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환(1941- )은 모더니즘(Modernism)을 확립한 대표적인 명작들을 패러디(Parody)하면서 한국 사회의 부패성에 비판적으로 접근하였다.《현실과 발언 창립전》(1980)에 출품한 <몬드리안 호텔>(1980)과 같은 해에 그려진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에서도 이와 같은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는 각종 플라스틱 제품, 잡지, 광고, 사진, 인쇄물, 못쓰는 장난감, 인형, 조화, 테이프, 끈, 버린 액자, 거울 등 이 도시의 소비사회에서 생산되어 넘쳐나는 폐품들을 소재로 쓰는 특성으로 인해, 재료비가 거의 들지 않는 예술을 한다는 의미에서 ‘1000원짜리 예술’ 혹은 ‘가난한 예술’을 하는 작가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에 가지각색의 혼합매체를 사용하여 만들어낸 작품들은 그 유희성과 사회적인 풍자정신의 절묘한 결합을 보여준다. 한국에서 소비사회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이후 등장한 젊은 세대의 작가들 가운데에는 미술작품을 만드는 과정과 행위, 그 결과에서 나타나는 유희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경우가 매우 많아졌는데, 주재환은 이러한 작가군에 있어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실제로 많은 신세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원왕생>은 고(故) 박창수 노동열사의 영안실에 난입한 경찰의 사진과 당시 빈번하게 자행된 공권력에 의한 침해를 달력에 기록하는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Chung Seoyoung is recognised for her use of unconventional artistic materials to investigate the relationship between language and art, expressing a sensitivity to social divides in the face of rapid economic and cultural change. Recurrent in her practice are decontextualised words, phrases and orthographic marks that take on sculptural aspects of their own.
Chung’s wooden assemblage Blood, flesh, bone 2019 references the basic sculptural materials that comprise human life. Ten accompanying ‘text drawings’ comprise enigmatic, fragmentary sentences in Korean, English and Chinese, handwritten on ceramic sheets poised atop oversized plinths. Together, these works suggest a material reality and a sense of freedom that aligns with a broader sense of absurdism in Chung’s practice and a healthy distaste for authoritarianism.
이설희 / 김범의 가정법 야코브 파브리시우스 / 기들만 과효시착—김범의 흑백화와 단어, 그리고 다른 작업들 기혜경 / 변신 이야기 장지한 / 제의의 장소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 김범 인터뷰, 2022년 11월
작품 목록 작가 약력 필자 소개
145 × 215밀리미터 / 296쪽 / 무선 소프트커버 / 2024년 10월 31일 / 27,000원 / ISBN 979-11-94232-02-5 03600
김뉘연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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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완 디자인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는 미술가 김범의 작품 세계에 대한 책이다. 일상적인 사물의 형상과 기능에 대한 인식에 질문을 던지는 제목은 김범의 동명 작품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2002)에서 빌려 왔다. 책의 1부에 해당하는 「김범」에서는 1987년부터 활동해 온 김범의 작품 중 82점을 선별해 정리했고, 이어 이설희(제60회 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 공동 예술 감독, 쿤스트할 오르후스 수석 큐레이터), 야코브 파브리시우스(제60회 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 공동 예술 감독, 아트 허브 코펜하겐 관장), 기혜경(미술사가, 예술 기획자), 장지한(미술평론가)이 가정법, 착시효과, 물활론, 이미지의 타자성 등을 키워드 삼아 다각도로 김범의 작품을 다뤘다. 책의 말미에는 여러 예술가들과 장기간 인터뷰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서펜타인 갤러리 예술 감독)가 김범과 진행한 인터뷰를 실었다.
이미지
미술과 이미지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김범 역시 미술가로서 기본적으로 이미지를 다룬다. 그런데 김범이 다루는 이미지는 눈에 보이는 현실의 표면적인 이미지와 더불어 경험, 기억, 가정, 연상 등을 통해 머릿속에 그려질 법한 이미지를 포함한다. 대상을 묘사하는 재현 대신 인식을 통해 다르거나 새로운 실재를 바라보도록 유도해 온 작가는 이미지를 다루면서 이미지의 실재성(actuality)에 질문을 던진다.
“저는 인간의 삶이 주로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체로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실체의 세계를 살고 있는 듯하지만, 어떤 의미에 대한 기표는 경우에 따라서는 꼭 어떤 특정한 모습이 아니어도 되며, 심지어 이름이나 기호만 있어도 됩니다. (…) 때때로 저는 제가 무엇을 주시하며 바라볼 때조차 제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제 작품에는 이러한 질문들이 종종 담겨 있습니다.”(김범, 「김범 인터뷰, 2022년 11월」, 241쪽)
“기본적으로 ‘이미지’의 문제는 김범 작업의 핵심이다. 그는 관람자의 ‘마음’에 ‘이미지’를 만드는 데 관심을 가져 왔다. 김범은 ‘마음에 품은 시각적 이미지’는, 사실 이미지를 보지 않고도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미지를 ‘시각적 현실’이 아니라 ‘실재적 현실’로 접근하는 태도. 즉 김범에게는 ‘어떻게 보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볼 수 있도록 만드는가’가 화두이기에, 궁극적으로 그는 ‘시각’이 아니라 ‘시각성’의 문제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이설희, 「김범의 가정법」, 136–137쪽)
보는 이가 스스로의 인지 작용을 돌아보게 만드는 가정적인 상황을 제시해 시각적 눈속임을 만드는 작가의 ‘다르게 보기’는 한눈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냉소적이거나 부조리한 유머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러한 ‘다르게 보기’를 통해 “인간의 지각이 기본적으로 의심되는 세계”(7쪽)를 다루는 김범의 작품은 그가 “거꾸로 생각하게 만드는 작가”이자 “거꾸로 걷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야코브 파브리시우스, 「기들만 과효시착」, 152쪽)임을 보여 주며, 나아가 “평면에 대한 부정과 긍정 사이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타자”에 가까운 회화의 이미지를 “‘이따금’의 시간성”으로 드러낸다(장지한, 「제의의 장소」, 216–218쪽).
언어
미술가 김범은 언어를 작업의 주요한 도구로 사용해 왔다. 작품의 내용에 따라 회화, 조각, 설치, 영상, 책 등 여러 유형의 매체를 다뤄 온 김범은 “‘문장’을 통해 가상 상황을 설정”하는 “‘가정’의 방법론”(49쪽)을 구사한다. 작품에 문장이 적혀 있는 김범의 초기 ‘지시’ 작업은 지시의 내용에 따라 가정해 보면서 이미지를 심상으로 재현하도록 이끈다. 이렇게 글과 언어로 미술의 영역을 확장한 김범의 작업은 『변신술』(1997), 『고향』(한국어판 1998/영어판 2005), 『눈치』(영어판 2009/한국어판 2010)와 같은 ‘책’이라는 실물로 이어졌다. 『변신술』은 인간을 가변적인 존재로 상정하고서 인간이 나무, 문, 풀, 바위, 냇물, 사다리, 표범, 에어컨으로 변신할 수 있는 방법을 지시문 형식으로 구성한 지침서이다. 『고향』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있는 운계리라는 마을”에 대한 안내서로, 이 가상의 마을을 누구든 자신의 고향으로 삼을 수 있도록 글로써 이미지를 만들어 간다. 『눈치』는 “인식 대상으로서의 어떤 개”를 그린 이야기책으로, “허구의 이미지를 현실적 차원에 구현해 나가는 행위를 은유”(김범, 「김범 인터뷰, 2022년 11월」, 243쪽)한다. 한편 2016년부터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무제 석판화’ 연작에서는 검은 색면 아래에 원판의 역(逆)으로 찍히는 석판화의 특성을 이용해 거꾸로 드러난 텍스트가 자리하는데, 거꾸로인 데다 내용마저 추상적이고 모호해 역시 추상적으로 보이는 색면과 연결시키기 어려운 이 작업은 인간의 인식의 허술함을 드러낸다.
