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SeMA-하나 평론상, 이진실·장지한 선정

서울시립미술관은 SeMA-하나 평론상 2019년 수상자로 이진실(45), 장지한(34)을 선정했다고 25일 밝혔다.

이진실은 작가 김실비의 작업이 내포하고 있는 중층의 의미들을 읽어낸 '계시와 의심 사이: 믿음의 알레고리로 테크노크라시를 해부하기'로, 장지한은 작가 김범의 작업을 독창적 시각으로 해석한 '다르게 존재하기 혹은 다르게 보기: 김범에 대한 노트'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진실은 서울대 미학과에서 독일현대미학을 공부하고 박사과정을 수료, 전시 기획과 미술비평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장지한은 뉴욕주립대(빙엄턴)에서 미술사학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틈틈이 잡지나 전시 도록에 글을 써 온 신진평론가다.

SeMA-하나 평론상은 국공립미술관 최초의 평론상으로, 하나금융그룹의 후원으로 제정되었다. 특히 국내외 평론상을 통틀어 가장 높은 2000만 원의 상금을 내걸고 한국 미술계의 발전을 견인할 평론가를 발굴해 지원한다. 심사는 3차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평론 역량만으로 수상자를 선정하자는 원칙 아래 응모자명을 비공개로 하는 ‘블라인드 심사’로 진행된다. 이번 심사에는 서동진 계원예술대 교수(심사위원장), 미학자 양효실, 우정아 포항공과대 교수, 정현 인하대 교수, 조선령 부산대 교수와 당연직으로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 운영부장이 참여했다.

이진실의 수상작과 관련 심사위원들은 “김실비의 영상을 통해 동시대의 매체이론과 철지난 종교적 상징을 병치하여 그 작업이 현대 사회에 편재한 자본주의 체제를 지시하는 방식을 치밀하게 분석했다"며 “문제의식을 꿋꿋이 지키며 비평을 밀고나가는 투지나 이를 설득하기 위한 글 솜씨는 심사위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이론적 성찰, 유려한 글쓰기 그리고 시대를 향한 비평적 시선의 균형이 적절하게 이뤄졌다”는 호평을 받았다.(심사위원 우정아, 서동진, 정현)

장지한의 수상작은 심사위원들로부터 “기존의 미술 이론에 매몰되지 않고, 개개의 작품을 정교하게 묘사하면서, 현상학적 읽기와 인식론적 읽기 사이의 간극을 벌려가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해석의 독창성과 포부”, “90년대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해보려는 패기와 신선함” 면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다. (심사위원 우정아, 조선령, 정현)

한편 2019 SeMA-하나 평론상은 1, 2회에 이어 나이, 학력, 전공, 경력, 직업 등 일체의 자격제한이 없는 공모제로 운영되었다. 평론 활동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열린 평론상’의 성격은 SeMA-하나 평론상의 한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8월 1일부터 25일까지 25일간에 걸친 응모기간 동안 총 31명이 지원했다. 응모자의 연령대는 50년대생 1명, 60년대생 2명, 70년대생 8명, 80년대생 13명, 90년대생 7명으로, 70년대생에서 90년대생이 전체 응모자 중 90% 정도의 비율을 차지했다. 접수된 원고들의 주제로는 작가론(10편), 전시 비평(9편), 단색화, 아카이브 아트, 영상 이미지, 신체적 드로잉 등이 있었다.

[서울=뉴시스]
Nov. 2019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2019_SeMA-하나_평론상,_한국_현대미술비평_집담회(전자책)
http://semacoral.org/cabinet/gimbeome-daehan-noteu

