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재환 작품전《좀 살자》2026. 07. 01 - 2026. 08. 09동곡뮤지엄 2층 전시실·주최·주관(재)보문복지재단 동곡뮤지엄 / 동곡뮤지엄·자하미술관·후원문화체육관광부, (재)예술경영지원센터
구민자 × 이경희
전시장에 갈 땐 으레 다음의 경험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이전에 느끼지 못한 더한 자극을 받거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탄과 함께 영감을 얻거나. 작가 구민자의 작업은 공교롭게도 위와 같은 기대를 충족시켜주진 않는다. 하지만 그 평범해 보이는 상황이나 덤덤한 행위를 따라가다 보면 방관자였던 관람자는 어느새 작업 속 작가의 자리에 앉아 작가가 만들어놓은 세상 안에서 문답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것이 좋은 예술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즉각적인 자극에 수없이 노출되어 무감한 이들에게 필요한 예술가는 서두름 없이 나와 내 주변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이 질문과 대답하기를 유도하는 이가 아닐까.
이경희 포트폴리오 표지에 일회용 카메라를 든 작가님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구민자 제가 하는 일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전문 장비를 갖춘 완벽한 상태에서 작업하는 작가도 있지만, 저는 그렇지 않은 편이거든요.
이경희 소재나 시각적 밸런스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작가가 있는 반면, 구 작가님은 내용과 과정이 중요하지 결과적으로 보여지는 것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습니다.
구민자 예전에는 작업으로 내놓을 생각으로 시작하기 보다는, 하다 보니 정리해서 내보이게 된 경우가 많았어요. 최근에는 제 삶과 작업의 범위가 매우 밀착되어 있다는 얘기를 자주 듣긴 해요. 생활의 일부가 작업과 분리할 수 없다는 건 자각하고 있었는데, 나의 일상이 작업에 드러난다는 생각은 전에는 크게 못했어요. 나를 보여주기 보다는 사회 곳곳의 틈을 보여주고자 했거든요. 거대한 사회 속 시스템과 고정관념이 개개인의 일상에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파고들어,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드러내고자 한 건데 그 과정에서 제 일상이 드러났던 거죠.
이경희 작업 형식에서도 과정에 집중하는 걸 볼 수 있거든요. 대표적으로 <향연>은 12시간 동안 남녀가 나눈 사랑 이야기를 하나의 책으로, <대서양태평양 상사>와 <구민자 아트페어-성격개조 자기표현>은 저마다의 서사가 담긴 물건들을 모았어요. 작업설명에도 ‘여정’이라는, 시간성이 포함된 단어가 곧잘 등장하고요.
구민자 요즘의 미술이 영화나 책과 같은 다른 문화 매체에 비해 벽이 높은 편인데, 저는 다양한 방식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걸 좋아해서 결과적으로 매체가 다양하게 나타난 것 같아요. <42.195>는 마라톤을 한 17, 18시간을 실시간으로 찍은 작업인데 최종 작업결과가 중요했다면 그렇게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카메라를 가지고, 단지 흔쾌히 찍어주겠다고 한 비전문 촬영자와 고생하며 찍진 않았을 거예요. 제 작업의 완성은 누군가가 그걸 보면서 ‘이 사람은 왜 이런 일을 했을까, 왜 이 상황이 벌어지는 걸까’ 하는 물음을 던지고 생각하면서 이루어지거든요. 그래서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것이 재료와 매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제가 자주 등장하기도 해요. 전시에서 어떻게 보여주기를 염두에 두기 보다는 우선 주어진 여건에서 기록을 하고, 이후에 어떻게 전시하면 좋을까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최근 들어서는 마지막에 보여지는 방식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지만요.
이경희 <구민자 아트페어-성격개조 자기표현>에서는 본인의 물건을 모두 내놓고 판매를 시도했습니다. ‘내 모든 것’을 공개하고 심지어 다른 이에게 판다는 건 기존의 삶을 떼어놓는 것이니 쉽지 않았을 텐데요. 새로운 ‘자기’가 필요했나요?
