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예총 미학 포럼 kpaf.org
- 2001_0129
-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강당, Seoul
취지_한국현대 예술을 미학적으로 점검하면서 21세기 진로를 모색하는 대단원의 미학포럼을 구상하는 차원으로 이번 포럼을 준비하게 되었다.
뉴미디어 시대의 미학적인 발전방향을 이번 포럼을 통해 잡아가길 바라면서, 한국 미학계의 전문가들을 주축으로 뉴미디어 시대의 미술운동, 영상운동, 영화 운동 등의 미학적 발전을 모색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총론_뉴미디어 시대 한국 예술운동의 미학적 과제_심광현발제 1_한국 영화 르네상스 시대의 영화 미학_황동미발제 2_뉴미디어 시대 미술운동 장르의 확산과 미학_이영준지정토론_임정희_전찬일_박찬경 (사회_이영진)
뉴미디어시대의 미술운동 장르의 확산과 미학
● 우선, 미술운동이란 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그런데 발표를 하기에 앞서서 나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더 이상 모든 것을 감싸 안을 수 있는 보편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위치에서 특정한 입장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미술운동이라는 거대담론의 권위와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뿐 아니라, 과거 막연한 동조자, 지지자로 생각하고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런 미술운동이 아니라면, 각자가 생산하는 담론의 특정한 위치를 스스로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사실 80년대의 미술운동의 열기가 사라진 지금 나 자신의 입장은 더 이상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가하는 활동가는 아니다. 물론 과거에도 한번도 활동가는 아니었으되, 미술운동의 뒷자리를 지키면서 이론적, 비평적 담론을 대는 부수적인 위치에 있었을 뿐이다. 미술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그랬었다. 이제 상황이 많이 바뀐 2000년대에 와서 새삼스럽게 미술운동을 말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많은 당혹감을 가져다 준다. 우선 무엇보다도 현재 일어나고 있는 조직화된 형태로서의 시민운동이나 미술운동과는 거리를 띄우고 있는 방관자나 구경꾼의 입장에서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기설정을 분명히 해야 할 때라고 본다. 과거와 같이 막연한 동지애, 막연한 연대만으로는 활동도 할 수 없고 살아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즉 이 발표는 어디까지나 구경꾼의 입장에서 하는 것이지, 미술운동에 대한 어떤 전망을 가지고 과제를 제시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제시하고, 그 경로를 다시금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새로운 운동력의 재생산으로 이끌 수 있는 위치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다.
● 그렇다면 오늘날의 미술운동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까? 사실 미술운동이라는 것이 과연 아직도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그 유효성은 무엇일까를 따져보는 것이 우선 필요한 일일테지만 그것을 다 얘기하는 것은 이 발표의 범위 밖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의 미술운동은 80년대와 같이 조직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라, 개별화되고 분산, 파편화된 상태에서 사고와 감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움직임들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여전히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왜냐하면 운동이라고 했을 때는 우선 목표가 있고, 목표를 향한 전망이 있을 것이고, 그 전망을 실천하기 위한 방안들이 있어야 하고, 그것들은 단순히 실용적으로 실천되는 것이 아니라 이념적이고 방향성이 있어야 하며, 즉 진보성을 띠어야 하며, 그것은 조직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지금 느슨하게 정의하는 운동은 그런 틀에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 뉴미디어 시대에 와서는 이 모든 개념에 혼란이 오는 것이 사실이다. 즉 목표, 전망, 실천, 전략, 전술, 진보성, 조직 이 모든 개념이 뉴미디어 시대에 와서는 과거의 의미를 잃었거나, 아니면 급격히 새로운 의미의 틀을 필요로 하고 있다. 사실 이 단계에 와서 필요한 논의는 과거와 같이 이런 식의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라고 설정해 놓은 틀과, 뉴미디어가 다가가고 있는 사용자/수용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세하고 급격한 변화가 어떤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바로 여기에 운동대중과 그 밖의 대중 사이의 경계를 긋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이 시점에서 전위적인 조직이 대중을 견인하거나 추동하는 형태의 운동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말은 다시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따라서 여기서는 미술운동이라는 것을 광범위한 시각문화의 전 영역에 걸쳐서 다양한 매체와 제스처를 통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양상의 변화들, 그 진동들,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공간과 개념, 코드의 집합이라고 설정하고 싶다. 즉 어떻게 보면 에이전시(agency) 없는 운동이라는 좀 기묘한 정의가 될 것 같다. 그런 속에서 여러 가지 변화의 패러다임은 나타나고 있다. 단지 문제는 그 주체가 과거와 같은 소수의 전위적인 집단이 아니라, 분산되고 파편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 문제는 어떤 주체가 나설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시각문화의 조건이 어떤 주체를 형성하고, 그 주체는 그런 조건에 다시 어떤 식으로 피드백을 가하는가 하는 순환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미술운동의 한 축은 대중적 영역에서 급격히 변화하는 시각환경의 다이나믹과, 거기에 개입되어 있는 문화정치적 맥락이다.