다르게 존재하기 혹은 다르게 보기 : 김범에 대한 노트 
장지한 


2002 년 김범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익숙한 비율의 탁자 위에 세 개의 사물을 배치했다. 언뜻 보았을 때 그것은 각각 다리미, 주전자, 그리고 라디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물 하나하나의 용도를 떠올려 보면 그들이 함께 놓여 있는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데, 더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사물들이 배치된 모습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사물들은 실용적인 도구로서 언제든 인간을 위해 준비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각각의 사물이 저마다 지닌 기능적이거나 혹은 미학적인 측면을 드러내기 위해 배치된 박람회나 박물관의 모습도 아니다. 사물들의 배치가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마치 우리들의 모습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왼쪽에 놓인 다리미는 마치 앉아 있거나 서 있는 듯하고, 주전자는 고개를 돌려 다리미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그 둘은 가운데의 라디오와 함께 둥글게 모여서 서로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논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 시선을 좁혀 각각의 사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순간, 우리를 더욱 낯설게 하는 건 그들의 자세만이 아님을 알게 된다. 주전자에는 안테나가 비쭉 솟아 있고 다리미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또한 라디오 밑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속 재질의 받침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단지 생소한 몇몇 장치들이 물을 끓이거나 옷의 주름을 펴고, 소리를 재생하는 사물 본래의 기능과는 무관할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
이렇게 김범의 작업에서 사물을 둘러싼 의미의 영역은 불확실한 채로 남겨져 있다. 관객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그들의 침묵에 조금이나마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작가가 캡션의 형식으로 남겨 놓은 단서에 의지하는 것이다. 제목은 다음과 같다.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2002). 우리는 이제야 이 사물들의 기능이 서로 뒤바뀌었음을 알게 된다. 즉 우리의 사물에 대한 이해는 정확하지 않았다. 그들의 존재는 유용함의 세계에 기반한 인간의 논리로는 포착될 수 없다. 관객은 그들을 인식하는 데 실패한다. 물론 작가가 제시하는 정보가 사물의 불확실한 의미를 고정시키는 것은 아니다. 제목을 보는 순간 사물에 대한 인식은 이제 믿음의 문제가 된다. 우리가 그들을 테이블 위에서 끌어내려 직접 사용해 보지 않는 한 기능과 외형의 불일치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작가가 사물에 달아 놓은 주석에 대한 믿음의 문제와 무관하게 여기서 중요한 건, 어쨌든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다는 사실이다. 이 실패는 김범의 작업에 접근하는 비평가와 큐레이터의 주된 관심사였다. 예를 들어 큐레이터 정도련에게 이는 주체의 사물에 대한 인식과 세계 사이의 간극의 문제로 나타난다. 그는 김범의 이 세 가지 사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작업의 효과 중 하나는 외부 세계와 시각적 인지의 분리를 깨닫게 한다는 점이다. 김범의 오브제는 묘사되는 기초 사물의 특징, 심지어 ‘본질’과 ‘개념’마저 소유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사물이다. 그리고 지각되는 그것, 바로 그것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혹은 다른 것이 된다. 이러한 오브제들은 현상학의 가르침, 곧 상황에 좌우되며 흔히 신뢰할 수 없는 지각은, 의식이란 사물들의 세계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 메를로 퐁티에 따르면, 몸 -주체는 의식과 세계의 2원론 사이에 끼어들어, 의식과 세계의 상관관계를 뒤얽힘의 망으로 바꾸어놓는다 . ” 

김범의 작업을 두고 흔히 발견되는 이러한 논리는 언뜻 보기에 관객의 실패를 잘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우리가 더 이상 사물들의 세계 바깥에 거주하면서 그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외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그들을 관찰하고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의 신체도 세계의 일부로서 사물들의 세계와 분리될 수 없으며, 그 결과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언제나 불확실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지각은 ‘상황에 좌우되며’ 그 결과 언제나 우연에 맡겨져 있다. 김범의 작업은 이러한 방식으로 지각의 불확실성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혹은 그 가능성을 실험하는 리트머스지로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설명은 언제나 현상학적인 수사에 의지한다. 여기서 그의 작업은 세계와 이미지(사물), 그리고 주체가 구성하는 매트릭스를 문제 삼는다. 대상의 인식을 둘러싼 방정식이 복잡해지는 이유는 이미지를 마주하는 과정이 관객의 위상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사물에 대한 인식은 대상의 표면을 뒤덮은 빽빽한 밀도의 기호를 해독하는 관찰자의 중립적인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과 세계가 ‘뒤얽힘의 망’을 형성하는 3차원의 공간에서 고정시킬 수 없는 우리의 신체에 달려 있다. 사물에 대한 인식의 복잡성을 강조하는 이런 식의 독해는 일견 김범의 작업을 관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주 앉은 세 종류의 사물은 분명 우리의 인식 그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를 두고 “실재와 형상의 간극”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의식에 맺히는 상은 실재의 사물과 다르다. 주전자로 인식했던 이미지는 사실 자세히 보면 (혹은 제목을 보니) 라디오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질문은 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 김범의 사물이 제기하는 질문이 과연 불확실한 지각의 문제인가. 즉 확신할 수 없고 언제나 우연에 맡겨져 있으며 주체의 신체에 따라 가변적인, 그래서 고정시킬 수 없고 수많은 해석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 바로 그 인식의 문제인가. 

