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Praise of Inaction 무위예찬(無爲禮讚)

 

May 13 - Jun 12, 2016

Kukje Gallery, Seoul

www.kukjegallery.com

국제갤러리는 한국의 대표적인 중견작가인 우순옥의 《무위예찬(無爲禮讚)》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지난 2011년 국제갤러리에서의 개인전 이후 5년 만에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으로 신작을 포함한 드로잉, 영상, 텍스트, 설치작품 등 12점을 K1에서 선보인다. 작가의 관조적 세계관과 예술관으로 ‘무위사상’을 재해석하는 《무위예찬》전은 과잉과 성과주의가 만연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본질에 관하여 질문을 던진다.
 
우순옥은 시간이나 공간과 같은 비물질적인 개념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현하는 작업을 한다. 작가의 재현으로 소환된 사라진 장소와 기억, 부재하는 대상 등은 관객에게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과거에 했던 작업이나 과거 전시 장소였지만 현재에는 사라지거나 잊혀진 공간을 불러오는 작품을 선보인다. 예를 들어, 1983년작 유화 <침묵의 바다>는 세월의 흐름을 담은 오브제 <시간의 그림>(1983/2016)이 되었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된 구(舊) 기무사에서의 작업 <온실>(2009)은 작가의 지난 예술적 여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시간과 공간을 순환하는 개념으로 인식하는 작가의 ‘무위사상’을 드러낸다.   
 
작가가 재해석한 ‘무위사상’은 이번 전시를 위한 신작에서 다양하게 변주한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발췌한 문구인 “Form is emptiness, Emptiness is form (色卽是空 空卽是色)”을 갤러리의 창문에 붙인 텍스트 작업 <무위의 정원>(2015/2016)은 안과 밖의 경계를 넘나들며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탐구한다. 또한 2008년 폐쇄된 후 개발하는 대신 시민들을 위한 공원으로 사용되는 베를린의 템펠호프 공항의 모습을 담은 <파라드로잉>(2014/2016)은 있는 그대로 두면서 발견할 수 있는 무위의 자유를 나타낸다.    
이번 전시는 이외에도 각자가 오롯이 감내해야 하는 인생의 여정 속에서도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따뜻한 메시지를 전한다. 영상작품 <무위의 풍경>(2014)에서 보이는 페터 춤토르의 브루더 클라우스 경당으로 이르는 구불거리는 길은 누구나 어딘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굴곡진 과정을 겪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경당의 내부에서 촬영된 (2014)는 명상의 개념이 건축으로 구현된 공간에서 작가가 경험한 감동을 관객들과 공유한다.

The Garden of Inaction, 2015/2016
Text on the window, Dimensions variable


The Landscape of Inaction, 
2014
Video,10 hr 26 min
Painting of Time, 1983/2016
Oil on canvas, thread, wrinkles by time, 142 x 121 cm

Untitled, 2016
Drawing with golden thread, 160 x 100 cm


Exhibition catalog
U Sunok: In Praise of Inaction















초연(超然) 풍경

우순옥 작가의 회화 작품 <침묵의 바다>(1983) 우연히 발견되어 이번 전시에 <시간의 그림>(2016)이라는 설치 작품이 되어 놓여 있다화폭의 주름으로 누적된 33년의 시간은 문득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작품은 덧붙여진 것이 없으므로 아무런 새로운 의미도 갖지 않거나또는 기나긴 시간을 관통해   작가의 지난 삶과 나란히 병치되면서 해독불가능한 깊은 비의(悲意) 얻게 된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아무런 말도   없다우리와 같은 시간 동안 저기에 무언가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아득해지는가.

