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예술, 산업의 예술: 박형렬×조춘만
2021년 7월 1일-7월 27일
Space 55, Seoul
이영준 <기계비평가>
대지미술에는 두가지 아이러니가 있다. 첫째는 드넓은 대지를 품자고 화이트큐브를 박차고 나갔으나 그 대지가 워낙 먼데 있고, 또 어떤 경우는 상태가 변하기 때문에 그 결과는 사진으로만 남는다는 점이다. 아는 분이 로버트 스미드슨의 <나선의 둑(Spiral Jetty)>을 보겠다고 미국 까지 갔는데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차를 빌려 한참을 운전을 해서 갔다고 한다. 구글지도로 검색해보니 2시간12분 걸린다고 나온다. 대지미술의 기념비적인 작업이라 할 마이클 하이저의 1972년작 <Double Negative>도 찾아가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24만톤의 흙을 퍼내어 길이 457미터, 깊이15미터의 구덩이를 만든 유명한 작업도 네바다의 오버튼이라는 곳에 있는 사막 한가운데 있다. 이래서 장대한 스케일의 대지미술은 째째한 사진 몇장으로만 전달된다. 작가로서는 사진이나 잘 남겨두자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마이클 하이저도, 월터 드 마리아도, 로버트 스미드슨도 다 작은 사진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건 한국의 작가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승택이나 김구림의 대지미술도 지금은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1970년 서울 뚝섬의 강변 풀밭을 태운 김구림의 <현상에서 흔적으로>도 사진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2016년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잔디밭에서 이 작업을 재연하긴 했으나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우선 장소가 달랐고 설사 불이 다른 건물로 옮겨 붙을까봐 과천소방서에서 불자동차까지 불러다 놓고 태웠다. 1970년의 김구림은 반항적으로 태웠으나 2000년대의 김구림은 미술관의 행정의 틀에 갇힌 채 태웠다. 그런 사정은 이승택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작업에서 이승택의 영향을 보여주는 박형렬은 그래서 기왕에 대지미술을 사진 찍는 김에 제대로 찍자고 작정하고 대형 카메라를 들이댄다. 대형 카메라를 쓰면 틸트와 쉬프트 기능을 통해 왜곡이 없는 사진을 찍을 수 있으므로 대지의 형태를 정확히 잡아볼 수 있다. 해상도가 높아서 디테일을 잘 볼 수 있는 것은 덤이다.
대지미술의 두 번째 아이러니는 좀 더 심각한 문제인데, 기껏 너른 대지로 나간 예술가들이 쪼잔한 디자인에 매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예술가가 대지로 나간 이유는 거대한 땅과 하늘을 캔버스 삼아 한계가 없는 작업을 펼쳐보고 싶어서일 것이다. 내가 예술가라면 그랬을 것 같다. 그런데 정작 대지에 나간 작가들은 다들 작은 수첩에 메모할 수 있을 것 같은 도형 따위를 만들어냈다. 위에 예로 든 마이클 하이저의 작업도 스케일은 크지만 결국은 디자인된 도형이며, 로버트 스미드슨의 작업도 결국은 달팽이 형상일 뿐이다. 그런데 인간이 형상의 욕구를 벗어날 수 있을까? 심심하고 지루해서 모래밭에 낙서를 하다보면 어느새 뭔가 형상을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형상의 노예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상금기에도 불구하고 부득불 신의 형상을 만들어 숭배하지 않는가. 쪼잔한 디자인에서 벗어나는 길은 딱 하나 뿐인데, 자동기술법으로 그리는 것이다. 그러면 도무지 파악도 번역도 요약도 되지 않는 기묘하고 난해한 형상이 나온다. 라캉이 그걸 봤다면 실재계라고 했을 것이고 핼 포스터가 봤다면 실재가 돌아왔다고 했겠지. 그런데 대지미술가들은 하나 같이 요리조리 디자인된 형상들을 대지에 펼쳐놓았으니, 인간이 형상의 노예라는 사실을 굳이 대지를 빌려서 알리고 싶어서였을까? 사실 대지로 나가서 대지의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굳이 형상을 만들어놓지 않아도 된다. 대지에는 바람과 햇빛과 중력과 기온차가 만들어낸 형상들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박형렬의 작업에서는 이런 두가지 딜레마가 함께 진동하고 있다. 앞서 든 대지미술가들처럼 박형렬도 간척지의 땅에 일정한 모양을 만들어낸다. 직선과 직각, 원으로 된 형상들은 너무 인위적이어서 간척지라는 반(半)자연에 도전하는 듯이 보인다. 바다를 막아서 만든 간척지는 인위적으로 공사해서 만들어낸 공간이지만 바닷물의 짠기를 빼기 위해 여러 해 방치하다 보면 퉁퉁마디나 함수초, 갈대 같은 풀들이 자라고 고라니 같은 짐승들도 많이 다녀서 자연스레 자연이 된다. 무엇보다도, 간척지는 바닷가에 넓은 대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인공물이라는 생각이 안 들고 자연의 공간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간척지는 방치된 땅이 아니다. 엄연히 농어촌개발공사가 관리하는 땅이다. 대부도나 시화 간척지에는 농어촌개발공사에서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 표지판들을 붙여놨다. 그러다 어느 정도 자연이 돌아와 자리를 잡을 무렵이 되면 인간도 되돌아올 시간이다. 땅이 다져지면 인간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자리를 본격적으로 밀어내고 도시를 만들어버린다. 지금은 너른 들에 갈대가 무성하고 고라니들이 뛰놀아 아름다워보이는 경기도 화성의 간척지 갈대밭에는 곧 송산그린시티대방노블랜드6차스타빌리지아파트, 송산그린시티EG더원레이크뷰아파트, 화성국제테마파크가 들어설 예정이다. 