구민자 실제 제 작업실과 집에 있는 것은 모두 나갔는데, 부족한 시간과 제한된 공간에서 기획하고 정리·분류하다보니 아쉬움은 있었어요. 특히 ‘정말 다 판다’는 제스처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했는데, 노트북이나 외장하드, 빨래감을 보며 고민의 지점이 생겨났죠. 그리고 쓰레기의 경우 곧 버려질 것임에도 나한테서 나온 것이니 내놓아야 하나 싶었고, 같이 사는 동생과 공유하는 물건도 온전한 나의 것인가를 고민해야 했어요. 노트북 같은 경우는 팔겠다고는 했지만, 종종 그것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요.(웃음) 소위 ‘잘 팔리는 작업’과는 거리가 있는 제게 키아프KIAF(한국국제아트페어)와 같은 기간 동안 다른 성격의 아트페어를 한 것이 억지스러운 계기가 개입된 듯도 하지만, 제가 내놓은 물건들이 모두 다 팔린다면 정말 다른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했어요. 하지만 그런 가운데 정말 중요한 물건은 매우 비싸게 매겨 팔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표했어요. 그리고 만에 하나 다 팔린다면 무역회사를 하면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볼까 하고 아주 잠깐이나마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고요.
이경희 자신의 물건을 파는 것이 예술 행위가 될 수 있었던 건 그간의 작품이 일상과 매우 밀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작가님의 일상 생활이 작품 안으로 그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안산 경기창작센터에서 작업한 <겨우 살이>도 그러한 예라고 생각해요. 직접 짓고 담근 밥과 김치를 레지던시 방문객에게 내어주셨죠?
구민자 경기창작센터는 마트를 가려 해도 30분 이상 버스를 타고 나가야해서 그곳 사람들은 매우 불편할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동네 분들은 매우 다양한 식물을 먹을 만큼 키워 수확하니까 나갈 일이 별로 없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그러한 삶은 곳곳에 오랜 공을 들여야해요. 겨울을 나기 위한 김장만 예를 들어도, 그에 필요한 재료를 위해 3월부터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계속 가꾸어야 하잖아요. 하지만 갑자기 들어간 저는 그렇게까지 하긴 어려우니 그들에게 기댈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어요. 혹자는 이 작업을 지역 참여 성격의 공공예술로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저는 ‘나를 위한 김장’을 담그고자 했어요. 그리고 그 방법과 재료 수급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노동을 하고 대가로 쌀과 김치를 받은 거죠.1
이경희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에도 계속 참여하고 있는데 ‘공공예술’이라는 자장 안에서 본인의 작업은 어떻게 지역 혹은 지역민과 어떤 순작용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의 출발을 어떻게 잡나요?
구민자 보통 이런 프로젝트를 할 땐 공동의 삶의 가치를 이상적인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2010년에는 그 안의 사람들이 뿔뿔히 흩어져 있는데 ‘어떻게 하면 모여 살게 할 수 있을까’, ‘도시는 왜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변할까’를 주목했어요. 저는 당시 오동 팀에 속했는데, 오동은 인근 지역이 재개발 찬반을 두고 시끄러웠던 반면, (그런 영향을 전혀 안 받을 순 없겠지만) 그곳에 오래 산 사람들은 서로를 신뢰하며 생활했어요. 그런 집단 혹은 공동체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공동체를 이루며, 그 안에서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죠. 환경미화를 위한 벽화도 그들이 필요하다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어떤 벌어진 일이 그들에게 재미를 주거나 일상을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된다면 공공예술은 유용한 것 같아요.
이경희 작가님의 작업은 특정한 인상을 주거나 자극적인 사건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되는데, 결국 그 일상에는 누구나 한 번쯤 의문해 보았을 사회구조의 문제점들이 어색하지 않게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작품의 내용(과정)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매우 차갑고 날카로운 ‘나의 문제’, 내가 고민하는 사회문제를 마주하게 됩니다. 가령, 대한민국 남녀 평균의 외모로 단체 맞선의 상황을 담은 <잘 살아보세>(2010), 대도시 타이페이로 와서 직업을 구하는 한 아주머니에서 출발해 작가가 현지 거리에서 직접 구직을 했던 <직업의 세계>(2008),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끌어낸 <예술가공무원법>(2013), 그리고 “예술가의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재단과 지원자의 관계로 치환해 발족시킨” <구&양 문화재단>(2013) 등 누구나 한 번쯤은 겪으며 괴로워했을 결혼, 직장, 노동, 예술가 혹은 젊은이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거든요.
