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 예술가, 김순기와의 대화


아트선재에서 열린 김순기의 개인전 <달, 어디에, 시장을 넘어서, 침묵>은 내용과 의미가 사라진 동시대 시각예술의 흐름 속에서 경제와 세계화가 미친 영향에 대해 두 명의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장-뤽 낭시(Jean-Luc Nancy)와 김순기가 나눈 철학적 대화 영상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전시는 시장 경제에 대한 재현이나 비평 대신 보이는 것 뒷면에 가려진 호흡, 소리, 움직임을 가리키는 철학적 화두로 이루어진 채움보다 비움에 다가간다. 그녀의 대화에 초대된 두 철학자는 자본 중심 사회가 예술과 창작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예술의 가능성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탐색한다. 특히 회화로 대표되는 시각예술의 딜레마, 즉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이자, 예술 작품이라는 유일성이 주는 소유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예술이 시장의 논리와 관계 맺을 것일지에 관해 탐구한다. 이에 대해 데리다는 세계화에 의한 시장의 보편화에 대해 진정한 보편성이란 단지 상품의 유통이라기보다 매 순간 일어날 수 있는 “만남의 신비”를 언급한다. 그러자 김순기는 “침묵의 공유”로 화답한다. 그녀에게 침묵이란 소리-없음이 아닌 자연 그리고 타인과의 교감을 지시한다. 그러자 데리다는 “만남이란 것 자체가 원래 타자를 만나는 것이지요. 만남이 있으려면 절대적인 이타성이 필요합니다”라고 덧붙인다. 낭시는 동시대 시각예술에 있어 자주 언급되는 “내용의 부재”라는 화두에 대해 단순히 내용의 부재가 예술의 내용으로 대체되었다기보다 현존(presence)에 관한 물음이 곧 (예술적) 내용의 문제가 되었다고 풀이한다. 197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동서양을 ‘가로-지르며’ 횡단적 사유를 통해 매체의 잠재성, 행위와 실천으로서의 창작 그리고 기계기술로서의 비디오가 아닌 철학적 매체로서의 비디오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작가 김순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정현(이하 정): 선생님의 프랑스 유학 생활이 궁금합니다. 더불어 1970년대 프랑스 미술계의 풍경이 어떠했는지도 듣고 싶어요.
김순기(이하 김): 1970년대 프랑스는 파리보다 남불, 니스, 마르세이유, 엑상프로방스 등이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창작이 일어나던 곳이었습니다. 특히 니스의 미술학교에서는 젊은 시절의 소냐 호프(Sonja Hopf), 이브 미쇼(Yves Michaud) 등과 같은 강사나 교수가 학생들과 함께 토론에 참여할 정도로 자유로운 분위기와 열정이 넘쳤죠. 저 역시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함께 한 밤 중에 다소 위험한 마르세이유 중심가에 가서 촬영을 감행하기도 했죠. 이미 그때부터 저는 혼자가 아닌 함께 동행하는 작업에 관심이 컸어요. 예를 들어 1986년도에 마르세이유의 비에이유 샤리떼(La Vieille Charité)에서 초현실주의 관련된 꽤 규모가 큰 전시가 열렸는데 그 때 개인전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전 그런 큰 전시의 맥락 속에서 제 개인전을 한다는 게 내키지 않아서 개인전 대신 제 지인들과 함께 하는 전시를 기획했죠. “비디오 & 멀티미디어/김순기와 친구들”(Video & multi-media/Soungui Kim et les invités)라는 제목으로 세 개의 페스티벌을 만들었어요. 존 케이지를 비롯해 다국적 작가들을 초대해 공연, 퍼포먼스, 강연, 시 낭독, 전시 등 경계 없는 축제를 만들었습니다. 금전적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바닷가에 텐트도 치고 학생 집에 작가들을 모시기도 하면서 함께 생활하는 것을 통해 국가와 세대의 경계를 넘어서는 축제를 통해 이른바 ‘만남이라는 상황’을 실천한 셈이죠. 오프닝 역시 여유가 없으니 차라리 배를 띄워서 일종의 선상파티를 열었습니다. 바닷가에서 잡은 꽁치, 꼴뚜기를 전시장 디렉터 집으로 가져가 구워 먹기도 했지요.
정: 선생님께 만남, 특히 우연한 만남은 창작은 물론 삶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인 것 같습니다. 존 케이지와의 만남 역시 그러한데요.
