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고 넘치지 않는
-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킴킴 갤러리’에 대해
현시원
1. 첨벙
첨벙, 물이 목 위까지 차올랐다.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작업은 언제 봐도 박진감 넘친다. 사물과 사물의 의미가 벌이는 게임 한가운데에서 승부차기로도 끝나지 않을 팽팽한 긴장 관계를 이룬다. 물이 찰랑찰랑하게 어떤 경계선의 위치점에 자리 잡고자 하는 ‘정확함’이 느껴진다.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작업은 그들이 포착한 ‘상태’가 지닌 여러 면모를 전시장에 배치한다. 비교적 최근에 열린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개인전 《파라노이아 파라다이스(Paranoia Paradise)》(아뜰리에 에르메스, 2024), 2025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기획전 《안티-셀프: 나에 반하여》에 선보인 작업들을 떠올려 보자니 20년 넘게 협업 작업을 한 이들의 존재 자체가 두 개인의 ‘상태’를 오가는 행동들의 결과다.
상태란? 상태(狀態)는 한자로 ‘모양 상’, ‘모양 태’ 자를 쓴다. 당연히, 물질의 성질을 나타낸다. 액체, 기체, 고체 또는 전도체 등의 물질적 속성을 표현한다. 또 뇌가 제대로 작동하는가, 맛이 간 것은 아닌가 하는 개인이나 음식 따위의 문제를 포함해, 사회 전반적인 패러다임의 문제 또한 다룰 수 있다. 그런 단어가 ‘상태’다.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작업에서 이 ‘상태’들은 에너지 넘침과 에너지 고갈을 오간다. 바로 그 (또 한 번 이 단어를 쓰자) ‘상태’에서 이들의 작업은 수적으로 많지만, 넘치지는 않는다. 독특한 적정선을 이룬다. 마치 거울 위에 동전 네 개가 알아서 고정되어 있던 작업 <위안화 동전>(2025)처럼 말이다. 둘의 작업 안에서는 (세상을) 보기와 (작업을) 만들기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거울을 재료로 하는 <위안화 동전>이 다른 벽면의 <편집증적 선인>(2025)이 달고 있는 수많은 눈알들을 비춰서 거울 각도에서도 다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 시각적 구조는, 거울 안의 전시로 전시라는 구조 자체를 새롭게 뒤튼다.
이렇게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작업은 관객으로서 보기에, 재밌다. 이들의 작업을 볼 때면 눈이 빠르게 움직인다. 수평적으로 흐트러트리기의 결과와 수직적으로 위아래로 쌓기의 움직임들이 눈에 동시에 들어온다. 자수로 미니마우스 등을 그린 작업이 가로 벽을 감고, 3미터에 달하는 <코케시 탑>(2025) 서로 다른 층위와 용도로 현실에 존재하고 현실에서 사용되는 사물들은 이들의 작업에 의해 따로 또 같이 만난다. 2011년 국립극단 소극장 판의 건물 위에 배치되었던 빨강색 목욕탕 표시의 작업(Hot Mill 열탕)을 예로 들어보자. 그것은 레디메이드 부호였다. 목욕탕 간판이란 뜨거운 열기와 수증기를 표현한 것 아닌가. 평평한 이미지 하나로 모락모락한 온도 감각과 만져질 듯한 촉각성을 불러일으켰던 이 온천 간판 작업, 군더더기 없이 명료한 사물의 ‘상태’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목욕탕(온천), 뜨거운 물 표시의 빨간 색. 이 산뜻한 시각성을 띠고서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작업은 현실의 특정한 상태를 포착하고, 그 예리한 포착의 순간들을 전시 제도 안에서 마주하게 한다.
