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Catalog
Catalog design: Byul.org & Sanghon Kim Photography: Yong kwan Kim & Wolfgang Guenzel
700 copies
88 pages
20x27cm
Publihed by Hermès Korea
Text by
Nikola Dietrich
Concret Graden 시멘트 정원
Sung Won Kim 김성원
정서영 인터뷰
Exhibitions:
On the top of the table, please use ordinary nails with small head.
Do not use screws.
책상 윗면에는 머리가 작은 일반못을 사용하도록 주의하십시오.
나사못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venue: Maison Hermès, Dosan Park 아뜨리에 에르메스
Seoul, S-Korea
date: 29.Mar.-22 May 2007
curated by Sung Won Kim
Leave the campfire there.
FREUDENFEUER EINFACH HINSTELLEN
모닥불을 거기 내려놓으시오
Portikus, Frankfurt am Main, Germany
10 Oct.-11 Nov. 2005
curated by Sunjung Kim
http://www.portikus.de/ArchiveA0137.html
시멘트정원 Zementgarten
관객은 작은 문턱을 넘어 전시장으로 바로 들어간다.
차가운 네온 불빛이 공간의 상황을 외부와 분명히 구분 짓는 분위기 속으로 가라앉게 만든다.
유리로 신축한 패션회사 건물에서, 시멘트 그대로인 바닥에, 천정의 높이는 숨 막힐 듯 낮아 반대편에 있는 출구로 도망치듯 급히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이 공간보다 무엇이 더 비사실적일 수 있을까? 거기, 다른 한 쪽에서 따뜻한 빛이 마주 흘러온다. 이 불가사의한 빛의 존재가 거기 있어서 그 공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정서영은 전시장의 원래 입구 앞에 정사각형의 작은 방을 만들었고 바닥을 시멘트로 몇 센티미터 높여 놓았다. 그 공간의 정 중앙, 입구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같은 시멘트 재료로 형성된, 실물보다 큰 거위 한 마리가 관객과 등지고 서 있다.
거칠게 만들어진 모습을 대하고 조금 놀라면서 이 오브제에 점차 가까이 다가가 보지만, 여기에서 다루어지는 그것이 어떤 만화에서 따온 형상인지, 아니면 어떤 고대 발굴지의 발굴물인지 확실하지 않다.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 거위는 단지 윤곽의 형태로, 정말 볼품없이, 그리고 날개도 없이 무거운 몸통으로 빚어진 것임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받침대가 거친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 새의 발은 그 안으로 사라져 있다.
이 거위는 거위가 갖는 본질적 특징 하나 없이 단지 그 표상으로만 만들어져있다.
그러나 기념비 같은 이 겉모습에서도 거위가 가진 다양한 특성들이 나타난다.
거위는 연결되어 있는 다른 전시공간으로 통하는 문 가까이에 마치 일종의 방패처럼 고집스럽고 거만하게, 그리고 피해갈 수 없게 그렇게 서 있다. 머리는 왼쪽을 향하고 있다. 마치 들어오는 관객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듯, 거의 그렇게.
정서영은 상당히 명확하게, 일상의 세계가 무엇인가 다른 것으로 넘어감을 드러내는 분리된 영역을 만들어냈다.
이 영역은 실제 세계와 정서영의 작업이 만들어낸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출입구처럼 기능한다. 이 영역은 분명한 구분을 만들어내고, 그 구분은 우리가 다음 발걸음으로 완전히 다른 장소에, 변화된 상황 또는 변화된 분위기에 도달할 것임을 암시한다.
Giorgio Agamben의 의미에서 “사물, 장소, 동물, 그리고 인간이 일반적인 관습에서 벗어나 완전히 분리된 다른 영역으로 옮겨지는” 듯 보인다.
“제의(Ritus)를 통해 분리된 것은 제의(Ritus)를 통해 다시 일상의 세계로 되돌려질 수 있다.”
“여기에 일상의 감염이 존재하고, 신성한 것을 분리하여 돌로 만들었던 마법의 힘을 빼앗았다가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되돌려 주는 접촉이 존재한다.”1)
정서영의 공간은 이 같은 갑문 형식을 통과해 가는 제의적 진행에 일치하는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다. 마치 정지의 짧은 순간을, 기억과 망각의 장소를 만들어내기 위해 입김으로 사물을 돌로 만들어버린 것처럼. 새로운 상황과 관계할 수 있도록 예전에 통과해 가 보았던 외부세계를 털어버리는 것으로서. 우리는 이 같은 사고의 세계를 자신의 주변공간과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하는 바로 그 공간에 맡긴다. 이 같은 상태에서 그 공간은 사회와 개인 사이, 사물 세계와 사고 세계 사이의 문지방으로 기능한다.
