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 29x36cm
Mixed media on Canvas
김범의 작품에는, 교육받지 않은 작가들을 연상시키는 특유의 형상언어, 단순한 도구들로부터도 감지되는 물활론(物活論:animism), 겸손한 재료의 선호와 그 조립을 위한 즉흥적 방법, 각각의 작품에 가득한 예측할 수 없는 유모어 감각등, 창작과정에서 서로 쉽게 어울리지 않는 다양한 부분들이 종합되고 있다. 그의 창작과정에서 이 유모어(해학)는 작품에 있어서 하나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그 형상 속에는 하나의 장난(joke)이 있지만, 형상을 만드는 방법이 그 자체로서도 유모어스럽기 때문에, 겹겹의 해학과 재치들은 시각적이고 언어학적인 표식들로 구성된 거미줄같은 망(web) 안에서 결합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일단 그 장난이 이해된 먼 이후까지 그 작품을 주목하게 한다.
그런 유모어로써 김범은, 진부한 해석들이 간과하는 사실들, 즉, 현상들에는 밑바닥이 있고, 그것이 밝혀질 때에도 일반적으로 위축된 감각을 가지고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에 늘 주목하는 자신의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유모어는 일상성의 근저를 관통하여 어떤 이치를 발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물질과 형상을 다루는 모든 과정에 철저히 적용되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을 표현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가능하게 한다. 길가의 개들의 모습 안에서 커다란 절망감을 보고, 부드러운 벽돌 벽의 표면 위에서 화면의 파괴 가능성을 발견하며, 구워진 닭의 대칭적인 형태안에서 흥분을 느끼는, 그의 이런 관점은 재미있고 또한 겸손한 것이다.번민하는 개와 요리된 통닭의 모습이 없는 도시나 시골의 생활은 상상할 수 없기에, 그 두 가지가 김 범의 진행되는 작품들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주제가 되는 것은 적절한 선택인 것 같다.
그의 작품들 중에, 캔바스 위에 계란 껍질로 통닭을 그린 것은 Faberge egg(계란 형태의 공예품)의 섬세함을 간직한 짓궂은 각색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캔바스에서 잘라낸 통닭의 실루엣을 계사용 철망으로 메꾸고 같은 재료로 구워진 통닭의 모습을 입체적인 조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개들은 개의 과자로 그려지고, 캔바스의 화폭을 오려냄으로써 자신의 몸을 물어 뜯어내고 있는 개의 모습이 묘사되기도 한다.
이렇게 원자재(raw materials)를 혼합시키는 방식은, 뉴욕에서 공부하는 외국출신 화가들이 즉각적으로 만나게 되는 어떤 미학적인 경향, 즉, 재료 그 자체에 가장 충실하려는 미니멀리스트(minimalist)와 1970년대의 급진적인 화가들이 지녔던 어떤 청교도적인 미학에 뭔가 기여하는 점이 있을 것 같다. 김 범은 이런 접근 방법을 물질을 통한 풍자적인 해석을, 위해 사용한다. 그는 원단 그대로의 캔바스, 아연도금된 전선줄, 유리, 달걀껍질등을 사용하여, 그것들이 함축하는 어휘들을, 단지 그 자연 그대로의 속성으로서 뿐 아니라 여러가지 서로 모순되는 해석을 통해 풀어보려는 작업을 시도한다. 우리는 화폭 위에 깨진 유리 조각들을 붙여 만든 발자욱 모습들, 또는, 화폭에 거꾸로 붙인 압핀들이 이루고 있는 개구리의 형상으로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물을 것이다. 이런, '트기'와 같은 발명물들은 그 반대의 극단도 생각해보게 한다. 즉, 압핀을 갖고 개구리를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에, '실없음'이 넌센스가 되고 의미가 사라지는 극점을 실험하듯, 그 넌센스가 또 다른 주제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김 범은 관습적인 특수성을 갖고 있는 화폭 그 자체를 재료로 사용하여 조형작업을 할 때 오히려 회화의 일반적인 제약에서 자유롭게 벗어나 무엇이든 형상화시켜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한 재료의 성질에 대한 탐구와 추구는 캔바스의 잘려진 부분에 어떤 다른 물질이 아닌 바로 그 잘려나간 물질을 다시 꿰매어 넣는 그의 최근작에서도 역시 나타나고 있다. 윤곽을 이런 식으로 꿰매어 만들어지는 형상은 기억에 남도록 미묘한 일련의 작품들로 이어진다.
