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있음의 의미와 카오스모스


text by Jung Hyun 정현
on the duo show of Nayoungim and Gregory Maass: "The early Worm catches the Bird"
(Venue: Space Hamilton, Seoul
Mar.2010)

in monthly magazine: Art in culture
Seoul
April 2010

소설가 폴 오스터는 가난했던 젊은 시절, 파리의 한 갤러리에서 작품과 도록 색인표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일을 맡는다. 우연히 마르셀 뒤샹의 <만지시오>(Priere de toucher)라는 작품이 랩에 한 번, 두꺼운 갈색 종이에 한 번 더, 마지막으로 ‘손대지 마시오’라는 표찰이 붙은 비닐 봉지에 들어가 있는 현실을 발견한다. 1947년 파리 초현실주의 전시 도록 표지 디자인으로 사용되었던 브래지어 속의 고무 패드를 그대로 덧붙인 이 레디메이드와 유명한 지시문을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이 시시한 활동을 숭배하지 말라”는 뒤샹의 메시지라고 폴 오스터는 생각한다. 진보적 예술의 실험과 정신도 시대가 지나면서 문화인류학적 산물이 되고, 하찮은 브래지어 고무 패드와 경직된 사회에 던진 조롱이 이제는 사회적 유물로 화석화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셀 수 없이 많은 생각과 이념, 가치와 원칙이 혼재하는 현실은 예술가의 상상력을 증폭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지만, 반대로 사회적 공통분모로서 이해할 수 있는 예술은 만나기 어려운 시대다. 다른 한 편으로 동시대미술의 난독 현상은 고전 예술에 과도하게 부가되었던 일방적이고 계몽적인 가치로부터 비로소 한국의 문화가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일 것이다.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새를 잡는다>라는 역설적인 표제를 건 김나영+그레고리 마스의 전시는 해체된 장난감, 문맥이 사라진 가구나 가구의 부품들, 익살과 아이러니를 펼쳐 놓는다. 20세기 초 유럽 아방가르드 시대의 감성을 연장한 듯 보이는 작업 태도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김나영+그레고리 마스는 초산업화 시대의 생산과 소비 구조 사이의 모순을 어느 지역의 현대 사회에서나 구할 수 있는 사물, 혹은 사물의 단위 등을 해체하거나 재조합하면서 사회적 기능과 의미를 중화시킨다. 나는 이런 행위를 ‘의미의 비어 있음’으로 본다. 빈 의미는 안강현의 <주사위 던지기>에서도 포착된다. 미디어, 착용이 가능한 조각 의상(Wearab le Sculptures), 놀이기구와 낙서 등으로 대안공간루프의 1층과 지하는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공존하는 카오스모스가 된다. 각각의 작업은 개별적이면서도 관련을 맺고 있고, 두 공간은 또한 한 작가의 두 모습처럼 분리된 하나의 형식으로 전개된다. 