온천 간판은 2019년 성곡미술관 개인전 《리프로스펙티브(REPROSPECTIVE)》에서도 건물 입구 간판에 붙어 있었다. 이때(2019)는 좀 더 개인 ‘전시’의 시공간적 입구로서 전시의 어법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첫인상’을 관객에게 건넸다. 또 과거의 작업들을 재제작하는 해당 전시의 방법론의 표지로서도 역할을 했다. 2011년보다 2019년의 이 온천 표시는 좀 더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8년 사이 한국에서 뜨거운 목욕탕이 사라진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둘의 작업에 깃든 ‘생경한 익숙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간판의 물리적 삶과 간판에 담긴 시각적 의미망은 현실과 무관하게 또 다른 세계를 살기 때문이다.
이들의 작업을 ‘생경한 익숙함’이라고 쓰고 나니 독립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이 스스로를 ‘야생적인 사상가(wild thinker)’라고 칭했던 것이 떠오른다. 그것은 과격함과는 다른, 현실의 날 것 그대로 상태들을 겹쳐 보는 신선한 눈이다. 둘의 작업에서 이들이 조율해 놓은 ‘상태’는 펑 하고 쉽게 터지지 않는다. 그것은 ‘예술 작업이 된 사물로서’ 지속된다. 먼저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는 현실의 사물을 자기 방식대로 인식한다. 그다음 자신들의 언어와 방법론으로 사물의 모습과 성격을 뒤바꾼다. 인식과 발견, 제작과 재제작 사이에 무엇이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작업이 사물, 예술, 삶의 앞모습만큼이나 뒤통수를 비롯한 측면, 후면 등 다양한 ‘면면’을 보게 한다는 점이다. (사물의, 누군가의, 세계의) 다른 면을 보게 하는 것은 놀라울까, 새로울까, 때로는 뒤로 물러서야 할 만큼 두렵기도 할까?
사물이 예술이 될 때, 이들이 다루는 것은 비단 사물만이 아니다.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는 지속(시간)적으로 미술 작업을 한다는 행위와 미술사를, 또 공간적으로 작업의 재료들을 발견해 내는 장소로서 세계 곳곳의 도시와 서울의 상태들을 오간다. 그러면서 작업이 될 현실의 파편들을 수집한다. 이들의 작업 안에 들어와 있는 일상의 각종 사물들은 이렇게 미술하기와 미술사, 세계와 서울, 이들의 작업과 이동을 둘러싼 ‘시스템’을 만든다.
2. 허구
‘일상의 각종 사물들’에 내가 밑줄을 친 것은, 몇 해 전 그들이 했던 킴킴 갤러리에 관련된 한 인터뷰 때문이다. 그들은 2011년 킴킴 갤러리로서 서울 종로구 계동의 모델하우스로 쓰였던 공간에서 정서영의 개인전을 ‘기획’한 후 이렇게 말했다. “정서영 작업에서 이게 작업인지 아닌지, 일상인지 작품인지, 이런 게 헷갈리는 부분이 있거든요. 모델 하우스라는 건 어차피 가짜잖아요. 그쵸? 21세기 모델 하우스가 아니라 17년 전 80년대 모델 하우스니까.”