구민자 <직업의 세계>는 타이페이 비엔날레 몇 달 전 리서치 차 갔다가 독특한 동네를 찾던 중 우연히 한 아주머니를 만났는데, 그분은 몇십 년 전 타이페이에 와서 일을 구하고 살아왔다고 하더라고요. 이후에도 한 번 더 만나 좀 더 자세히 물어봤어요. 처음 도시로 왔을 때 아주머니는 저보다도 훨씬 어린 10대였고, 차비와 당장 몇 끼 때울 수 있는 돈밖에 없었다고 해요. 그런데 한참을 듣다보니 대만이 우리나라와 역사적으로 만나는 점이 많았어요. 그러면서 대만의 근대화 혹은 우리나라의 근대화 중 단면을 떠올리게 됐죠. 가령, 도시로 보낸 딸로부터 돈을 받아 생활하는 가족과, 혈혈단신으로 낯선 곳에 가서 직업을 구하는 젊은 여자는 어떤 상황에 놓인 걸까. 아주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제가 그러한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 될까 싶었어요.
이경희 그렇게 본인의 삶과 작업의 경계가 모호해 보이는 작업은 실생활에도 변화를 일으킬 것 같아요.
구민자 어느 정도는요. 예술을 하는 것도 일을 하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이것도 밥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이라 볼 수 있는 걸까?’, ‘예술로서 하는 일과 생활 유지를 위해 하는 일을 동등하게 볼 수 있을까’ 하면서, 타이페이 작업 이후 일과 미술을 포개어 놓고 보게 됐어요. 작품 판매로 생계를 유지하는 작가도 하지만, 제 경우에는 예술과 일의 일치를 생각하게 된 계기였어요. 한국에 돌아와서도 내가 먹고 사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한국에서 돈을 버는 것도 다시 보게 되고요.
이경희 <예술가공무원법>을 통해 예술가란 과연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인지, 만약 예술가가 공무원이 된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를 다룬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구민자 그 작업에서는 예술가, 특히 공공을 위한 예술 행위를 하는 이들 외에 혼자 작업하는 작가들의 역할을 얘기해보고 싶었어요. 사회는 예술가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하는 거죠. 나라에서는 예술가가 구체적인 결과물을 가지고 예술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 당장 눈에 보이는 영향이 있기를 바라잖아요. 하지만 수치화할 순 없어도 작업실에서 공부하고 준비하는 사람도 있는데 즉각적으로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너무 몰린 것 같거든요. 예술이 눈앞의 민원을 처리한다거나 동네에 필요한 공공예술로서의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사회라는 커다란 자장에서 예술이 지닌 다양한 층위의 역할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밖에서 당장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혼자 작업하는 예술가의 활동이 ‘일’이 된다면 어디에서 그에게 돈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해 봤어요. 과거에는 후원자가 있었고 오늘날에는 공공예술프로젝트에 나라가 지불하죠. 하지만 그런 것 외에도, 기초과학과 인문학이 우리 삶에 필요한 것처럼 예술도 같은 레벨에서 똑같이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당장 눈에 보이는 기여가 없더라도, 누군가가 하는 행동이 쌓이고 또 쌓이다보면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쓰일 수도 있을 거예요 (사실 그 쓰인다는 것도 매우 상대적인 개념이죠). 그 많은 예술가가 작업실에서 하는 활동들은 어디로 가고 지금과 앞으로 어떻게 인식할 수 있나 하는 거죠.
이경희 예술가를 보는 관점이 너무 획일화 되어 있거나 자기 편의대로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작가님의 또 다른 작업에서는 이러한 평균이나 통계가 가하는 폭력도 다루었죠.
구민자 대표적으로 <24시간>은 한국평균생활시간조사를 참고한 건데, 평범한 것에 대한 반감이 있었어요. 평균을 위해 통계치를 이용하는 걸 보면, 가령 한국의 산아율은 평균 1.3명인데, 실제로 1.3명을 낳는 사람은 없잖아요. 통계가 사람들에게 ‘평범한 삶이라는 게 이런 거야’라고 자꾸 얘기해서 사람의 생각을 안착·고착시키는 것 같았거든요. 사람들도 획일화를 싫어한다고 하지만 동시에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고요.
이경희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가요?