비어 있는 의미: 열린 공간
독일인인 그레고리 마스와 한국인인 김나영의 협업 체제는 두 작가의 모국이 걸어 온 역사의 유사성과 무관하지 않다. 산업화로 국가를 부흥시킨 현대화 과정이나 분단의 역사까지, 김나영+그레고리 마스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물을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마치 라인강의 기적과 한강의 기적을 일궈 낸 가치였던 부지런함을 조롱하듯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새를 잡는다>의 아이러니는 관습적인 모범적 답안, 사회적 의미를 지워 버린다.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고전주의와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한 반감으로, 예술 작품(텍스트)이 본질적으로 해독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롤랑 바르트는 예술을 향유하는 방식의 구조와 그 위상을 뒤집는데, 예를 들어 ‘읽기’가 수동적 독자, 관객의 몫이고 ‘쓰기’가 예술가의 몫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에서 ‘읽기’ 역시 의미를 생산하는 창의적인 활동으로 해석한다. 현대적인 개념으로서 ‘읽기’는 의미가 비어 있는 텍스트에 독자, 관객이 능동적으로 주석을 붙이는 ‘열린 텍스트’를 말하고 있다. 바르트는 이런 열림을 ‘쓸 수 있는 텍스트’라고 불렀는데, 그에게 읽기만이 강요된 텍스트는 기의로 채워진 패쇄적인 고전 문학을 상정한다. 반면, 쓸 수 있는 텍스트는 열려 있는 텍스트로 수동적인 읽기에서 능동적인 쓰기가 개입될 수 있는 기의가 빈 상태를 의미한다. 
‘현대적인 텍스트인 쓸 수 있는 텍스트는 의미 생산의 끝없는 과정으로서 생산적인 모델이다.’(《해체 미학》 피종호 222쪽) 여기서 작가의 역할은 의미 생산자가 아닌 의미가 상실된 기표를 공간(텍스트, 전시장, 도시, 웹 사이트 등)에 배치하는 사람으로 전환된다. 김나영+그레고리 마스가 제시하는 비-의미의 오브제나 레디메이드 아상블라주는 일종의 해체된 텍스트다. 바르트는 이런 글쓰기를 불가능한 문학이란 의미로 ‘흰 글쓰기’라며 다소 우울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그보다는 프랑스 현대소설가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의 경우 ‘평평한 글쓰기’라고 보다 담백하게 자신의 글을 소개하기도 했다. 흰 글쓰기와 평평한 글쓰기는 방점도 스타일도 없는 텍스트의 투명함을 통해 언어에 의해 고정되기를 거부하고, 창의적 독자에 의해 늘 새로운 의미로 생산되는 증식의 미학을 꿈꾼다.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새를 잡는다>는 외형적으로 오브제 설치미술처럼 보일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론 모든 미술의 전형을 차용함과 동시에 어떤 장르적 속성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의미와 형식의 부재는 본질적으로 반문학적 반예술적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카오스모스: 증식하는 이미지
안강현의 <주사위 던지기>라는 전시 제목은 어쩔 수 없이 말라르메의 시를 떠올리게 한다. 문학사에서 말라르메는 처음으로 ‘흰 글쓰기’를 시도한 시인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그의 시가 언어 이전의 연속적인 공간 넘기기와 펼치기였다는 점을 주목해 보면 독자의 역할이 확장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안강현 역시 놀이터로 만들고자 한 전시 <주사위 던지기>를 결정적으로 ‘존재’하도록 만들어 준 것이 참여자의 역할이라고 얘기한다. 작가가 “나는 스스로를 작품이 공간 안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배달부’(Delivery system)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듯, 안강현의 작업은 어떤 경험의 매개물이거나 우연한 신체의 움직임을 발생시키는 비논리적인 장치로 등장한다. 
1층에 걸려 있는 종이 옷은 아일랜드의 레지던시 기간 동안 주민들에게 받은 헌 책으로 만든 것으로, 그는 옷이 완성된 후 책을 기증한 주민을 찾아가 집 앞에서 거주 기간 동안 배운 아일랜드 민속춤을 선보였다. 그의 작업은 자신을 어떤 연극적 인물로 분하게 만드는 매개물이 된다. 그렇지만 그가 상황주의적 전략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안강현의 행위는 전시 공간을 포함한 미술 매체의 폐쇄성을 열기 위한 시도에 가깝기 때문이다. 작가가 “(입을 수 있는 조각) 작업들은 대개 미술 전시장의 틀 밖에서 이루어졌고, 전시장에 오는 수고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내가 직접 ‘방문’하는 방식”이었다고 밝히고 있듯이 말이다. 또한 1층에는 미디어 3부작이 설치되어 있는데,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낭독하는 화면과 그 반대편에 자신의 낭독을 들으면서 벽면에 분필로 댄스 드로잉을 하는 모습, 둘 사이에 말 모양의 기구를 매고 앞으로 향하는 미니멀한 춤 장면이 흘러 나온다. 
지하 전시장으로 내려가면 카드 게임 보드와 게임 도구들이 즐비한 테이블이 있고 반대편에는 해먹 같은 그물과 의도를 알아차리기 힘든 놀이기구‘같은 것’이 구석에 배치되어 있다. 탈장르적 성격을 띤 <주사위 던지기>는 일종의 무대와 같다. 하지만 그의 설치가 극적 구성을 통한 탈 공간적인 연극 무대를 꾸민 것은 아니다. 연극적 설치의 극적 구성은 장소의 건축적 성질이나 질감을 배제한 이상적인 우주인데 비해, 안강현의 설치는 연극적 질감을 응용하고 있는 점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그리고 전시 기간 중에 검은 벽 드로잉, 영화 감상과 요리 시식회(맛있는 감상회)가 연속적으로 실연된다. 작가와의 만남을 대신하는 이런 퍼포먼스는 그의 작업이 제도적인 전시 장소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가 아님을 강조한 사실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안강현에게 작업이란 만남과 나눔의 기회이기 때문인데, 이번 전시는 한 달 간 대안공간루프를 작업실로 사용한 과정의 일부이며, 퍼포먼스 역시 작업의 연장이자 과거에 찾아 다녔던 관객과의 만남이 전시라는 형식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검은 벽 드로잉>의 경우, 작가와 관객의 만남이 진행될수록 과정으로서의 드로잉의 선과 형태의 겹은 쌓이게 된다. 드로잉이 증식되고, 의식에서 무의식의 놀이로 진행되는 안강현의 초현실주의적 몸짓에서 들뢰즈가 얘기한 ‘카오스모스’를 떠올리게 된다. 들뢰즈의 ‘주사위 던지기’는 마치 제비뽑기와 같이 우연과 질서, 의식과 무의식이 공존하는 준우연적 질서 이론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의미화된 언어로 쓰여진 텍스트와 철학이 비담론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대체됨을 시사하고 있다. 아마도 안강현과 김나영+그레고리 마스의 비-정형적인 전시를 대하는 태도는 무엇보다 참여자의 비담론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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