이렇듯 미술가 김범의 작품 세계에서 ‘이미지’와 ‘언어’는 이미지의 실재성에 질문을 던지면서 이미지의 타자성을 환기시킨다. “이해하는 내용보다는, 이해할 수가 없기에 계속 생각하게 되는 내용에 대해 더 많이 작업”(238쪽)해 온 그에게, 그리고 그처럼 무언가를 만드는 이들에게, 언제나 “현실화되어 가는 대상”(230쪽)이 함께한다. 작품이라는 대상은 그렇게 계속 존재하는 것이 되어 간다.
발췌
무언가 ‘존재함’에 있어 이것이 ‘미술’이 되는 주요한 특징은 작가가 재료를 직접 사용하여 시각적인 작품을 만드는 데 있다. 예술가가 간직한 심리적인 현상은 작품에서 구체적인 사실 혹은 사물과 결합된 정신성과 물질성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는데, 김범은 이 관계를 지속적으로 왕래할 수 있는 가정적인 상황을 만드는 작가이다. (이설희, 「김범의 가정법」, 123쪽)
김범은 회화에서 출발했기에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한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회화의 실존, 즉 ‘평면’과 ‘표면’에 흥미를 가졌다. (이설희, 「김범의 가정법」, 128쪽)
‘기들만 과효시착’은 존재하지 않는 두 단어를 연이은 말로, 헛소리의 범주에 든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기들만 과효시착은 존재하는 말이기도 하다. ‘착시효과 만들기’란 말을 뒤집은 거울 이미지일 뿐이므로. 우리의 눈은 두 단어로 구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제목을 인지하지만, 이 말이 실은 단어 각각의 음절을 거꾸로 썼을 뿐인 아주 간단한 속임수로 만든 말임을 우리 뇌가 알아차리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김범 작가를 일컬어 단어를 거꾸로 쓰는 작가라고 하는 건 바른 말이 아닐 테지만, 그가 우리로 하여금 거꾸로 생각하게 만드는 작가라고는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거꾸로 걷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다. 나아가 관람하는 우리의 뇌도 덩달아 거꾸로 가게 만들어 우리 눈에 보이고 우리 눈이 읽는 것을 다시 보고 다시 생각하도록 이끈다. 당신이 보는 게 당신이 보는 게 (또는 보인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인지 작용을 돌아보고 되돌려 봐야 한다. 김범은 간단한 유희나 속임수로 착시효과를 일으키는, 익살 넘치는 작품을 만들어 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작가다. 언어적, 시각적 함정을 이용해 관람자의 호기심과 보는 이의 마음[정신]을 자극한다. (야코브 파브리시우스, 「기들만 과효시착—김범의 흑백화와 단어, 그리고 다른 작업들」, 151–152쪽)
변신은 이전의 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것 ‘되기’를 의미한다. 하지만 김범이 의도하는 변신은 형태적인 변화보다는 내면적인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그의 작품이 제시하는 변신은 말 그대로 어떤 것으로 변신하여 도달한 상태(being)가 아닌 변화의 과정(becoming)을 의미한다.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로 변해 가는 과정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 변화의 과정을 거치는 것만으로도 이미 떠나온 이전의 존재와 차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이성이 주도하는 사회체제, 그리고 그 사회 속에서 학습해 온 위계질서와 그에 근거한 권력관계로부터의 탈주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는 사물, 동물, 식물 등과 같은 주변의 것들을 인간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것에서 벗어나 인간과 동식물, 인간과 사물, 인간과 대상을 나누는 경계를 다시 설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혜경, 「변신 이야기」, 197쪽)
작가는 자신의 수행적 행위가 이미지를 수동적인 대상으로 고정시킬 위험을 피하기 위해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회화의 이미지가 관조를 위한 그림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 이미지가 자신만의 몸을 지닌 실제의 객체로 지각되기 위해, 즉 사각의 프레임을 초과해서 몸의 차원으로 넘쳐흐르기 위해, 작가의 수행은 붓으로 인식의 관점 하나를 그려 내는 일에 그쳐서는 안 된다. 김범의 회화에서 그의 수행은 물질의 흔적을 넘어 평면에 가해지는 일종의 물리적 충격과도 같다. 이를테면 작가는 종종 문자 그대로 캔버스를 자르고 꿰맨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회화의 물성 등등을 운운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작가의 물리적인 수행은 평면에 물성을 부여하는 것을 넘어 평면성 그 자체를 부정한다. (장지한, 「제의의 장소」, 213–214쪽)
전반적으로 제가 미술가가 되어 온 과정은 거기에 특별한 순간(epiphany)이 있었다기보다는 천천히, 복잡한 상황과 심경을 거치며 진행된 것 같습니다. 물론 제게도 예술의 의미는 아주 중요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커다란 바위 속에 띄엄띄엄 퍼져 있는 듯했으며, 긴 시간에 걸쳐 그것을 캐내듯이 조금씩 조금씩 접해 온 듯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조금씩 느껴 온 그런 작은 순간들이 결국 저를 작가로 만들어 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김범, 「김범 인터뷰, 2022년 11월」, 229쪽)
저는 미술가들이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이유는, 혼자가 아니라 현실화되어 가는 대상이 함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범, 「김범 인터뷰, 2022년 11월」, 230쪽)
저는 비관론자로서, 인간의 삶은 한정적이며 또한 비극적인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통해 가급적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싶다는 기본적인 의도는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김범, 「김범 인터뷰, 2022년 11월」, 231쪽)
사실 저는 밥 로스를 좋아하고, 그가 지속적으로 보여 주는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과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사랑을 존경합니다. 밥 로스의 그림이 지니는 주제와 의미는 방법상으로나 미학적으로 오래도록 일리가 있어 왔으며 인간의 본능적인 시지각(視知覺)을 이해하는 데에도 유용합니다. 저도 미술을 공부할 때 인상주의풍의 풍경화를 즐겨 그렸습니다. 자주 방향을 바꾸어 온 제 작업의 맥락이 혹시 언젠가 저를 풍경화가가 되도록 이끌어 주는 일이 생긴다 해도 저로서는 큰 불편 없이 기쁘겠습니다. (김범, 「김범 인터뷰, 2022년 11월」, 232쪽)
[cbn뉴스=이재영 기자] 포항시립미술관은 개관 10년 기념 특별전 "제로 ZERO"와 연계해 국제 학술포럼 “다시 원점으로, 국제미술운동 제로(ZERO)”를 오는 14일(토) 오후 2시에 진행한다.