‘이게 작업인지 아닌지, 일상인지 작품인지’ 헷갈리는 것은 두 작가와 킴킴 갤러리가 오래 함께해 온 작가 정서영의 작업뿐만은 아니다. 이들이 운영하는 새로운 주체인 킴킴 갤러리도 공유하는 특성이었다.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는 2008년부터 ‘킴킴 갤러리’라는 ‘시스템’을 운영하면서 소위 큐레이터로서의 작가 그 ’이상(beyond)‘의 활동을 해왔다. 작가로서 자신의 방법론으로 큐레이팅을 재정의하거나, 유사 큐레이팅 행위를 작업의 프로세스 안에 깃들인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독특한 시스템을 가진 ‘다른 갤러리’를 운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킴킴 갤러리는 ‘벽 없는 미술관(museum without walls)’과 같은 두터운 비유나 은유가 아니라, 실제 갤러리로 존재하고 움직이는 ‘실체’가 되어 나갔다. 2008년 글래스고에서 ‘킴킴 갤러리’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했던 그들은 이후 전시, 프로그램 등의 기획과 실행, 협업을 몸소 자행해 왔다. 이들은 아뜰리에 에르메스 디렉터 안소연과의 인터뷰에서 킴킴 갤러리를 시작했던 시점을 이렇게 회고했다. “전시가 가능한 작가들은 실제 작품을 전시했지만, 예산과 운송 문제 등으로 실물 전시가 불가능한 작가들의 작품은 우리가 만든 조각에 작품 사진을 출력해 붙여서 조각처럼 만들어 전시”했다. “관객들이 그것을 갤러리라고 믿고 보길래” 다른 방식으로 갤러리를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믿음, ‘믿고 (바라) 보는’ 지속되는 시간이 그들이 만든 킴킴 갤러리라는 ‘시스템’이자 ‘전시’라는 말하기 방식 사이로 등장한다.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끝이 날 때까지, 두 작가가 만든 전시는 애초에 ‘적정한 거리를 두고 감상하기’라는 오래된 규율을 깨버린다. 관람자로서의 나는 어떤 특정한 내러티브를 지닌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아닌데, 한가운데 있다. 2025년 현재 AI의 전면화로 인해 아마도 소설의 3대 구성 요소였던, 인물-사건-배경이라는 층위는 변화하게 될 텐데. 그렇다면 나는 이 전시장에서 인물도 사건도 배경도 아닌 무엇이 될까?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전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킴킴 갤러리는 진짜이면서도 허구적이다. 실제 현실에 존재하며 여러 일을 했지만 허구적인 면모를 잃지 않는 것이 이들을 바라보는 흥미진진함을 잃지 않게끔 한다. 그것은 이들이 말한 ‘시스템’이라는 행동 방식에 기인하는 것일 테다.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는 2025년 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 노해나와의 편지에서 킴킴 갤러리에 대해 이렇게 썼다. “킴킴 갤러리는 가짜도 아니고 환상도 아닙니다. 상상 속의 것이 아닙니다. (중략) 이것은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시스템이 뭐죠? 시스템의 유일한 목적은,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보아 왔듯, 시스템의 실질적 목적이 공식적 목적과 상충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의 말처럼,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가? 이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어떻게 가능할까. 내가 킴킴 갤러리가 ‘허구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이미지로서, 이들이 불러일으키는 킴킴 갤러리의 존재가 무수히 많은 시간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간들은 킴킴 갤러리에 함께하는(초대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많은 작가들의 작업이 지닌 특성에 기인한다. 그리고 또 킴킴 갤러리는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주소를 모르고 문 열고 닫는 관객들과의 약속이 부재하며 가시적이지만 어딘가 비밀스럽다. 이 모든 것들은 이들이 전시를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서 ‘추적의 원리’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일 듯하다. 그러니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나가는 것, ‘전시’의 한자 뜻처럼 모든 것을 다 펼쳐 놓는 것이 아니라, 동그랗게 말려 있는 양피지처럼 계속 새롭게 뚝딱 나타나서, 다른 활동들의 지면이 되어 주는 미지의 영역이 되어 주곤 하는, 절반의 펼침 상태다.
이는 이들에게 전시가 ‘완성되는 구조’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움직이는 프로젝트임을 뜻한다. 재배치하고, 재해석하며 이들의 여정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빨리 실용적”으로, “경제적인, 물리적인 문제들을 극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선택하는 행위로서 가변성을 띤다. 이때 이 가변성을 질주하는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사물들은 새로운 삶들을 성취해 낸다. 핼 포스터(Hal Foster)는 “레디메이드는 미술가나 큐레이터의 의도를 넘어서는” 창조 행위“(뒤샹이 말년에 한 말이다), 즉 잠재해 있는 맥락을 여전히 끌어낼 수 있는 제시의 퍼포먼스이기도 하다”고 말하며 “레디메이드는 회화에 닥쳤던 죽음들만큼이나 많은 삶을 지녔다”고 쓴다.