대상없는 사물화 Gegenstandslose Verdinglichung
그 뒤에 위치한 커다란 공간에서는 여러 가지 대상들, 그리고 서로 잘 맞추어져 있고 서로 자신들의 물질성과 비물질성 속에서 그 근거를 묻고 있는 듯 보이는 광원(光源)을 마주하게 된다. 낮 시간의 리듬에 지배받지 않고 불분명한 흔들림의 상태를 낳는 몽롱한 공간에 우리는 들어와 있다.
바닥에는 어떤 지형의 윤곽을 생각나게 만드는 형태, 알루미늄 틀로 경계를 두르고 잘 배분된 고운 모래가 채워진 한 영역이 길게 뻗어 있다. 마치 장난스럽게 자기 위에 무엇인가를 썼다가 지우고, 다시 쓰라고 부르는 듯한 모래와 같이 이 오브제는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작품의 제목은 <정오에서 자정까지>. 이는 생산력이 가장 큰 하루의 시간을 가리킨다.
물론 모든 생산이 다 유용한 것은 아니다. 이 오브제 또한 무엇인가 과장되고, 그래서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종이에 끄적인 낙서로부터 탄생되었다. 단념해 버림으로써 새로운 형태를 생산해 낸 어떤 생각. 행위 가운데 그 형태를 받아들일 수 있고, 크기와 모양에 있어서 ‘그 밑에 놓여 있는 것’과 관계되는 이러한 은폐의 단순한 형식적 수단은 이 같은 관점에서 그 근원 주제와 분리되어 - 말과 문장으로부터 분리되어 - 기능하며 확정된 형식으로서 독립성을 얻는다. 그런 가운데 채워진 것으로서의 모래는 계속해서 버리고 다시 바꿔 쓸 수 있는 끄적임 자체로 유혹한다. 언젠가 예전에 부정했던 것, 하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기억 속에 붙잡혀 있는 - 그렇게 우리는 흔적을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 어떤 것에 대한 환기만 유지되고 있다. 대상 없이 포기해 버린 것으로서의 어떤 것이 대상 자체가 된다.
빛을 조각하기 Verskulpturierung des Lichts
나란히 위치하면서 그 빛의 힘으로 볼륨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빛 상자들이 전도되어 나타난다. 보관기구로서, 그리고 보통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케이크와 아이스크림 판매에 이용되는 진열장으로서 이 상자들은 친근한 사물들이지만 이것들은 그 실용성에서 벗어나 있다. 불투명한 유리를 통해 비치는 네온 빛은 그 안으로 시선을 끌기 보다는 오브제의 외면과 그 주변을 더욱 강조한다. <아이스크림 냉장고, 케이크 냉장고>는 전시회장의 또 다른 인공적 광원과 관련하여 관찰할 수 있다. 긴 전기선이 공간을 가로지르고, 모든 조명기구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원래 임시조치임을 그대로 드러내며 깔려 있는 전기선은 공간을 분류하는 그림 요소가 되는 동시에 시선을 여러 가지로 변형된 전등으로 이끌려는 목적이 있음을 알려준다.
손전등 두 개가 바닥에 놓여 있다. 이 전등들은 단순하게 벽과 창문을 향하고 있어서 - 이 전등들은 예술적으로 나타나는 사물들의 조명 효과에 이용되는 것이 아니기에 - 빛 자체를 그대로 묘사하기 위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이 전등에서 나오는 미미한 광원은 이미 존재하는 전시장 천정에서 나오는 빛과 다시 합쳐짐으로써 쓸모없는 것이 된다. 이와 더불어 창문을 향하고 있는 손전등은 안으로 비쳐드는 자연광과 빛의 힘을 놓고 겨룬다.
이 같은 빛의 구성 속에서 일상에서 사용되는 물건이 순수한 조명수단으로 변화되거나, 어차피 조명수단으로 사용되는 물건들이 그 기능에 있어서 과장되게 연출되었다.