이번 학술포럼은 1950년대 후반 결성된 제로 미술운동에 대해 살펴보고 정체성과 현 미술사에서의 제로에 대해 종합 토론한다. 1950년대 후반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시작된 제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기존 미술 체계를 ‘제로’(ZERO)의 상태라 규정하고 ‘영’(零)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로 시작된 국제미술운동이다.
이 행사에는 하인츠 노베르트 욕스(현대미술연구가)의 특별강연을 시작으로 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팀장, 윤양호 작가(국제선조형예술연구 소장, 前 원광대학교 교수), 우순옥 작가(이화여자대학교 교수)가 제로 미술운동을 소개하는 발표를 하고 종합 토론 및 질의응답을 나눈다.
하인츠 노베르트 욕스는 독일 뒤셀도르프와 베이징에서 활동하는 현대미술연구가이다. 1964년 제로미술운동 해체 이후 주요 3인 작가들의 인터뷰를 진행하며 제로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그는 이번 포럼에서“제로, 실험과 외부세계로의 개방”을 주제로 특별강연을 선보인다. 김석모는 “제로는 무엇인가”를 주제로 발제하며 윤양호는 제로의 미학, 조형적 특성연구에 대해 그리고, 우순옥은 “나의 마이스터 귄터 위커와 제로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번 국제 학술포럼은 포항시립미술관 홈페이지(www.poma.kr) 신청 또는 당일 현장 접수로 참여할 수 있다. 참가비는 무료며, 독일어 순차 통역을 제공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고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뇌로 사고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뇌만으로 사고할 수 있을까? 컴퓨터가 돌아가려면 전원을 넣어줘야 할 텐데? 뇌가 돌아가려면 피가 공급돼야 한다. 심장에서 뇌로 가는 굵은 뇌동맥을 통해 높은 압력으로 많은 양의 피가 공급되야 뇌는 기능한다. 뇌와 심장이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보니 예로부터 사람들이 심장이 생각한다고 착각하여 심장에 마음 심(心)자를 쓴 것이고 영어로도 ‘heart’가 염통이라는 뜻과 마음이라는 뜻을 같이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 심장과 뇌만 있으면 사고 할 수 있을까? 어디선가 피를 만들어줘야 하는데? 피는 골수에서 만들어지니 사고의 원천은 뼈라고 해야 할까? 뼈는 칼슘으로 돼 있고 칼슘은 멸치에 많다고 하니 사고의 원료는 멸치인가? 뼈에는 근육이 붙어 있어야 하고 근육에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은 위장과 폐이고… 결국 사고작용이 일어나려면 온 몸이 다 있어야 한다. 그런데 몸이 하나만 있으면 사고가 일어날까? 지구상에 사람이 딱 하나만 있으면 그는 사고할 수 있을까? 설사 무슨 생각을 해도 같이 대화해서 검증을 하거나 수정을 할 상대가 없으니 그의 사고는 진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만 잔뜩 있으면 사고가 일어날까? 사고의 대상이 있어서 사람이 그에 대해 인지도 하고 지각도 하고 성찰도 하고 논리를 만들어서 설명도 해야 하는데? 사람만 똑똑하고 그 외의 대상들(동식물 같은 유기체에서부터 물, 불, 공기, 광물 같은 무기체까지)은 다 말 못하고 논리를 못하는 먹통들일까? 사람이 그것들을 무시하고 있을 때 그것들 끼리 사람을 쳐다보며 비웃고 있지는 않은 것일까? 그런 생각을 얼핏 했던 사람이 자크 라캉이다. 그는 물 위에 떠 있는 작고 하찮은 깡통에도 시선이 있어서 사람을 쳐다보고 있다고 했다. 하물며 유기체는 말 할 것도 없다. 결국 사고는 사람과 대상이 서로 협력하던지 싸워서 생기는 작용일 것이다. 바위는 바위 노릇을 하기 때문에 바위고 책상은 책상 노릇 하기 때문에 책상이다. 물질이 그렇게 있는 것이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퍼포머티비티다. 멀쩡한 책상을 사장님이 치우라고 하면 바로 치워지니까 말이다. 책상이 그 자리에서 계속 있으면서 책상 노릇 하려면 많은 조건들이 충족되야 한다. 그런 조건들은 사람이 만든 것도 있지만 책상이 만든 것도 있다. 책상을 놓을 때 책상 놓을 만한 곳을 골라서 놓는 것은 책상의 목소리를 존중해 주기 때문이다. 아파트 짓는데 바위가 방해 되면 바로 쪼개서 없애 버린다. 그런데 그 바위가 영물이라고 하면 금줄을 치고 치성을 드린다. 그런 식으로 바위는 스스로 존중 받는 노릇을 한다. 우리가 관찰할 것은 바로 그런 대상들의 퍼포머티비티다. 그렇다고 사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원시적인 시선으로 관찰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철저히 기계비평적인 방법으로 관찰할 것이다. 대상을 이루고 있는 물질, 그 구성, 기능, 역할, 그것이 존재하고 기능하는 조건을 관찰할 것이다. 우리가 걸으며 관찰할 것들은 다 기계비평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건물이나 도로나 자동차는 물론이고 심지어 하늘의 구름이나 마음 속의 울렁이는 느낌 마저도 말이다. 사실 내가 주체가 되고 저것은 내 시선 아래 꼼짝 없이 놓인 대상이라고 이분법적으로 나눠놓는 관찰이라는 말도 적절치 않은데 적당한 말이 없어서 그렇게 쓴 것이다. 우리가 할 행위에 도대체 어떤 이름을 붙일지는 걸으면서, 걷고 나서 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혹은 이름 없이 그냥 놔두게 될지도 모른다.
