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觀音): 사물의 목소리 보기

2024년 11월 29일 ~ 2024년 12월 27일

수업 계획서

안전핀

사람은 무엇으로 사고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뇌로 사고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뇌만으로 사고할 수 있을까? 컴퓨터가 돌아가려면 전원을 넣어줘야 할 텐데? 뇌가 돌아가려면 피가 공급돼야 한다. 심장에서 뇌로 가는 굵은 뇌동맥을 통해 높은 압력으로 많은 양의 피가 공급되야 뇌는 기능한다. 뇌와 심장이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보니 예로부터 사람들이 심장이 생각한다고 착각하여 심장에 마음 심()자를 쓴 것이고 영어로도 ‘heart’가 염통이라는 뜻과 마음이라는 뜻을 같이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 심장과 뇌만 있으면 사고 할 수 있을까? 어디선가 피를 만들어줘야 하는데? 피는 골수에서 만들어지니 사고의 원천은 뼈라고 해야 할까? 뼈는 칼슘으로 돼 있고 칼슘은 멸치에 많다고 하니 사고의 원료는 멸치인가? 뼈에는 근육이 붙어 있어야 하고 근육에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은 위장과 폐이고… 결국 사고작용이 일어나려면 온 몸이 다 있어야 한다. 그런데 몸이 하나만 있으면 사고가 일어날까? 지구상에 사람이 딱 하나만 있으면 그는 사고할 수 있을까? 설사 무슨 생각을 해도 같이 대화해서 검증을 하거나 수정을 할 상대가 없으니 그의 사고는 진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만 잔뜩 있으면 사고가 일어날까? 사고의 대상이 있어서 사람이 그에 대해 인지도 하고 지각도 하고 성찰도 하고 논리를 만들어서 설명도 해야 하는데? 사람만 똑똑하고 그 외의 대상들(동식물 같은 유기체에서부터 물, 불, 공기, 광물 같은 무기체까지)은 다 말 못하고 논리를 못하는 먹통들일까? 사람이 그것들을 무시하고 있을 때 그것들 끼리 사람을 쳐다보며 비웃고 있지는 않은 것일까? 그런 생각을 얼핏 했던 사람이 자크 라캉이다. 그는 물 위에 떠 있는 작고 하찮은 깡통에도 시선이 있어서 사람을 쳐다보고 있다고 했다. 하물며 유기체는 말 할 것도 없다. 결국 사고는 사람과 대상이 서로 협력하던지 싸워서 생기는 작용일 것이다. 바위는 바위 노릇을 하기 때문에 바위고 책상은 책상 노릇 하기 때문에 책상이다. 물질이 그렇게 있는 것이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퍼포머티비티다. 멀쩡한 책상을 사장님이 치우라고 하면 바로 치워지니까 말이다. 책상이 그 자리에서 계속 있으면서 책상 노릇 하려면 많은 조건들이 충족되야 한다. 그런 조건들은 사람이 만든 것도 있지만 책상이 만든 것도 있다. 책상을 놓을 때 책상 놓을 만한 곳을 골라서 놓는 것은 책상의 목소리를 존중해 주기 때문이다. 아파트 짓는데 바위가 방해 되면 바로 쪼개서 없애 버린다. 그런데 그 바위가 영물이라고 하면 금줄을 치고 치성을 드린다. 그런 식으로 바위는 스스로 존중 받는 노릇을 한다. 우리가 관찰할 것은 바로 그런 대상들의 퍼포머티비티다. 그렇다고 사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원시적인 시선으로 관찰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철저히 기계비평적인 방법으로 관찰할 것이다. 대상을 이루고 있는 물질, 그 구성, 기능, 역할, 그것이 존재하고 기능하는 조건을 관찰할 것이다. 우리가 걸으며 관찰할 것들은 다 기계비평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건물이나 도로나 자동차는 물론이고 심지어 하늘의 구름이나 마음 속의 울렁이는 느낌 마저도 말이다. 사실 내가 주체가 되고 저것은 내 시선 아래 꼼짝 없이 놓인 대상이라고 이분법적으로 나눠놓는 관찰이라는 말도 적절치 않은데 적당한 말이 없어서 그렇게 쓴 것이다. 우리가 할 행위에 도대체 어떤 이름을 붙일지는 걸으면서, 걷고 나서 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혹은 이름 없이 그냥 놔두게 될지도 모른다.

