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ng Seoyoung solo show
Artsonje Center
Seoul, Korea
17.Mar.-14 May 2000
Lookout, 1999, wood, 210 x 120 x 88 cm, Collection of Art Sonje Center.
Lookout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representative works of the artist’s practice, which consistently formulates new ways of perceiving objects and embodies them in a sculptural language. Beginning with a fingernail-sized image of a lookout in a postcard from her friend’s overseas trip, the artist asked how she could transform this tiny image of an object into a real experience, creating a bizarre situation with its odd scale, which is not suitable for climbing and looking away. It shows her artistic attitude that maintains the distance to an object in order to break the accustomed epistemology and explore the object.
전망대; 정서영의 사물
“이 사물들이란 이제는 주인공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의 막연한 반영이 아닐 것이고 주인공의 고민의 이미지도 아닐 것이며 그의 욕망의 그림자도 아닐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물들이 또다시 순간적으로 인간의 열정에 지주로 사용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단지 일시적으로 그럴 따름일 것이다. 그리고 사물들은 그것이 인간에게 어느 정도 까지 낯선 상태로 남아 있는가를 보다 잘 보여주기 위해서 겉으로만 - 조롱하는 것처럼 - 여러 가지 의미들의 압박을 받아들일 것이다.”
- 알랭 로브그리예 Alain Robbe-Grillet -
사물성
[잘/못 볼만한 조각]의 이중 이미지는 친숙한 것이 낯선 것으로, 또는 그 반대로 아주 쉽사리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작품처럼, 정서영 작품들은 친숙하면서 낯설다. 그러나 이것은 게으른 인식의 습관을 들깨우기 위한 충격이나, 작품과의 비평적인 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단절, 혹은 체험의 순수성을 옹호하는 그간의 문학 예술의 방법들과 약간씩 결을 달리한다. 그녀의 작품들은 그렇게 눈에 띄게 쇼크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치 충격이 어떻게든 이미 흡수되고 난 후의 ‘공간-심리적’인 상황에 관객을 ‘내던져 버린다’.
정서영의 작업이 친숙한 것은, 그녀의 작업이 가구처럼 사람의 몸과 어떤 기능적 교환을 응용하거나 참조하여 디자인되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이 작품들이 모방하는 것은, 사물 자체라기보다는 모든 사물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기능 또는 신체와 인접한 관계이다. 카펫이나 모노륨은 바닥재로서의 기능을, 전망대는 전망하는 기능을, 꽃은 아름다운 장식이라는 기능 이외에 특별히 다른 것을 모방하지 않는다. 또 이러한 사물들 자체가 군대의 내무반 식기들처럼 매우 ‘기능-동일적’이다. 그것은 [고무줄 달린 조각]에 손잡이처럼 달린 고무줄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구식 전화기의 다이얼이나 자전거 바퀴처럼 물건의 기능이 과시적인 화려함을 버린 상태이다. 이것은 정서영 작품의 ‘익숙한 측면’을 이룬다.
그러나 방안에 물건은 비스듬하게 놓여있거나, 쓰러져 있거나, 기대어 있어서 사물은 우리에게 대항한다. 물건과 그것에 잇대어 있는 공간 사이의 틈에서 물건들이 비로소 효과적으로 돌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간감의 사각지대를 재발견하는 것, [조각적 신부]나 [꽃병에, 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 일탈한 각도들은, 정서영 작품의 ‘낯선 측면’을 이룬다. 최근 작업에서 이 이물성은, 주로 작품 크기비례의 재배열이나 안팎의 배반, 시선의 불편함과 같은 보다 복합적인 장치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전망대]는 미니어쳐와 실제 사이에서 애매하게 맴돈다. 안에 있어야 마땅할 것([꽃])이 밖에 나와 있는 듯 하며, 밖에 있어서 보아야 할 것([전망대])이 안에 들어와 보여져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오히려 특정한 시공간 속에 고립무원한 사물이 드러남과 동시에 우리는, ‘질서’라는 것의 어떤 내적인 불안을 체험한다.
그러나 이러한 익숙함과 낯설음의 변증법이 우리를 새로움에 대한 흥분으로 이끄는 것은 여전히 아니다. 만약 이 물건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면, 아마도 이것은 옛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놀랄 것 같지만 실은 일말의 진정한 놀라움도 일어나지 않는 상황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놀랄 것이 없는 결과에 대한 선선하고도 훈련된 승인 - ‘권태’라는 저 흥미로운 ‘자본주의적’ 감정 때문일 것이다. 작품 [-어]에서처럼, 대상(이 경우에는 문자)의 기호화와 미화는 오히려 반대로 사물이나 재료, 혹은 제작방법의 평범성을 그 이상의 숭고한 상태나 비범한 계기로 끌고 가지 않는 장치들이다. 그것은 그렇게 위로 올라가기보다는 밑으로 내려간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언 듯 우아한 미적 대상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시종 물건됨의 윤리랄까, 물건으로서의 자격을 강조한다. 애초에 그것들은 물건이었으며 마지막까지도 물건이다.
우리는 이것을 정서영이 최근에 사용한 주요 재료들을 목록화함으로서도 그려볼 수 있다.
1) 매직펜 2) 나무 3) 카펫 4) 스치로폴 덩어리 5) 시멘트
6) ‘장판지 모노륨’ 7) 유리 8) 스폰지 9) 양철판
이 재료들에 ‘의해 사용된’ 작품들은 어떤 가공에 의해서 자신의 성질을 인간화 혹은 자연화하는 조각의 일반적인 경향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마치 이러한 재료가 어떤 공업적인 중요성을 지니는지 보여주기 위한 교육적인 박람회에 전시된 것처럼, 어떤 사용가치로부터도 자주적인 것으로 보인다. 작가에 의해 스치로폴은 벗겨진다. 더구나 이들 대개는 평소 우리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디자인된 실내환경의 건축적인 부속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정서영의 작품 속에서 누리는 주인공의 지위는 오히려 일정한 생경함과 외상(trauma)적인 체험을 동반한다. 이들은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선택되며, 작품 속에서도 자신의 구조적인 필요 기능 이외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도록 원래 사물의 위치에 되돌려 놓는 방식으로 애용된다.1) [전망대]는 그 대표적인 작업이다.
