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환 Joo Jae-Hwan: 이 매 망 량

Seoul


April 2015



 
구세주
2015


주 재 환  개인전  

이 매 망 량

2015. 4.2 – 4.28 

http://www.trunkgallery.com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 만리변성에 일장검 집고 서서 / 긴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수백 년 전 조선 초에 김종서가 남긴 시조로 대장부의 기개가 지금도 가슴 울리고 있다. 1930년대 전후의 일제시절에 대학생들은 '티베트 고원에서 오줌 갈기면 멀리 고비사막에 무지개가 선 다'며 객기를 부렸다고 한다. 대입 경쟁과 취업 문제로 고통 받는 청소년들에게 '긴파람 큰 한소리'와 '오줌 무지개' 같은 호연지기를 부추길 방안이 절실한데 지금은 막막하다가 정답일 것이다.
조선 창건의 주역인 삼봉 정도전은 한때 전라도 나주 회진으로 유배된 적이 있다. 그는 적막한 유배지에서 어느 날 몽롱한 상태에서 도깨비 무리를 만나 불화하다가 화해하게 된다. 그 내역이 '국역 삼봉집' 1977, 제4권의 '도깨비에게 사과하는 글'에 실려 있다. "산언덕 바다 모퉁이에 천기가 음음하고 초목이 우거졌네. /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사는 내가 너를 버리면 누구와 같이 놀랴. / 아침에 나가 놀고 저녁에 같이 있으며, 노래 부르고 화답하고 세월 보내네. / 이미 시대와 어그러져 세상을 버렸는데 또다시 무엇을 구하랴. / 풀밭에서 춤추며 너와 같이 놀리라."
이 글은 기득권의 전횡에 대항하다가 피 이슬로 마감한 숱한 선현들의 가시밭길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도깨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매망량비인비귀비유비명역일물 魑魅魍魎非人非鬼非幽非明亦一物 자주 흐리고 비가 많이 내린다. 가까운 산과 바다의 음허한 기운과 초목과 토석의 정精이 스미고 엉켜서 이매망량이 되는데 그것은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고 밝음도 아닌 어떤 한 존재다."
이매망량, 온갖 도깨비는 UFO처럼 호기심 자극하는 정체불명인데 사람과의 관계에서 황당무계한 드라마를 연출해 무수한 파격의 얘깃거리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오늘의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의 한 흔적으로 보인다. 한자 이매망량은 귀신 귀鬼자 4개가 병렬되어 있고, 옆 글자는 발음 표시다. 도깨비란 단순표음보다는 귓것들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한자 모양이 마음에 들었고 줄여서 망량이라 한다. 당시 고단한 서민의 일상에 돌개바람으로 작동해 일탈의 해방감을 주었던 도깨비 소동은 이제는 기독교의 유일신 공략과 이성합리의 위력으로 추방된 지 오래되었다. 비유하면 삼봉이 유배된 게 아니라 거꾸로 망량이 유배되었고, 그것들은 시대 변동에 따라 둔갑된 변태망량으로 등장해 때를 만난 듯 활보하고 있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그 갈래가 종잡을 수없이 혼란하지만 작년에 출간된 '사회를 말하는 사회. 한국사회를 읽는 30개 키워드'에 압축되어 있다. 2010년 전후로 유통된 저서 역서 30권 -책 제목에 '사회'가 있는- 을 골라 30명 필자가 서평 형식으로 해제했다. 소비. 자기절제. 낭비. 잉여. 하류. 탈학교. 허기. 위험. 분노. 감시. 과로. 탈 감정. 피로. 투명. 탈 신뢰. 승자독식. 격차. 부품. 주거신분. 팔꿈치. 영어계급. 절벽. 제로섬. 불평등. 링크. 단속. 루머. 무연. 싱글. 신 없는. 부록 그 밖의 사회들에는 감성. 고령화. 공포. 모멸감. 민영화. 불통. 빈곤. 신용계급. 액체. 자조. 저 출산. 행복강박증 사회에 관한 저역서 30권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어지러울 정도로 사회연구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 책을 펴낸 이유에 대해 기획자는 '최근 학계를 비롯한 다양한 지식집단이 피로사회, 단속사회, 잉여사회, 제로섬사회, 무연사회, 하류사회 등을 키워드 삼아 한국사회의 제 현상을 분석하고 있다. 이에 각 키워드가 갖고 있는 함의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 이 사회 저변에 흐르는 변화의 양상을 짚어보자고 했다'고 설명한다.
대다수 보통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 책에 서술된 각종 망량질환으로 상처받아 신음하고 있을 터인데 특효약 없는 그 병증은 각인각색의 처지와 운세에 따라 급성 만성으로 진단되어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팽창될 것 같다. 이 책의 맺음말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어떤 삶을 사는 가' 는 '어떤 예술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과 연계되어 있다. 내 경우 오랜 세월 속절없이 헤매면서 몸속에 잠복해 있는 망량잡균을 일부 걸러내 잠시 위안을 얻는 게 이번 출품작의 한계다. ■ 주재환
http://www.neoloo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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