3. 완벽한 동그라미
킴킴 갤러리, 그들은 ‘킴킴 갤러리’라는 이름을 붙이는 행위에도, 공간을 찾는 행위에도, 누구와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숨기지 않아 왔다. 그것은 묘하게 선명하고 용감무쌍하게 섬세하다. 이질적인 상태들에 익숙한 그들은 킴킴 갤러리를 만드는 데에서도 자신감 있게 미술 만들기와 보기를 즐기는 듯하다. 개방적인 이 ‘독립성의 영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언제 시작했는가가 그리 선언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2008년이라는 시점도 ‘마음에 든다’.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에서도, 정치·사회적인 상황과도 크게 결부되지 않는 듯한데,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2008년의 금융위기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다. 일부러 ‘마음에 든다’는 표현을 쓴 것은, 소비자가 아닌 상태에서, 개인의 호오(favorite)가 지닐 수 있는 힘을 말하고 싶어서다. 내가 왕이어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 자두 맛 캔디를 고집하며 빨아먹을 수 있을 만큼 작아진 상태에서 깨뜨렸던 그 물질감의 ‘개인적’ 조율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집단이 개인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확신은 한국 사회의 ‘일사분란’을 가져왔다. 한강의 기적이라든가 발 빠른 변화로 이뤄낸 1980년대 이후의 변화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긴 시간 동안 군인 출신의 대통령이 정치·사회 전반을 지배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물론,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가 현실을 말하는 방식은 매우 개인적이고, 매우 디테일하다. 담배 한 조각, 먼지 하나, 자수 실 하나와 세계 이곳저곳에서 수집하고 이동해 온 여러 사물들이 갖고 있는 '세부성‘이 작업의 힘을 만든다. 김나영의 1997–1999년 작업인 <전설>의 한 구절은 미술가 ’개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세부 묘사된 장면으로서 담겨 있다. 아르코미술관의 2025년 전시에서 펼쳐진 페이지는 다음과 같았다.
그레고리가 어렸을 적 먼친척의 농장에 놀러갔다. 그 집 부엌에서 종이위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는데, 그 동그라미가 하도 완벽해서 마치 콤파스로 그린것 같았다. 그래서 당장 그 동그라미 그림을 먼 친척인 농장주인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영문을 모르는 이 친척아저씨는 별로 달가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동그라미 그림’에 관한 이 어린 시절 그레고리의 일화는 지극히 소소하고 세밀하다. 1997년에서 1999년에 만들어진 김나영의 작업 <전설>의 일부를 꺼내온 것은 ‘영문을 모르는’ 것 그리고 ‘동그라미 그리기’에 관한 이 이야기가 어떤 요리의 냄새나 찌릿 나도 모르게 느껴지는 정전기 같은 신체적 체험으로서 관객에게 흘러들어오기 때문이다. “저희는 디테일은 좋아하는데, 이것은 종종 어떤 상황에서 걸어 나오는지 혹은 들려 나오는지의 차이를 뜻합니다.” 이 이야기는 마치 이렇게 이야기한 두 작가의 사고가 텍스트로 물질화된 예처럼 보인다.
자, 다시 킴킴 갤러리란 무엇인가? 킴킴 갤러리는 정의의 대상이 아니라, 추동하는 에너지 그 자체다. 시스템이란 일종의 에너지의 흐름이다. 에너지는 때때로 작은 사물들이 서로를 잠시 믿고 기대어 보는 것과 언어와 사물성, 시각성 사이가 복합적으로 섞여 들어간 유머로 나타난다. 정확히 말해, 시스템이 작동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미 미술제도, 문화사회적 조건 안에서 정의 내려지고는 하는 여러 대상들을 함몰시키지도 완전히 그 대상에 기대지도 않는다. 킴킴 갤러리는 무엇도 무너뜨리지 않고, 특정한 무엇도 세우지 않는다. 마치 공공미술을 이야기하면서 홀로코스트의 기념물을 대상으로 ‘카운터 모뉴먼트(counter monument)’라는 단어를 내세움으로써, 우리에게 남기고 세우고 기념하고 기억하는 것에 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제임스 영(James Young)의 글처럼, 킴킴 갤러리도 ‘킴킴 갤러리’를 통해 만들고 보고, 세계의 방대한 사물과 믿음들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지를 무겁지 않게 던진다. 20세기 초 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Tatlin)의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기념비(Monument to the Third International)> 구상과 같이 이뤄지지 않은 큰 꿈들을,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는 조각내고 변형된 상태로 현실화한다. 마치 2008년 처음 킴킴 갤러리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할 때, 운송 불가했던 작가의 작품들을 다르게 변화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둘은, 거대하면서도 이뤄지지 않은 개념이 갖고 있는 이미지와 실재, 목표와 현실의 간극을 그 자체로서 인정하고 다룬다.
