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니발, 카바레, 칸타빌레

19금 퍼포먼스

어떤 퍼포먼스도 19 이상을 넘길 없다는 것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조건인, 19 퍼포먼스 릴레이가 다시 열렸다. 지난 겨울 이태원 공간 해밀톤의 마지막 프로젝트로 호응을 얻었던 기획은 장소를 홍대 루프로 바꾸어 11 11 번째 릴레이를 펼쳤다. 참여 작가는 10, 저녁 6시에 시작해 거의 자정까지 이어지는 마라톤이었다. 동시간과 공간 그리고 음식을 공유하는 따뜻한 환대의 카니발이 되고자 한다 초대의 말처럼 분식트럭이 루프 입구에 주차하여 먹거리 판을 열었고, 많은 사람들이 아래 , 안과 밖을 넘나들며 퍼포먼스를 관람하거나 동행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와 음악, 무용이 장르 구분 없이 곳에서 벌어지는 카바레 볼테르 같은 기획이 서울에 존재하고 그것이 2회를 맞으며 지속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19금이라는 불온한 제목의 힘인지, 참여하는 이들이나 관람하는 사람들이나 어깨 빼고 편견 없이 부담 없이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둠 속에서 시작한 번째 퍼포먼스는 구동희 작가가 사진 찍는 청년 이윤호와 함께 보여준 <제너럴 일렉트릭>이었다. 공사장에서 각을 잡을 사용하는 수직, 수평의 붉은 레이저 선이 그어진 벽면을 배경으로 작업복을 입은 구동희가 한쪽 구석에서 전기로 빛을 내는 사물들, 조명이 달린 액자나 인형을 하나씩 가져와 무대에 놓고 전선을 연결한다. 잠깐 빛이 나오는 순간에 이윤호가 사진을 찍고 이내 구동희는 전기를 끊어버리는 행위가 반복되었다. 순간에 던져진 빛의 흔적을 쫓아 사진을 찍는 시간이 전기를 연결하고 끊는 동작과 거의 일치한다. 한편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가 재앙의 실체로 다가오는 사건을 목격한 2011년의 사람들에게 전기를 이야기나 작품의 소재로 다루는 것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재난에의 연상을 피할 없게 되었다. 사물들의 오프, 전력의 작동과 절단의 반복 사이에서 찰나의 빛을 이용해 사진을 찍으려는 시도들은 원자력 재앙의 시대의 작업의 조건에 대한 알레고리로 느껴지기도 했다.

옥인콜렉티브의 <작전명 하얗고 까만 것을 위하여> 이러한 재난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제안하는 실행교본이다. 작품은 후쿠시마 원전사태에서 정부에 의한 언론 봉쇄로 시민들의 초기 피해가 늘었던 것을 상기하며국가가 시민을 보호하지 못할 무기력하게 노출된 위험으로부터 자가 방어력을 키우기 위한 기체조로서 고안되었다고 한다. 여러 재난방지 기관들의 매뉴얼들을 리서치한 옥인콜렉티브는 결국 이러한 매뉴얼들이 위험상황에서는 침착하게 행동하고 대처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만을 반복할 어떤행동으로 어떻게대처 있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한다. 10 경력의 숙련된 조교를 위시한 명의 옥인-기체조 팀은 장시간 앉아 있기만 했던 관객들을 일으켜 그들이 고안한 재난방지 기체조를 학습시켰다. 미리 녹음된 나레이션이 말랑말랑한 음색과 묘한 설득의 어조가 담긴 지시어를 던졌고, 관객들은 어린 시절 학교 운동장에서 체조를 하던 기분으로 사람을 밀고 당기는, 한판참여 장이 벌어졌다. 참여라는 말에 함유된 놀이의 기능과 정치적인 함의가 동시에 발효되는 순간이었다.