중요한 일은 의지에 상관 없이 일어난다탄생과 죽음이 갑자기 도래하듯풍경과 만남도 그렇게 찾아온다내가 목격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지각과 정서가 우리에게 사건처럼 일어난다말하자면사람은 주격(“I”)이라기보다 여격(“to me”) 것이다인간을 주체로 내세웠던 지난  세기의 유럽을 제외한다면 사실은 대부분의 시기에 대부분의 인류에게 당연한 일이었다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사실을 긍정하는 것으로 우리의 삶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는 것일지 모른다성숙해지는 인생의 후반부에 우리가   있는 일은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있는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있다그런데 이러한 긍정의 이면은 무엇인가우리의 현대 문명이 공인하고 있지는 않지만각자에게 은밀한 비밀처럼 찾아오는  이면을 우순옥 작가의 <무위예찬> 가리킨다.


초월론적 풍경

사람들이 이별의 고통을 서로 토로하고 위로하는 장면을  적이 있다인상적인 것은 어떤 대조였다모든 사람들이 개별적이고 환원불가능한 고통을 호소하는 반면이들이 겪은 사랑과 이별의 과정 자체는 냉정할 정도로 서로 유사했다이처럼 사단칠정의 혼란스러운 일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처럼 지구  여기저기에 쏟아지고 있었다개별적인 경험들 너머에 보편적인 정서가 차가운 폭탄처럼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내가 길을 걷고 말을 하고 빠져들기 위해서는풍경 자체가 있고언어 자체가 있고사랑 자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후자가 펼쳐지는 장소를 “초월론적 ”(champ transcendantal)이라고 부르자우리의 삶이란 이러한 초월론적 장의 이곳 저곳을  십년  여행하는 일이다그래서 우순옥 작가는 이전 전시들에 이어 이번 전시에 다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다(이번 전시, <잠시 동안의 드로잉>(2011), <Empty Space Moving>(2007) 작품들). 그녀가 말하는 여행은 여행사에 위탁할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문학이나 철학이 그런 것처럼예술도 경험적인 것에서 이러한 초월론적인 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이다

작가의 예술론이 성립하는 지점은 이곳이다그녀에게 예술은 이런 초월론적 풍경을 발견하는 작업이다그녀가 작성한 텍스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을 꼽자면 아마 이런 대목일 것이다. “나는 그림이 (…) 우리 마음 속에 이미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지각이라고 생각한다”(<잠시 동안의 드로잉>, 2011, 90). 우연히 어떤 공간을 마주치고 애써 어떤 장소를 찾아가는 일은 중요하지만그것은 이런저런 흥미로운 사물과 정물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작가에에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원초적인 풍경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메를로-퐁티(Merleau-Ponty)처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인간과 풍경은 아득한 옛날에 함께 태어난다 갈래로 갈라지는 분수의 물줄기처럼 말이다인간은 누구나 원초적인 풍경을 가슴에 담고 태어나고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풍경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다그래서 작가는 작품을 통해 이렇게 설득한다. <예술은 이미 당신의 마음속에 있다>(<잠시 동안의 드로잉>). 삶과 예술의 공외연성을 함축하는  정언명령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고현대예술에서 그다지 새로운 말이 아닐지 모른다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자기만의 중요한 함의를 덧붙인다근원적인 풍경을 배태한 채로 삶은 시작되고예술은 그러한 삶이 품고 있는 풍경을 멀리에서 불러와 다시 펼쳐놓는 것이다우리는 자연(自然너머에 있는 그러한 풍경을 <초연(超然) 풍경>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이것은 상관적으로 목격자에게 초연한 자세를 요구하고 그러한 태도 안에서만 피어 오른다.

작가에게 형태를 수립하기 위한 의지가 거의 없는 것은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앞서 말했듯이작가에게 그림이란 우리가 선택적으로 바라보는 사물의 형태를 옮기는 일이 아니다차라리 그녀는 창밖을 미술관으로 끌어들인다(<무위의 정원>).  나아가 집을 미술관처럼 사용했던 이전 전시에서 벽에 캔버스처럼 구멍을 내기를 선택한다이를 통해 도시를 오래 전부터 내려다보고 있던 산의 풍경화를 제공한다(<Hanok Project – Warm Wall 2>, 2000).  산들의 이미지가 언제나  바깥에  닿고 있었지만마치 우리의 의식이 집의 오래된 벽과 같아두꺼운 습관에 둘러싸여 우리는 그것을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일상적인 의식을 멈추어 세울 수만 있다면우리는 언제든 근원적인 풍경을   있을 것이다우리는  작품의 그녀를 ‘() 세잔(Cézanne)’이라고 말할  있을까.