일정 및 장소
11월 29일 금요일(14:00-17:00, 나선도서관, 방산시장) 12월 6일 금요일(10:00-18:00, 청계천) 12월 13일 금요일(10:00-15:00, 서울성곽) 12월 20일 금요일(11:00-15:00, 안산역 다문화 거리 및 땟골마을) 12월 27일 금요일(11:00-17:00, 영등포시장, 나선도서관)
정원
8명
수업료
30만 원 (분납 가능)
참고
선착순 접수 마감
진행
이영준
사진 (구체적으로는 예술 작품으로서 사진보다는 기계 장치의 산출물로서의 사진) 이미지에 관심을 두고 비평 작업을 해오던 이영준은 2006년부터 스스로 ’기계비평’이라는 새로운 활동 영역을 만들어 기계비평가로서 작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역설적으로 비평과 비평가의 임무에 대한 자기 자신의 정의의 일관성으로부터 비롯한다. 그는 비평이란 무엇보다도 자신을 강하게 매혹하는 무언가로부터 시작하며, 지식의 잉여로 남은 그 무언가의 순간을 규명하는 지성적 활동이라고 여긴다. 이에 “의미 형성과 해석의 작용 속에서 완전히 용해되지 않고 남는 찌꺼기, 말의 체계 속에 다 정리되지 않고 남는 언저리에 대한 것”, “기존의 지식과 감각으로는 알아볼 수 없는 것… 즉 차이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는 것, 그리고 그 이름이 굳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세분화하고 유동하는 차이의 (비)체계를 만드는 것이 예술의 일이자 비평의 일”이라고 서술한다(『이미지 비평』, 2004). 이와 같은 입장을 기반삼아, 이영준은 예술 작품을 넘어 ‘모든 것을 비평한다’는 지성적 모험의 기획을 여전히 수행중이다. ‘모든 것’중 기계는 그에게 유달리 특별한 대상이다. 그가 보기에 이 시대는 “기계의 욕망이 다른 이미지에 대한 욕망을 뚫고 강하게 겉으로 분출”된 때이며, “기계의 사용을 통해 인간, 사회, 역사, 제도, 문화 등 많은 것들이 기계적으로 됐”지만 그것은 아직 비평적으로 거의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기계 비평』, 2006/2019). 망막을 통과해 몸에 잔여로 남은 이미지의 신비를 다루듯, 그는 기계라는 미지의 사물을 다루기 위해 장치의 회로와 메커니즘을 세밀히 들여다볼 뿐 아니라, 가공할 규모의 시설이 중첩되고 가동되는 풍경을 수없이 방문하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배우며, 기계가 일으킨 여파의 현상을 멀리까지 추적한다. 단순하게 말해보자면, 기계비평이란 오늘날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그러나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사물 전반에 대해 숙고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업에 관한 Q&A
‘기계비평적 방법의 관찰’에 대해서 조금 더 알려주세요. 기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비평가도 아닌데 수업을 들어도 좋을까요?
기계비평적 방법이란 대상을 볼 때 선입견을 가지지 말고 사물의 기능과 구조를 관찰해보고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방법입니다. 복잡한 기계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사물들은 다 나름의 구조를 가지고 어떤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선입견이나 세계관 등을 사물에 덮어씌워서 미리 재단하지 말고 사물에 대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기계비평적 방법입니다. 사물이 가진 의미나 상징성은 그 다음에 보는 이의 머리 속에서 떠오르게 돼 있으므로 일단 관찰하고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다 보면 의미가 떠오르게 됩니다.
수업에서 걷게 되는 장소들은 어떤 곳인가요? 왜 그곳을 방문하는지 궁금합니다.
이 세상의 장소들에는 다 나름의 특성과 맥락이 있습니다. 다만 특정 장소에 따라 특성과 맥락의 밀도는 다 다릅니다. 이 수업에서 고른 장소들은 서울과 주변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만나게 되는 아파트나 상가, 학교와 사무실 등과는 다른 분위기와 밀도, 맥락을 가진 곳들입니다. 설사 이곳들을 가본 적이 있다고 해도 이 수업에서는 다른 선을 따라 걸을 것이고 해석의 눈을 가지고 걸을 것이기 때문에 걷는 자체로 새로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서울은 이 세계 어느 도시보다도 독특한 밀도로 가득 한 곳이고 이 수업에서 고른 장소들은 그 중에서도 또 다른 밀도를 가진 곳이기 때문에 그곳들을 방문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딱 하나의 예만 들자면 영등포 시장을 가보면 21세기도 아니고 서울도 아닌 곳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느끼는 충격에 대해 되새겨 보는 것이 이 수업의 내용이 될 것입니다.
수업에 참여하고 싶긴 한데, 사물을 관찰하는 일이 조금 어렵게 느껴져 미리 연습을 해보고 싶습니다. 간단한 조언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집에 있는 아무 사물이나 골라서 한참을 뚫어지게 보다 보면 그것이 다른 것으로 변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을 체험하고 오면 됩니다. 하지만 아무 준비 없이 와도 됩니다.
간단한 사고실험 하나를 해보자. 하나의 닫힌 공간이 있다. A는 그 공간의 바깥으로는 나갈 수 없지만 안쪽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며, 특정 시간 구간을 무한히 반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B는 공간 안팎을 제약 없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의 시간은 결코 반복하지 않고 유한하다. 이때 A와 B중 누가 더 앎에 특권적인가?
언뜻 이 질문은 앎에 있어 시간의 무한성과 공간의 무한성 중 무엇이 더 특권적인지를 묻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주어진 지문에서 양자택일을 하기보다는, 이 사고실험 자체가 너무 허술하게 설계되었다고 지적할지 모른다. 닫힌 공간은 몸을 겨우 가눌 뿐인 좁은 방만한가 아니면 태양계만 한가? 닫힌 공간은 화이트 큐브처럼 텅 비어 있는가 아니면 복잡한 현상과 사물들로 가득한가? A가 반복할 수 있는 시간의 길이는 한두 시간 정도인가 아니면 무한에 가까이 긴가? B는 무한한 공간을 걸어서 이동하는가 아니면 매우 빠른 속도로도 이동할 수 있는가? 언뜻 생각해도 현실 경험에 비추어 수많은 변수를 떠올릴 수 있고 이 변수에 따라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허술함이 가진 이점이 있다면, 허술함 덕분에 여기저기서 비집고 나오는 앎의 수많은 조건을 검토해 볼 수 있다면, 질문이 불러일으키는 반발심과 수많은 이미지를 붙잡아둬 보는 것은 그렇게 쓸데없는 일은 아닐 수 있다. 이 사고실험은 앎에 대한 철학적인 문제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앎을 갱신하려는 노력을 하려 할 때 어떤 행동을 해야 할 것인가 판단해 보기 위함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처음의 사고실험으로 돌아가 보자. A를 선택하는 편이 좋을까? 아니면 B가 더 좋을까? 문제를 우회해 보기 위해 이야기에 관해 생각해보자. 아주 오래전에는 신비한 우연적 사건들로 가득한 길을 떠나는 모험과 방랑의 이야기가 대중적인 서사였다면, 요즘 유행하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 같은 시간 선을 반복해 살게 되는 회귀와 환생의 이야기이다. 이는 언뜻 서로 다른 서사 양식처럼 보이지만, 앎의 특권적 주체라는 판타지를 투사한다는 점에서는 엇비슷하다. 그리고 그 판타지가 투사되는 곳은 우리가 기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처음의 사고실험은 일종의 함정과도 같은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A와 B는 서로 대립하거나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A와 A’의 관계에 더 가깝다.