다른 전기선 하나는 자전거로 이어진다. 이 자전거는 추가로 세워진 벽 앞에 서 있고, 그 벽과 이미 있던 벽 사이에 좁은 통로가 자유롭게 형성된다. 자전거의 전조등에서 나오는 빛은 벽에 만들어진 둥근 구멍을 향한다. 우선, 그 크기에 있어서 자전거 전조등의 원추형 빛에 일치하는 이 구멍은 작품의 요소들인 자전거, 원추형 빛, 구멍, 벽을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로 융합시킨다. 구멍으로 인해 인식할 수 있는 것으로, 그림자가 빛과 만난다. 이 두 가지는 그 본질에 사로잡혀 있다. 정서영은 이 작업으로 그 물질성에 있어서 조각의 차원을 얻은 빛을 제시한다.
자전거를 벽의 건축적 요소와 연결시킴으로써 원추형 빛을 통해 결합되는 사물의 우연한 자연발생적 구성이 생겨난다. 빛은 비밀 수수께끼 알아내기처럼 보이는 유혹적인 놀이를 만들어내지만 결국 빛 자체 이외에 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유용한 공간조명의 기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서로 상이한 빛의 몸체가 과장된 모습으로 보여주는 상태는 그 자체와만 관련되어 있지 않다. 늘 그렇게 연출된 것으로 보이듯 우선 사물을 가시화하고 분위기를 만드는데 기여하는 빛 고유의 특성은 그 상황에서 착각을 하게 만들고 시선을 유도하는 인위적인 연출 매카니즘의 잠재적 힘을 명확하게 지시한다. 그것은 진정한 빛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완전히 밝혀주고 가시성에서 떼어내야 할 것에 그림자를 덮어 주는 힘이다.
시멘트정원 Zementgarten
<1>은 이 전시의 첫 출발점에서 보았던 작업상황과 연결되어 있다. 커다란 시멘트 덩어리에서 자라나온 긴 플라스틱 야자수 잎들은 각기 창문 쪽에 기대있고 바닥에 넓게 늘어져 있으며 전시장의 전체 배열에 저항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 원산지가 어디인지는 상관없이, 전 세계적으로 사무실의 실내장식에 이용되고 있는 야자수 같이 이것은 그 인위성이 강화된 가운데 단지 자연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다. 여기에서는 그것이 살아있는 실내 식물인지 아니면 공장에서 찍어낸 식물인지와는 상관없이 자연모조품의 기능이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지움의 순간을 발견한다. 속담에도 있듯이 모든 것을 양탄자 아래 넣어 버리거나(모든 것을 얼버무린다는 의미 - 역주), 더욱이 모든 것을 시멘트 덩어리 아래 숨겨버리게 되면 그 밑에 놓여있는 것을 더 이상 다시 손댈 수 없게 된다. 부피가 상당히 큰 야자수 잎은 획일화와 망각에 저항하여 굽히지 않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사회적으로 사용하는데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은 나머지 것들에 대한 생각만 살아남아 있다. 벽을 쌓아 막는 방법으로 생산적 이용을 막아서고 있는 쓸모없는 생산품의 가벼운 개입을 위한 수단이 발견된다.
목적을 위한 수단 Mittel zum Zweck
가장 멀리 떨어진 전시 공간에 있는 이 작품은 식탁의 변화를 위한 기술적 지시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자리에서 어떤 물건의 제작 설명을 담고 있는 까다로운 전시회 제목이 생각난다. <책상 윗면에는 머리가 작은 일반못을 사용하도록 주의하십시오. 나사못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일반적인 식탁의 상판은 오른쪽 모서리 일부분이 잘려져 나갔다. 이는 정서영의 요청에 따라 제작자가 임의로 잘라낸 것이다. 낯선 방식으로 아랫면의 식탁 받침대는 절단된 상판의 변화된 윤곽에 따르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비스듬하게 톱질된 절단면 모서리는 가공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이다. 이를 통해 기준은 오히려 지켜진다. 그 구성방식에 대해 더 자세한 근거를 설명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그리고 변화에 의해 이 일용품이 그 이상의 유용성을 갖게 된다거나 세련되게 개선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치수가 명백한 기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 식탁은 원래 가지고 있는 실용성을 야만적으로 강탈당한 듯 보이며 이 같은 주관적인 낯설게 하기의 행위에 따라 예술작품으로서의 <식탁> 이외에는 그 어디에도 명확하게 편입될 수 없는 듯 보인다.
