세계나 그 세계를 대리하는 사물, 그리고 그 사물을 개념적인 방식으로 활용하는 일은 김범과 정서영의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세계는 그런 곳이 아니었고, 세계 속의 사물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어느 누구의 승리나 우위를 말할 수 없을, ‘그것이 그곳에서 그때’ 떠오르는 장소였습니다.

이런 추상적인 이야기가 지금에 와서 무슨 소용이냐고 누군가는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드디어, 비로소 세계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초연결의 세계 속에서 누군가는 객체의 승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언젠가부터 수많은 전시의 제목을 점령한 인류세, 또는 새로운 유물론에 기반한 물질이나 객체와 같은 유행하는 어휘들의 목록이 이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객체의 승리를 주장하는 반대편에서 끈질기게 주체의 승리를 주장하는 담론도 있습니다. 개인의 감정이나 감성을 내세우면서, 더는 작품의 내재적인 공간 따위는 없다고, 그래서 비평은 이제 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사물의 민주주의나 물질의 네트워크를 주장하는 사람만큼 많습니다. 언뜻 보기에 에세이의 범람과 같은 현재의 풍경이 이를 증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김범과 정서영의 이 사유가 여전히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면, 어느 쪽의 승리를 선뜻 주장하기 어려운 공간, 그래서 점점 더 오리무중인 장소가 여전히도, 지금의 ‘세계’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아직은 세계가 아니라 ‘그때’를, 객체가 아니라 ‘그것’을, 나의 감성이 아니라 ‘그곳’을 좀 더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평에 여전히 장소가 있다면 작품의 내재적인 공간이 부단히 좇는 바로 그 공간을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석에 찬성한다: 장지한 비평가의 노트에 대한 응답

서동진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동진입니다. 2019년 SeMA-하나 평론상에서 장지한 비평가의 글을 읽고 심사를 하는 과정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요. 다시 오늘 집담회에 초대되어서 함께 대화를 나눌 기회를 마련해 주신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며칠 전에 장지한 비평가에게서 오늘 집담회를 위해서 마련한 간단한 노트를 전달받았습니다. 그 노트에 대한 저의 생각을 일종의 대화적인 응답의 형식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늘의 대화를 진행해볼까 합니다.

오늘 집담회, 대화의 혹은 응답의 제목은 “해석에 찬성한다”입니다. 왜 “해석에 찬성한다”일까? 여러분들은 금방 연상하시겠지만, 사실 이 제목은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12는 글에 대한 어느 정도의 부인이기도 하고, 또한 동시에 그 흐름의 어떠한 반대편에 서려고 하는 장지한 비평가 가진, 비평의 위상에 대한 어떠한 태도를 제가 지지하는 또 다른 형태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오늘 장지한 비평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김범과 정서영이라고 하는 두 명의 작가를 호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에 관련된 제 궁금증이 어느 정도는 오늘 좀 더 선명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1990년대는 한국 사회 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고무적인 시간들이죠. 1990년대는 정의되기 어려운 채, 그 이전 모더니즘의 시대로부터 컨템포러리 아트라고 하는, 동시대 미술로의 이행이 이루어진 시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1990년대의 모습을 알린 모든 작가들은 이행기의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이 이행기의 작가들이 모두 다 공통적으로 그 시대의 관계를 맺었을까?

우리가 1990년대를 흔히 이야기할 때, 한국 사회에서는 본격적인 소비자본주의가 도래했다는 점, 혹은 세계화와 더불어서 마침내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통합되었다는 등, 1990년대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회학적인 규정이 있습니다. 1990년대 동시대 미술의 등장은 이와 같은 사회적 배경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다. 소비자본주의 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감각과 감수성이 동시대 미술을 나타내게 되었다 등등. 흔한 이야기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와 같은 이행을 둘러싸고 있는 말끔하고 이음새 없는 이야기에 관해서 오늘 장지한 비평가가 무언가 어깃장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좀 들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이행의 시기에 긍정적 혹은 협력적 관계를 맺었다고 볼 수 있는 작가들이 있다면, 그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방식으로 동시대 미술이 출연하는 과정 안에 개입하거나 동승하는 작가들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겠죠. 그런 점에서 김범과 정서영이라고 하는 작가를 ‘1990년대의 작가들’이라고 부르는 이름으로 묶어버리는 것의 어색함과 어긋남 같은 것이 아마 오늘 장지한 비평가의 발표에서 제가 짐작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런 것이겠어요. 그렇다면 여기에서 김범과 정서영이 빚고 있는, 1990년대의 작가들 사이에서 두 작가가 빚어내는 동시대 미술 속 갈등의 기원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볼 때, 두 작가와 다른 이들 사이의 그 차이 또는 그 반발 또는 그 부정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 장지한 비평가가 그것을 규정할 수 있는 어떠한 비평적인 논거들을 제안했었는데요. 그에 관해서 저도 이어가면서 이야기를 진행해볼까 합니다.