구민자 노동에 계속 관심이 있고, 시간 혹은 통계, 제도에 의해 인위적으로 규정된 것에도 관심이 있어요. 시간과 관련해서는 어떤 칼럼을 보니까, 인간이 시간 관념에 익숙해진 계기 중 하나가 기차라고 하더라고요. 정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놓치면 안 되니까요. 시계가 도입되고 하루를 24시간, 분, 초로 나누면서 일상생활에서는 ‘해가 저 산 어디쯤 떴을 때’ 라는 식에서, 몇 시 몇 분이라는 근대적 시간의 정확함을 따르게 된 거죠. 자연에 인위적인 기준이 들어간 거예요. 시작은 자연의 흐름을 수치화하고 편리하게 사용하고자 한 것인데 삶 속에서는 틀과 제약이 되어버리는 상황, 그런 걸 자꾸 생각하게 돼요.
건축신문 2013년 12월 31일
서문
권선영_이성민_이채원_임시호展
가장 짧지도 크지도 않는, 지적 패러다임 속에 숨어있는 현실적 인식의 변화 ● 누구에게나 잊혀질 권리는 존재한다. 자의든 타의든 기억에서 잊혀져 가는 것은 감춤과 동시에 드러남이 표출 되어지는 것일 지도 모른다.『MAXIMA』展은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하고 지속적인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KiMi For you' 공모작가들로 구성되었다. 공모를 통한 작가의 발굴과 더불어 대중에게 잊혀지지 않는 작가군 형성을 지원하는 전시로, 4인 작가들의 발전된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소통에 주력하고자 한다. 권선영, 이성민, 이채원, 임시호는 키미공간에 대한 물리적 구조이상의 중측적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시각적 변화를 주는 작품을 선보이며 이에 기반하여 키미는 미적관조의 태도로 보다 넓은 의식의 지평에 위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 한다. 무의미한 시간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의미와 중요성을 놓치고, 공감의 시간을 값 없이 보내는 태도를 성찰해야 하듯이, 높은 역량의 작가들을 지나치지 않고 선별하여 작가의 깊이와 실존에 중점을 두는 전시가 되고자 한다.

임시호는 인간의 몸과 심리변화의 상관관계에 주목한다.
긴 호흡으로 뛰는 Runner를 통해 단순한 몸의 움직임이 내적인 세계의 통로임을 발견하고 그 순간의 체험을 포착한다. 외부의 외침이 격해 질수록 내적인 것들은 텅 비어지고 이성과 감각의 진공상태에 이른다. 이러한 발견들은 현실 속 무한함과 미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고 삶에서 잊어버릴 수 있는 깊이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게 한다. ■ 키미아트
김순기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71년 프랑스 정부 초대로 파리 니스로 도불했다. 어린시절부터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가겠다고 키웠던 꿈이 이루어진 때다.1986년 우연히 미국 전위 음악가 존 케이지(1912~1992)를 만나면서 예술 활동이 업그레이드 됐다. 인위적인 행위를 최대한 지양하는 김순기의 작업과 자연 그대로의 소리에 귀를 열게 했던 존 케이지의 예술관이 깊이 공명하면서 비디오와 멀티미디어의 세계를 확장했다. 존 케이지의 소개로 뉴욕에 살던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을 만나 같이 활동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비디오아트를 하는 백남준 영향을 받은 것 아니냐고 하지만, 김순기는 강력하게 저항한다. "백남준때문에 비디오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1971년부터 프랑스 니스와 모나코에서 관객과 실시간 연결되는 비디오와 퍼포먼스 작품을 해왔고, 그런 작업이 이어져 1983년 파리에서 백남준과 퍼포먼스를 펼쳤다. 김순기는 "백남준의 '비디오는 비빔밥', '비디오는 색동'이라는 말을 백남준과 대담하면서 한 말"이라면서 '여자 백남준'이라는 시선을 거부했다.실제로 그를 비디오 아티스트로만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이수정 학예연구사는 "1980년대부터 파리 교외 비엘 메종(Viels-maisons)의 농가를 개조한 작업실에 거주하면서 동·서양의 철학, 시간과 공간 개념에 관한 탐구를 바탕으로 영상, 설치, 드로잉, 회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정형화될 수 없는 예술과 삶의 관계를 고찰해왔다"면서 "프랑스에 살았지만 동양의 전통을 살리고 있는 작가로 평소 작업을 하지 않는 순간이 없을 정도로 예술을 삶에서 녹아내는 작가의 작업을 통해 예술이 매일 각자의 순간을 풍요롭게 만는 삶의 일부임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우연히 만난 큐레이터와의 인연의 고리는 김순기 작업세계와도 맞닿아있다. '도는 똥과 오줌속에도 있다'는 글귀를 써 전시한 그의 작품은 ‘작위’를 지양한다. '게으른 구름'의 시 처럼 '그냥 그것', 사물과 풍경의 원래 모습을 담으려고 했다. 돌멩이에 글씨를 쓰고, 화선지에 붓으로 삐뚤빼툴 쓴 '바보 서예'도 선보인다. 전혀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무용'이야말로 정말로 '유용'하다는 장자 철학이 엿보인다. 전시는 2020년 1월 27일까지.