4. “일련의 흐릿한”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작업을 보는 나에게,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과연 ‘한국의’ ‘지정학적 한국’의 미술인가 하는 점이다. 당연히 ‘한국 미술’에 대한 단일한 답은 없다. 그러나 이들이 사용하는 외국어이자 모국어로서의 한국어는 낯설지도 않고 익숙하지도 않다. 2025년 아르코미술관의 기획전 《안티-셀프: 나에 반하여》에서 보았던 먹으로 쓴 서예 글자는 이렇게 말한다. ‘다이어리아: 원인, 증상과 치료’: 부호는 흘러내려서 8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문장은 명료한데, 표현은 묵직하다. 더 이상 미술 시간에 서예를 배우지 않는 2025년 한국/서울에서, 검은 먹물로 쓴 한국은 묘하게 코스모폴리탄적이다. 이 언어적·문화적 혼종성 역시 킴킴 갤러리라는 ‘가변적 시스템’의 한 축이다.
글을 쓰면서 기억난 것은 내가 2010년 서울 이태원에 위치했던 공간 해밀톤에서 김나영 & 그레고리의 개인전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벌레가 새를 잡는다》에서도 한을 봤다는 사실이다. 이때 전시장 가운데에도 먹으로 쓴 텍스트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새를 잡는다》가 있었다.
‘한국적‘이라고 할 때 내가 떠올리는 것은 당연 박이소를 포함해 1960년대 초중반 태생의 몇몇 작가들이기도 한데 그보다는 어떤 분위기로서의 서울, 한국 풍광이다.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작업이 갖고 있는 묘한 쾌활함은 서울과 한국의 것과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목가적이면서도 차가운, 한 개인의 행동을 천천히 관찰하고 집과 여행을 구분하지 않는 수평성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이들이 만드는 작업과 실천으로서의 이미지들은 그들이 그것이 한국이든 프랑스든 독일이든 도대체 ’개의치 않는다‘는 점을 기반으로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들이 만든 시각적 쾌의 실체에 대해 말하고 있다. 1960년대 개념미술가들이 만들어 냈던 개념 자체를 실천의 테크닉으로 사용하고(이를테면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가 사용하는 언어들은 미니멀리즘으로서의 소거가 아니라 실제 행동을 촉발하는 실천 방식이 된다. 킴킴 갤러리처럼), 1980년대 신표현주의 화가들이 파고들었던 질감의 문제를 사물과 사물의 마찰로서 드러낸다(땅콩버터으로 그린 작품들을 보라). 이것은 미술사를 다시 읽기 위한 것이 아니다. 현실을 보기 위한 것으로서, 이 현실은 이들의 눈이 보았던 많은 것들을 소화하고, 미술로서 살아가는 생활의 방식일 것이다. <스테인리스 피카소 핀카소 온 더 비치>(2024)는 ‘못 박기’ 행위를 통해 피카소의 드로잉 이미지를 다르게 탄생시킨다.