먼저 굉장히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습니다. 비평가 장지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동시대성을 둘러싼 담론의 지형 속에서 작품이라는 장소가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고 시대의 요구가 아니라 작가의 사유를 들여다보고자 했다.”13 굉장히 흥미로운 진술이었고 또한 동시에 대담하게 말한다면, 사실 오늘날 금기에 가까운 어떠한 주장을 장지한 비평가가 제기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그런 비평가의 대담한 어깃장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물론 그것은 조건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저는 비평가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주관적 의지에 따라 작품이라는 장소를 개설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나는 작품이라고 하는 장소를 나 스스로 마련하고 있다.’ 이렇게 개인적 의지에 따라서 작품이라는 장소가 마련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이와 같은 ‘작품’이라고 불리는, 더 이상 지지할 수 없는 하나의 관념을 그가 다시 불러일으키려고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저는 어떤 글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었습니다. 이 글은 오늘날 작품이라고 불리는 것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어떤 조건들에 관련되어 있는, 저희들이 처하고 있는 어떤 정황을 묘사하고 분석하고자 했던 그런 글인데요. 인용해 보면 이렇습니다.

미술관에 있는 작품들을 두고 우리는 여전히 그것들이 예술적 객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을 실현하는 오브젝트라는 것에 귀속시킬 수 있을까. 예술가의 영혼과 상상력이 물질화되어 있는 객체, 즉 작품이라는 관념은 모더니즘 예술의 알파이자 오메가에 해당하는 관념이다. (중략) 그러나 현재 작품이란 것은 현실을 재현하는 추상으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일시적인 전시 이벤트를 위해 마련된 어떤 관념의 추상에 가까운 것이리라. 다시 말해 그것은 현실을 추상한다기보다는 전시라는 것이 진행되고 있다는 관념을 위해 봉사하는 추상에 가깝다. 따라서 그 작품이 다른 전시 이벤트에서 호출되는 행운을 누린다면 그것은 다시 그 전시를 위해 전시가 열리는 곳에서 제작되면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의 눈앞에 특정한 부피와 형태, 색채를 지닌 오브젝트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을 오브젝트 즉 객체가 아니라고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여전히 미술관은 그것을 창고에 보관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새로운 미술관 신축을 위해 그리고 신속하게 새로운 소장품으로 교체하기 위해 경매에 내놓을 수도 있다. 미술관의 수장고는 이벤트를 위한 새로운 아이템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14

여기에서 저는 장지한 비평가가 선택하고 있는 ‘사건’이라고 하는 관념, ‘이벤트’라고 하는 관념을 잠시 참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작품’이라고 불리는 관념은 이벤트, 즉 사건이라는 관념으로 대체되어 왔고, 여러분들 잘 아시다시피 모든 것들이 큐레이션 되는 현실에서, 미술 제도 안에서 작가보다 큐레이터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해도 좋을 형편이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작가보다 큐레이터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큐레이션 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상 ‘작품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 가치와 의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오브제의 미적 가치는 어떠한 방식으로 큐레이션 되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개인적인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작가’라고 불리고 있는 전설적인, 예술가적인 주체에 대한 생각은 거의 이제는 희미해져 가고 있는 상황 안에서, 마치 백화점에서 새로운 형태의 주제에 따라서 상품들을 큐레이션 하는 것처럼, 미술관 안에서도 동등한 일들이 펼쳐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럴 경우 사실 우리가 익히 알고 왔었던 작품이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저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고 봅니다. 이제 ‘작품으로부터 사건으로의 이행을, 우리는 겪어왔다’고 말이죠.