그런 면에서, 정서영의 특히 지금 작품들은(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지만), 물건을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소유한 사람에 의해 그것에 역사와 가치가 부여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마치 가구와 같다. 그러니까 현대의 가구, 숫기 없이도 다가갈 수 있고, 특별한 사물로서의 권위나 내역, 혹은 감정적인 가치나 회고적 밀도에 거리를 유지한 채, 인간의 효율적인 활동 속에 대부분 포섭되어 있는 그런 가구 말이다.2) 물론 정서영의 작품들이 ‘킴스 클럽’의 상품들처럼 비밀이라고는 전혀 없이 차갑게 노출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다. 작품들은 기술과 노고의 낭비라고는 없이 만들어진 대단히 기능축약적인 사물로 보이다가도, 때로는 심오한 알레고리로 보이기도하고, ‘상징의 숲’ 속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나친 범용성은 역설적인 특수성을 낳기도 하며,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다가도 불현듯 ‘뭔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관객의 의미에 대한 갈구에, 작품이 냉정하게 뒤돌아서 있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이 물건들을 처음 대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별다른 해답을 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생겨난다.
[전망대]가 거기 놓여져 있는 전망대와 같이 생긴 물건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제는 그것이 전망대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왜 하필이면?’ 하고 질문하는 상황에 있다. 관객과 작품 사이에 미리 체결되어있는 약속, 혹은 필연성의 상실이야말로, 이 사물의 진정한 의미, ‘의미’가 아니라면 상황의 ‘야기’이다. 이를테면 나는 전시장을 방황하면서 작품의 ‘해석’이라는 헛된 자문자답을 언제까지 되풀이할 것인가를 은근히 계산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의미가 나로부터 떠나기 전에 언어의 갈고리를 깊숙이 걸어두어야 할 것만 같다. 아마도 그것은 범죄현장의 물건들처럼 그저 물건들일 뿐이지만, 아직은 그들의 내역에 대해 무지에 처해있는 상태가 불러오는 매력과도 같은 것일 테다. 진상이 밝혀진다는 것이 그 물건으로부터 신비감이나 호기심을 앗아가듯이,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만큼 그것들은 물건으로 남아있다. 탐정소설에서 사건의 해결이 아무 가치가 없듯이, 그것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물로 남아있는 시간만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들은 다른 무엇도 아닌 물건으로서 명백하면서, 어떻게 깊은 의미의 체계, 어떤 알레고리처럼 보일 수 있을까? 왜 그들은 (의미로서) 애매한가? 왜 사물로서는 벗겨져 있는데 의미로서는 베일에 감싸져 있을까?3)
‘꽃!’
정서영 작업의 사물성(혹은 객관성)과 분위기(혹은 주관성)는 그녀가 언어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앞에서의 설명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정서영은 언어에 실체를 부여하는 언어의 객체화와 사물화를 주요 방법으로 삼고 있다. [꽃]의 경우에서처럼, 여기서 모방되고 있는 것은 실제 대상으로서의 살아있는 꽃이기보다는, ‘꽃’이라는 단어이다. 꽃이 소리와 의미를 획득하는 순간, 즉 소쉬르에 따라 말하자면 꽃이 추상화된 언어체계의 일부로 귀속되자마자 ‘꽃’은 그 생생한 구체성을 잃어버릴텐데, 정서영이 착안하는 지점이 바로 이 언어적 모방에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본래 갖고 있는 생생한 구체성의 죽음과 그 체계로부터 벗어나려는 ‘말(speech)’의 주관적이고 창조적인 능력, 혹은 신비이다.
그녀가 쓴 것처럼, ‘거리의 간판들 중 별로 크지 않아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꽃이라는 글자를 간단하게, 꽉 차게 그리고 대부분 붉은 색으로 쓴 네모난 종류의 것이다. 그 간판을 보면 누군가가 느닷없이 내 얼굴 정면에 대고 ‘꽃’이라고 명확하게 발음해놓고는 획 돌아서서 가버리는 것 같다. 그런 다음에는 어안이 벙벙’하다.4)
물론 이러한 이야기가, 정서영의 작업이 실제의 대상, 자연이나 인간을 모방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이러한 모방은 한자(漢字)처럼 대상을 고도로 추상화하여 닮고있지만 그러한 유사성은 언어가 사용되는 소통의 실질적 국면에서는 멀리 사라져 있기 때문에, 어느 인식론적 순간 이후부터는 그러한 지시의 행동 자체가 하나의 공허한 판토마임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정서영이 재미나게 진술한 ‘꽃’의 에피소드에서 꽃가게에 진열되어있을 살아있는 장미나 국화들은 유명무실한 것이다. 이 유명론적인 태도가 이 작가의 전작(全作)을 지배하는데, 바로 이것이 정서영의 작업을 익숙한 것과 생경한 것으로 끊임없이 교체하도록 만드는데 일조한다. 그것은 이미테이션들, 무대의 소품들이 주는 이중성을 더 극단적으로, 혹은 시적인 건너뜀을 통해 벌여 놓은 것과도 같다.
아동극의 배우가 머리에 뒤집어쓴 봉제 토끼나 전화선이 연결되어있지 않은 무대 위의 전화기처럼, 그것들이 극 속에서 명확한 소품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단일한 대상을 지시하면 할 수록, 그들은 오직 전화기나 토끼가 아닌 것들, 그 물건들 자신에 속한 것들만을 호출한다. 우리는 정서영의 작품 [카펫]에서, 바닥에 깔리기 위해 이토록 대단히 육중해진 ‘카페트’가, 저 울긋불긋한 무늬와 찬란한 표면을 수단으로(사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언어로서의) ‘카펫’이 되려고 애쓰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카펫, 전망대, 선인장 등은 목적과의 내적인 조응을 상실한 어떤 수단들 자체이며 형태, 면적과 위치들로 이루어진 어떤 의미의 덫들이다. 이들은 의미가 없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아니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의미라는 화물을 사물로부터 땅위로 내리듯이, 실체의 무상성 속으로 걷게한다. 수수께끼의 진정한 가치는 엉뚱한 대답에 있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소설가보다는 시인의 태도에 속한다. 사르트르가 이미 50여년 전에 통쾌하게 말했던 바, ‘시는 전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오히려 시는 말에 「봉사」한다’ 물론, ‘사실 말에다 언어적 통일성을 줄 수 있는 것은 의미밖에 없다. 의미가 없는 말은 음이나 펜의 흔적으로 산산이 흩어지고 말 것이다. 다만 시인에게는 의미까지도 자연적인 것이 된다. ..... 「의미」는 얼굴표정이나 음이나, 색채의 슬픈 또는 쾌활한 느낌과 비슷한 각 용어의 고유한 영역이다. 그것은 말속에 흘러들고, 말의 음향 또는 그 눈에 보이는 외관에 흡수되며, 두터워지고, 격이 떨어져 그것 역시 창조되지 않은 영원한 「사물」이 되는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언어는 외부세계의 한 구조물이다.’5) 간단히 말해서, 시인에게 의미 있는 언어란 일종의 사물에 가까운 것이다.