간척지는 무정형의 땅인 것 같지만 애초에 간척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지도에 금을 긋고 바다를 여기서 여기까지 막자고 계획을 세워서 간척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작부터 철저히 정형성의 땅이다. 바다를 막고 몇 년간 놔두면 풀이나 짐승들 같은 무정형의 존재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그러나 인간은 무정형은 참을 수 없다는 듯 그 자리에 비정한 정형의 도시를 만들어 버린다. 그러니까 간척지는 정형의 의지와 무정형의 의지가 다투는 각축장이다. 박형렬의 작업은 그 각축의 축소판 혹은 알레고리다. 알레고리라고 하는 이유는 그의 작업에 나오는 정형들이 반드시 도시의 형태나 그런 것들을 직접 지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렇게 볼 수도 있고 안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형태만으로 보면 박형렬의 작업은 정밀한 측량을 닮았다. 땅에 정확한 선을 긋고 일정 지점에 변침점을 만들어서 선이 꺾이게 한다든가, 마치 항공기에서 판독하라고 만들어놓은 듯한 거대한 글씨를 만들어놓아서 공중에서 촬영한 것들이 그런 느낌을 준다. 활주로 끝단에 32R, 32L 등 크게 써있는 활주로 번호 같은 글씨 말이다.
반면, 자연이 쌓아놓은 흔적에 직접 개입한 작업도 있다. <Figure Project_Earth#49> (2015), <Figure Project_Earth#58> (2016)에서는 간척지의 흙을 파내서 하나의 층을 들어낸 것을 사진 찍은 작업이다. 물론 사진도 정성스럽게 찍긴 했겠으나 땅을 들어내서 밑의 층이 드러나게 했다는 점에서 이들 작업은 대지미술이라고 보고 싶다. 이들 작업이 마이클 하이저나 로버트 스미드슨의 작업과 다른 점은, 이들은 거대한 중장비를 동원하여 토목공사 하여 작업했다면, 박형렬은 땅속에 묻혀 있는 문화재를 발굴하듯이 살살 어루만져 흙을 들어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흙이 오랜 시간 굳어지고 말라서 갈라져서 생긴 자국들의 선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미국의 작가들이 대지를 장악하려 했다면 박형렬은 대지에 스며들었을 뿐이다. 서양인들이 대지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대지를 장악하려 했다면 박형렬은 대지의 흔적을 따라갔다. 션찮은 카메라로 대강 몇장 찍었다면 사진은 단순히 대지미술의 기록에 그칠 뿐이고 앞서 말한 대지미술의 첫 번째 아이러니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형렬은 대지의 스케일에 걸맞는 카메라로 땅에 새겨진 흔적들을 찍어서 사진 자체도 대지미술의 일부로 만들었다.
조춘만의 작업도 대지미술과 연관이 있을까? 그가 사진 찍은 공장들은 대지 자체는 아니지만 넓은 대지 위에 들어서 있는 육중한 설비들이라는 점에서는 대지미술에 필적하는 스케일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처음에 조춘만의 사진에 대해 글을 쓸 때는 사진 속에 등장하는 설비가 무엇인지 신경을 많이 썼다. 사진은 인지의 체계이고 사진을 제대로 보려면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산업설비도 조선소와 중화학공장이 다르고, 조선소도 컨테이너선이나 벌크선이나 유조선 같은 일반 선박을 만드는지 아니면 드릴쉽이나 FPSO 같은 해양 플랜트를 만드는지에 따라 구조와 디자인이 다르고, 중화학공장도 화학제품인지 석유계열 제품인지에 따라 파이프라인의 형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춘만의 사진을 열심히 들여다 보면서 무슨 설비들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다 관람객의 입장에서 보니 다 부질 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장에 걸린 그의 사진을 보는 이들이 그 설비들이 무엇인지 알 리도 없거니와, 알고자 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것을 모르면서도 그 사진들을 좋게 본 이도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조춘만의 사진에 나오는 설비들은 사진 속에서 다른 것으로 번역이 되는데, 무엇이 되느냐면 형태, 즉 게슈탈트가 되버린다. 즉 설비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강철로 된 구조물의 생김새, 그 복잡함에서 오는 숨막힐 듯한 느낌, 빛과 그림자 등 그림의 요소들이 뒤얽혀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아마도 조춘만 사진의 관객은 둘로 나뉠 것이다. 설비들을 게슈탈트로 볼 다수의 관객과, 설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고 따지듯이 보는 소수의 관객. 후자는 저것은 덴마크의 해운회사 머스크사의 컨테이너선의 덱하우스인데 윙브리지가 하나로 통해 있는 머스크 특유의 디자인으로 돼 있어서 흥미롭다는 식으로 본다. 전자는 뭔지는 모르겠는데 아주 복잡하면서도 기묘한 형상으로 돼 있어서 신비롭고 흥미롭다는 식으로 본다. 나는 후자의 입장이었는데 최근 전자의 입장으로 바뀌었다. 조춘만의 사진에 대해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것이 한국 산업의 현황을 알리기 위해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도 결국은 하나의 그림이다라는 생각을 도입하게 된다. 사진이 제 아무리 현존하는 대상의 물리적 흔적이니 어쩌니 해도 결국 볼 때는 하나의 그림으로 본다. 