근원적인 그리움

어떤 그리움이 작가를 끊임없이 초월적인 추구로 몰아가는 것은 분명하다작가는 “근원적인 그리움”(<잠시 동안의 드로잉>, 91속에서 초월적인 풍경비의적인 문장들비인칭적인 정서를 찾아 떠난다그것은 그리움이지만직접적으로 다른 사람을 향해 있지 않다는 점에서 구체적인 그리움이 아니다오히려 (희망적으로는타르코프스키(Tarkovski) (비관적으로는안토니오니(Antonioni) 영화에서처럼 인간의 밀도가 극소해질 때에만사람들 사이를 연결하는 순수한 정서와 풍경을 겨우 되찾을  있을 것이다사람들로 되돌아오기 위해서 사람들을 헤치고 떠나게 만든다는 점에서그것은 작가의 예술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인” 정서이다우리 역시 문득 그리움에 밀려 사람 없는 풍경 속으로 떠날 때가 있다면작가의 말처럼 “예술은 이미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작품 <Microhome – !>(2006) 그리움의 목소리들로 가득하다하지만  작품은 발화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최소화하고 풍경 속의  점으로 밀어넣으면서 정서의 개별적이고 인칭적인 측면을 지운다목소리들은 비개별적이고 탈인칭적인 것이 되면서 화면과 공간을 전방위적으로 채운다스크린 안에서 발화의 지점(point of sound) 모호해지는 그만큼 관객은 그리움의 순수 정서들이 만들어내는 장으로 더욱더 이끌려들어간다.

그리다라는 우리말이 ‘그리움이라는 정서와 ‘그림이라는 작업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미술이란 현존의 재현이 아니라 부재의 기억과 관련된다는 데리다(Derrida) 유명한 분석을 언급하지 않더라도우리말의 어원은 이러한 사정을 이미  보여준다우리는 그리운 것을 그리는 것이다또는 마음 속에 그리는 것이  그리운 것이다작가의 시선이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사물들을 넘어 수평선 너머의 풍경을 그리워할 그녀의 작품은 이러한 예술론과 조우한다.

이러한 관점에  이번 전시를 관통하고 있는 조형적 구도를 이해할  있다이번 전시에서 더욱 뚜렷해지고 있는 구도는두세개의 수평선과  개의 수직선이 교차하는 것이다. <시간의 그림>, <Microhome – !>, <Empty Space – 우리는 모두 여행자많은 작품들이 이러한 구도를 공유하고 있다아마도 이러한 시선은 작가가 세계를 종합적으로 지각하는 방식일 것이다 너머의 수직선은 작가가 도달하고자 하나 무한히 지연되는 초월적인 지점을그리고 이편의 수평선들 사이의 공간은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유희하고 분투해야 하는 여정을 나타낼 것이다. <무위의 풍경> 여정의 체험 자체를 무한히 연장하면서 사이의 시간을 현시하고, <Empty Space – 우리는 모두 여행자> 수직적인 지점에 텍스트를 기입함으로써 초월적인 도약의 의지를 드러낸다.

초월을 향한 부단한 여정이란 표현은 평범하거나 심지어 진부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의외로 분명한 예술적 방법론을 함유하고 있다작가의 화두라 할만한 반야심경의 “색즉시공공즉시색 실체론적 형태가 모두 해체되는 극단적 지점을 보여준다작가가 자주 꺼내보는 틱낫한 스님의 해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종이  장에는 햇빛나뭇꾼구름이 모두 들어있다왜냐하면 종이  장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있어야만 하고그렇지 않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이런 의미에서 종이는 비어있고그것은 자기 아닌 다른 모든 요소들로 가득차 있다.

