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정란(시인)
Kim Chung Ran, “A Little Bit Sandy but Moving Relationships with Things: On an Anxiety from Prudence and Love; Chung Seo Young’s Sculptures,” Chung Seo Young by Kumho Gallery (1995), Kumho Gallery, Seoul
1. 事物의
습격
처음에, 〈거기 사물이 있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 처음에, 〈사물이 거기있다는 것을
인지하는〉자아가 있었다. 정서영은 그렇게 출발한다. 자아는
어느날 그렇게 문득 쳐들어온 사물 앞에서 당황하는 것이다. 정서영은 그녀의 석사학위
논문에서이렇게 쓴다. 사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일차적으로 어느날 갑자기 맞닥뜨리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 강조: 원저자
아주 차가운 〈것〉, 그 자체로서 아무런 목적성도 가지고 있지 않은 무지막지한 〈있음〉. 자기 안에 완강히
폐쇄되어 있는 본질적 불투명성, 사물은 그렇게 불가해한, 어떻게 보면 적의에 가득 차 있기마저한 모습으로 인식의 화면에 어느날 와서 쿵하고 부딪친다. 그리고는
그걸로 끝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에게는
사물을 규정할 수 있는 아무런 단서도
없다. 우리는그것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지하다. 그렇다면, 하이데거를 따라서,
사물이라는 존재자의
존재를 사물이라는 존재자에게 되돌려보내야만 할까?
또는, 장자처럼, 사물
앞에 다만 無爲의 거울로서 있어야만 할까? 사물을 보내지도 맞아들이지도 않는 거울, 다만 비출
뿐인 거울, 사물에
대한 자아의 임무는 따라서 사물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의 속성인
낯섦과 혼돈 사이로 나아가 그것들과 공존하고, 그것들이
그것들의 몫을 누리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도
도인도 아닌 조각가인 정서영으로서는, 사물에 대한 인식의 역할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조각가에게는, 사물에 대하여 자아가 인지한 바를
형태로 제시해야 할 어떤 종류의 〈조형적〉책무가 따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조각가
정서영은, 사물의 밤 속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그런데 나는 무엇인가를 또 원하였다. 사물적인 것 외에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다. 사물을
사유하는 것은 진정코 금지되어 있기만 한 것일까? 객관적
진술 그 너머에 자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무의식적이면서도 필연적인
가치부여를 허락하는 것이다. 목적한 바 없으나 지향하게 되는 것으로서의 투사를 행하는 것이다. 그 투사는 작품에
일종의 뉘앙스를 갖게 한다. 본
작품에서 나타나는 부정?비판적인 냄새, 절
제, 모르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유와 시선, 정신의 교조성으로
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
등이 바로 그것이다.
정서영은 사물 앞에 맞닥뜨린 자아의 무력함을 인정하면서도, 무엇인가를
〈하고〉싶어한다. 그녀는 이미 있는 사물을 향해 다가가 참견하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또는
않는다. 예술가는 그렇게, 정서영의 표현을
빌리면, 사물의
밤에 〈가담〉하고 〈투사〉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해서, 사물의 밤에 자아의 인식작용이라는 빛을 가져온다. 그러나 가능한 한 조금, 아주 조금의 빛만을, 겸손한 박명만을‥‥‥ 왜냐하면, 이 명민한 조각가는 출발 당시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소위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이름 아래 진행되어 온 모든 인간적 가치의 추구가 얼마나
무수한 타자들을 만들어내었던가를, 그 위대한 빛의 등대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못난 말들이 발언권을 잃었는가를. 그런데
이 투사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주의한 것은 나의 정신작용이 인간중심의 이데올로기화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영역을 떠난
적이 없으되 인간의 교조적인 위치에 군림함이
얼마나 편협된 것인가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서영은 출발 당시부터 인간 중심의 〈위대함〉의 메세지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것은, 그녀가 알게 모르게 찾아 나서게 된 〈타자의 말〉의 한 특성이다. 타자로서, 또는 타자를 위해 발언하려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아의
자기 동일성의 확신을 부순다. 그것은 흔들리는 겸손한 자아, 타자를 향해 존재의 집을
열어둔 자아의 말이다.