송호준은 소형 인공 위성을 띄우는 프로젝트로 알려진 작가이다. 그의 참여작 <어제 오늘 빅토리> 띄워 올린 것은 두터운 종이로 만든 자신의 프로필 사진이었다. 머리와 어깨를 따라 잘라낸 대형 사진은 마치 로켓의 형태 같았고, 나무토막으로 지지대를 붙이고 추를 연결해 수직으로 세우는 장면은 연극에서 세트를 만드는 모습처럼 보였다. 우주 공학의 실현이 거대 국가적 차원에서만 행해져야 하는지를 질문해 기존의 돈키호테적인 시도가 초상 사진과 종이 로켓 그리고 승리(빅토리)라는 단어로 연결되어 한층 아날로그한 방식으로 재연되었다. 퍼포먼스의 마지막은 조용필의 노래 <어제 오늘 그리고> 흐르는 가운데 작가가 자신의 대형 사진을 옆에 세워 두고 관객을 응시하는 장면이다. 오늘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버린 것은 무엇인가라는 노래는 자기지시성을 가지는 동시에 현재, 순간에만 오롯이 존재하는 퍼포먼스의 시간 흐름에 맞아 떨어지는 가사이다.

길종상가의 박가공과 현시원의 <골든> 스파이크 존즈나 미셸 공드리 식의 상상과 유머를 보여준다. 7,80년대를 풍미한 가수라면 쯤은골든이라는 앨범을 발매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아마도 미국에서 만장 이상 팔린 음반을 뜻하는 골든 디스크에서 따온 듯하다. 많이 팔리기도 전에 미리골든이라고 딱지를 붙이는 것은 흥행의 기법 중의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여기 가수 송창식의 골든 앨범 자켓 이미지를 배경막으로 걸고 나타난 길종상가의 흥행사 박가공은 황금색 물통처럼 생긴골든이라는 물건을 소개하였다. 머리에 뒤집어쓰면 가수 송창식의 뇌와 동기화되어 춤을 추고 노래도 하게 되는 제품이다. 길종상가는 미스터리한 사건과 사람들의 집합체이자 7 1/2층과 같은 공간이다. 이에 헛웃음과 기괴한 행동, 감정의 실체를 없는 일정한 표정의 가수 송창식을 뇌동기화의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탁월했다. 지난 8 전시 <천수마트 2>에서 작가와 기획자로 만난 박길종과 현시원이 이번에는 각각 사장님과 인턴사원으로 자리바꿈 하였고, 그동안 SNS에서 주로 활동하던 박가공이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가공의 기술(혹은 상술) 선보였다. 19분의 퍼포먼스 시간이 지난 , 골든을 시착해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른 참여자들에게 박가공이 참가비 오만원을 뒷돈으로 건네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다. 박가공은 노인들에게 전기요나 건강식품을 파는 장사꾼들의 수법을 착실하게 답습하고 있는데, 그것이 퍼포먼스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라는 혐의를 두게 된다.

19 릴레이의 기획자이자 작가인 홍성민은 장르의 요소들을 하나하나 절단하여 재조립한다. 지난 페스티벌 봄에 소개되었던 <엑스트라스>에서는 주요 연극과 뮤지컬에서 엑스트라로 활동하는 대학로 배우들을 떼어 와서 무대 위에 펼쳐 놓고 각각의 연기와 대사를 동시에 실행하게 불협의 꼴라주를 선보였다. 사지를 잘라도 끝없이 되살아나는 '재현 연기' 헛헛한 실체가 강조되는 잔인한 유머였다. 이번에 선보인 <영화>에서는 남녀 연극배우가 몇몇 영화의 클립들을 어색하고 과도한 감정 표현 일색의 더빙 말투로 연기한다. 영화 이미지와 대사가 분리된 배경으로 작동하고 연극배우들의 희화화된 애정씬이 이에 접합된다.

이외의 참여작 중에는 특히나 음악이 연계된 퍼포먼스들이 많았다. 오프닝 밴드 <빛과 세금> 비롯하여 전래동요를 개사하여 부른 부추라마 없은 부추라마 [ 2.0 beta 버전] 합창단, 19 노동이 그러했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송호준의 작업에 조용필이, 길종상가와 현시원의 작업에 송창식의 음악이 사용되었다. 이들 퍼포먼스에서 개사하거나 창작한 노래, 대중가요가 사용된 반면, 디륵 플라이슈만은 비엔나 행동주의자이자 자신의 대학 은사였던 헤르만 니치의 렉쳐를 소개하는 렉쳐-퍼포먼스 선보였다. 비엔나 행동주의 그룹에서 과격하고 도발적인 퍼포먼스를 보였던 작가 헤르만 니치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던 쇤베르크, 바흐, 스트라우스의 음악과 가사들이었다. 김나영과 그레고리 마스의 킴킴 갤러리는 작가 나키온과 에스터만의 협업을 소개하였다. 에스터만은 단순 사물들을 간결하게 묘사한 다수의 흑백 드로잉들을 보내왔고, 나키온은 그림들을 여러 시간차의 리듬을 만들어 편집, 이에 맞춘 디제잉을 선보였다. 주어진 시간 동안 점점 고조되는 나키온의 음악과 벽면에 영사된 에스터만의 드로잉 이미지들은 접합과 결렬을 반복하며 제목 그대로 공간 안에서 분열, 분산되는 효과(distractions) 만들어 내었다.