그 중의 하나로서 개의 발자국들이 잘라내진 부분들을 원래의 제자리에 꿰매어 넣음으로써 마치 그 동물이 거기에 서 있었던 듯한 옴폭한 면을 남긴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캔바스의 직사각형들이 벽돌 벽을 묘사하기 위해 재조립되며, 고르지 않은 바느질은 굴곡과 느슨함으로써 그 형상에 예리한 활기를 준다. 'REMEMBER'라는 단어가 조심스럽게 잘려지고 다시 꿰매어 붙여져 있는 작품에서는 글자들이 사라짐으로써, '기억하라'는 명령을 애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 가운데엔 특히 그의 종교적 배경, 즉, 백 여년전 만해도 아직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당했던 한국에서 가톨릭 신자로서 자라온 영향이 그런 해학과 더불어 드러나는 경우들이 있다. 그 중엔 지우개가 화폭에 십자가 모양으로 직접 붙여지거나, 화면 뒤에 볼록하게 담겨진 작품들이 있다. '죄를 지우다'라는 것이 명제이며, 마치 너의 십자가를 들고 너의 죄를 지우라는 듯 지우개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나타났음을 알고는 미소를 머금게 된다. 다른 방법으로 그의 그림과 드로잉에서 표면에 직접 훈계와 지시사항을 적거나, 비밀 메모를 혼합해 넣은 일련의 작품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질나게 한다. '도주열차'는 외로운 철도길처럼 캔바스에 꿰어진 도화선에, 행위가 수반되어야 하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지시사항의 하나로 보는 이로 하여금 제공된 라이터로 불을 붙여서 그 스스로를 파괴하도록 요구한다. 실제로 그렇게 하기 전에 당신은 주어진 빈칸에 이름을 써넣어야 한다. 즉, 작품은 파괴되기 전까지는 미완성일 뿐 아니라, 그 행위자로서 서명한 사람이 바로 그 작품의 진짜 작가라는 것을 뒤샹적인 방법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리즈 가운데 또 다른 작품에서는 당신으로 하여금 어느 한 부분은 못 보게 하고, 어느 부분은 보게 하며, 또 다른 부분은 만지도록 촉구한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고의적인 역기능과, 그림들을 보는 법률을 새로 쓴다는 점은 커다란 발명의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런 고의성은 예술작업을 위해 Manzoni가 지적(知的)인 구습타파(또는 우상파괴)를 주장하던 것과 몇몇 Fluxus 예술가들이 가졌던 대담성을 생각나게 한다.
그의 작품은 희미하게 알아볼 수 있는 창백한 모습을 하고 있고, 드로잉들은 수줍고 도해적(diagrammatic)이며, 난해하다. 그들은 마치 하나의 흔적으로서도 충분한 듯, 매우 고요하고 깊은 인상을 준다. 실상 그 자체는, 개 발자국, 사람 발자국, 캔바스에서 잘라낸 자국들에서 보듯이, 많은 경우에 흔적들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는 달걀껍질 깨진 것, 유리조각 등의 남은 부스러기들을 재료로 자주 이용한다.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이런 소재들은 그가 불합리 성을 묘사하기에 효과적인데, 그것은, 강렬한 표현방법으로 우리를 압도하기보다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 형상과 해학을 탐지해 나가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들은, 경험에 대한 연설조의 진술이 아니라, 그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완곡한 방법이며, 어떻게 사람들이 어떤 관습적인 틀을 벗어난 관찰에 대해 설명을 붙이는 가를 살짝 엿보게 하는 것이다. 즉, Michaux가 말한 대로 평상시의 상황에서 어떤 놀라운 결론들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멜론 안에는 심장이 뛰고있다(Henri Michaux, Slices of Knowledge, 1952)"
이런 식의 이야기는 주로 크지않은 종이에 그리는 김 범의 많은 드로잉들에서 매우 명백하게 나타난다. 여기에 제한되지 않은 생각들을 실은 폭주열차를, 아이디어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빨리 형상을 그린다는 점과 연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드로잉 작품 경우에, 흔히 무시된 채 지나치는 주제들이 다루어지는데, 거기에는 물체와 동물들도 우리 자신의 것과 동등한 생명을 갖고 있고 인간의 특성들을 대변한다고 여김으로써 그것들의 존재론적 지위를 향상시켜 주는 물활론(物活論: animism)이 담겨 있다.
그 작품들 가운데는 부끄러워서 눈을 앞발로 가린 개의 모습과 같은 것도 있지만, 또 다른 작품에서는 사자의 시체를 뜯어먹고 있는 황소, 자기의 두개골을 의기양양하게 밟고 서있는 머리없는 뼈대, 자기자신을 조각조각으로 절단하는 검사(劒士), 폭발하려고 하는 다이나마이트를 쥐고 있는 잘린 손, 그리고 목줄이 전기 콘센트에 꽂혀있는 세파드를 또한 그리고 있다. 그런 독설적인 해학들은 냉소적인 사색과 예외적인 인간애가 서로 편안하게 합쳐지는 Michaux의 두번째의 측면을 생각나게 한다.
"거기에, 싸움에서 포로가 된 공격자들은 현장에서 얼굴이 찢겨 벗겨지고… 필요한 것은 얼굴을 잡아당겨 벗겨내는 믿을 수 없는 의지력이고, 사람들은 거기에 익숙한데‥‥(Henri Michaux, In the Land of Magic, 1941)" 이런 잔인성을 지니지 않은 다른 그림들 역시도 예측하기 힘든 주제들을 다루었기에 몇몇 묘사해보자면, 그 가운데 하나는, 카메라가 사진사의 머리 위에 올려져 있고 카메라의 끈은 턱 둘레로 흘러내리고 셔터 케이블(shutter cable)은 눈에 바짝 붙어 있다. 사진사가 눈을 깜박이는 순간에, 즉, 사진사가 물체를 못 보는 그 순간에, 그 카메라가 그 물체를 대신 보도록 하려는 것이다. 다른 작품에서는 요리된 닭의 초록색 다리가 종이를 움푹 들어가게 한 실제의 이빨 자국을 간신히 벗어나고 있고, 또 다른 작품에서는 권총이, 손잡이에 털가죽, 총의 공이치기 대신 귀, 그리고 총열에는 구레나룻 수염이 붙어있는 개의 얼굴로 바뀌어지고 있다. 이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맴도는 놀라운 드로잉들이고, 그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 즉, 우리가 생명이 없다고 여겨온 곳에도 흘러넘치는 생명이 분명코 있음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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