그는 세계가 잘난
사람들에게만 위임해 온 발언권이 얼마나 끈질기게
〈위대함〉의 신화에 몰두해 왔는가를 알고 있다. 아니 르클레르 Annie
Leclerc에게
〈위대함〉이란 남자들, 〈발전〉의
배타적인 이니셔티브를 장악해 온 기득권자들의 허풍이다. 위대한 여자는 위대한 남자가 될 수 없다. 위대함이란 여자에게는 센티미터에
관계된 문제일 뿐이다. - Annie Leclerc, Parole de femme. Paris,
p.9
2. 物性의
정복
〈사물〉을 향해 다가간 한 여자는, 그러나
아직 그녀가 원하는 것만큼 충분히 겸손했던 것 같지는
않다. 초기의 정서영은, 논리적으로는 분명히 〈사물〉을 향해 열려있는 인식론적 토대 위에 서 있다. 그녀의 초기 작품들은 〈사물〉의 〈物性〉과 접촉하기 위한 끊임없는
고투처럼 보인다. 그녀는 석고를 파거나, 나무를
자귀로 쳐서 자욱을 내 그 조직을 보기도 하고, 여러 겹 겹쳐진 철판의 부분을 한꺼번에 글라인더로 갈아 그 겹겹이 쌓인 층이 마모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석고 덩어리와
석고판이 반복적으로 놓이게도 해보고, 석고 덩어리에 종이를 겹쳐 끼우기도 하고, 쇠판에
가죽을 부분적으로 씌워보기도 한다.
이 단계에서 그녀의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는 물질의 〈복수성〉을 물리적으로 체험한 결과밖에는 만들어내지 못한 듯하다. 그녀는, "物性을 체험하는 즐거움, 그
체험을 위한 인내를 얻을 수 있었으나 그 물성 자체가 목적화, 대상화한 지점에서 사물과는 극히
표피적인 부딪침만이 있었음을 깨달았고 따라서 과연 사물을 접촉하였다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좀더
깊이 사물 속으로‥‥‥
정서영은 사물에 보다 깊이 〈가담〉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번거로움을 피하는 방식을 택한다(최근의 그녀가 온갖 다양한 시도를 구사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마티에르를 한정하는 대신에 그 마티에르에 다양한 시선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녀는 〈쇠〉를 택하여 여러가지 실험을
한다. 그것을 일단 기본형인 직육면체로 설정하고, 클라식한
모양으로 일으켜 세운다. (대저 모든 조각은 대지를 거스르며 일어서 있지 않는가. 마치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인듯이, 최근의 작품에서 정서영은
흥미롭게도 이 직육면체를 바닥에 드러눕힌다. 또는
아주 조금 대지에서 들어올린다. 뒤집힌 두상, 또는 판대기를 베고
드러누워 있는 인물의 데생도 같은 의미론적
계열 체 안에서 읽힌다. 남성적 수직성을 조심스럽게 부수는 대지의 수평성?) 그리고
난 뒤, 쇠판을 벼려서 만든 다양한 모양을 〈오랜 동안의 망치 작업을 통하여 쇠 특유의 저항을 정복당하고 나긋나긋 수평으로 널부러져 버린) 그 〈본체〉에 덧붙인다. 그것은 때로는 위에, 때로는 옆에, 부속물처럼
〈매달려 있다〉. 때로는 아예 떨어진
곳에 쇠판이 따로 배치되어 있거나, 제법 독립성을
가지고 본체에서 빠져 나와 있기는 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벼려진 쇠판은 독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자신의 종속성을 얌전히 고백하며 웅크리고 있다. 이 단계에서 정서영은 분명히 어떤 〈기본형〉에 대한 사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물의
어떤 추상적인, 우아하고 깔끔하며, 명쾌한
〈기본형〉을 설정하고, 체험된, 아니
오히려 정복된, 구질구질하고 들쑥날쑥하며 제멋대로인 사물을 그것에 종속시키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벼리어진 쇠판을 기본형이 되고 있는 직육면체의 구멍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그래서
그에게로 다시 돌려보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타자는 아직 못나고, 지리멸렬하고 종속적인 가치를 가진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
단계에서 정서영의 형이상학은 자아의 자기동일성의 확신에 기대고 있는, 자아의
위대함을 확보하기 위해서 타자를 열등성의 지옥에 처박아온 남성적 형이상학에 아직 기대고 있다. 하나는 다른 하나에 비하여 절대적으로 우월하다. 신은
단 하나이다.