디스플레이(display)
만약 사물들이 그 자체 속에 절대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선택된 물건들의 임의성과, 공간 속에서의 배치이다. 정서영의 최근 작업은 특히 이러한 물건들의 근원 없는 임의성, 실존주의자들의 용어를 따르자면 그들과의 ‘우연한 대면’, 혹은 부조리한 분위기로 인도한다.6) 이 작가에게 전시회는 어떤 부조리한 인테리어 디자인이다. 여기서 인테리어 디자인이라는 것은, 물론 장식, 상징, 효용을 일사불란한 계획 속에서 충족시킨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물건들의 ‘디스플레이’라는 인테리어 디자인의 빙점(氷點)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이다. 그것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사물들이란 정서영의 작업처럼, 서로 결합하여 ‘어울린다’든지 하는 어떤 의미체계를 만들어 내기에는 처음부터 너무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기보다는, 개별들의 침묵시위 속에 나란히 공존한다. 그런데도 작가는 ‘작품들이 설치되는 것이 아니라, 설치되는 것이 작품’이라는, 사람들이 잊고 있는 설치미술 특유의 긴장을 놓치지 않는 것 같다.7) 이들은 삼류 그룹전에 배열된 작품들처럼 즉자적으로 연립하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색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일종의 ‘대자적 공존’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공존의 이유를 오히려 되묻고 있다. 사실 어떤 분위기 이외에 정서영의 물건들에서 일관된 의미체계나 주제의 연관을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개별들의 공존 이외에 디스플레이란 허구로 드러나며, 작품들간의 연관성이나 결합은 일종의 인위적인 제스츄어가 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서영의 비교적 예전 작업의 한 예를 훑어보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이러한 예를 통해 최근에 가까워질수록 아래와 같은 특징들이 훨씬 정제되고 강력해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수십개의 그림과 몇 개의 조각으로 만든 일]에서 드로잉, 조각 등 낱개의 ‘작품’이 쓰이는 방식은 이러한 부조리한 인테리어 디자인의 성격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제목이 이미 지시해놓고 있듯이, 이 공간은 드로잉이나 조각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장이라기보다 액자가 걸려있고 소품이 전시된 현실의 방에 가깝다. 전시장과 생활공간의 오버-랩은, 작품들이 어떤 메시지의 원칙에 의해 배치되어있기 보다는 어느 정도 장식적인 배려나 관습을 ‘닮아’ 놓여져 있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즉 여기서 모방된 대상은 생활공간 자체가 아니라 ‘디스플레이’ 이다. 이 공간에서 작품들은 전시장에서처럼 각각 독립되어 있는가하면, 다른 한편으로 작품은 소품이나 가구의 지위로 떨어져(실은, 제 위치를 찾아) 하나의 통합된 공간으로서의 방안에 놓여있다. 이렇게 해서 마치 우리가 생활하는 집의 방안이 각자에게 전시장의 기능을 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듯이, 전시장이 방으로 전환되는 것 역시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미술관의 이데올로기적 문지방만 없다면, 사실 전시장과 방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공간 속에 놓여진 물건들이다.
사물들이 모인 결과(디스플레이)는 결국 하나의 ‘분위기’이다. [수십개의 그림과...]보다 이후 작업인 금호미술관의 [유령 불 파도]의 설치는 더욱 그렇고, 선재 출품작은 이러한 측면을 더 끌고 나갔다. 정확히 말하면 정서영의 사물들은 ‘분위기 메이커’이며, 그것이 원래 사물들의 공약수인 것처럼 나타난다. 그것은 사물들로부터 나오는 힘이지만, 동시에 유령이나 불처럼 사물 자체가 갖고 있는 사물의 베일처럼 보인다.
분위기는 한편으로 대상을 신비화하기 쉽다는 문제를 언제나 안고 있지만, 그 사물들이 있는 세계가 애매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에는 적절하다. 왜냐하면 ‘분위기’야말로 우리가 사물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의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정서영의 사물들이 모호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서영이 이 작업을 통해 ‘무엇이든’ 분위기를 풍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데 있다. 그러나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하며 특히 미술제도의 영악함에는 가속도가 붙는 법이다.
정서영의 무덤덤한 사물들이 사물의 평범성과 실체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작업들’은 그것이 뭔지 모르겠다는 이유 때문에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는 정서영 작업의 고유한 모순으로, 앞서 말한 사물과 의미 사이의 공백과 상응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정서영의 작업이 모이면 ‘흔히 말해 예술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왜냐하면 예술은 뭔지 모르겠는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업들은 예술의 코드들은 끊임없이 소거해나가 손쉬운 신비화를 예방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그리고 미술관이라는 정체불명의 공간에서 어느 정도까지 신비화를 넘어설 수 있는지는 알기 어렵다. 물론, 그것은 작가보다는 제도가 수고해야할 몫이며, 그렇게 물을 때에만 문제될 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질문을 좀 더 정확하게 하자면, 이 사물들은 과연 어디까지 제도로서의 미술을 난처하게 할 수 있을까?
의미의 압박
‘의미의 베일’, 혹은 분위기의 이중성에 관해 더 나아가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서영의 작업에서 의미는 덫과 같은 것이다. 글 머리에 인용한 로브그리에를 따라 말하자면, 정서영의 물건들은 의미의 압박을 받아들이는 체할 뿐으로 보인다.