한편 오는 9월 8일 전시마당에서 무당 김미화, 로봇 영희와 함께 신작 사운드 퍼포먼스를 진행된다. 2019년 현재의 시간과 공간을 고찰한 신작 퍼포먼스 '시간과 공간 2019'를 선보인다. 입력된 명령만 수행하는 로봇과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무당이 등장해 게으르고 심심해하는 로봇 ‘영희’가 시를 읊고 무당 김미화의 굿하는 소리, 전시 마당 내 설치된 다양한 기구들이 내는 소리가 서울관을 점령할 예정이다.https://www.msn.com/2019 Seoul김익현, 임영주, 정서영, 조은영 Gim Ikhyun, IM Youngzoo, Chung Seoyoung, Choey Eun Young Cho
2026.6.24.—8.1.
두산갤러리 DOOSAN Gallery
두산인문극장 기획전 DOOSAN Humanities Theater Special Exhibition
Curated by 장혜정 Hyejung Jang
DOOSAN Humanities Theater Special Exhibition: The Multilingual
지난해에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는 생의 마지막 시기를 보낸 요양병원에서 ‘3개국어 할머니’라는 별칭을 얻었다. 1930년생인 그는 어느 시점부터 조금씩 자신의 현재를 지우고 과거와 가까워져 가더니, 언어와 인지가 유아적 수준에 이르던 어느 날 불현듯 일어, 영어, 한국어를 섞어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할머니의 새 별명 이야기를 엄마에게 전해 들으며 감탄인지 탄식인지 알 수 없는 짧은 숨이 입에서 새어 나왔는데, 그 순간 그때까지 내가 안다고 생각한 나의 할머니는 산산조각 나 공기 중에 흩어졌다.
나는 이 파편들을 주워 담을 수 있을까? 어차피 나를 통해 이해되는 할머니는 여러 굴절과 왜곡을 겪는다. 그러므로 아무리 애를 써도 나에게 기억되는 할머니는 새로운 할머니로 향할 것이다. 이 전시는 삶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나의 할머니와 마찬가지일 모든 개인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기억할 몫을 부여받은 주변인들을 향하는 전시이다. 누구를, 무엇을 떠올리고 어떻게 새길지는 당신의 자유다.
저자도 대상도 없는 조각. 길을 걷다 보면 종종 마주치는 이름 없는 모퉁이 돌처럼, 정서영의 〈떠돌이〉(2022)는 전시장 한복판에 우두커니 있다. 시멘트로 수습하듯 덕지덕지 덧발라진 이 덩어리는 무엇이든 되고 무엇도 아닌, 잠정적인 응결 상태로 있다. 이곳에서 당신이 계속해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떠돌이〉는 아마도 매번 다른 모습일 것이다. 한 사람이 삶을 살아내는 동안 일어나는 숱한 이동과 만남에는 자의와 타의가 하릴없이 뒤섞인다. 그러면서 마주하는 모든 사건과 경험, 정동의 총체인 한 개인은 끝까지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 유동적 초상에 다가가기 위해 우리가 ‘이해’의 방식으로 주로 익숙하게 거쳐온 경로를 이탈하고, 기꺼이 오해를 받아들이며, 그럼에도 훼손되지 않을 본질에 대한 희미한 믿음을 움켜쥔 채 이곳에 있기를 제안한다.