 사실 이는 반세기 전 이우환이 던졌던 질문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공간이나 물체는 과연 보이는 대로의 것일까. 어떤 계기나 형식이나 관계의 변화에 따라 경험과 인식이 변하는 일은 없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그는 신중한 태도로 사물을 고르고 그것의 위치를 조정한다. 이렇게 구축된 섬세한 짜임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세계 속 사물의 좌표, 그것과 다른 것 사이의 기묘한 마주침, 그리고 이 복잡한 매트릭스에 끼어든 인간의 신체 사이의 관계를 집요하게 탐구하는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근대적인 혹은 이성적인 주체에 기반한 인식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수동성과 능동성을 겸비한 신체적인 시각을 중시하고 싶다 […] 신체는 내게 소속되어 있음과 동시에 외계하고도 이어져 있는 양의적인 매개항이다. 그러니까 신체를 통해 본다는 것은, 보면서 동시에 보여지는 것이며 보여짐과 동시에 보는 것이 된다.” 
그저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기도 하는 주체, 다시 말해 생리적인 시각이 아닌 ‘신체적인 시각’을 제안하는 이 새로운 인식론은 본다는 행위를 사물과 주체, 그리고 세계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지각의 게임으로 변형시킨다. 그가 실험했던 것은 결국 “사물도 장도 신체도 모노파에서는 미지의 것으로 되살아난다”라는 식의 게임, 다시 말해 세계에 대한 인식을 생경하고 불확실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과연 김범의 작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이러한 것인가. 그의 관심을 대상에 대해 무한히 열린 해석, 세계와의 새로운 관계, 그 결과 발생하는 인식의 오류로 환원할 수 있을까. 김범의 작업에 대해 평론가와 큐레이터는 그가 ‘이미지의 진실성과 허구성’을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김범은 관습적으로 작동하는 우리의 시각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관객의 눈이 기억에 의존하는 한 우리는 진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눈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이미지의 무한함을 향해 열려 있으며 대상의 표면에 고정될 수 없는 신체적인 것, 혹은 신체를 넘어서는 세계의 일부다. 