미술로(미술과 함께) 살아가는 한 방식으로서 킴킴 갤러리는 국내외 여러 작가들을 움직이게 했다. 그것은 플럭서스와 같은 공동 제작도, 영구적인 네트워크를 꿈꾸는 것도 아닌 ‘개인적’인 것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로 작가 우순옥은 2013년 10월 15일부터 11월 12일까지 서울 종로구 서촌의 지금은 사라진 서점 가가린과 여전히 존재하는 온그라운드에서 your ground park ( A Douglas Park by U Sunok ) ‘여기 소문자와 대문자 배열 등은 우순옥 작가의 작업이므로 그대로 써주세요!’ 《Douglas Park by U Sunok》이라는 전시를 열었다. 그는 여기서 이렇게 썼다. “우연히 킴킴 갤러리 전시에서 (2012년 광주비엔날레에 참가한 우순옥은 같은 시기에 열린 광주아트페어에 킴킴 갤러리가 전시한, 전혀 판매 가능한 유형의 작품이 없는 작가인 더글러스 파크, 후에 <더글러시즘>이 될 쇼케이스를 관람했다.) 영국작가 더글라스 박 더글러스 파크의 예술가로서 독특한 존재방식의 기록들을 보게 되었다. 다양한 예술가들 작품 속에 그의 마치 카메오처럼 무심한 듯 슬쩍 개입된 비-중심적 흔적들 속에서 나의 테마 ‘잠시 동안’과의 일련의 흐릿한 연대감이 느껴졌고” 라고. ‘흐릿한 연대감’과 ‘잠시 동안’이라는 표현에 이어 작가 우순옥은 자신의 작업에 대해 선명하게 서술해 나간다. 과연 이 ‘잠시 동안’ 분명히 존재했던 것, 그리고 킴킴 갤러리가 특정한 한 공간을 운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갖는 힘이 있다. 그것은 회고나 ‘존재했음’의 과거형으로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의 전시 공간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의 경로(찾아오는 길)을 특정하지 않는 데에서 오는 자유를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는 미리 알았던 것일까?
6. <반야(般若) 키티(Kitty Enlightenment)>(2024)
그는 킴킴갤러리를 매개로 예술가들 사이에 “지금은 잊힌 우애의 공동체”를 복원하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더글러시즘 더글라시즘의 국제주의 역시 아마도 그러한 의지의 일환일 것이다. (중략) 그의 답이 떠오르지 않는 이유도 그가 아무 말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내가 잊어버렸기 때문인지 이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 그 자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에게 “우애의 공동체”에 관한, 되살릴만한 어떤 기억과 경험이 있다는 것은, 그가 그것을 위한 여정을 계속해나가는 데 큰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시장 영역과 후원 영역 모두에서 치열한 경쟁이 일상화되고 상업화의 압박이 날로 심해져만 가는 미술계에 그러한 이상이라니, 과연 실현가능한 일인가? 공간도 없는 갤러리, 상업성도 없는 작가들 몇 명이 ‘예술’을 탐하며 모였다 흩어졌다 운동한다고 해서? “나비의 날개/몇 번이나 넘는가/담장의 지붕”(마쓰오 바쇼)
글을 끝내면서 시각적으로는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반야(般若) 키티(Kitty Enlightenment)>(2024)를, 텍스트적으로는 이들의 오랜 벗이기도 한 이상길 교수의 글을 다소 길지만 인용하고자 한다. 여러 개의 조명이 달린 흰둥이 키티는 깨달음을 온몸으로 현시하듯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반(反) 야외 공간에 서 있었다. 동네(!)에 버려진 대형 조형물 키티를 주어 만든 것으로 밝혀진 이 <반야 키티>는 앞과 뒤의 표정이 다르게 ‘복원’되어 있다. 기존의 것들을 변형하고 재조합해서 다시 만드는 행위는 이제 20세기 후반 이후의 현대 미술가들만이 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새롭게 끊어지고 연결되는(우리의 사고와 존재 자체가 AI로 인해 재편집되는) 낯선 문명 위에 올라가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작업을 보면서 더욱 든다. 그래서 더욱 위의 이상길이 쓴 “그렇게 생각하다는 사실 그 자체”라는 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킴킴 갤러리라는 존재도 어쨌든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과 믿고 보는 일을 통과하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글을 시작할 때 꼭 “첨벙, 물이 목 위까지 차올랐다.”라는 문장으로 출발하고 싶었다.
Oct. 2025
Seou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