실제로 우리는 ‘누보 로망’에서 소설가가 보는 세계, 소위 ‘주관적 객관주의’의 세계와 정서영의 어법이 서로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사물을 마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처럼 기술하지만, 실은 그러한 기술이 사물과 세계에 대한 주관에서 나온 것일 뿐이라는 하나의 원칙을 공유한다는 점에서이다. 그러한 글쓰기는, 주관(작중인물, 작가)이 사물이나 세계에 투사되어 대상을 인간주의적으로 정복하거나 세계를 세계관의 통합된 질서 아래 도구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은 사물이고, 인간은 인간일 뿐인’ 상태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어야만 한다. 인간의 시선에 의해 세계는 남김없이 묘사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미지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세계는 언제나 애매하다. 따라서 애매함은 심리적이거나 논리적인 혼란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명석함이나 진실의 수준을 획득하며, 특히 시간이나 인식의 변화에 따라 모든 것이 잠정적인 의미만을 갖고 있는 상태를 표현한다. 기술(記述)된 세계는 메마른 객관성을 띠고 있어 보이지만 이는 상황과 기억의 변형이나 결핍에 따라 그 때 그 때 달라지는 사물의 유약한 정체성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8)
애매함은, 무지의 결과처럼 능력의 부족에 기인하여 결국 대상을 알게됨으로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대상 뒤에 숨어있는 알기 어려운 의미의 이면을 갖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것은 세계와 나 사이에 있을 수밖에 없는 거리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적극적이고도 치밀하게 강구되는-판명함에 대한 휴머니즘적 열정의 부재를 증명하는-모호함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회 전체의 지도이자 전시개념의 다이아그램 격인 매직펜 드로잉 [무제]에서 확인되는 바, 작가는 ‘무관심’하게 그려진 선들을 통해 사전의 도판처럼 경제적이고 설명적인 단순성에 의해서 대상을 명기하지만, 그들은 ‘틀린’ 구도, 크기, 배열 등을 통해 우리의 기억이 대상을 선택하고 배치하듯이 매우 임의적이고 ‘간접적인’ 상태로만 그려져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서영은 알레고리나 상징을 사물에게 다만 일시적으로만, 즉 금방 소모될 수 있고 끊임없이 바뀔 수 있도록 부여할 뿐(즉 ‘의미의 압박’으로)이며, 주관(작가나 관객)은 사물과, 작품은 그것이 호출하는 연상대와, 현실적인 것은 상상적인 것과 만나거나 중첩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겉돌도록 되어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물이 사물로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맞지 않는 병과 뚜껑은 그들 사이뿐만 아니라, 우리로부터도 그 사물을 격리시킨다.
이러한 방법은 현대적인 체험, 특히 덧없는 일상의 리얼리티를 보장해준다. 탑처럼 말려올라간 카펫은 변두리 나이트클럽의 바니타스(vanitas)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러한 상상은 잠정적, 자의적일 뿐(정확한 약속에 기초해있지 않다는 의미에서)이고, 그것은 그저 나선형으로 말려 올라간 카펫 이상으로 볼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렇게 됨으로써 사물은 고유의 무상함을 드러낸다. 그것은 권태의 미덕이다. ‘권태는 생활의 행위 끝에 오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의 운동을 시작하게 한다.’9) 그리고 ‘사물의 궁극 목적은 길을 가로막아서 사람을 그 자신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10)
결론 대신에
예술제도 속의 물건과 생활 속의 물건이 그 위상을 교환함으로서 갖는 폭로적인 가치는 레디메이드 미술(ready-made art) 이래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극 사이의 도저히 있을 수 없었을 것만 같아 보였던 교환을 레디메이드가 성취했던 것과는 달리, 정서영은 예술과 현실의 접점이 불분명한 접경에서 예술에 생활세계를 도입한다. 게다가 언제부터인가 기성품이야말로 뭔가 심오한 정신성의 담지체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에, 선택된 물질을 기술적인 묘기로 가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것은 더 이상 낯익은 미술사적 폭로가 아닌 대신에, 오히려 그러한 전복의 메카니즘과는 전혀 별개의 회로를 선택하는 것이다. 제도의 영역 밖에서, 작품들은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아파트나 가판대와 제도적으로나 문맥적으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이 세계의 가구들이다. 그 대신에 세계에 대한 비판이 실상은 모든 개인들의 생활 속에서, 수시로 각자에게 일어나는, 각자의 의문과 책임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성공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이 더 근본적인 대안일지 모른다.
따라서 사물들은 우리의 ‘저편’에서 어떤 드라마를 연출하지 않는다. 더구나 드라마가 자율적인 가치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언쟁들이나 아이디어상품 개발처럼 미술사의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 작업과는 더욱 무관한 일이다. 반면에 어떤 인식의 보편적인 확장, 과학으로 대표되는 인식의 영웅성도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더 현실적인 것인지 모른다. 전반적으로, 정서영의 작업은 지금의 한국에서 (그리고 아마도 여성으로서), 주체의 불안과 불확실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
이것은 현대생활의 폭력에 대한 실존적인 ‘우려’와 자구책에 대한 평가, 특히 이 몹쓸 나라에서의 그것에 대한 평가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동시대 한국의 조각에서 정서영의 자리를 가늠케 한다. 이에 관하여 자세하게 쓸 수는 없었지만, 한국의 ‘서양조각’이 어떻게 전개되어왔는가를 살펴본다면 어렵지 않게 부각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다.
한국의 현대 조각의 분야에서 물신주의는 강력하고 전반적인 경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육중하고 강한 사물에 대한 허기 속에는 명확한 주체, 종교적이고 대리적이기는 하지만 대상에 동일시된 자신감 있는 주체들이 있다. 그리고 한국의 조각이란 것은 대체로, 모든 대형건물에 법적인 강제로 작품을 설치해야하는 나라의 그것답게, 아마도 이러한 사회전체의 남근성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정서영의 조각을 광화문을 내려다보는 이순신 상과 비교하는 것은 너무 단순해진 대비이다. 이러한 비교는, 이러한 올려다 봐야하는 조각이 사람과 그 자신(사물) 사이의 딜레마를 전혀 이해하지도 눈치채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을 때에만 가치 있는 것이다.