하지만 김범의 사물들은 이런 식의 현상학적인 시선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들의 침묵은 이 세계에 대한 극단적인 무관심을 선언한다. 관객이 마주하는 건 그저 테이블 위에 놓인 일상의 사물이 아니라, 김범의 말을 빌리자면 “겉에서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은밀하고 내적인 실체”를 지닌 기묘한 존재다. 6 라디오로 기능하기 위해 주전자의 내부에 설치된 복잡한 전자장치는 꼼꼼하게 이식된 인공장기처럼 새로운 생명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한 존재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는 주전자의 내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주전자의 뚜껑 옆으로 보이는 안테나는 사물이 우리에게 드러내는 자신의 겉모습에 불과하다. 관객에게 허락되지 않은 내적인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제목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는 각자의 상상력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저것은 겉으로 주전자인 척하지만 분명 내부에 은밀하게 트랜지스터를 품은 채 신호를 증폭시키는 라디오일 것이다.’). 관객은 사물의 겉모습을 바라보며 들리는 소문만을 믿고 짐작할 뿐이다. 
 즉 관객이 김범의 사물을 인식하는 데에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의 시각이 ‘신체적’이기에 대상과의 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 결과 수많은 해석의 가능성에 열려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물이 우리를 포함하는 세계와의 관계로부터 등을 돌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과의 대면은 우리를 무한히 열려 있기에 불확실한 세계가 아닌 불가능성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다. 이우환의 사물이 관객과 함께 공존하는 팽팽한 공간, 즉 ‘뒤얽힘의 망’ 속에서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면(돌은 더 이상 자연에서의 그 돌이 아니다), 김범의 사물은 관객에게 인식의 가능성 그 자체를 묻는다. 우리는 그들의 은밀한 속을 알 길이 없다. 이제 김범의 사물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인식에 대해 제기되어 온 질문의 방향을 급진적으로 뒤집는다. 이우환이 제기했던 질문(‘어떤 계기나 형식이나 관계의 변화에 따라 경험과 인식이 변하는 일은 없을까’)에 대해 그들은 ‘그럴 일은 없다’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더 이상 세계와의 관계에 관심이 없다. 미술 작품의 고집스런 자율성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관객의 현전을 중시하는 작가들이 가공되지 않거나 혹은 단순한 형태의 사물에 그토록 집착한 것은 대상이 단순할수록 세계와의 미묘한 관계의 변화에 따라 그것이 새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우환의 돌과 도널드 저드의 특수한 사물은 형태의 단순함으로 인해 지각의 무한한 가능성에 열려 있다. 대상의 표면은 관객의 해독을 기다리는 빽빽한 밀도의 기호가 아니라, 관객의 신체로 채워진다. 여기서 관계는 대상과 주체, 세계 사이의 거리뿐만이 아니라 벽과 바닥의 질감, 빛의 조도와 공기의 온도를 포함한다. 이우환은 말한다. “나의 관심은 이미지나 물체의 존재성보다 만남의 관계에서 오는 현상학적인 지각의 세계에 있다.” 
김범의 사물을 논하려면 우리는 이 문장을 뒤집어야만 한다. 작가는 ‘현상학적인 지각’보다 ‘이미지나 물체의 존재성’에 관심이 있다. 김범은 본인의 목표가 “실재-이미지-이미저리와 같은 관계보다는 ‘가능한 한’ 이미지가 실재가 되는 것”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김범의 사물은 ‘만남의 관계’에 휩쓸리지 않을 내구성을 지녔다. 물론 이러한 이미지의 견고한 실존은 소위 말하는 모더니즘의 폐쇄적인 자율성을 향한 것이 아니다. 대신 그는 겉으로 보이는 간결한 형식 뒷면에 ‘은밀하고 내적인 실체’를 구축한다. 그것은 캔버스를 자르고 꿰매는 식의 꼼꼼한 수작업(예를 들어 〈벽돌 벽〉(1994)) 혹은 돌에게 시를 낭독하는(〈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2010)) 등의 장시간의 노동을 포함한다.  이는 대상에 자족적이고 초월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우리 시대에 전근대적인 무엇으로 쉽게 폄하되는 이미지에 대한 주술적인 태도를 되살려내는 일에 가깝다. 공간과 사물, 관객이 구축하던 조화로운 관계가 해체된 자리를 대신하는 건 마치 생명을 지닌 유기체와 같은 새로운 존재론의 이미지다. 〈임신한 망치〉(1995)는 사물이 인간을 위한 도구라는 정체성을 벗어나 생명을 잉태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이미지는 마치 무한함을 가늠할 수 없는 온전한 타자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김범이 제시하는 이러한 기묘한 이미지의 존재론을 종교적인 믿음이나 철학적인 실험으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그는 사물에 대한 원시적이고 마술적인 믿음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것도, 사물(object) 을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모든 존재자의 동등한 위상을 주장하고자 함도 아니다.  김범은 자신의 목표가 ‘가능한 한’ 이미지가 실재가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그가 ‘가능한 한’ 이라고 강조해서 말하는 이유는 이미지가 실재성을 획득하는 것이 (그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김범의 사물을 인식하는 일에 실패하는 까닭은 그들이 유기체로의 변신에 완벽하게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다. 김범의 사물은 여전히 이미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범의 사물이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는 건 김범이 고안한 형식적 장치들로 인해 그들이 W.J.T. 미첼이 말한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이중의식”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지가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마치 살아있는 양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아닌 줄 알면서도 “그림이 살아 있는 것처럼”, 다시 말해 “마법적 믿음과 의심에 찬 불신 사이에서, 소박한 애니미즘과 완고한 유물론 사이에서, 신비적 태도와 비판적 태도 사이에서 동요하는 ‘이중의식’을 유지”한다 .  이러한 상황은 김범의 잘 알려진 두 개의 문장으로 요약된다.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 혹은 ‘당신이 보는 것은 당신이 보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이미지의 진실과 거짓에 대한 것이 아니다.