그렇다면 여전히 작품이라고 불리는 관념을 다시 부활시킬 수 있거나 혹은 소생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 걸까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평가 장지한의 생각은 작품에 대한 흔한 관념을 변경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비평하고자 하는 김범과 정서영의 작품이 그간 우리가 알고 있었던 작품이라기보다는, 주체나 작가, 저자(author), 아티스트(artist)라 부르는 이의 주관적인 의식과 관념과 상상이 드러나고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것(작품)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그런 식의 생각도 지속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외부’라고 부르는, 작가가 만들어 놓았던 일련의 작품들 속에서 공통된 스타일, 어떤 형식들을 발견함으로써 작품이라는 관념을 굳건하게 승인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와 같은 형태의 ‘작품’이라고 하는 관념을 지속시킬 수 없고, 과거 우리가 알고 있던 객체를 작품이라고도 할 수 없겠죠. 그러면서 장지한은 “이와 같은 작품이라고 하는 관념에 내가 순순히 동의하는 바는 아니며, 우리는 작품이라고 하는 것에 어떠한 의미의 변경을 꽤 해야 하는데, 그것이 사건을 일으키는 장소이자 경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일으키는 장소이자 경계, 공간적인 비율을 우리가 좀 더 유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건으로서의 작품’이라고 하는 생각은 사실 이율배반이 아닐까? 왜냐하면 작품이 소멸함으로써 사건으로서의 작품이 등장하고 있다면, 사실 작품과 사건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관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작품이라는 생각을 부인하는 것이 바로 사건 아니겠습니까?

1990년대 동시대 세대의 전환 이후로, 작품의 내부적인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고 그것이 처해있는 시대적인 사고와 의식 등등을 논하기 바쁜, 말 그대로 속류적인 사회학적인 비판들이 굉장히 난무해 왔었습니다. 장지한 비평가가 가장 커다란 경계심을 품고 있는 비평의 태도라고 할 만한 것은 바로―아도르노의 “창문 없는 단자”라고 하는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던 것처럼―어떠한 개별적인 작품에 대한 사회학적인 환원이고, 이를 넘어서서 작품의 내적 형식 안에 존재하고 있는 사회적 규정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을 계속 격렬하게 피력했었는데요. 그런 점에서 시대의 요구가 아니라 작가의 사유를 들여보고자 했다는 말. 말 그대로 이제 저자의 의도 혹은 작가의 상상력 등과 같이 우리가 저자의 죽음이라고 하는 소동 이후에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게 돼 있었던 관념을 그는 다시 되풀이하고자 합니다. 그런 점에서 굉장히 이 발언은 시대착오적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런 시대착오성이 굉장히 흥미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작가의 사회라는 말에는 왠지 마음에 끌립니다. 그것은 비평을 무색하게 만들었었던 한순간의 소동, 그것이 이제 의심의 해석학을 거부하는 데 모두 한계를 가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대 미술 비평의 언어를 과감하게 요약해보자면 크게 두 개의 추세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도 역시 여전히 비평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죠.

첫 번째는, 현상학적인 경험의 서술입니다. 예를 들어 대다수의 전시에서 우리 전시 서문을 읽을 때마다, 혹은 작가의 스테이트먼트를 읽을 때마다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사실 ‘나는 현실을 어떠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있고 어떻게 감각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작가이든 비평가이든, 그러한 비평적인 언어가 득세하게 된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감각과 경험, 특히 우리가 디지털적인 전환을 이루고 난 이후에 나타난 수없이 많은 매개된 감각들에 대한 저항으로서도 볼 수 있겠지만, 이와 같은 감각적 경험을 장황하게 서술하고 그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 사실 오늘 가지고 있는 전(前)비평적인 비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요.