이러한 특징은 최근의 그녀의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끊임없는 〈둘〉. 상이하지만,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비하여 절대적으로 열등하지 않은 〈둘〉의 주제와
비교해 보면 너무나 흥미롭고 또한 암시적이다.
그녀가 굳이
〈쇠〉를 선택한 것도 우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가장 인간중심적인 질료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에 대한 승리를 결정적으로 확보하게 해준 사건은 바로 〈쇠〉의 발명이 아니었던가, 그것의
단단함, 차가움 등도 지성적 추구에 몰두하고 있는 한 미술학도의 입맛에
맞았으리라. 그 만만치 않은 특별함 역시, 덤벼들어
정복하고 싶은 욕구를 부추겼을 것이다. (최근에 그녀가 택하는 따스하고 만만한 질료들: 나무, 플라스틱, 석고, 심지어는 헝겊 등과 비교해 보라). 그녀는 젊은이답게
〈힘든〉질료에 야심만만하게, 심각하게 덤벼든다. 〈가벼운〉 쇠를 얻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 가벼움은 얼마나 지독히 무거운 시간을, 행위를, 인내를, 자기확신을 앞세웠을 것인가?
3. 마음, 부드러운 비낌
그리고 정서영은 오랫동안 지쳐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어쩌면, 무엇보다도, 작업의 추구성 때문에, 내게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녀가 독일로 유학을 떠난 뒤, 처음으로
전시한 작품들에서 〈설치〉의 요소가 얽히기 시작하는 것은 따라서 나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로 보인다. 왜냐하면, 〈설치〉란
다름 아니라, 삶의 콘테스트를, 이야기를
작품 안에 도입하는 것일 테니까. 작품 「소풍길로 향한 계단」은 너무나 명백한 동화적 상상력을 지니고 있어서, 어쩌면 너무 직접적이라는 비판을 들을 법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저절로 작가의 내면으로부터 그렇게 〈튀어나왔을〉 것이다. 작가는 직접성에 굶주려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정서영은 서서히 초기의 추상성과 결별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단순한 결별은 아니다. 지적인
추구에 몰두하고 있던 젊은이답게, 정서영은 어떤 완벽함에 대한 욕망에 떠다밀렸을 것이다. 어떤 종류의 지적
순수성, 삶이라는 울퉁불퉁한 비효율성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소독된 영역,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녀의 작품세계는 마음의 침범으로부터 완벽하게 문을
닫아걸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정서영의 미술은 사납지는 않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어떤 전복을 기도하
고 있는지도 모른다.
1992년의 작품 「무제」를 보자. 뒷모습의
인물 사진 두 장 (작가사진의 뒷모습이라고 한다). 그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화사한 나무들, 바닥에
비스듬히 눕혀져 있는 장식대, 그리고 장식대 밑바닥에
붙어 있는 거울, 작가 자신에 의하면, 이 칙칙한
뻘건 색은, 그것의
조잡함 때문에 일부러 택해진 것이다. 시골 농가의 커다란 창고문에 칠해져 있는, 온갖 색을 다 섞으면
얻어지는 잡색. 또, 그것은
작가자신의 언급에 따르면, "강렬한
심상을 표현하고자 할 때 화가들이 즐겨 써온
색깔"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작가에게서 단순히 〈매개자〉의 역할만을 요구해온 현대미술이
터부시해온 〈마음〉의 작용을 표현하기 위해서 일부러 택해진 색깔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사하게 꽃이
피어 있는 창문 가까이 배치된 작가의 뒷모습 두 장은 명쾌하게 설명된다.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의 미지의 자아이다. 그 자아는 언제나 두 사람, 〈타자〉에
의해 겹쳐진 자아이다. 이 어두운 뒷모습의 미지의 자아는 바닥을 비추는 거울 (이
영원한 프시케의 도구!) 에 의해 다시 한번 더 확인되는데, 작가의
의도는 이런 것이
다. "관객이 다가가도, 거울은 관객의 발은 비추지만, 관객
자신은 그걸 보지 못하죠."