주인 없는 문장. 조은영의 〈I Ordered a New Body and It Never Came〉(2026)은 여러 번의 번역과 재작성을 거치며 타인의 몸을 통과한 변형된 발화다. 한국인 할머니와 그에 못지않게 각별한 관계를 맺은 미국인 할머니와의 대화는 조은영에 의해 한글에서 영어로 다시 한글로 번역되고 낭독되는 과정에서 원본은 소실된다. 하나의 서사로 통일되지 않을 서로 다른 세대와 언어, 인종적 배경과 역사적 조건을 가진 두 여성의 기억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한 사람의 입에서 다른 사람의 귀로 건너가는 동안 문장은 조금씩 닳고, 어긋나고, 뜻밖의 리듬을 얻는다. 누구의 기억이 누구의 문장을 빌려 도착했는지 분간할 수 없는 지점에서, 여러 시간과 화자가 동시에 살아 숨 쉬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미래로 향한다. 〈I Ordered a New Body and It Never Came〉에서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다른 입을 빌려 계속 도착하는 시간이다. 미래시제로 말해지는 사건들은 회상이라기보다 예감처럼 들리고, 기억은 소유가 아니라 경유가 된다. 한 사람의 몸에 새겨졌던 시간이 다른 몸으로 이접되는 동안, 언어는 불완전한 매개로 그 사이를 잇는다.
주워들은 이야기. 언제 어디서부터였는지 알 수 없지만 입안에 남아 계속 불리는 한 유행가의 멜로디처럼, 출처를 알 수 없는 어떤 기억들은 세대를 건너도 여전히 남아있다. 임영주의 〈가쿠메이 鶴鳴〉(2026)는 작가의 고백적 서사를 통해 어떤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 유산이 어떻게 끝끝내 다음 세대를 통해 이어지고 변형되는지 살핀다. 임영주는 자신의 기억에 아스라히 남은 할머니의 학 울음 흉내와 암호 같은 일본어, 그리고 학춤을 추는 어머니의 몸짓과 내밀한 고백을 교차시키며, 한 가족 안에 남겨진 무속의 잔여와 흉내, 전승, 거부와 동경이 뒤엉킨 감각을 불러낸다. 시집간 첫날 마루 커튼 뒤에 숨겨진 신당을 보고 한 달간 밥도 못 먹을 만큼 무속을 무서워했던 스물네 살의 어린 며느리는, 세월이 흐른 뒤 딸의 카메라 앞에서 다시 몸을 움직인다. 무당집은 싫어하면서도 굿 춤을 보며 “나도 할 수 있을 텐데”라고 중얼거리는 어머니의 이중성은, 지워졌다고 믿었던 것이 실은 다른 형식으로 몸에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기록과 흉내, 전통과 잔여, 공포와 친밀감의 경계는 느슨하게 멀어지고 여전히 가깝게 붙어있다. 우리는 뜻을 다 잃고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몸짓과 같이 해독되지 않는 것들을 그대로 품고 살아간다.
옮겨지는 믿음. 1836년부터 통용된 ‘청동기(Bronze Age)’라는 시대 구분은 뒤섞여 발견되는 유물들의 관계 패턴을 읽어내 특정 시대의 경향을 파악하는 방식이다. 이는 과거가 여러 겹으로 뒤섞인 채 미래로 온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한편, 사진이 객관적 기록의 장치로 신뢰되던 시절, 그 믿음은 실물 캐스팅 의혹에서 오귀스트 로댕을 구해냈다—〈청동 시대〉(1877). 그러나 사진은 언제나 어느 것, 어느 때의 부분일 뿐이다. 로댕이 남긴 수천 개의 분리된 신체 조각—아바티(abattis)와 7천 점이 넘는 〈청동 시대〉의 기록 사진은 영영 전체가 되지 못하는 부분들의 새로운 관계도를 상상케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과 믿음을 경유한 김익현의 〈어느 청동기〉(2026)는 미술사적 재배열을 넘어, 역사와 인물을 기억하는 방식이 얼마나 많은 누락과 이데올로기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지 짚어낸다. 그 시선은 식민지 조선과 전후 한국의 동상 건립 문화로 확장되어 한·일의 근현대 동상을 추적하며, 인물 조각이 근대성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기능했음을 환기한다. 정치와 사회적 신념이 바뀔 때마다 시대의 조각은 파괴되거나 이동하고 다시 세워졌다. 어떤 조각은 녹여져 다른 동상이 되기도 하고, 어느 동상의 저자는 다음 세대에 의해 동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결국 시대를 통과해 지금 우리에게 당도한 현재는 여러 번 해체되고 엉키며 다시 옮겨지는 진실, 또는 믿음의 흔적이다.