두 번째는, 매체론의 득세입니다. 우리의 의식, 감정, 지각, 태도 같은 것이 이제는 모두 매개된 채 주어진다고 할 수 있을 텐데요, 특히 디지털적 전환 이후, 우리 주변에 매체론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으로 증대해 왔습니다. 이제 저자, 작가라고, 혹은 의식, 의미보다, 우리는 매체를 통해서 어떠한 개별적인 대상, 작품의 의미들이 형성되고 규정되고 변이되는가에 관련되어 있는 구구한 분석들을 보게 됩니다.

이런 비평의 추세를 요약해보자면, 전자의 경우를 하나는 주관주의라고, 하나는 객관주의라고 부를 수 있겠죠. 첫 번째는 현상학적인 경험이 묘사와 서술로서 정확하게 이어지고 있는 비평. 두 번째는 매체론으로 환원되어 있는 비평. 이렇게 주체와 객체가 매개된 것이 아니라 분리된 채 자립화된 것처럼 나타날 때, 저는 최근의 비평은 사실상 주체의 객체성, 객체의 주체성이란 것을 사실상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에 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던져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이 주체와 객체라고 불리는 미술 비평 안에서는 좀체 등장하지 않는 사실, 사변적인 현상학에 가까운 관념이라고 볼 수 있는 이 개념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 장지한 비평가의 태도가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장지한 비평가가 주장하는 암호와 같은 주체와 객체라고 하는 것이, 그가 새로운 형태의 존재론을 혹은 새로운 형태의 인식론을 미술 비평의 어떠한 토대로 정치화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발언을 일종의 허풍처럼 늘어놓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여전히 우리가 해석할 대상으로 작품이 존재하고 있다고 발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작품이라는 관념을 규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한 가지밖에 없을 텐데요. 그것은 작품을 해석되어야 할 대상으로서 정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자발적인 경험은 사실상 이미 모두 매개된 경험이고 해석된 경험이기 때문에, 그 해석된 경험으로부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험이 무엇을 억압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해석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다시피,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란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해석을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상적인 삶의 경험 안에서 억압된 무엇이 있다. 우리의 자발적이고 자생적이고 자연스러운 경험 안에서, 사실 우리는 유토피아적인 무엇을 가지고 있다.’ 프로이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리비도겠죠. 혹은 유토피아적인 욕망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이것처럼 우리는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는 경험을 단순하게 서술할 것이 아니라 그 주어져 있는, 해석되어 있는 경험 안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의 추가적인 해석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용어를 빌리자면 “메타코멘터리(metacommentary)”15라고 부를 수 있는 비평을 부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오늘 장지한 비평가의 주장 혹은 발언이 이와 같은 메타코멘터리에 가까운 비평을 다시 게시하기 위한 대담한 주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려웠습니다.

제가 장지한 비평가와 대화하고 싶은 대목에는 또 이와 같은 쟁점이 있습니다. 장지한 비평가에 따르면, 그들의 작품에서 사물은 매체 특정성의 논리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의 주체와 객체의 위상에 도전합니다. 최근의 비평에서 미술 비평 안에서는 등장하기 어려운, 어쩌면 껄끄럽다고도 할 수 있는, 이미 사변적 개념으로 낙인이 찍혀 있는 주체와 객체라고 불리는 관념을 그는 다시 끌어들입니다.

저는, 그가 조각에서 사물로의 이행 혹은 확장이라는 논리를 들어, 김범과 정서영의 작업을 해석해 왔었던 그간의 논리, 개념미술을 둘러싸고 있는 흔해빠진 관념들을 예로 들어서 김범과 정서영의 작품의 해석이 완결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으로 읽었습니다. 그렇다 치면, 비평가 장지한은, 김범과 정서영을 조각의 매체의 특정성을 위반하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다른 지형 위에 놓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그것이 주객의 이분법에 저항하는 것으로서 자리매김 되어야 할까요?