글: 박찬경
2000
Lookout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representative works of the artist’s practice, which consistently formulates new ways of perceiving objects and embodies them in a sculptural language. Beginning with a fingernail-sized image of a lookout in a postcard from her friend’s overseas trip, the artist asked how she could transform this tiny image of an object into a real experience, creating a bizarre situation with its odd scale, which is not suitable for climbing and looking away. It shows her artistic attitude that maintains the distance to an object in order to break the accustomed epistemology and explore the object.
전망대; 정서영의 사물
“이 사물들이란 이제는 주인공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의 막연한 반영이 아닐 것이고 주인공의 고민의 이미지도 아닐 것이며 그의 욕망의 그림자도 아닐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물들이 또다시 순간적으로 인간의 열정에 지주로 사용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단지 일시적으로 그럴 따름일 것이다. 그리고 사물들은 그것이 인간에게 어느 정도 까지 낯선 상태로 남아 있는가를 보다 잘 보여주기 위해서 겉으로만 - 조롱하는 것처럼 - 여러 가지 의미들의 압박을 받아들일 것이다.”
- 알랭 로브그리예 Alain Robbe-Grillet -
사물성
[잘/못 볼만한 조각]의 이중 이미지는 친숙한 것이 낯선 것으로, 또는 그 반대로 아주 쉽사리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작품처럼, 정서영 작품들은 친숙하면서 낯설다. 그러나 이것은 게으른 인식의 습관을 들깨우기 위한 충격이나, 작품과의 비평적인 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단절, 혹은 체험의 순수성을 옹호하는 그간의 문학 예술의 방법들과 약간씩 결을 달리한다. 그녀의 작품들은 그렇게 눈에 띄게 쇼크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치 충격이 어떻게든 이미 흡수되고 난 후의 ‘공간-심리적’인 상황에 관객을 ‘내던져 버린다’.
정서영의 작업이 친숙한 것은, 그녀의 작업이 가구처럼 사람의 몸과 어떤 기능적 교환을 응용하거나 참조하여 디자인되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이 작품들이 모방하는 것은, 사물 자체라기보다는 모든 사물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기능 또는 신체와 인접한 관계이다. 카펫이나 모노륨은 바닥재로서의 기능을, 전망대는 전망하는 기능을, 꽃은 아름다운 장식이라는 기능 이외에 특별히 다른 것을 모방하지 않는다. 또 이러한 사물들 자체가 군대의 내무반 식기들처럼 매우 ‘기능-동일적’이다. 그것은 [고무줄 달린 조각]에 손잡이처럼 달린 고무줄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구식 전화기의 다이얼이나 자전거 바퀴처럼 물건의 기능이 과시적인 화려함을 버린 상태이다. 이것은 정서영 작품의 ‘익숙한 측면’을 이룬다.
그러나 방안에 물건은 비스듬하게 놓여있거나, 쓰러져 있거나, 기대어 있어서 사물은 우리에게 대항한다. 물건과 그것에 잇대어 있는 공간 사이의 틈에서 물건들이 비로소 효과적으로 돌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간감의 사각지대를 재발견하는 것, [조각적 신부]나 [꽃병에, 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 일탈한 각도들은, 정서영 작품의 ‘낯선 측면’을 이룬다. 최근 작업에서 이 이물성은, 주로 작품 크기비례의 재배열이나 안팎의 배반, 시선의 불편함과 같은 보다 복합적인 장치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전망대]는 미니어쳐와 실제 사이에서 애매하게 맴돈다. 안에 있어야 마땅할 것([꽃])이 밖에 나와 있는 듯 하며, 밖에 있어서 보아야 할 것([전망대])이 안에 들어와 보여져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오히려 특정한 시공간 속에 고립무원한 사물이 드러남과 동시에 우리는, ‘질서’라는 것의 어떤 내적인 불안을 체험한다.
그러나 이러한 익숙함과 낯설음의 변증법이 우리를 새로움에 대한 흥분으로 이끄는 것은 여전히 아니다. 만약 이 물건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면, 아마도 이것은 옛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놀랄 것 같지만 실은 일말의 진정한 놀라움도 일어나지 않는 상황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놀랄 것이 없는 결과에 대한 선선하고도 훈련된 승인 - ‘권태’라는 저 흥미로운 ‘자본주의적’ 감정 때문일 것이다. 작품 [-어]에서처럼, 대상(이 경우에는 문자)의 기호화와 미화는 오히려 반대로 사물이나 재료, 혹은 제작방법의 평범성을 그 이상의 숭고한 상태나 비범한 계기로 끌고 가지 않는 장치들이다. 그것은 그렇게 위로 올라가기보다는 밑으로 내려간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언 듯 우아한 미적 대상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시종 물건됨의 윤리랄까, 물건으로서의 자격을 강조한다. 애초에 그것들은 물건이었으며 마지막까지도 물건이다.
우리는 이것을 정서영이 최근에 사용한 주요 재료들을 목록화함으로서도 그려볼 수 있다.
1) 매직펜 2) 나무 3) 카펫 4) 스치로폴 덩어리 5) 시멘트
6) ‘장판지 모노륨’ 7) 유리 8) 스폰지 9) 양철판
이 재료들에 ‘의해 사용된’ 작품들은 어떤 가공에 의해서 자신의 성질을 인간화 혹은 자연화하는 조각의 일반적인 경향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마치 이러한 재료가 어떤 공업적인 중요성을 지니는지 보여주기 위한 교육적인 박람회에 전시된 것처럼, 어떤 사용가치로부터도 자주적인 것으로 보인다. 작가에 의해 스치로폴은 벗겨진다. 더구나 이들 대개는 평소 우리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디자인된 실내환경의 건축적인 부속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정서영의 작품 속에서 누리는 주인공의 지위는 오히려 일정한 생경함과 외상(trauma)적인 체험을 동반한다. 이들은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선택되며, 작품 속에서도 자신의 구조적인 필요 기능 이외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도록 원래 사물의 위치에 되돌려 놓는 방식으로 애용된다.1) [전망대]는 그 대표적인 작업이다.