일정 및 장소

11월 29일 금요일(14:00-17:00, 나선도서관, 방산시장)
12월 6일 금요일(10:00-18:00, 청계천)
12월 13일 금요일(10:00-15:00, 서울성곽)
12월 20일 금요일(11:00-15:00, 안산역 다문화 거리 및 땟골마을)
12월 27일 금요일(11:00-17:00, 영등포시장, 나선도서관)

정원

8명

수업료

30만 원 (분납 가능)

참고

선착순 접수 마감


진행

이영준

사진 (구체적으로는 예술 작품으로서 사진보다는 기계 장치의 산출물로서의 사진) 이미지에 관심을 두고 비평 작업을 해오던 이영준은 2006년부터 스스로 ’기계비평’이라는 새로운 활동 영역을 만들어 기계비평가로서 작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역설적으로 비평과 비평가의 임무에 대한 자기 자신의 정의의 일관성으로부터 비롯한다. 그는 비평이란 무엇보다도 자신을 강하게 매혹하는 무언가로부터 시작하며, 지식의 잉여로 남은 그 무언가의 순간을 규명하는 지성적 활동이라고 여긴다. 이에 “의미 형성과 해석의 작용 속에서 완전히 용해되지 않고 남는 찌꺼기, 말의 체계 속에 다 정리되지 않고 남는 언저리에 대한 것”, “기존의 지식과 감각으로는 알아볼 수 없는 것… 즉 차이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는 것, 그리고 그 이름이 굳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세분화하고 유동하는 차이의 ()체계를 만드는 것이 예술의 일이자 비평의 일”이라고 서술한다(이미지 비평, 2004). 이와 같은 입장을 기반삼아, 이영준은 예술 작품을 넘어 ‘모든 것을 비평한다’는 지성적 모험의 기획을 여전히 수행중이다. ‘모든 것’중 기계는 그에게 유달리 특별한 대상이다. 그가 보기에 이 시대는 “기계의 욕망이 다른 이미지에 대한 욕망을 뚫고 강하게 겉으로 분출”된 때이며, “기계의 사용을 통해 인간, 사회, 역사, 제도, 문화 등 많은 것들이 기계적으로 됐”지만 그것은 아직 비평적으로 거의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기계 비평, 2006/2019). 망막을 통과해 몸에 잔여로 남은 이미지의 신비를 다루듯, 그는 기계라는 미지의 사물을 다루기 위해 장치의 회로와 메커니즘을 세밀히 들여다볼 뿐 아니라, 가공할 규모의 시설이 중첩되고 가동되는 풍경을 수없이 방문하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배우며, 기계가 일으킨 여파의 현상을 멀리까지 추적한다. 단순하게 말해보자면, 기계비평이란 오늘날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그러나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사물 전반에 대해 숙고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업에 관한 Q&A

‘기계비평적 방법의 관찰’에 대해서 조금 더 알려주세요. 기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비평가도 아닌데 수업을 들어도 좋을까요?

기계비평적 방법이란 대상을 볼 때 선입견을 가지지 말고 사물의 기능과 구조를 관찰해보고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방법입니다. 복잡한 기계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사물들은 다 나름의 구조를 가지고 어떤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선입견이나 세계관 등을 사물에 덮어씌워서 미리 재단하지 말고 사물에 대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기계비평적 방법입니다. 사물이 가진 의미나 상징성은 그 다음에 보는 이의 머리 속에서 떠오르게 돼 있으므로 일단 관찰하고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다 보면 의미가 떠오르게 됩니다.

수업에서 걷게 되는 장소들은 어떤 곳인가요? 왜 그곳을 방문하는지 궁금합니다.

이 세상의 장소들에는 다 나름의 특성과 맥락이 있습니다. 다만 특정 장소에 따라 특성과 맥락의 밀도는 다 다릅니다. 이 수업에서 고른 장소들은 서울과 주변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만나게 되는 아파트나 상가, 학교와 사무실 등과는 다른 분위기와 밀도, 맥락을 가진 곳들입니다. 설사 이곳들을 가본 적이 있다고 해도 이 수업에서는 다른 선을 따라 걸을 것이고 해석의 눈을 가지고 걸을 것이기 때문에 걷는 자체로 새로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서울은 이 세계 어느 도시보다도 독특한 밀도로 가득 한 곳이고 이 수업에서 고른 장소들은 그 중에서도 또 다른 밀도를 가진 곳이기 때문에 그곳들을 방문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딱 하나의 예만 들자면 영등포 시장을 가보면 21세기도 아니고 서울도 아닌 곳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느끼는 충격에 대해 되새겨 보는 것이 이 수업의 내용이 될 것입니다.

수업에 참여하고 싶긴 한데, 사물을 관찰하는 일이 조금 어렵게 느껴져 미리 연습을 해보고 싶습니다. 간단한 조언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집에 있는 아무 사물이나 골라서 한참을 뚫어지게 보다 보면 그것이 다른 것으로 변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을 체험하고 오면 됩니다. 하지만 아무 준비 없이 와도 됩니다.

http://rasun.org/school/2024-2025-thoughtexperimentschool/seeing-the-voice-of-thing


이한범

학교를 열며

2024년 10월 1일 ~ 2025년 3월 31일

간단한 사고실험 하나를 해보자. 하나의 닫힌 공간이 있다. A는 그 공간의 바깥으로는 나갈 수 없지만 안쪽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며, 특정 시간 구간을 무한히 반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B는 공간 안팎을 제약 없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의 시간은 결코 반복하지 않고 유한하다. 이때 A와 B중 누가 더 앎에 특권적인가?