매체론이 마뜩잖아하는 것은, 그것이 너무나 객체적인 수준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즉 작품의 존재 조건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것, 그것은 매체를 통해서 의미가 일시적으로 규정되고 분배될 뿐이라는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정서영과 김범이라고 하는 두 작가 주체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하고자 했던 일은 은밀히 뒷문으로 다시 주체를 끌어들이려고 하려는 것일까? 물론 그럴 리가 없겠죠. 그가 주체-객체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했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헤겔이 ‘주체는 실체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주체는 객체’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래서 그 이원론을, 이원론적인 대립을 해소했다고 그 스스로 주장하는 것일까? 이 점에서 저는 이데올로기론이라고 하는—다시 한번 말하자면 여기서 ‘이데올로기론’이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미적인 장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데올로기, 즉 미적 이데올로기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그가 비평의 난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실은 비평이 깃든 미적 이데올로기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이데올로기론이 가지고 있는 위상학적(topological)인 특성들을 한번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간략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흔히 이데올로기론을 그릇된 의식이나 관념 같은 것으로 환원하기도 합니다. 혹은 대담하게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돌파에 의해서 주장되었던 것처럼, ‘이데올로기는 의식이 아니라 바로 객체의 편에 서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저 유명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16라는 논문에서 말했던 ‘장치’라는 관념은 곧 객체에 관한 담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체이면서 객체이며, 그 둘을 동시에 발생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앞서 장지한 비평가가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을 넘어서야 한다고, 혹은 주체와 객체가 서로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돼 있다고 이야기할 때, 그의 주장은 ‘주체와 객체’라 불리고 있는 것을 소멸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것이 항상 동시에 발생한다는 생각을 전하고자 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언급할 때, 그 관계를 명명하거나 정의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개념은 경험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적 경험이라고 불리는 것, 그런 경험이 어떻게 발생하는가, 그리고 미적 경험은 어떠한 종류의 경험을—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억압하는가를 규명해야 되겠죠. 그런 점에서, 이데올로기론에서 가장 탁월한 예가 물신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신주의는 객관적 추상으로서의 상품의 위상에 관한 담론입니다. 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난센스로 가득 차 있죠. 왜냐하면 우리는 추상을 머릿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의식의 과정이거나 관념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로 여깁니다. ‘상품’과 ‘화폐’라고 불리는 것은 현실의 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추상적인 작용입니다. 무언가 주관적인 것도 아니면서도 객관적인 것도 아닌,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감각적이면서도 초감각적인, 또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유령과도 같은 객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지점에서 마치 장지한 비평가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유령’이라고 불리는 개념을 끄집어내서 김범과 정서영이라는 두 작가를 관통하고 있는 작품의 이상이라고 할 만한 것에 적절한 주의를 부여해 줍니다. 작품이 정서영과 김범의 작품에 어떠한 위상학적인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유령적인 대상성입니다.

주관적 의식과 상상의 표현으로서의 작품, 혹은 물질적인 대상으로서의 작품,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아닌 신비한 위상을 갖고 있는 작품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장지한은 지금 개념미술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을 둘러싼 우리의 통념 안의 김범과 정서영을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199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우리의 경험의 지평 안에서 무언가 수상하고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자각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의식이나 혹은 관념이나 혹은 상상의 표현으로서도 혹은 더 이상 다른 종류의 대상과 구분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문화와 경제의 경계가 사라져 버리게 되었을 때, 우리가 모든 상품을 미적 대상처럼 다루게 되었을 때, 작품이 가지고 있었던 어떤 것, 즉 작품이 가지고 있는 미적인 ‘주의(主義)’라고 할 만한 것은 심각하게 훼손되고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때를 ‘이행기’라고 부를 수 있다면, 1990년대라는 이행기의 김범과 정서영 작가를, 작품이 가지고 있는—끊임없이 도모할 수밖에 없는 위상—지위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했었던 작가로, 장지한 비평가는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당대에 우리가 모두 환영했었던, ‘새로운 종류의, 경험의 세계가 열렸다’고 이야기했었던 1990년대 이후, 말 그대로 소비자본주의의 환상 속에 우리가 급류처럼 휩쓸려 들어가게 되고 열거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형태의 환상과 기쁨을 맛보게 되었을 때, 왜 그들은 그것을 불편하게 여기게 되었을까? 우리는 이에 대해 한 번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소비자본주의의 만연과 개념미술의 등장 사이에서 의미심장한 연관을 보는 여러 비평들을 한국의 맥락에서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이지요.