김범의 사물은 우리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처음의 순진했던 생각은 이후의 깨달음으로 교정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이 주전자라고 생각했던 순간과 그것이 라디오일지도 모른다는 반성 사이의 간극이 아니라, 양 극단 사이에서 확신에 찬 태도로 한쪽을 선택하지 못한 채 위태롭게 유지되는 주체의 이미지에 대한 ‘이중의식’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들을 인식하는 데에 실패하는 이유는 이미지의 기묘한 존재론이 우리를 입구와 출구가 막힌 ‘닫힌 회로’ 속에 가두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집스런 사물의 독립적인 실존 앞에서 믿음과 불신 사이, 물신숭배와 비판적 해석 사이에서 무한한 진자 운동을 반복하는 무력한 주체다. 이는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괄호 치는 일이다. 우리의 눈은 이미지를 감각하는 생리적인 기관 혹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사물을 낯설게 지각하는 ‘신체적인’ 눈이 아니라, 닫힌 회로 안에서 지루한 운동을 반복하는 ‘기계적인’ 눈에 가깝다. 김범의 회화 연작인 〈친숙한 고통〉(2008- ) 앞에서 우리는 텍스트의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유희하는 주체가 아니라, 이미지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알고리즘을 따라가는 비인간에 가깝다. 우리 앞에 제시된 것은 이미지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 복잡한 체계의 기호가 아니라 정답을 찾아야만 하는 미로다. 여기서 관객이 해야 할일은 다만 주어진 경로를 따라가는 것에 그치고 만다.

그런데 우리를 닫힌 회로 앞에 붙들어 매는 것이 그저 치밀하게 설계된 검은 형태의 미로가 아니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미지 앞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 보이는 것은 아크릴 물감을 머금은 채 이미지의 표면을 훑고 지나간 붓질의 미세한 흔적이다. 벽에 단단히 고정된 캔버스는 우리에게 ‘이것이 미술관에 있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리는 당신이 알고 있던 바로 그 회화’라고 말한다. 즉 김범의 그림은 기하학적 추상이면서 동시에 수학적인 문제다. 여기서 우리는 회화의 자율성에 대한 오래된 믿음과 흔한 형식의 수수께끼를 대하는 자폐적인 도전의식 사이를 오간다. 

김범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세계를 괄호 치고 그저 묵묵히 이미지를 바라본다. 김범이 1995년 발표한 작은 그림은 주체의 비인간적인 눈에 대한 완벽한 은유다. 작은 캔버스에는 뒤집어진 소의 꼬리와 다리가 잉크로 그려져 있다. 여기서 관객과 그림이 대면하는 순간이 만들어 내는 건 시선의 기묘한 중첩이다. 관객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꼬리를 바라보는 소의 위치에 서 있다. 즉 그림 앞에서 주체의 눈은 세계를 향하기보다 그것을 괄호 치고 그저 스스로를 바라보는 비인간의 눈이다.