그럼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 여기서 A, B와는 다르게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골똘히 생각 중인 C를 상상한다. C는 무한을 통제하거나 소유하려 하지 않고 무한한 실재에 스스로 참여한 후 갖가지 다채로운 방법으로 그것을 소진시키는 데 열중한다. 그래서 무엇이 남았는가, 남은 것들은 어떻게 배열되고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숙고하며 앎 자체를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것으로 밀어낸다. 사고실험학교는 그런 C의 자리로서 고안되었다. 사고실험학교는 닫힌 공간이라는 하나의 이미지-현실에서 촉발되었고 다른 기술적 비전에 대한 상상으로 길러진 장소다. 리베카 솔닛은 ‘기술’을 두고 “세상이나 세상에 대한 경험을 변화시키는 어떤 실천, 기법, 혹은 장치”라고 정의한 적이 있는데, 우리는 기술의 근원적인 의미에 대한 이 정의를 숙고하며 사물과 세계의 변형에 대한 여러 가능성을 검토해 볼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저런 유형을 산출해보는 것이 그 목적은 아니다. 그보다는 양식화된 픽션을 재생산하는 것으로부터 가능한 멀리 달아나며 진실의 방향을 가리킬 픽션을 구하는 것이다. 많은 시도들이 높은 확률로 실패할 테지만, 거기서부터 비로소 뭔가를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술한 사고실험이 무수한 이미지들을 불러오듯이 말이다.
우리는 지금껏 ‘세상이나 세상에 대한 경험을 변화시키는’ 일의 역량을 천천히 그리고 철저히 외부의 기술 장치들에 이양해 왔다. 사물과 세계를 변형시키는 과정, 픽션의 세계에 참여하고 협력하는 일을 바로 그만큼 서서히 망각해 간다. 사고실험학교는 바로 이런 닫혀가는 세계에 대한 반응이자 앎의 점진적이고 전면적인 재구성에 대한 요청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코이너 씨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생각한다는 건 곧 변화를 일으킨다는 뜻이지. 내가 어떤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를 변화시키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도 썼다. “희망이 아버지가 아닌 생각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이 아포리즘에 빚져 말해보자면, 생각하기는 사물과 세계의 변화를 추동하는 역량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희망을 전망하는 일과 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학교는 바로 그런 희망이 가능한 장소여야 한다. 생각하기와 희망의 관계가 자명한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그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내기를 걸어볼 만하다. 그리고 이건 생각보다 시급한 일인지도 모른다.
김순기(金順基, 1946- )는 서양화를 전공하고 1971년 니스에 위치한 국제예술교류센터(Centre Artistique de Rencontre International) 초청작가로 선발되어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는 1974년부터 니스 국립장식미술학교(École Nationale d’Art Décoratif de Nice), 디종 국립고등미술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Art de Dijon) 등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남프랑스 지역에서 철학자, 단체와 만나면서 실험적인 설치 작품 및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1980년대 초부터는 존 케이지(John Cage), 백남준, 이라 슈나이더(Ira Schneider) 등과 교류하면서 예술과 철학, 과학이 접목된 실험적인 비디오와 멀티미디어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는 1986년부터 파리 근교 비엘메종(Viels-Maisons)의 농가를 개조한 작업실에 거주하면서 동·서양의 철학, 시간과 공간 개념에 관한 탐구를 바탕으로 정형화될 수 없는 예술과 삶의 관계를 고찰해왔다.<산보>는 새의 발자국을 종이에 옮겨 그린 여러 장의 드로잉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순기는 집 앞을 산책하며 사색하기를 즐겨 했다. 그는 산책하면서 보았던 새의 발걸음을 드로잉으로 남기는 작업을 오랜 시간 동안 해왔다.
이 작품은 작가가 화첩 형태로 모아 둔 드로잉을 2019년에 국립현대미술관 《김순기: 게으른 구름》에서 전시하기 위해 종이 앞뒷면이 모두 보이도록 투명한 유리에 붙인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작년에 뒤샹 전을 열어 그 이름값을 했고, 올해는 김순기 전을 열어 그 이름값을 했다. 현대미술관이라는 이름 함부로 붙이는 것 아니다 가능하면 백남준 전시도 한번 열면 좋겠다>
국립현대미술관《김순기: 게으른 구름》전 개최 2019년 8월 31일(토)부터 2019년 1월 27(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개최 9월 8일(일) 신작 퍼포먼스 <시간과 공간 2019> 공개 [1] 프랑스를 무대로 새로운 미술 언어를 실험해 온 김순기 조망하고 [2] 일상과 실천으로서의 예술세계를 추구한 작품 총 200점 망라해 소개한다.
전시명 ‘게으른 구름’은 김순기가 쓴 동명의 시 제목으로, 작가가 지향하는 예술의 의미, 삶의 태도를 은유한다.
6전시실에서는 ‘색 놀이 언어 놀이: 일기(日記)-작업실에서’를 주제로 작가가 작업실 주변에서 수집한 돌멩이, 나무 등을 이용해 제작한 오브제와 판화, <일기>(1971~75)를 비롯해 1970년대 초반 퍼포먼스 영상, 언어와 이미지의 차이를 이용한 언어유희가 담긴 <색 놀이> 연작, 작업실에서 보낸 사계절의 시간을 담은 <이창>(2017) 등이 소개된다.
7전시실에는 ‘작업실에서의 고독과 탐구 VS 예술적 교감으로 빛나는 여름밤’을 주제로 실험적인 영역에 도전해온 작가의 예술적 여정을 보여준다.
지하 3층은‘일화(一畵)-활쏘기와 색동’, ‘조형상황’, ‘빛과 시간으로 쓴 일기’세 가지 주제로 구성된다.
전시마당에는 2019년 현재의 시간과 공간을 고찰한 신작 퍼포먼스 <시간과 공간 2019>를 선보인다. 입력된 명령만 수행하는 로봇과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무당이 등장해 게으르고 심심해하는 로봇 ‘영희’가 시를 읊고 무당 김미화의 굿하는 소리, 전시마당 내 설치된 다양한 기구들이 내는 소리가 함께 어우러진다.
국립현대미술관 2018년 뒤샹전으로 그나마 현대미술관이라는 체면을 세우다 국립현대미술 2019년 김순기전으로 그나마 현대미술관이라는 체면을 세우다. 그 공로는 바로 국립현대미술관 강승완 학예연구실장 공로다. 늦기는 했지만 2-3년전 김순기 작가 파리 작업실을 방문하고 그의 작품의 질적인 수준과 양적인 면에서도 충분했기에 이런 작가는 꼭 소개를 해야 한다고 결심을 한 것이다.