‘장소’라고 하는 위상에 관련해서 비평가 장지한이 들려주었던 이야기에 저도 얼마간 덧붙이자면 이럴 것 같습니다. 비평가 장지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술의 세계화는 제도적인 장치의 이해관계와 너무나 가깝거나(내셔널 브랜딩,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혹은 실제 세계와 너무나 먼(도상학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기호로 가득한), 두 가지 층위의 재현적인 질서(two orders of representation)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그가 보기에 전자의 ‘제도적인 차원(institutional matter)’, 그리고 후자의 ‘도상학적인 차원(iconographic one)’은 방법론적으로 우리에게 ‘스케일의 문제(a problem of scale)’를 던진다. 오직 줌인과 줌아웃을 반복할 뿐인 담론의 질서 속에서 미술의 세계는, 세계 속의 미술은 어떻게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17

“‘스케일의 문제’를 던진다.” 굉장히 재미난 표현인데요. “오직 줌인과 줌아웃을 반복할 뿐인 담론의 질서 속에서 (후략)”라고 말할 때, 줌인과 줌아웃은 시점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튜브에 있는 수없이 많은 영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크게 두 개의 시점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셀카로 자신을 보여주고 있는, 과도하게 노출되어 있는 클로즈업의 영상, 아니면 뜬금없이 반복되고 있는 드론 뷰 영상 같은 것이죠. 드론 뷰는 우리에게 거의 선험적으로 많은 것을, 넓은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런 드론 뷰의 시점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또 더 잘 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물론 클로즈업도 그러합니다.

클로즈업은 더 가까이 바짝 다가서서 봄으로써 우리에게 세밀한 세부까지를 모두 볼 수 있다는 신뢰를 만들어주죠. 이와 같은 크로즈업과 드론 뷰로 대표되고 있는—장지한 비평가의 표현을 빌리면, 스케일의 문제가—이 두 가지 수렴할 수 없는, 평행한 듯이 보이고 있는 두 개의 시점은, 과연 우리가 세계를 상상적인 이미지로 만들어 내는 데 있어서—혹은 과거의 표현을 들자면 세계를 재현하는 데 있어서—적절한 것일까?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과연 휴먼 스케일로 알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종류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 질문을 이렇게 한번 바꿔보고 싶습니다. 동시대 예술이 직면한 가장 큰 곤란을 꼽자면, 그것은 인지적 지도 그리기에 대한 어려움이라고요. 개인의 현상학적인 경험의 서술과 표현을, 전 지구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인식과 함께 결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 이것을 인지적 지도 그리기 이야기라 부를 수 있을 텐데요. 현재 그것의 가능성은 현저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고백이나 증언이나 해석이나 트라우마 등의 형태를 띤 서사들, 즉 개인이 가지고 있는 현상학적인 경험들을 폭발적으로 증대하고 있고, 또 이를 지원하고 있는 미시사나 구술사와 같은 서사적 형태가 미술 작품 안에서도 성가를 드높이는, 말 그대로 아카이브적인 전환이라고 할 만한 동시대 미술의 경향이 이와 같은 것을 나타낼 텐데요. 우리는 이와 같은 변화를 속수무책의 시선으로 계속 바라봐 왔습니다. 이런 현상은 매우 징후적인데, 이를 간단하게 ‘신자유주의의 개인화가 이루어져서—사회주의식으로 과거처럼 계급이라든가 민족과 같은 주체들을 대신해서—자기계발하고 있는, 원자화되어 있는 개인들의 네트워크의 세계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럴 것이다.’라고 손쉽게, 사회학적 효과로 환원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우리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 소셜미디어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요. 여기서 ‘소셜’이라고 하는 것은 원자적인 개인들의 네트워크라는 의미에서 ‘더 이상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아이러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소위 ‘부캐’ 같은 유행어 등에서 짐작하듯 ‘계정 자아’라고 하는 주체의 자기 서사가 가장 지배적인 서사 형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식으로 이를 간단히 치부할 수는 없는 거죠.

이는 자본주의 지배의 가공할 만한 추상성과 보편성이 제기하는 인식론적이면서도 미학적인 곤란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개인의 경험이 세계 자체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구조에 대한 경험과 더 이상 매개되지 않게 된다’는 근본적인 곤란—혹은 인지적인 지도 그리기의 미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의 어떤 곤란—을 가리키는 것이겠죠.