대상의 실제를 떠올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림을 보듯 선을 따라가게 되고 구도를 살피고 색채와 톤의 조화를 살피면서 시각적인 요소를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요리 하면서 상상력을 키우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조춘만의 사진에 나오는 것들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감각과 상상력을 자극하느냐가 중요해진다. 그러면 공장과 자연은 뚜렷이 구별된다는 이분법도 흐물거리게 된다. 공장을 이루는 설비도 먼 옛날에는 자연에서 온 것들이다. 자연물들이 파란만장한 기술의 과정 속에서 온갖 천변만화를 겪으면서 존재의 양태가 바뀌어 강철이 되고 고분자화합물이 됐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상상력을 마구 뻗치다 보면 조춘만의 사진도 대지미술의 범주에 넣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마저 하게 된다. 그런데 모든게 통한다는 식으로 무조건 대지미술에 때려넣을 수는 없고, 산업미가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 조춘만의 사진을 보는 입장이 둘로 갈릴 수 있듯이 산업미를 보는 입장도 둘로 갈릴 수 있다. 하나는 산업설비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 게슈탈트로만 보는 입장이다. 이는 어느 정도는 소비자의 입장이다. 그는 자동차의 성능에 대해서는 모르면서 외관 디자인만 보고 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를 탓할 수는 없다. 오늘날 산업기술이 워낙 복잡하게 세분화되고 발전해 있어서 전문가가 아니면 그 누구도 속의 구조나 원리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스마트폰을 터치하면 앱이 작동하는 원리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과연 컴퓨터의 윈도우즈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알고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주변 사람들에게 나노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소리나 빛의 속도를 아는 사람도 하나도 없다. 그런데 산업은 소비자가 이런 것을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모르는 채 무조건 많이 사주기만 바랄 뿐이다. 그리고 산업제품의 외관은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에 소비자로서는 거기에 끌릴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외관이 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정신 없이 혁신 한다. 물론 산업미가 외관의 모양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감에 걸쳐 다 있다. 공장설비가 내는 소리에서부터 제품이 내는 온갖 소리, 새 차 샀을 때 실내에서 나는 냄새나 플라스틱 냄새 같은 후각적 요소, 공장에서 찍어낸 식품 특유의 방부제+MSG 맛, 온갖 제품들의 질감이 가지는 촉각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산업미는 오감의 전영역에 걸쳐 있다. 따라서 산업기술의 내적 원리를 모른다 해도 누릴 수 있는 산업미는 매우 풍부하다.
그런데 산업미의 완전히 다른 차원이 있다. 그것은 조춘만의 사진을 보는 후자의 입장이다. 여기서 산업미는 외관에서 느껴지는 감각적 차원이 아니라 산업기술의 내적 논리에 대한 것이다. 즉 전문가가 느끼는 산업미다. 예를 들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어떤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보고 느끼는 쾌감이나(정말 그런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있을 것 같다. 석유화학공장을 만든 이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파이프라인을 보고 ‘예술이다’라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효율이 좋은 엔진을 만든 이가 잘 작동하는 엔진을 보고 느끼는 만족감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 경우의 산업미는 아주 추상적인 원리에까지 뻗어나갈 수 있다. 원리는 개념적인 측면이고 미는 감각적인 면인데 이걸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조춘만의 사진을 자세히 보면 그 둘의 연결고리를 볼 수 있다. 사진에 나오는 산업설비들은 모두 엄청난 힘으로 무게를 버티는 구조로 돼 있다. 산업미의 중요한 부분은 구조미라고 할 수 있는데, 무게를 버티는 강철의 재질과 구조가 사진 속에 나오는 형상들을 이루고 있다. 그것이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추상적인 패턴으로 보이는 것이다. 석유화학공장의 파이프라인은 유체가 흐르는 유압을 버티면서 효율적으로 생산이 이루어지도록 설치돼 있다. 그런 역학이 만들어낸 패턴이 사진 속에 엄청난 밀도와 긴장감을 이루고 있다. 산업설비의 공학적 원리라는 내용과 그것들의 패턴이라는 형식이 합해져서 산업미를 이루게 된다. 산업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조춘만의 산업미도 오래 갈 것이다.
사진 매체를 중심으로 시공간에 대한 자신만의 인식을 구축해 온 작가 16인을 2명씩 매칭하여 순차적으로 소개하는 전시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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