이 모든 전시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수정 학예연구사가 있기에 가능했다 그 밖에 많은 사람의 수고가 있었겠지만 대표로 그렇다 그런데 이수정 연구사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공로자가 있다 그분이 바로 이번 전시를 진정 가능하게 한 강승완 학예연구실장 역시 여성이라 여성작가를 제대로 볼 줄 안다
사실 국립현대미술관이라고 해도 과거에는 김순기 작가를 받아들일 실력과 소화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김순기 작가 1995년 국립 콜을 받았지만 보기 좋게 거절하다. 당시는 여건이 안 되었던 것이다. 원래 최고의 수재가 예술가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데 김순기 작가는 그런 좋은 예다. 창덕여고 다닐 때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앙드레 말로 문화부 시절 프랑스 장학생 중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30년간 교수를 하다. [저서] 우선 시집 '게으른 구름(Les Nuages Paresseux)'이 있고.시화집으로 '보이니?(Entends-tu?)가 있다. 철학 에세이로는 '산은 바다요, 장자와비트겐슈타인(Montagne, C’est la Mer: Tchouang-Tseu et Wittgenstein)'가 있다. 인터뷰 집으로 '예술 혹은 침묵의 청취: 김순기와 자크 데리다, 장-뤽낭시, 존 케이지와의 대화(Art or Listen to the Silence: Kim Soun-Gui Conversation with Jacques Derrida, Jean-Luc Nancy and John Cage)',
<국립현대미술관, 개집>
개집(구 국립현대미술관)을 만들었다 이제는 국립이 이 모든 것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작품 국립현대미술관 수중품하면 어떨까 싶다.
백남준과 김순기 작가 급이 맞는다 1982년 김순기 작가는 뉴욕에서 백남준을 만나 예술의 대한 토론 혹은 인터뷰를 하다 그것을 작품화한 것이 바로 비디오 작품 <봉주르 백남준(1982)> 김순기 작가가 백남준을 만나게 된 것은 존 케이지의 강력한 주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디오 영상이란 시간이 관통된 그림> 여성 작가 중 1세대 미디어 아티스트인 김 순기 작가는 백남준과 작업도 했다. 참고로, 백남준과의 인연은 존 케이지로 시작한다. 프랑스에서 존 케이지이와 함께하는 페스티벌에 참가했고 그곳에 김 작가도 참석했다.
그는 글자를 세로로 쓴 존 케이지의 작품에 대해 "당신 작업은 언어 작업인데 동양 음악과도 연결된다"며 단소 악보와 비교해 설명했다. 어린시절 단소를 접하고 동양 철학을 꾸준히 공부한 김순기였기에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었다. 동양과 서양의 교집합을 찾은 거다.
김 작가의 해석에 존 케이지는 흥미를 느꼈고, 뉴욕으로 돌아가 백남준에게 김순기에 대해 이야기하며 '꼭 만나보라'고 권유했다. 1982년 김순기 작가와 백남준의 만남이 이뤄졌다. 김순기는 백남준을 인터뷰한 영상 작품 '봉주르 백남준'을 세상에 공개했다. -뉴스핌
백남준과 김순기 같은 시간에 같은 작업 "요이 땅!" 위는 작품은 작업의 결과 작업은 색동판에 텍스트 쓰기 아래는 작품을 하는 과정을 비디오 찍은 것 색동의 원조는 김순기(?)
김순기를 좀 어폐가 있지만 나는 여자 백남준이라고 부른다. 시각을 시간으로 코드변경한다거나 플럭서스의 정신을 실천한다거나 물리학과 하이테크에 대한 남다른 관심 그리고 선사시대와 한국전통악기에 대한 관심 등 한국문화의 원류와 동양 고전철학과 서양 현대철학에 대한 깊은 혜안을 풀어내는 작업이라든가, 신자유주의의 돈 숭배와 감시 사회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문명에 대한 비판이라든가, 작품 판매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즉 돈보다 축제를 중시한다거나, 여성이라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여성의 생명력이 발휘하는 미래지향적 비전을 제시한다거나, 그리고 작업에서 그 과정과 우연성을 중시하는 예술적 태도 등등 그런 면에서 그렇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김순기는 다원예술이고 백남준은 정보예술이라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궁극적으로 만나는 지점이 있다
백남준 김순기 색동시리즈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붓글씨 쓰기 작업 영상 1984년 파리의 한국식당 한일관 레스토랑에서 색동 무늬 위에 붓으로 쓰기 퍼포먼스 Performance, reataurant Hanilgwan, Paris, 1984, Bonjour Nam-June Paik II, 1984, KIM Soun Gui
김순기와 존 케이지
존 케이지와 김순기 작가 급이 맞는다. 존 케이지와 마르셀 뒤샹은 동급이다. 그러므로 김순기 작가는 백남준과 존 케이지와 마르셀 뒤샹과 동급이다. 김순기 작가와 존 케이지는 파리 아트 모임에서 처음 만나다. 김순기 작가의 질문에 반한 존 케이지는 그녀와 일주일 간 예술에 대한 토론회에 동참했다고 한다
존 케이지가 김순기 작가를 좋아하는 것은 그녀가 늘 이미지작업을 사운드 작업으로 옮기는 것에 흥미가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미술에서 이미지(형태)보다 사실 사운드(소리)가 더 중요해지는 시대가 되었다 현대미술에서는 공간보다 시간이 중요하듯이 그렇게 sight 보다 sound가 더 중요하게 된 것이다
백남준의 스승이자 광인인 존 케이지는 분명 김순기 작가에게 홀린 셈이다 김순기 작가는 존 케이지의 소개로 백남준을 1982년 뉴욕에서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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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이지 1991 마이애미에서 연주 퍼포먼스 '빈말'>
John Cage performs a 90 minute excerpt from "Empty Words" at the 1991 Subtropics Music Festival in Miami, Florida.
<1986년 김순기의 연 '비디오와 멀티미디어: 김순기와 그의 초청자들 '존 케이지과 그의 작품을 연주하는 프랑스 피아니스트 제라르 프레미(Gérard Frémy)의 포퍼먼스> Kim Soun Gui, Concert of John Cage with Gerard Fremy dans le Festival, 1986 Performance and video installation
김순기와 자크 데리다 인터뷰 Performance
<과장하면 김순기 작가 마치 데리다보다 프랑스어를 더 잘하는 것처럼 보인다> 김순기 작가는 현대미술을 해체하는 작가로 해체철학자 데리다와 낭시와도 동급이다 김순기 작가는 데리다와 낭시와 인터뷰 영상을 작품화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2002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소개되었는데 나도 광주에서 그 작품을 봤다. 그 당시 아무도 이해를 못했다. 강승완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실장이 옆에서 보니 단지 아줌마 2분이 보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 옆에 마침 박만우관장이 역시 보고 있었단다. 내가 미술계에 데뷔한 것은 2002년 광주 비엔날레에 참관하면서 부터다 데리다 낭시의 인터뷰내용을 찾아보니 집에 그 자료가 있네요
철학자(데리다)와 예술가(김순기) 공통적 키워드는 해체주의다 한 마디로 싹 지우기다 그러나 다 지워지지는 않겠지만 칠판을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글씨를 쓰듯 그렇게 새로운 기호와 개념을 생성시키겠죠.