즉, 그것은
자아의 인식작용 바깥에서 홀로 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삐딱함이라니! 작가는 마음이 가는 대로 버려 두는 것이다! 바짝, 창가에 붙어 있는, 이미 객관적 평형을 포기한, 편들기 하는 마음이 가는 대로! 정서영의
모든 작품에서는 이처럼 시적 메세지가 강렬하게 풍겨 나온다.
〈마음〉의 복수성은 「3인칭 복수」에서 다시 한번 〈거울〉을 사용해서 표현된다. 작품의 가운데 부분에는 순록(실제로는
장난감을 찍은 것이라고 한다)의 사진이 붙어 있다. 장난감이었어도 아니었어도, 순록이었어도 아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속임수의 이미지가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불규칙하게 흐르며 떠돈다는 사실이다. 이미지의 실재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변덕에
따라 변한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우리에게 〈3인칭〉의 무관한 타자인 것일까? 아니 오히려 타자들인 것일까?
정서영은 그렇게 조심스럽게 〈마음〉의 요소를 조각 안에 도입한다. (70년대
자동차 모델이 지나가는, 그래서 마치 옛날에
찍은 사진처럼 느껴지는 기차역의 사진이 붙어 있는 「기차역」. 어떻게
보면 형태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쉐타가
감겨 있는 둥근 테 등).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그녀의 표현대로 그녀가 "서양의 미술사에 대한 책무를 별로 느끼지 않기 때문"일까? 그녀의 최근의 작품들이 초기의 작품에 비해서 훨씬 더 순발력이 있고, 심리적 자발성이 두드러지는가 하면, 훨씬
더 가볍고
유쾌한 것은 어쩌면 그녀가 독일 땅에서
비로소 동양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눈뜨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4. 매우
겸손한 작품 - 최소한의 개입
정서영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마음의 경사를 따라 매우 분방해 보이는 추구에 착수한다. 사물의
물성의 정복이라는 초기의 단일한 주제는 매우 다양한 주제들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그녀의
추구는 너무나 다양해서, 어찌 보면 일관성을 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치고 빠진다. 이것인가 싶어서 그맥을 따라가다 보면 아니고, 또 저것인가 싶으면 이미 작가는 딴전을
피우고 있다. 작품들의 발랄한 디테일은 따로따로 톡톡 튀지만, 그것을 어떤 체계에 정리해 담으려고 하면, 그것들은
완강하게 저항하며 달아나 버린다.
무얼까? 이 무수한, 발랄한, 따로따로 말하는 작품들의 숨겨진 욕망은? 겉보기에
매우 어지러워 보이는 정서영의 작품들은 그러나 사실은 동일한 욕망을
다양한 전략에 따라 변주한 결과이다. 정서영의 욕망은 오히려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잘라 말하면, 〈고정되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는다. 사용되는
제재도, 그것을 제작하는 방식도, 또 그것을 전시하고 감상하는 방식까지도. 그러나
그 뒤흔들림은 너무나미세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서, 관객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작품의 場에 이끌려 들어간 뒤이다. 그 이후에는 어쩔 수 없이 작품에 대하여 어떤 태도든 표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녀는 특별히 조각에 적합한 재료를 고르지 않는다. 그녀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작품 자체라기보다는, 작품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조각가는 작품을 제작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작품의 조건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1991년에 제작된 「풍경」은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가는
그저 평범한 유리단지 안에 물감을 넣고, 물을
부어 물감을 가라앉혀 놓고, 오랜 시간을 기다린 뒤에, 주어진 유리조각을 덮어
작품을 완성한다. 작품 제작은 최소한으로 축소된다. 그렇게
작가의 최소한의 개입
으로 완성된 작품은 절대로 큰소리를
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인가 거대한 개념을, 어떤 정해진 조형적 메세지를 전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적어도,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과격하지는 않게, 살금살금, 관객은
분명히 도전을 받았다고 느끼지만, 특별히 화를 낼
수도 없는 것이, 작가가 작품을 비트는 방식이 너무나 순진하고 만화적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은 대놓고 도발하지는 않는다. 도대체가
핏대를 올려서 도전하는 데에 이 순진한 동양여성은 관심이 없는 것이다.