그런 면에서, 정서영의 특히 지금 작품들은(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지만), 물건을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소유한 사람에 의해 그것에 역사와 가치가 부여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마치 가구와 같다. 그러니까 현대의 가구, 숫기 없이도 다가갈 수 있고, 특별한 사물로서의 권위나 내역, 혹은 감정적인 가치나 회고적 밀도에 거리를 유지한 채, 인간의 효율적인 활동 속에 대부분 포섭되어 있는 그런 가구 말이다.2) 물론 정서영의 작품들이 ‘킴스 클럽’의 상품들처럼 비밀이라고는 전혀 없이 차갑게 노출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다. 작품들은 기술과 노고의 낭비라고는 없이 만들어진 대단히 기능축약적인 사물로 보이다가도, 때로는 심오한 알레고리로 보이기도하고, ‘상징의 숲’ 속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나친 범용성은 역설적인 특수성을 낳기도 하며,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다가도 불현듯 ‘뭔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관객의 의미에 대한 갈구에, 작품이 냉정하게 뒤돌아서 있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이 물건들을 처음 대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별다른 해답을 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생겨난다.
[전망대]가 거기 놓여져 있는 전망대와 같이 생긴 물건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제는 그것이 전망대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왜 하필이면?’ 하고 질문하는 상황에 있다. 관객과 작품 사이에 미리 체결되어있는 약속, 혹은 필연성의 상실이야말로, 이 사물의 진정한 의미, ‘의미’가 아니라면 상황의 ‘야기’이다. 이를테면 나는 전시장을 방황하면서 작품의 ‘해석’이라는 헛된 자문자답을 언제까지 되풀이할 것인가를 은근히 계산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의미가 나로부터 떠나기 전에 언어의 갈고리를 깊숙이 걸어두어야 할 것만 같다. 아마도 그것은 범죄현장의 물건들처럼 그저 물건들일 뿐이지만, 아직은 그들의 내역에 대해 무지에 처해있는 상태가 불러오는 매력과도 같은 것일 테다. 진상이 밝혀진다는 것이 그 물건으로부터 신비감이나 호기심을 앗아가듯이,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만큼 그것들은 물건으로 남아있다. 탐정소설에서 사건의 해결이 아무 가치가 없듯이, 그것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물로 남아있는 시간만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들은 다른 무엇도 아닌 물건으로서 명백하면서, 어떻게 깊은 의미의 체계, 어떤 알레고리처럼 보일 수 있을까? 왜 그들은 (의미로서) 애매한가? 왜 사물로서는 벗겨져 있는데 의미로서는 베일에 감싸져 있을까?3)
‘꽃!’
정서영 작업의 사물성(혹은 객관성)과 분위기(혹은 주관성)는 그녀가 언어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앞에서의 설명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정서영은 언어에 실체를 부여하는 언어의 객체화와 사물화를 주요 방법으로 삼고 있다. [꽃]의 경우에서처럼, 여기서 모방되고 있는 것은 실제 대상으로서의 살아있는 꽃이기보다는, ‘꽃’이라는 단어이다. 꽃이 소리와 의미를 획득하는 순간, 즉 소쉬르에 따라 말하자면 꽃이 추상화된 언어체계의 일부로 귀속되자마자 ‘꽃’은 그 생생한 구체성을 잃어버릴텐데, 정서영이 착안하는 지점이 바로 이 언어적 모방에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본래 갖고 있는 생생한 구체성의 죽음과 그 체계로부터 벗어나려는 ‘말(speech)’의 주관적이고 창조적인 능력, 혹은 신비이다.
그녀가 쓴 것처럼, ‘거리의 간판들 중 별로 크지 않아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꽃이라는 글자를 간단하게, 꽉 차게 그리고 대부분 붉은 색으로 쓴 네모난 종류의 것이다. 그 간판을 보면 누군가가 느닷없이 내 얼굴 정면에 대고 ‘꽃’이라고 명확하게 발음해놓고는 획 돌아서서 가버리는 것 같다. 그런 다음에는 어안이 벙벙’하다.4)
물론 이러한 이야기가, 정서영의 작업이 실제의 대상, 자연이나 인간을 모방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이러한 모방은 한자(漢字)처럼 대상을 고도로 추상화하여 닮고있지만 그러한 유사성은 언어가 사용되는 소통의 실질적 국면에서는 멀리 사라져 있기 때문에, 어느 인식론적 순간 이후부터는 그러한 지시의 행동 자체가 하나의 공허한 판토마임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정서영이 재미나게 진술한 ‘꽃’의 에피소드에서 꽃가게에 진열되어있을 살아있는 장미나 국화들은 유명무실한 것이다. 이 유명론적인 태도가 이 작가의 전작(全作)을 지배하는데, 바로 이것이 정서영의 작업을 익숙한 것과 생경한 것으로 끊임없이 교체하도록 만드는데 일조한다. 그것은 이미테이션들, 무대의 소품들이 주는 이중성을 더 극단적으로, 혹은 시적인 건너뜀을 통해 벌여 놓은 것과도 같다.
아동극의 배우가 머리에 뒤집어쓴 봉제 토끼나 전화선이 연결되어있지 않은 무대 위의 전화기처럼, 그것들이 극 속에서 명확한 소품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단일한 대상을 지시하면 할 수록, 그들은 오직 전화기나 토끼가 아닌 것들, 그 물건들 자신에 속한 것들만을 호출한다. 우리는 정서영의 작품 [카펫]에서, 바닥에 깔리기 위해 이토록 대단히 육중해진 ‘카페트’가, 저 울긋불긋한 무늬와 찬란한 표면을 수단으로(사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언어로서의) ‘카펫’이 되려고 애쓰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카펫, 전망대, 선인장 등은 목적과의 내적인 조응을 상실한 어떤 수단들 자체이며 형태, 면적과 위치들로 이루어진 어떤 의미의 덫들이다. 이들은 의미가 없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아니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의미라는 화물을 사물로부터 땅위로 내리듯이, 실체의 무상성 속으로 걷게한다. 수수께끼의 진정한 가치는 엉뚱한 대답에 있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소설가보다는 시인의 태도에 속한다. 사르트르가 이미 50여년 전에 통쾌하게 말했던 바, ‘시는 전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오히려 시는 말에 「봉사」한다’ 물론, ‘사실 말에다 언어적 통일성을 줄 수 있는 것은 의미밖에 없다. 의미가 없는 말은 음이나 펜의 흔적으로 산산이 흩어지고 말 것이다. 다만 시인에게는 의미까지도 자연적인 것이 된다. ..... 「의미」는 얼굴표정이나 음이나, 색채의 슬픈 또는 쾌활한 느낌과 비슷한 각 용어의 고유한 영역이다. 그것은 말속에 흘러들고, 말의 음향 또는 그 눈에 보이는 외관에 흡수되며, 두터워지고, 격이 떨어져 그것 역시 창조되지 않은 영원한 「사물」이 되는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언어는 외부세계의 한 구조물이다.’5) 간단히 말해서, 시인에게 의미 있는 언어란 일종의 사물에 가까운 것이다.