● 뉴미디어의 확산이 가져오는 효과 중의 하나는 과거의 전통적인 미디어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이상적인 소통상황에 대한 꿈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집단 사이의 층위화와 블록화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를 사용하여 채팅을 하는 10대나 20대의 언어와 습관을 40대는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소통의 코드와 프로토콜을 공유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뉴미디어는 그런 층위화와 블록화를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럴 때일수록 불특정다수의 대중을 대상으로 했던 과거의 운동과는 달리, 현재의 운동은 대상층, 즉 관객층, 독자층이 어떤 층위에서 오는지, 즉 누구를 향해 말을 하고, 어떤 말이 어떤 층위의 관객에게 어떤 효력을 가져오는지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 그런 면에서 과거 미술의 문화정치의 일부를 이루던 용어와 개념들의 사용법이 오늘날에 와서 변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요즘 기존의 미술계에서는 80년대까지만 해도 전혀 쓰이지 않았던 정체성이니, 성의 정치니, 신체니 페미니즘이니, 미술과 정치 같은 용어들이 급속하게 유행처럼 퍼져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과거에 그런 용어들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전혀 없던 보수적인 평론가들이 이런 용어들을 비평과 전시기획을 위한 수사로서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런 용어들이 포함하고 있는 문화정치는 탈이념화, 탈맥락화가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그런 용어나 제스처를 사용하는 것이 진보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 이 지점에서 많은 질문들을 늘어놓고, 그것들에 위계를 부여하고, 그것들의 전제를 파악하는 것이 더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 볼 수 있다.
● 뉴미디어의 문화정치는 무엇인가?
● 뉴미디어의 문화정치는 어떤 필드에서, 어떤 수사들을 가지고, 어떤 실천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가? ● 뉴미디어는 얼마나 새로운 감각과 사고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오는가?
● 뉴미디어의 진보성이란 무엇인가? (그런 것이 과연 있는가? 있다면 어떤 층위에서, 어떤 전제하에서 가능한가?)
● 이런 뉴미디어의 문화정치를 의식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공간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현재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대안공간들이 그곳이라고 할 것이다. 대안공간 풀, 인더 루프, 쌈지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 인사미술공간, 일주아트하우스 등의 대안공간들이 각기 다른 문화지리적 위치(인사동, 홍대앞, 광화문)에서 각각 다른 전략을 가지고 작동하고 있다. 이들 공간의 공통점은 기존미술에서 다루지 못하는 디지털 매체를 다루면서 시각예술의 생산, 향유층을 20, 30대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기존의 미술문화에서는 도외시하는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 그렇다면 질문은 이들 공간이 제시하는 대안이 무엇에 대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대안을 통해서 비판하거나 저항해야 할 지배미술이라는 것이 있는가? 혹은 대안을 제시해야 할 어떤 굳어진 미술이라는 것이 있는가? 그런 것이 있다면 그 양태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한국의 미술문화가 대안공간을 필요로 할만큼 층위화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도 제기할 수 있다. 이는 대안공간을 채우는 전시기획의 내용이 대안적이지 않은 것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은 층위화가 본격화되어 있지 않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층위화가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층위화는 게토화의 위험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대안공간이 품고 있는 어려움 중의 하나는 미술문화가 급격히 상품화, 관광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와중에서 대안공간들도 재정적인 자립을 이루어야 하고, 미술의 공공적 개념이 극히 부재한 한국의 상황에서는 대안공간들은 자본주의 상품시장의 한 귀퉁이에 간신히 살아남을 위험에 처하게도 된다.
● 이 모든 것들이 뉴미디어의 미래가 결코 밝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 하다. 이럴 때일수록 운동의 개념을 좁게 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이영준
https://neolook.com/archives/2001012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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