한 사람, 사건, 시대는 그것을 기억하는 누군가를 기대어 잔류한다. 그러니 우리가 현재라고 믿는 순간은 실상 과거와 미래의 혼재이며, 발화하자마자 사라지는 목소리처럼 이미 과거로서 새로운 지연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왜곡을 받아들이는 것, 더 다양한 감각을 깨우는 것, 그리하여 정답이라고 착각하는 방향을 비껴가는 경로를 상상할 수 있을까? 정서영의 〈무제–트랙2〉(2012/2026)는 길거리의 지각 경험을 언어와 소리로 치환하며, 소음과 발자국 소리가 뒤섞인 청각적 층위 속에서 보지 않고 듣는 감각을 통해 시각적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오디오속 인물이 주택가와 대로를 걸으며 눈에 보이는 것을 즉흥적으로 묘사할 때, 본 것을 말로 옮기는 찰나의 침묵과 생략, 기억의 간섭은 우리가 익숙하게 지나다니던 일상적 풍경을 낯설게 만든다. 시각이 언어로 번역되며 발생하는 어긋남의 틈 사이 사운드와 언어 사이의 역동이 하나의 조각적 사건이 된다. 어긋남은 규정의 실패가 아니라 다른 읽기와 다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틈이 된다. 한 개인이 고정된 하나의 문장 안에 담기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그 중에 변치 않을 것도 있다.
* 나의 엄마의 엄마인 할머니 강성숙은 1930년 북한 함경도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 중 이미 결혼한 언니를 두고 나머지 형제들과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피난와 가정을 꾸렸다. 조금 이르게 남편과 사별 후 홀로 키우던 자녀들이 장성하자, 197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이주한 형제들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가 또 다른 10여년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자녀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돌보며 살았다. 나는 할머니표 삼겹살 샌드위치 맛을 잊지 못한다.
- 장혜정(큐레이터)
작가 소개
김익현(b.1985)은 사진과 영상 매체를 통해 과거-현재라는 시간과 다양한 단위의 얽힘이 만드는 세계를 상상하고 관찰한다. 시청각 랩(2025, 서울), 경기도미술관(2020, 안산), 산수문화(2017, 서울), 공간 지금여기(2016, 서울)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국립현대미술관(2024, 과천), 웨일리아트(2024, 타이베이, 대만) 등에서 개최한 단체전과 제7회 창원조각비엔날레(2024, 창원), 2022 부산비엔날레(2022, 부산),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2016, 서울) 등 국제전에 참여했다.
임영주(b.1982)는 영상, 설치, 퍼포먼스, 출판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미신과 신념, 종교적 믿음이 형성되고 작동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스페이스 제로원(2026, 뉴욕, 미국), 페리지 갤러리(2024, 서울), Hall1(2021, 서울)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국립현대미술관(2025, 서울), 서울시립미술관(2025, 서울), 루드비히 미술관(2023, 코블렌츠, 독일), 아트선재센터(2021, 서울), 타이베이 컨템포러리 아트 센터(2019, 타이베이, 대만) 등에서 개최한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으며, 2025년 올해의 작가상 4인으로 선정되었다.
정서영(b.1964)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사물’의 위상과 관계에 주목하며, 조각의 범주를 확장하고 사물과 세계의 연결 방식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제시해왔다. 개러지 갤러리(2026, 도하, 카타르), 티나킴 갤러리(2024, 뉴욕, 미국), 서울시립미술관(2022, 서울)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제59회 카네기 인터내셔널(2026, 피츠버그, 미국), 제7회 창원조각비엔날레(2024, 창원), 제11회 아시아 퍼시픽 트리엔날레(2024, 브리스번, 호주), 기륭미술관(2024, 기륭, 대만) 등에서 국제적으로 소개되었다.
조은영(b.1985)은 한국과 미국을 기반으로, 언어, 물질, 기억이 서로에게 가하는 압력과 그 상호작용을 다룬다.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2024, 서울), 홀만 아트&미디어 센터(2023, 인클라인 빌리지, 미국), 선뷰 런쳔(2022, 브루클린, 미국)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루이스 홉킨스 언더우드 아트 센터(2023, 러벅, 미국), 퍼스오프 아티스트 콜렉티브(2022, 밀포드, 미국), 폭시 프로덕션(2022, 뉴욕, 미국) 등에서 개최한 단체전에 참여했다.
https://www.doosangallery.com/en/exhibitions/detail/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