전반적으로 19 퍼포먼스 릴레이의 퍼포먼스들은 완결에의 강요가 없고, 의도된 허술함이 허용되고 있었다. 드나듦이 자유로운 공간이자 냉정한 비평적 잣대에서 다소 자유로울 있는 시간이었다. 이로서 하나의 작업이어도 좋고, 어떤 작업의 과정이어도 좋고, 그저 어떤 시도여도 좋다는 허용이 창작자와 관객 사이에 자연스럽게 공유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맥락 이탈의 즐거움과 신선함 너머, 제시된 시간 내에 관객의 머릿속까지 휘감는 사건들은 기대만큼 일어나지 않았다. 19분은 짧지만 충분한 시간이다. 형식에 있어 1915 마리네티가 발표했고 추구했던미래주의 총체(synthetic) 연극 유사한 시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마리네티가 미래주의 총체연극의 조건으로 생각했던 하나도 우선 짧다는 것이었다. 분의 시간, 가지 단어와 행동만으로 없는 상황, 감정, 아이디어, 사건, 상징들을 발생시킨다는 것이 선언의 요체였다. 그러나 이번 릴레이에서 하나씩 이어지는 개별 작품은 19 프레임 안에 하나의 완결태를 갖춘 공연의 연속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오히려 19분이라는 그릇이 형식의 완성을 유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19 퍼포먼스 10여분의 여백이 동일하게 반복 되자 다소 지루한 리듬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지난해 프로젝트를 통해 19금이라는 시간 프레임이 어느덧 조건으로서 자리를 잡았다면 번째 해를 맞은 이번에는 위에 겹쳐져 개입할 다른 게임의 조건이 던져졌다면 어땠을까. 한편 극장이 아니라 전시장 공간이었음에도 조명과 명확한 시간 분배를 통해 객석과 무대가 분리된 느낌을 것도 다소 아쉬웠다. 운영에 있어서 지난해 보다 정돈되고 체계적이라는 중평이 있지만 이처럼 유사 극장과 같은 배치보다는 전시공간의 가변성을 더욱 활용하여 사람들의 모이고 흩어지는 자연스런 형태와 동선을 이용했더라면 보는 사람들을 수동의 역할에서 벗어난 공동제작자로 끌어들이고 예술가와 공감하고 협력할 있도록 유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한번 미래주의 총체 연극 선언의 예를 들어보자. 여기서는 감정의 고조, 미리 준비한 효과, 지연된 클라이막스와 같이 의무적인 연극 장치들에 봉사하는 것은 바보스런 일이고, 누구라도 인내를 가지고 공부하고 연습하면 획득할 있는 테크닉에 목을 매느라 사람의 재능을 소모시키는 역시 바보 같다고 말한다. 무대 , 객석, 오케스트라 어디에서도 전개될 있으며, 정해진 줄거리 없이, 던져진 사건과 장치에 예술가와 관객이 함께 공감하고 반응함으로써 서로의 구분을 없앤다. 같은 총체 연극의 목적은? 가장 난해한 문제와 복잡한 정치적 사건 누구에게나 재빠르고 신속하게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19 퍼포먼스 릴레이처럼 공동의 시간, 공동의 장소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모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공유와 공감의 장을 연다는 것이 퍼포먼스가 가진 일회성의 정치적 힘이자 강력한 조건이다. 형식이 음악이든 무용이든 통로가 놀라움, 혐오감, 유머이든 시간은 감각을 나눠 갖고 우리의 문제에 대한 공동의 대안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19 퍼포먼스가 가져올 있는 선언과 공감의 힘이 매해 지속될 있기를 기대한다.

김해주 (국립극단 연구원) / 2011 <아트인컬쳐> 12월호
Dec. 2011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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