다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김범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질문은 과연 무엇인가. 그의 사물과 그림이 제기하는 질문이 과연 불확실한 지각의 문제인가. 그의 관심을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오류로 환원할 수 있을까. 캔버스를 무언가로 채우기보다 가능한 한 비우고, 사물을 극적으로 변형시키기보다 은밀한 방식으로 그것에게 말을 거는 김범의 작업은 우리 시대의 문화적인 생산물이 몰두하는 스펙터클한 외형에 대해 모든 면에서 저항한다. 문제는 일견 다소 소박해 보이는 형식 때문에 그동안 작업의 비판적이고 역사적인 의미가 간과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그를 그저 흥미로운 지각의 게임에 몰두하는 고독한 장인의 지위에서 구출할 필요가 있다. 현상학의 질문을 경유하면서 그것과 선을 긋고, 그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론적인 정밀함을 포기하는 순간, 김범이 제기하는 질문이 쉽게 가늠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재현을 통해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질문을 던지거나 관객을 비판적인 의식을 지닌 행위자로 변형시키는 데에 관심이 없다. 김범은 우리가 보는 방식 그 자체를 묻는다. W.J.T. 미첼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시각체제는 시각문화나 정치문화에 어떤 가시적 영향을 남기지 않고서도 거듭 전복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그는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시각성’의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 김범의 관심을 ‘시각성’ 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작업이 “우리가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또는 더 나아가 “어떻게 보도록 허용되거나 혹은 어떻게 보도록 만들어지는가”와 같은 질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이는 본다는 문제를 넘어 “시각체제”의 문제를 포함한다. 김범은 “시각이 주체성을 생산하는 데 있어서 하는 역할”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15 김범의 작업에서 이미지는 ‘가능한 한’ 실재가 된다. 다시 말해 그의 이미지는 해석의 대상이라기보다 믿음과 불신, 가시성과 비가시성, 유기체와 비인간 사이의 위태로운 이중의식과 관련된 문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미지의 이중적인 지위가 주체성을 구성하는 기술적인 형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주체는 이미지를 통해 세계를 재현하거나 또는 재현된 이미지의 정치학을 논하지 않는다. 즉 이미지와의 대면은 세계와 관계 맺고 그것을 새롭게 인식하는 일이 아니라, 세계를 괄호 치는 일이다. 우리는 김범이 구축하는 시각체제에서 두 가지 상이한 방향의 운동을 발견한다. 이미지는 이제 더 이상 완고한 유물론에 기반한 물질이 아니라, 유기체에 가깝다. 반대로 주체는 이미지를 해석하고 세계를 변혁하는 근대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이미지 앞에서 무력하거나 또는 그들과 평등한 비인간을 향해 나아간다. 이미지와 주체는 서로의 자리를 뒤바꾼다. 새롭게 주권을 부여받는 쪽은 이미지다. 유기체를 닮은 이미지와 이미지를 닮은 주체, 그 둘은 김범의 작업에서 급진적인 평등의 공간을 구축한다. 

이 기묘한 존재론적 평등은 김범의 드로잉에서 주체와 대상, 인간과 비인간, 유기체와 사물 사이의 하이브리드적 존재로 나타난다. 다리미의 내부에서 발견되는 건 발열 장치와 배터리가 아니라 인간의 폐와 심장이다(〈Iron Body Organs〉(1994)). 자물쇠에서는 털이 자라고, 못에 박힌 인간의 발에서부터 식물이 자라나기 시작한다(〈26 Untitled Drawings〉(1995)). 이렇게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존재론적 위계가 해체된 장소에는 주체와 대상, 혹은 주인과 노예 사이의 변증법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김범은 〈말 타는 말(머이브리지에 의한)〉(2008)에서 잘 알려진 연속 사진을 변형시켜 짧은 영상으로 만들었다. 반복되는 영상에서 말을 타고 있는 건 사람이 아니라 말이다. 이러한 식의 기묘한 공존은 김범에게 주체성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의미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주인도 되고 말도 될 수 있는 특이한 내적 구조를 가진 것 같다. 그리고 사회의 많은 부분이 그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회와 주체성에 대한 이러한 급진적인 관점은 김범의 작업을 역사적인 변곡점에 위치시킨다. 그가 작업을 발표하기 시작한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약 30년의 시간은 새로운 주체성에 대한 온갖 종류의 실험이 진행된 시기였다. 그것이 신세대이든, 탈주하는 노마드이든 (혹은 지금, 여기의 ‘속물’이나 ‘잉여’이든) 이 새로운 주체성의 모델은 리얼리즘과 현실주의라는 이름 아래 이미지를 통해 세계를 고발하거나 주체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던 바로 그 정치적인 주체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도주론 (逃走論 )』의 작가 아사다 아키라의 말을 빌리자면 이 새로운 주체들은 자신들을 구속하던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했다 . ” 시대의 명령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행선지 같은 건 알 게 뭐냐. 어쨌든 도망쳐라, 도망쳐라, 어디까지든 . ”  우리는 김범의 작은 책 『변신술』을 ‘동시대’에 발명된 새로운 주체들의 ‘도주론’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무가 되기 위해 인간은 “눈을 감은 채 어떠한 말도 생각도 하지 않는다 [ …] 그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다. 피로와 고통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 ”  역사의 종언 이후의 ‘새로운 미래’는 아사다 아키라에게 “정점까지 올라가면 어느 틈엔가 되돌아와 있는 세계, 외부가 내부이며, 끝이 시작인 세계”로 상상되었다 .  약 30년간 김범이 그려 왔던 세계가 바로 역사 이후 이 공백의 세계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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