디스플레이(display)
만약 사물들이 그 자체 속에 절대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선택된 물건들의 임의성과, 공간 속에서의 배치이다. 정서영의 최근 작업은 특히 이러한 물건들의 근원 없는 임의성, 실존주의자들의 용어를 따르자면 그들과의 ‘우연한 대면’, 혹은 부조리한 분위기로 인도한다.6) 이 작가에게 전시회는 어떤 부조리한 인테리어 디자인이다. 여기서 인테리어 디자인이라는 것은, 물론 장식, 상징, 효용을 일사불란한 계획 속에서 충족시킨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물건들의 ‘디스플레이’라는 인테리어 디자인의 빙점(氷點)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이다. 그것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사물들이란 정서영의 작업처럼, 서로 결합하여 ‘어울린다’든지 하는 어떤 의미체계를 만들어 내기에는 처음부터 너무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기보다는, 개별들의 침묵시위 속에 나란히 공존한다. 그런데도 작가는 ‘작품들이 설치되는 것이 아니라, 설치되는 것이 작품’이라는, 사람들이 잊고 있는 설치미술 특유의 긴장을 놓치지 않는 것 같다.7) 이들은 삼류 그룹전에 배열된 작품들처럼 즉자적으로 연립하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색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일종의 ‘대자적 공존’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공존의 이유를 오히려 되묻고 있다. 사실 어떤 분위기 이외에 정서영의 물건들에서 일관된 의미체계나 주제의 연관을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개별들의 공존 이외에 디스플레이란 허구로 드러나며, 작품들간의 연관성이나 결합은 일종의 인위적인 제스츄어가 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서영의 비교적 예전 작업의 한 예를 훑어보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이러한 예를 통해 최근에 가까워질수록 아래와 같은 특징들이 훨씬 정제되고 강력해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수십개의 그림과 몇 개의 조각으로 만든 일]에서 드로잉, 조각 등 낱개의 ‘작품’이 쓰이는 방식은 이러한 부조리한 인테리어 디자인의 성격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제목이 이미 지시해놓고 있듯이, 이 공간은 드로잉이나 조각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장이라기보다 액자가 걸려있고 소품이 전시된 현실의 방에 가깝다. 전시장과 생활공간의 오버-랩은, 작품들이 어떤 메시지의 원칙에 의해 배치되어있기 보다는 어느 정도 장식적인 배려나 관습을 ‘닮아’ 놓여져 있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즉 여기서 모방된 대상은 생활공간 자체가 아니라 ‘디스플레이’ 이다. 이 공간에서 작품들은 전시장에서처럼 각각 독립되어 있는가하면, 다른 한편으로 작품은 소품이나 가구의 지위로 떨어져(실은, 제 위치를 찾아) 하나의 통합된 공간으로서의 방안에 놓여있다. 이렇게 해서 마치 우리가 생활하는 집의 방안이 각자에게 전시장의 기능을 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듯이, 전시장이 방으로 전환되는 것 역시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미술관의 이데올로기적 문지방만 없다면, 사실 전시장과 방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공간 속에 놓여진 물건들이다.
사물들이 모인 결과(디스플레이)는 결국 하나의 ‘분위기’이다. [수십개의 그림과...]보다 이후 작업인 금호미술관의 [유령 불 파도]의 설치는 더욱 그렇고, 선재 출품작은 이러한 측면을 더 끌고 나갔다. 정확히 말하면 정서영의 사물들은 ‘분위기 메이커’이며, 그것이 원래 사물들의 공약수인 것처럼 나타난다. 그것은 사물들로부터 나오는 힘이지만, 동시에 유령이나 불처럼 사물 자체가 갖고 있는 사물의 베일처럼 보인다.
분위기는 한편으로 대상을 신비화하기 쉽다는 문제를 언제나 안고 있지만, 그 사물들이 있는 세계가 애매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에는 적절하다. 왜냐하면 ‘분위기’야말로 우리가 사물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의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정서영의 사물들이 모호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서영이 이 작업을 통해 ‘무엇이든’ 분위기를 풍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데 있다. 그러나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하며 특히 미술제도의 영악함에는 가속도가 붙는 법이다.
정서영의 무덤덤한 사물들이 사물의 평범성과 실체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작업들’은 그것이 뭔지 모르겠다는 이유 때문에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는 정서영 작업의 고유한 모순으로, 앞서 말한 사물과 의미 사이의 공백과 상응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정서영의 작업이 모이면 ‘흔히 말해 예술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왜냐하면 예술은 뭔지 모르겠는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업들은 예술의 코드들은 끊임없이 소거해나가 손쉬운 신비화를 예방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그리고 미술관이라는 정체불명의 공간에서 어느 정도까지 신비화를 넘어설 수 있는지는 알기 어렵다. 물론, 그것은 작가보다는 제도가 수고해야할 몫이며, 그렇게 물을 때에만 문제될 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질문을 좀 더 정확하게 하자면, 이 사물들은 과연 어디까지 제도로서의 미술을 난처하게 할 수 있을까?
의미의 압박
‘의미의 베일’, 혹은 분위기의 이중성에 관해 더 나아가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서영의 작업에서 의미는 덫과 같은 것이다. 글 머리에 인용한 로브그리에를 따라 말하자면, 정서영의 물건들은 의미의 압박을 받아들이는 체할 뿐으로 보인다.