김순기와 장 뤽 낭시 인터뷰 Performance
[김순기 두 철학자와 인터뷰 내용 1줄 요약] "침묵이야말로 타자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 -자크 데리다 - "예술이란 물러나면서 흔적을 남기는 것" -장 뤽 낭시
해체 철학자 자크 데리다와 동급인 장 뤽 낭시가 김순기 작가를 위해서 시 <모든 시간은 항상 현재이다>를 남기다. 과거도 현재, 미래도 현재, 현재도 현재 이것은 아마도 불교의 시간관이리라
김순기와 간송 집안과의 인연 // 김순기 선생 서울미대 다닐 때 간송가 큰아들 전성우 교수가 그의 스승이다. 김순기 작품을 다 칭찬했는데 그만 애정 어린 비판을 했다고 그러면서 성북동 집에서 작업하라고 집 한 모퉁이를 레지던시로 3년 간(?) 제공했다고 대단한 일이다. 김순기 작가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는 소리다
1975년 김순기 미술제 미국문화원 서울에서 할 때 전시기간 중 서울대 등에서 강의(conference)하는 모습 “1975년, 내가 미술하면 ‘여자가 건방지다’고 했다. 여자가 아니고 ‘젊은여자 기집애’라더라.”
[김순기 미술제] 김순기는 1975년 서울 미국문화원에서 <김순기 미술제>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1971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 처음으로 서울에서 개최한 이 전시에서 작가는 현대미술에 대한 생각을 발표하고, 공유하기 위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11일부터 16일까지 열린 전시 기간 동안 매일 저녁 6시부터 7시까지 작품 슬라이드와 영화를 상영했고, 9월 13일부터 16일까지 “여러분과 함께 이 미술제에 관하여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토론회를 가질 것이므로, 여러분의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라고 초대했다. 오늘날 전시와 함께 상영회, 토론회는 흔하게 열리지만 당시로서는 ‘전람회’라는 용어 대신 ‘미술제’라고 쓰고 영상을 활용하는 등의 구성은 시대를 앞선 혁신적인 것이었다. 미술을 회화 혹은 시각 예술로만 바라보는 당시 분위기 속에서 ‘김순기 미술제’는 일대사건이었다. 영상 <일기>는 1971년부터 1973년 사이에 작가가 프랑스에서 실행했던 퍼포먼스들이 담겨 있다. 나무에 도끼로 패고, 들판의 흙을 파서 옆에 쌓았다가 다시 그 구덩이를 메우고, 바닷가에서 물을 퍼서 다시 그 옆에 물을 붓는 <물+물(일기)>, 실뜨기를 하는 <줄놀이(일기)> 등이 담겨 있다. 자연 속에서 일상적인 행위에 기반을 둔 퍼포먼스는 미술의 비물질성을 추구했던 1960년대 해외 미술계 동향과 흐름과 같이하며, 회화 중심이었던 한국 미술계의 경향과 비교할 때 매우 앞선 것으로 김순기 미술제에 참여한 젊은 미술학도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김순기가 1986년 마르세유에서 미디어와 멀티미디어 축제를 할 때 비행기 숙소비용이 많이 들지만 조건이 좋지 않아도 유럽에 많은 작가가 참가를 하고 정 돈이 없으면 텐트를 치고 숙박문제를 해결하면서 그렇게 즐겁고 행복할 수 없었다고 역시 예술이란 삶을 축제로 바뀌는 기술이라는 것을 여지 없이 경험했다고 모든 예술가 그렇지만 그녀는 특히 삶의 축제감(festivity)를 누구보다 강조하는 작가
김순기의 용어 중 참신한 것은 그는 전시를 전람회라고 하는 세대이다. 그런데 그는 전시라는 말보다 미술제라는 말을 선호했다 다시 말해서 전시는 그냥 행사가 아니고 축제라는 것이다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 나는 축제의식이 없는 전시를 있으나마나 한 것이다(무용지물). 그래서 미술제라는 말을 썼는데 매우 창의적 발상이고 일상과 예술을 하나가 되려고 했다는 면에서 진정한 축제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는 바보라는 말이 많이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흔히 잘 노는 사람을 바보로 보기 때문이다 세상은 모든 것이 그 유용성과 필요성으로 돌아가는데 그것을 과감하게 거부하고 그냥 즐겁게 노는 바보가 되는 것이 작가가 생각하는 최고의 유토피아인 것이다 게으른 구름(김순주 작가의 시집) 여기서 게으르다는 것을 바로 그런 의미가 담겨 있고 구름이라는 것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사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기존사회에 대한 반역 혹은 반작용이다. 그의 서예 작품도 결국은 더 잘 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자유롭게 사는 것이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김순기는 시서화에서 첨단의 전자아트까지 다 시도했는데 거기서도 역시 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즐겁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즉 그 과정을 중시한 것이다 발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모든 것이 예술의 사건이 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삶을 예술로 녹이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거기서 예술이 뭐고 예술가의 역할이 뭔지들 다시 묻게 되는 것이다
20대 데뷔시절 70년 대 김순기 첫 전시 작품제목은 <소리(1970) 신문회관>다. 샤먼의 무한대 에너지(dynamic power 무기)와 영매(미디어) 아트의 강력한 신기(신령함)이 보인다. 김순기는 백남준처럼 비디오라는 한 영역을 깊이 판 것이 아니라 그는 요즘말로 다원예술의 창시자다. 그는 낡은 예술을 다 지어버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다시 다른 영역에 도전해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언제 현재만 있을 뿐, 시작이 있을 뿐이다.
천재가 되려면 10살 이전에 주역과 장자 등 중국고전을 읽어야 한다. 한문을 공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서양 것 베끼다가 시간을 다 낭비한다. 진정한 창조력과 상상력은 결국 10-15살 이전의 동양고전을 읽은 데서 나오는 것이다. 독서가 어려우면 길을 안내해줄 스승이 있으면 더욱 좋다. 한국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김순기 작가에게서 그런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의 저서 중 <장자와 비트켄슈타인>이 있다 오늘 김순기 작가와 대화에서 이런 말을 한다. 서양에서는 서양철학의 약효가 끝났다고 유통기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서양이 아닌 예컨대 동양의 사상과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는 똥과 오줌에도 있다>는 점토판에 『장자』에 나오는 구절을 쓰고 구워낸 도자기 작품이다. 작가는 작품에서 주역과 장자, 노자, 불교 등을 기반으로 무위(無爲)와 유희를 추구해 왔다. 그는 “참으로 쓸모없다는 것은 곧 가장 중요한 것, 인간의 큰 행복을 생각하는 것, 무위(無爲)를 다른 말로 하면 형식주의적 틀에서 (벗어나) 조금이나마 사람들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는 것”이며, “의미가 없는 의미를 만드는 것이 작품”이라고 말했다.