그런 점에서 저는 휴먼 스케일이라고 불리고 있는—아까 이야기했었던 ‘그것’, ‘그때’와 같은, 말 그대로 누구나 이 발언을 들었을 때 머릿속에 연상하는 것, 어디선가 들어본 그것은, 무의식이라는 개념으로서—개념적 세례를 받기 전에 프로이트가 ‘Es(그것 또는 id)’라고 칭했던—우리나라에서는 흔히 ‘그것’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인 위상은, 특별하게 주어져 있는 실체가 있는 것이 현재의 경험이 존재하기 위해서 억압되어야 했었던 것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객체도 아니고 주체도 아닌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장지한 비평가가 김범과 정서영 두 명의 작가를, 한국 현대미술로 알려져 있는 작가들이 갖고 있는 흔한 비평적인 어휘의 안에 그들을 가두지 않고, ‘1990년대라고 하는 이행 시기에 존재하고 있던, 우리가 가지고 있던 미적 경험의 세계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그때 분열되었으며, 또 그 경험들을, 그 경험들이 가지고 있었던 변형을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미적인 형태로 드러내야 하는가.’ 이 문제에 천착해, 이 두 명의 작가를 새롭게 해석할 필요들을 제기했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가치 있는 비평적인 시도를 감행하고 있음을 이야기해 주고 싶습니다.

*2021 한국 현대미술비평 집담회를 위해 사전에 작성된 장지한, 서동진, 두 발표자의 원고를 그대로 옮겼으며, 부분적으로 녹취 내용을 더했습니다.

부분 기록과 편집 김진주

[편집자 주] 장지한 쓰고 엮음, 『그것이 그곳에서 그때: 김범과 정서영의 글과 드로잉』(서울: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 2021). 이 책은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출판되었다. ↩

[편집자 주] 이 내용이 발표된 2021 한국 현대미술비평 집담회 (2021.12.16.) 시점에서 말한 것이다.  ↩

아를레트 파르주, 『아카이브 취향』(서울: 문학과지성사, 2020), 158-159.  ↩

서동진, 「연결에서 벗어나기(de-linking): ‘글로벌 아트’와 세계 체제」, 2021년 11월 17일, http://homopop.org/log/?p=1778#more-1778. ↩

앞의 글. ↩

서동진, 『동시대 이후: 시간-경험-이미지』(서울: 현실문화연구, 2018), 29. ↩

김범, 「무제」(1995), 『그것이 그곳에서 그때』, 17. ↩

서동진, 『동시대 이후: 시간-경험-이미지』, 106. ↩

정서영, 「사물에의 가담과 투사에 의한 조각 작품 제작 연구」(1989), 『그것이 그곳에서 그때』, 182. ↩

앞의 책, 193.  ↩

서동진, 『동시대 이후: 시간-경험-이미지』(서울: 현실문화연구, 2018), 106-108. ↩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이민아 옮김(서울: 이후, 2002). ↩

장지한, 『그것이 그곳에서 그때』, 11-12 참고. ↩

서동진, 「미술관은 금융시장인가?」, 2020년 12월 5일, http://homopop.org/log/?p=1649. ↩

Fredric Jameson, The Ideologies of Theory (London and New York: Verso, 2008), 5-19. ↩

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연구를 위한 노트」, 『레닌과 철학』(서울: 백의, 1995), 135-192. ↩

장지한이 2021 한국 현대미술비평 집담회를 준비하며 쓴 노트의 일부분이다. 여기서 ‘그’는 미술사가 Pamela M. Lee이며, 그의 책 Forgetting the Art World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2012), 8-17을 참고하라. ↩ 

장지한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빙엄턴)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9년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그것이 그곳에서 그때: 김범과 정서영의 글과 드로잉』(서울: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 2021)이 있다.

서동진 문화평론가. 계원대학교 융합예술학과 교수이다. 시각예술과 자본주의의 문화/경제에 대한 비판적 연구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 저서로 『자유의 의지 자기 개발의 의지』, 『동시대 이후: 시간-경험-이미지』 등이 있다. 

http://semacoral.org/features/2021-art-criticism-discourse-jangjihan-seodong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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