그 공간의 뒤쪽, 고급 마루바닥 위에 커피 얼룩이 크게 퍼져 있다. 관찰자는 우선 가정에서 일어난 실수를 연상하겠지만 이 작업은 놀랍게도 일종의 기호로서 그 가치가 나타나는 예술적 몸짓임이 드러난다. 다른 작품들에선 우연에 맡긴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물질성이 근본적으로 형식을 부여하는 출발점이라면 여기에서는 추측해 보건대 의도하지 않은 순간으로부터 그 윤곽선이 발생한다. 정서영은 <얼룩>이라는 이 작업으로 자신의 작가적 존재를 주제화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작업들은 바로 그 부재성을 통해 두드러진다. 이 작업은 모든 사물 또는 어떤 상황 뒤에는, 표면 뒤로 사라지기는 하지만 책임 있는 누군가가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작가의 정체성이 가진 모든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 그 같은 동일한 몸짓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원할 수 없는 작가의 필연성을 주장하고 있다.”2) Agamben이 몸짓을 “목적 없는 순수한 수단”의 영역으로 표현하고 있듯이3) 여기에서도 원래 탐구의 목적이 아니었던 무엇인가에 대한 우연한 관찰을 나타내는 이 몸짓은 “행복한 우연”을 표현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로써 이 작업은 일시적 몸짓에 부합한다. 이 작업의 근원은 <정오부터 자정까지>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깥 테라스로 나간다. 기존의 난간에 더하여 정사각형 테라스의 윤곽에 상응하는, 파란색 라커가 칠해진 무릎 높이의 울타리가 연결되어 있다. 이 같은 울타리는 통상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을 구분하거나 막아놓는데 사용되지만 작품 <동서남북>에서는 내부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는 입구가 사방에 있음이 보인다. 바퀴가 설치되어 있고, 조각과의 장난스런 상호작용을 가까이 위치시킨 이 구조물 전체는 이음쇠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최소화된 이 작품의 크기는 이 작품이 귀찮은 불청객을 막는데 쓰이는 사실적인 울타리라기 보다는 오히려 모형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증명한다.
전시회 내부에서 보자면, 이 열리고/닫힌 구조물은 이 전시장의 첫 작품과 전시장의 동선 끝 사이에 위치하는 연결부로 기능한다. 이 같은 입장에서 전시의 시작 상황과 마지막 공간을 보자면 비로소 이 전시의 구성이 하나의 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예술가 정서영의 전시회는 이질적인 오브제들의 흔들리지 않는 구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오브제들은 정적인 개별적 그림들로서 그만큼 설득력 있는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 전체 구성에 있어서는 일종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모든 작품은 끊임없이 새롭게 계속되고 중단되는 이야기의 실타래를 찾아내도록 만든다. 이야기는 결코 직선의 형태로 증식되는 법이 없으며 어렵게 전체 그림과 통합될 뿐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은 자주 텍스트를 토대로 하고 있는 정서영의 작업에서 텍스트 내재적인 진술을 찾으려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진술 뒤에 존재하는 주체를 찾을 수 있다고 믿은 그 순간에, 말하자면 그 주체는 이야기된 것이 다른 쪽으로 옮겨지면서 함께 사라져 버린다. “글을 쓸 때 문제되는 것은 주체 자체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고 있는 주체가 끊임없이 사라지는 공간이 열리는 것이다. 작가의 본질적 특징은 작가 자신의 부재성이라는 특성에 있다.”4) 일상적인 관용구, 기술적 지시, 부차적인 것을 드러내는 몸짓, 그리고 개개의 말들은 그림으로 상징화되며 단순한 시각화의 기능 없이 3차원적 관찰을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사물의 구상성은 여러 의미차원들 사이의 상황을 제공하는 공간을 점유한다. 사물을 그 사물의 실용성에서 완전히 분리시키거나, 반대로 무엇인가 다른 것을 위한 알레고리 수단으로 사물을 끼워 넣는 대신, 사물은 오히려 여러 가지 변화 가능한 인식의 입장을 필수적으로 만드는 하나의 형식인 것이다.
Nikola Dietr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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