김순기 작가의 20대 질문은 시간이 무엇인가 공간이 무엇인가 였다
김순기 그에게 공간은 시간이 되고 이미지는 사운드가 된다. 그런 면에서 해체적 작가다. 지금까지 모든 예술의 기존의 룰과 체계를 다 지워버리고 거기에 전혀 새로운 예술적 영역을 확장하고 그걸 실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 백남준 과에 속한다. 아방가르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초기 인공지능 개념을 가지고 전자공학에 관심을 가지고 비디오아트를 한 이유이다. 그는 플럭서스의 후계자다 고체(hard)를 액체(soft)로 바꾸기 위해서 기존아트를 해체시키다
김순기의 아트개념 철학개념 전자개념 도표
달 항아리 뉴미디어아트로 번역하다
김순기 그에게 공간은 시간이 되고 이미지는 사운드가 된다. 그런 면에서 해체적 작가다. 지금까지 모든 예술의 기존의 룰과 체계를 다 지워버리고 거기에 전혀 새로운 예술적 영역을 확장하고 그걸 실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 백남준 과에 속한다. 아방가르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초기 인공지능 개념을 가지고 전자공학에 관심을 가지고 비디오아트를 한 이유이다. 그는 플럭서스의 후계자다 고체(hard)를 액체(soft)로 바꾸기 위해서 기존아트를 해체시키다
김순기 작품 역대 전시 포스터 중 일부
<1975년 시간과 공간 페스티벌> 당시 유신시대 낮에 개인전 미술제 설치를 하면 밤에 경찰이 와서 없애버리고 그러면 다시 그 다음날 다시 설치하는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해야 하는 번거로움 속에서 멋진 축제를 계속되엇다고 워낙 별난 축제가 당시 정부에서는 미친 자들의 놀이로 볼 수도 있었으리라
<"아방가르드 예술이란 이상한 짓 아닌, 소통하고 나누는 것" 새로운 영역을 확장하는 것)>김순기 조형상황 3번 보드도의 10월 1973년 단채널 비디오 4분 3초 마스터 필름 필름 16mm 13분 45초 요즘 이런 영상작품은 많지만 1973년 그리 흔하지 않은 작품이었다 아래도 같은 작품
<게으른 구름> -김순기(시인이기도 하다)
잘 보기 위하여 / 잘 읽기 위하여 / 잘 생각하기 위하여 잘 하기 위하여 / 안경을 쓸 필요가 없다
생각도 그림도 다 아니다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이는 것도 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오 밖에 있는 것도 아니오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 그냥 그것이다 그냥 게으른 구름이다 그냥 노닐다가 그냥 모습, 그냥 색깔, 그냥 소리
장자와 비트겐슈타인 주제의 글 중에서 "유희란 규율을 떠난 열린 태도"
<이 얼음TV를 만들기 위해 미술관 전시장 한 곳에 간이 냉장고 만들다> 김순기, <Vide&O>를 위한 드로잉, 1987, 종이 위에 수채, 연필, 29.8x39.4cm Drawing for Vide&O, 1987, watercolor, pencil on paper, 29.8x39.4cm 뒤로 냉장고가
이번 전시에서는 김순기가 작품을 제작하기 전에 남긴 여러 드로잉을 소개한다. 김순기는 작품을 제작할 때, 수많은 메모와 드로잉을 남긴다. <Vide&O>의 경우에, 전체 느낌을 담은 회화적인 드로잉이 있는가 하면, 마치 엔지니어의 도면처럼 수치와 비례를 정밀하게 표기한 드로잉도 남긴다. 또한 한 작품에 대해서 한 번의 드로잉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서 드로잉한다. 드로잉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붙잡아 구체화시키는 과정이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점점 실제로 구현되어 간다. <Vide&O>는 영어 비디오이자, 프랑스어로 ‘비어 있는’ ‘물’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띈다. 작가는 전시를 위해 얼음으로 모니터 모양의 조각을 제작하려고 했고, 특히 모니터의 프레임과 내부가 서로 다른 속도로 녹아내릴 수 있도록 수차례 연구와 실험을 계속했다. 마침내 방법을 찾아 제작을 의뢰했을 때, 얼음 공장 직원이 ‘비디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실수로 ‘빈 물’이라고 표기하여 주었다. 평소 언어 게임을 즐겨 하는 작가는 ‘실수’로 붙은 제목이 영상을 보여주지만 비어있는 모니터의 속성을 적확하게 포착했다고 생각하여, 아예 작품 제목을 <Vide&O>로 명명했다
스스로도 Performer
신자유주의 풍자 돈의 신을 믿는 시대 복권으로 만든 하우스
시를 노래하는 로봇도 있군요 백남준의 오페라를 영창하는 로봇를 상기시킨다
<김순기 작가 백남준과 존 케이지와 협업하고 세계적인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와 장뤽 낭시와 대화 퍼포먼스아트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아래는 김순기 작가의 위안부(성노예) 주제 작품 뭐든지 남보다 빠르다>
Screening Videos by Soun-Gui Kim BUSHWICK / RIDGEWOOD Wed. Dec. 11th 2013, 7:00 PM Microscope Gallery | 4 Charles Place, New York Videos by Soun-Gui Kim | Events Calendar Still from "Sans Nom" (Soun-Gui Kim, 1995) courtesy of the artist
We are very pleased to welcome artist Soun-Gui Kim for a very rare screening of her video works including “Bonjour Nam-June-Paik II”, a 1984 performance of Kim with Nam-June Paik, and “John Cage, Empty Words” with Cage performing/reading his text composition in 1986 in Marseille, France. The Korean-born, French artist has been working with video and installation since the 1970s, and over the years has collaborated and performed not only with Cage and Paik, but also French philosophers Jean-Luc Nancy and Jacques Derrida.
Soun-Gui Kim is currently in the US for the opening of her solo exhibition “Soun-Gui Kim in dialogue with Cage, Derrida, and Nancy” at the Slought Foundation in Philadelphia. Kim will be available for Q&A after the screening.
“[…] Soun-gui’s experiment is also an experiencing of the voyage through art itself, through this singular apparatus we call “art” and its recent history ; a passage until the other side, where the “artist” no longer achieves “a work of art” but performs something else, still to be named by us, if it is to be named at all. Such an experiment which is that of contemporary art as a whole, is made by Soun-gui in her very own way, as an experiencing of fading out. Each time, her time is one of dissolution, disappearance, evading or erasing. Of an angle closing up or the aperture being shuttered, of a sliding to the side, off screen or into the digital decomposition deep into the monitor or deep into the picture itself. Maps are cast into deep shadows, photographs become blurred, screens melt down, noises die away, figures thin out and the frog jumps off.” – Jean-Luc Nancy, from "Experiencing Soun-Gui"
“Soun-Gui Kim in dialogue with Cage, Derrida, and Nancy” at the Slought Foundation (Philadelphia, PA) runs from December 6 through January 18, 2014. More info available at www.slought.org
Soun-Gui Kim moved to Paris in 1971 after completing art studies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Her work has been exhibited internationally at institutions such as 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 Sydney and Adelaide, Australia; the Museum of Modern Art, Austria; 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 Ars Aevi, Bosnia; Fukui International video Biennale, Fukui ; «Japan 87 Video T.V Festival», Tokyo, Japan ; DAAD gallery, Berlin and Kunsthaus, Hamburg ; the Korean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Art Sonje Center, Seoul and the Gwangju Biennale in South Korea; the Centre George Pompidou and the Fondation Cartier in Paris; the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in Nice, France; the San Diego Art Museum in California; and the Slought Foundation in Philadelphia. Soun-Gui Kim works and lives in Paris. Full program and more info at www.microscopegalle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