언뜻 이 질문은 앎에 있어 시간의 무한성과 공간의 무한성 중 무엇이 더 특권적인지를 묻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주어진 지문에서 양자택일을 하기보다는, 이 사고실험 자체가 너무 허술하게 설계되었다고 지적할지 모른다. 닫힌 공간은 몸을 겨우 가눌 뿐인 좁은 방만한가 아니면 태양계만 한가? 닫힌 공간은 화이트 큐브처럼 텅 비어 있는가 아니면 복잡한 현상과 사물들로 가득한가? A가 반복할 수 있는 시간의 길이는 한두 시간 정도인가 아니면 무한에 가까이 긴가? B는 무한한 공간을 걸어서 이동하는가 아니면 매우 빠른 속도로도 이동할 수 있는가? 언뜻 생각해도 현실 경험에 비추어 수많은 변수를 떠올릴 수 있고 이 변수에 따라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허술함이 가진 이점이 있다면, 허술함 덕분에 여기저기서 비집고 나오는 앎의 수많은 조건을 검토해 볼 수 있다면, 질문이 불러일으키는 반발심과 수많은 이미지를 붙잡아둬 보는 것은 그렇게 쓸데없는 일은 아닐 수 있다. 이 사고실험은 앎에 대한 철학적인 문제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앎을 갱신하려는 노력을 하려 할 때 어떤 행동을 해야 할 것인가 판단해 보기 위함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처음의 사고실험으로 돌아가 보자. A를 선택하는 편이 좋을까? 아니면 B가 더 좋을까? 문제를 우회해 보기 위해 이야기에 관해 생각해보자. 아주 오래전에는 신비한 우연적 사건들로 가득한 길을 떠나는 모험과 방랑의 이야기가 대중적인 서사였다면, 요즘 유행하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 같은 시간 선을 반복해 살게 되는 회귀와 환생의 이야기이다. 이는 언뜻 서로 다른 서사 양식처럼 보이지만, 앎의 특권적 주체라는 판타지를 투사한다는 점에서는 엇비슷하다. 그리고 그 판타지가 투사되는 곳은 우리가 기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처음의 사고실험은 일종의 함정과도 같은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A와 B는 서로 대립하거나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A와 A’의 관계에 더 가깝다.

그럼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 여기서 A, B와는 다르게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골똘히 생각 중인 C를 상상한다. C는 무한을 통제하거나 소유하려 하지 않고 무한한 실재에 스스로 참여한 후 갖가지 다채로운 방법으로 그것을 소진시키는 데 열중한다. 그래서 무엇이 남았는가, 남은 것들은 어떻게 배열되고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숙고하며 앎 자체를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것으로 밀어낸다. 사고실험학교는 그런 C의 자리로서 고안되었다. 사고실험학교는 닫힌 공간이라는 하나의 이미지-현실에서 촉발되었고 다른 기술적 비전에 대한 상상으로 길러진 장소다. 리베카 솔닛은 ‘기술’을 두고 “세상이나 세상에 대한 경험을 변화시키는 어떤 실천, 기법, 혹은 장치”라고 정의한 적이 있는데, 우리는 기술의 근원적인 의미에 대한 이 정의를 숙고하며 사물과 세계의 변형에 대한 여러 가능성을 검토해 볼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저런 유형을 산출해보는 것이 그 목적은 아니다. 그보다는 양식화된 픽션을 재생산하는 것으로부터 가능한 멀리 달아나며 진실의 방향을 가리킬 픽션을 구하는 것이다. 많은 시도들이 높은 확률로 실패할 테지만, 거기서부터 비로소 뭔가를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술한 사고실험이 무수한 이미지들을 불러오듯이 말이다.

우리는 지금껏 ‘세상이나 세상에 대한 경험을 변화시키는’ 일의 역량을 천천히 그리고 철저히 외부의 기술 장치들에 이양해 왔다. 사물과 세계를 변형시키는 과정, 픽션의 세계에 참여하고 협력하는 일을 바로 그만큼 서서히 망각해 간다. 사고실험학교는 바로 이런 닫혀가는 세계에 대한 반응이자 앎의 점진적이고 전면적인 재구성에 대한 요청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코이너 씨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생각한다는 건 곧 변화를 일으킨다는 뜻이지. 내가 어떤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를 변화시키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도 썼다. “희망이 아버지가 아닌 생각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이 아포리즘에 빚져 말해보자면, 생각하기는 사물과 세계의 변화를 추동하는 역량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희망을 전망하는 일과 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학교는 바로 그런 희망이 가능한 장소여야 한다. 생각하기와 희망의 관계가 자명한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그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내기를 걸어볼 만하다. 그리고 이건 생각보다 시급한 일인지도 모른다.

http://rasun.org/school/2024-2025-thoughtexperimentschool/hakgyoreul-yeolmy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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