실제로 우리는 ‘누보 로망’에서 소설가가 보는 세계, 소위 ‘주관적 객관주의’의 세계와 정서영의 어법이 서로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사물을 마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처럼 기술하지만, 실은 그러한 기술이 사물과 세계에 대한 주관에서 나온 것일 뿐이라는 하나의 원칙을 공유한다는 점에서이다. 그러한 글쓰기는, 주관(작중인물, 작가)이 사물이나 세계에 투사되어 대상을 인간주의적으로 정복하거나 세계를 세계관의 통합된 질서 아래 도구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은 사물이고, 인간은 인간일 뿐인’ 상태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어야만 한다. 인간의 시선에 의해 세계는 남김없이 묘사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미지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세계는 언제나 애매하다. 따라서 애매함은 심리적이거나 논리적인 혼란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명석함이나 진실의 수준을 획득하며, 특히 시간이나 인식의 변화에 따라 모든 것이 잠정적인 의미만을 갖고 있는 상태를 표현한다. 기술(記述)된 세계는 메마른 객관성을 띠고 있어 보이지만 이는 상황과 기억의 변형이나 결핍에 따라 그 때 그 때 달라지는 사물의 유약한 정체성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8)
애매함은, 무지의 결과처럼 능력의 부족에 기인하여 결국 대상을 알게됨으로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대상 뒤에 숨어있는 알기 어려운 의미의 이면을 갖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것은 세계와 나 사이에 있을 수밖에 없는 거리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적극적이고도 치밀하게 강구되는-판명함에 대한 휴머니즘적 열정의 부재를 증명하는-모호함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회 전체의 지도이자 전시개념의 다이아그램 격인 매직펜 드로잉 [무제]에서 확인되는 바, 작가는 ‘무관심’하게 그려진 선들을 통해 사전의 도판처럼 경제적이고 설명적인 단순성에 의해서 대상을 명기하지만, 그들은 ‘틀린’ 구도, 크기, 배열 등을 통해 우리의 기억이 대상을 선택하고 배치하듯이 매우 임의적이고 ‘간접적인’ 상태로만 그려져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서영은 알레고리나 상징을 사물에게 다만 일시적으로만, 즉 금방 소모될 수 있고 끊임없이 바뀔 수 있도록 부여할 뿐(즉 ‘의미의 압박’으로)이며, 주관(작가나 관객)은 사물과, 작품은 그것이 호출하는 연상대와, 현실적인 것은 상상적인 것과 만나거나 중첩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겉돌도록 되어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물이 사물로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맞지 않는 병과 뚜껑은 그들 사이뿐만 아니라, 우리로부터도 그 사물을 격리시킨다.
이러한 방법은 현대적인 체험, 특히 덧없는 일상의 리얼리티를 보장해준다. 탑처럼 말려올라간 카펫은 변두리 나이트클럽의 바니타스(vanitas)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러한 상상은 잠정적, 자의적일 뿐(정확한 약속에 기초해있지 않다는 의미에서)이고, 그것은 그저 나선형으로 말려 올라간 카펫 이상으로 볼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렇게 됨으로써 사물은 고유의 무상함을 드러낸다. 그것은 권태의 미덕이다. ‘권태는 생활의 행위 끝에 오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의 운동을 시작하게 한다.’9) 그리고 ‘사물의 궁극 목적은 길을 가로막아서 사람을 그 자신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10)
결론 대신에
예술제도 속의 물건과 생활 속의 물건이 그 위상을 교환함으로서 갖는 폭로적인 가치는 레디메이드 미술(ready-made art) 이래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극 사이의 도저히 있을 수 없었을 것만 같아 보였던 교환을 레디메이드가 성취했던 것과는 달리, 정서영은 예술과 현실의 접점이 불분명한 접경에서 예술에 생활세계를 도입한다. 게다가 언제부터인가 기성품이야말로 뭔가 심오한 정신성의 담지체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에, 선택된 물질을 기술적인 묘기로 가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것은 더 이상 낯익은 미술사적 폭로가 아닌 대신에, 오히려 그러한 전복의 메카니즘과는 전혀 별개의 회로를 선택하는 것이다. 제도의 영역 밖에서, 작품들은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아파트나 가판대와 제도적으로나 문맥적으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이 세계의 가구들이다. 그 대신에 세계에 대한 비판이 실상은 모든 개인들의 생활 속에서, 수시로 각자에게 일어나는, 각자의 의문과 책임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성공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이 더 근본적인 대안일지 모른다.
따라서 사물들은 우리의 ‘저편’에서 어떤 드라마를 연출하지 않는다. 더구나 드라마가 자율적인 가치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언쟁들이나 아이디어상품 개발처럼 미술사의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 작업과는 더욱 무관한 일이다. 반면에 어떤 인식의 보편적인 확장, 과학으로 대표되는 인식의 영웅성도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더 현실적인 것인지 모른다. 전반적으로, 정서영의 작업은 지금의 한국에서 (그리고 아마도 여성으로서), 주체의 불안과 불확실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
이것은 현대생활의 폭력에 대한 실존적인 ‘우려’와 자구책에 대한 평가, 특히 이 몹쓸 나라에서의 그것에 대한 평가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동시대 한국의 조각에서 정서영의 자리를 가늠케 한다. 이에 관하여 자세하게 쓸 수는 없었지만, 한국의 ‘서양조각’이 어떻게 전개되어왔는가를 살펴본다면 어렵지 않게 부각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다.
한국의 현대 조각의 분야에서 물신주의는 강력하고 전반적인 경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육중하고 강한 사물에 대한 허기 속에는 명확한 주체, 종교적이고 대리적이기는 하지만 대상에 동일시된 자신감 있는 주체들이 있다. 그리고 한국의 조각이란 것은 대체로, 모든 대형건물에 법적인 강제로 작품을 설치해야하는 나라의 그것답게, 아마도 이러한 사회전체의 남근성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정서영의 조각을 광화문을 내려다보는 이순신 상과 비교하는 것은 너무 단순해진 대비이다. 이러한 비교는, 이러한 올려다 봐야하는 조각이 사람과 그 자신(사물) 사이의 딜레마를 전혀 이해하지도 눈치채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을 때에만 가치 있는 것이다.
글: 박찬경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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