"위대함은
그대들의 것이니까." 그녀는 무거운 짐을 지고 낑낑댈 생각이 없다. 그런 조각가들이야 동서고금에 천
다스는 있지 않은가.
그런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꽃처럼
조각된 병뚜껑을 스폰지에 박아놓는 다든지, 두개의 화분을 대충 포개놓고 거기에 고무줄을 잡아 매어놓는다든지, 선반 위에 헝겊을〈한번 잘〉 매어서 올려놓는다든지, 너무나
천연덕스러워서 웃음이 나오는 이 정서영 특유의 유머는 사실은 겉보기처럼 단순한 순발력의 소산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세밀하게 관찰하고 난 뒤에 내린, 고도의
동양적인 전략이다. 멍해 보일 정도로 너무나 천연덕스러운 방식, 그녀의 말을 빌리면,
"생각은 세밀하게, 그러나 보여주기는 멍청하게." 동양인
특유의 자연스러움. 그것은 공연히 겉으로 날카로운 외양을 드러내어서 미리 적의를 촉발하지 않는다. 얼마나
실속 있는 미학적 전략인가!
5. 작은, 그러나 끊임없는 움직임
정서영의 어떤 작품들은 가까이 다가갈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관객의 참여를 거쳐서 비로소 완성된다. 1991/1992년 사이에 제작된 「무제」를 살펴보자. 이 작품은 쇠로 된 원통
속에 자동차 기름이 들어 있고, 통 양옆에 쇠로 된 국자가 걸려 있다. 자동차 기름, 쇠통, 국자등의
일상적 소품. 관객은 우선 통속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미 관객은 작가가 쳐놓은 관계망의 그물에 걸려든 것이다. 그후에
관객은 다음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그는 '이
국자, 분명히 일상적 소품인 이 국자는 어디에 쓰이는 것일까. 이걸로 이 기름을 떠내야 하는 걸까' 라는
질문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약간의 혼란.
1992년의
「개인적 상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상자 위에는 작가의 시력에 맞추어져 있는 렌즈가 부착되어 있다. 이 작품을 완성하려면, 관객은 그 구멍에 눈을 갖다대는 수 밖에 없다. 작가가 그것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관객은
주체로서 작품에 참여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하는 것이다. 안을 들여다보면, 가까스로 약간의 빛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각자의 시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빛. 불편함을 감수하고 〈가까스로〉 찾아내는 약간의 빛. 1995년의 「잘/못 볼만한 조각」은 그 제목에서부터 이미 관객의 개입을 유도한다. 개입하지 않는 관객은 〈못 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대위의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작품 위의 조각은 조그만 오리새끼처럼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거울을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그것이 사람의 옆모습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가질만한 조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선반 위에 이것인지 저것인지 알 수 없는, 무슨
용암덩어리 같기도 하고, 여자가 앉아 있는 모습인 것 같기도 한 조그마한 형태가 하나 놓여
있다. 가까이 다가가는 관객들만이 이 조그마한 형태 안에 또 미세한 무늬가
그려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작가로부터 이미 모든 것이 완결된 채로 주어지는 방식에 익숙한
관객은, 이 참여해야 하는, 작품을 향해 〈움직여야 하는〉작품에 대해 불편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서영 작품의 특징은 그것이 관객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살그머니 작품의 장안으로 끌어들인다는 사실이다.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면, 관객은 자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새로 형성된 관계에 눈을