작가의 작품들이 형식적인 측면에서 겨우 존립하거나인간의 밀도가 극단적으로 낮거나바깥의 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안팎이 뒤바뀌어 있거나작가의 인위적인 작업보다 시간이 만들어내는 무위의 몫이  커보이는 이유는 이러한 방법론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다작품들은 모두 바깥을 끌어들이기 위해 놓여 있다예술은 삶을미술관은 풍경을목적지는 여정을화폭은 습기를밝은 목소리는 견뎌온 시간을 향해 놓여 있다.

 나아가반야심경의  구절은 근본적인 존재론적 평등성에 도달할 것을 요구한다어떤 사물이든그것은 다른 모든 것이 모여드는 비어 있는 그릇과 같은 것이고따라서 모든 것은 자리를 바꿔가며 스며드는 동등한 것이기 때문이다작가는  생각을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작품으로 만들었다. <사물의 질서>(1989/2016)라고 부제가 명명된 제목 없는 설치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이질적인 지점을 형성한다이차원적인 평면으로 구성된 다른 작품들과 달리삼차원의 공간 안에서 무질서하게 사물들이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런 이질성은 사실 관객에게 하나의 문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길 암시하고 있다 수수께끼의 답은  지점이다어떤 지점에 관객이  매달린 사물들은 서로를 가리는  없이 이차원의 평면 위에서 놓인 것처럼 동등한 위상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현재완료형의 깨달음

색즉시공의 설법은 실천적인 깨달음으로 이어진다종이  장이 사실 햇빛나뭇꾼구름이었다면마찬가지로 각각의 모든 사물이 그것 아닌 모든 사물들이 모여드는 자리라면 역시  아닌 다른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이런 의미에서 작가가 이전 전시에서 보르헤스(Borges) 인용한 것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칼날이었다나는 강의 물방울이었다나는 빛나는 별이었다… I have been a sword in the hand / I have been a drop of water in a river / I have been a star…” 이렇게  작가의 작품에서 반과거 시제의 지표(index) 떠올리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오히려 그녀의 작품들은 현재완료형의 깨달음을 함축한다나의 모습이 과거 어느 때부터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관계와 흐름들 속에서 형성되어온 존재라고 깨닫는 것이다이것이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개의 시간 사이에 우리를 위치시키는 이유이다우리는 작가가 대학원 시절에 그린 그림과 최근에 새로 찾아간 경당 사이에 위치하거나(<시간의 그림> <Silence, Please>), <Microhome – !>에서 자연 안에 묻힌 발화자들에게서 십수년간 견뎌온 시간들이 있있음을 듣게 된다그러므로 이것들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사진론처럼 어떤 형태가 거기 있었다는 흔적이 아니다우리 스스로가 어떤 시간을 견뎌온 존재들이고 시간 속에서 생각치 못하게 여러 요소들이 흘러들어와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그동안 저멀리 있었던 그런 것들이었구나하고 깨닫는 것이다.

아니 글의 시작에서 주저한 것처럼다시   주어를 고쳐 적어야겠다 모든 것들이 모든 시간들이 나로 모여들고 흘러 나가는 것이다이리하여 그리움은 나의 근원에 흐른다모여들고 흩어진 것들과의 관계가 나를 지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나의 깊은 곳에서사라져간 모든 것들을 그리워하면서도딱히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말할  없게 된다우리가   있는 일이란사물들을 모아 그것들이 평등하게 보이는 지점에 서기 위해 노력하거나 개의 시간 사이에 놓여 망연자실하거나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기억 불가능한 지각을 되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뿐이다. <무위예찬>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우순옥 작가의 작품들은 이런 작지만 깊은 행위들을 우리에게 전달한다예술과 삶이 일치하는 소실점 안에서 작품의 형태가 거의 사라져간다 해도세계의 계절을 바꿀 어떤 지각을 예찬하는 태도만이 고요히 남는다.

이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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