뜰 수도 있는 자신의 능력을 이미 사용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관객이 감수해야 하는 약간의 불편함으로 완성되는 이러한 작품 제작 방식은 설치 작품 「수십 개의 그림과 몇 개의 조각으로 만든 일」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방에는 그림과 액자들이
고전적인 방식으로 얌전하게 걸려 있다. 그러나 그 그림들 사이사이에는 불안한 조각들이 자리잡고 있다. 매우 고전적인 위치에 고전적인 방식으로〈장식되어 있는〉조각품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작품들은 미묘한 방식으로 뒤틀려 있다. 우선 전철 안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손잡이를 꼭
잡고 있으라"는 지시 기호물이 조각으로 제작되어 그럴듯하게 장식대 위에 올려져
있다. 하기는 이 지시물은 작가의 메세지를 알아듣는 관객에게는 정확한 지시 역할을 하기는 한다: 이 방 안에 숨어 있는 약간의 흔들림을 조심할 것. 한
구석에는 그저 툭 치면 분리되어 버릴 플라스틱 화분이 엉성하게
겹쳐져 있고, 그리고 잡아당겨 보라고, 그래서 작품을 부수어 보라고 도발하기라도
하듯이 고무줄이 양옆에 손잡이처럼 길게 늘어져
있다. 삐딱한 대 위에 삐딱하게 올려져 있는 항아리. 항아리
위엔 전혀 엉뚱한, 매우 산업적인 이미지: 뒤틀린 인터체인지의 모티프가 그려져 있다. 또 한 구석에는 약해 보이는 나무 선반에 엉성하게 헝겊이 걸쳐진 불안한 작품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을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이 방들을 돌아 나오는 관객들은 어떤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정서영이 〈움직임〉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드러낸다. 이 〈움직임〉을 통해서, 작품과 관객은 유기적으로 맺어지지만, 그것은
어느 경우에도 안정된, 고정된 관계가 아니다. 그녀의 작품 앞에서 관객은 절대로 안심하지 못한다. 관계는 작품과 관객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번복된다. 그 불안의 진동은 오래
남는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치고 들어가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작가는 어디서 얼마만큼 허물고 있는 것일까. 관습과 예외의 미묘한 공존, 그리고
가늠할 수 없는 양자의 비율.
그녀의 그림에 나타나는 〈끈〉의 의미에 나는 오래 매달린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그림에 그토록 무수히 나타나는 〈둘〉의 의미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서로 다른 둘, 그러나
서로 배제하지도 합일되지도 않는 둘, 기대고 있으면서도 독립적인 둘, 흔들리는 둘, 그러나 강력히 연계되어 있는 둘 서로에게, 귀 기울이는 둘, 자아의 확실성을 유보하는 둘, 존재는 불안의 양식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둘, 흔들리는, 불안한, 규정되지
않는, 자아라는 양식, 그러나, 그것은 불안만은 아니다. 불안해하는 것은 일상에 코를 박고 있는 자아일 뿐이다. 다른
자아는 그 불안을 즐긴다. 오, 사르트르가
지옥에다 처박은 타자는 그렇게 조심스럽게 〈자아의 확장에의 권리〉의 이름으로 우리 곁으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얘" 라고
나는 내 존재를 다정한 호격으로 부른다. 그것은 나이면서 내가 아니므로. 정서영의 〈끈〉은 그 호격의 글에서 미세하게 진동한다. 그리고
그녀가 10이라는 완성수를 매기기를 포기한. 가운데의 텅
빈 구멍 속에다 (예술가의 구멍! 왜 아니겠는가, 그 구멍 속에서 모든 형태는 녹아
사라진다!) 나를 비끌어맨다. 좋다. 나는 그 끈을 부드럽게 잡고 잡아당긴다. 그
끈의 탄성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동일하지 않다. 그건〈끈〉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의 잘못이다. 우리 모두다 알고 있듯이. 그러므로 나는 정서영의 〈불안〉을 받아들인다. 삶의
이름으로.
http://artsonline.knaa.or.kr/jwork/boardClientView.do?fileID=&boardCD=12d12175e368&boardID=12eeca97f0b4&boardRef=0&boardDepth=1&searchField=&searchWord=&encodeValue=&returnUrl=&mode=&menuId=&category=P0000408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