김: 전 이유는 모르겠지만 위대한 작가들을 매우 일상적인 장소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존 케이지도 마찬가지인데요. 존 케이지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그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그게 인연이 되었습니다. 존 케이지가 함께 대화를 더 나누자고 제안했고 그렇게 그와 친분을 맺게 되었어요. 이번 전시에 출품된 “존 케이지-빈 말 & 미라주 베르발”(John Cage –Empty Words & Mirage Verbal, 1986)이 1986년도 축제에서 촬영한 작업입니다. 축제를 기획하면서 전시장 측에 존 케이지를 초대한다고 했더니 아무도 믿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는 초대에 응했고 주역을 이용해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의 글에서 임의적으로 단어를 선택해 “빈 말”을 찾았고, 뒤샹의 편지에서 단어를 선택해 “미라주 베르발”(구술적 신기루)라는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처럼 동양 철학에 밝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사실 소리에 대한 관심은 존 케이지를 만나기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전 회화의 한계를 벗어나려 노력했죠. 한국에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을 때, 광목 천을 잘라 12개의 물감 통에 집어 넣은 후 미술대학 마당에서 말린 적이 있었어요. 새벽에 일어나 이 장면을 보니 이른바 조형적 상황이 펼쳐진 겁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나무에 걸린 천 조각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나무도 함께 진동하고 있었어요. 작업과 자연이 공명하고 있던 겁니다. 이때부터 소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소리는 한계가 없고 무한한 만남으로 나타나지만 그 무엇도 소외시키지 않습니다. 이후 돌 아래 마이크 장치를 해 언제나 존재하지만 가청 영역 바깥에 있는 소리를 들려주는 작업을 했습니다. <릿슨투더엠티니스>(Listen to the Emptiness, 1986)는 이러한 침묵의 소리를 공유하는 작업으로 정원의 바윗돌을 전시장으로 옮겨 앰프로 활용한 작업이에요. 음악은 팔 수 있지만 (존재로서의) 소리는 팔 수 없는 것 아닐까요?
정: 소리의 무한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은 ‘빛’에 대한 감수성도 예민해 졌다는 걸 의미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김: 맞아요. “달들”(Lunes, 2003)이 바로 그 작업입니다. 물론 소리의 자각 이후 비디오 작업을 시작하게 되면서부터였지요. 왜냐하면 제 작업이 정형화된 전시 공간이나 매체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기록’이 필요했습니다. 사진이나 영화와 달리 비디오는 뉴미디어이자 빛과 시간의 기록 매체였습니다. 저는 연출가나 사진작가처럼 카메라 뒤에서 관찰하는 사람이고 싶지 않았어요. 1974년 모나코에서는 “Signe”그룹과 함께 바다에서 연을 날리는 장면을 비디오를 통해 곧바로 TV모니터로 전송해 ‘시간의 실재성’을 실험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저도 그 화면, 그 시간 안에 함께 있었죠. 하지만 1980년대 말이 되자 이러한 새로운 기록의 매체로서의 비디오도 한계가 드러났고, 나는 더 이상 기술매체로서의 비디오가 아닌 빛을 담는 그릇이 바로 비디오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흙으로 TV모니터 주형을 만들어 물을 얼려 앞의 개념을 구체화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얼음공장에 찾아가 이 작업을 실험할 수 있었어요. 곧바로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온도의 차이에 따라 물의 질감, 성질이 변화하는 것을 측정해야만 했어요. 마치 도자기를 구울 때 불의 온도, 움직임, 성질이 중요하듯 얼음 모니터를 만들 때도 온도의 차이에 따라 미세한 변화가 일어났어요. 일정 온도로 하강하자 얼음으로 바뀌면서 부피가 커지다가 더 내려가자 부피가 줄고 투명성이 나타나는 겁니다. “아이스 비디오 콘서트: 비데 & 오”(Ice Video Concert: Vide & O, 1989) 이미지는 쿤스트하우스에서 5일 간 녹인 장면을 촬영한 것입니다. 이 제목에도 일화가 있는데요. 얼음 공장에서 무엇을 만드느냐고 묻길래 빈 공간에 물을 부어 얼릴 것이라 얘기했더니 공장 직원이 비어있음을 뜻하는 “Vide”와 발음 상 물을 지시하는 “O”라고 표시를 해 놓은 게 결국 작품 제목이 된 셈입니다. 직원이 제목을 지어준 거죠. “달들”은 핀홀 카메라로 찍은 달 사진입니다. 30분 정도 노출된 핀홀 카메라는 달의 움직임을 기록하는데 그게 마치 동양화의 획을 연상시켰습니다. 핀홀 카메라에 구멍을 하나 더 뚫자 어리석게도 두 개의 달 움직임이 사시의 시점으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저희 집안에는 훌륭한 서예가들이 많았어요. 현재 구순이 된 제 어머니도 서예전을 준비 중일 정도니까요. 그래서 저도 글씨를 잘 썼지만 서법을 습관적으로 따라가기보다 스스로 습관을 버리고 싶어서 적은 서예 작업이 “컴컴한 동쪽바다에”(Kom Kom Han Dong Zok Badaé, 1998)와 “스스스투투투 오리 날라가면”(Su-Su-Su An gué Sorié, 1998)입니다. 바보 서도라 부르는 이 글쓰기 법은 자아와 필(篳), 묵(默) 사이의 힘과 속도에 관한 작업이에요. 획을 천천히 그으면 묵이 퍼지고, 너무 빨리 그으면 건필이 되기 때문이죠.
정: 바보 서도는 기의 움직임이자 상호적인 만남에 대한 작업이군요.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데리다가 강조한 형식(Support)과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는 급진적인 발전과 개발 아래 지나칠 정도로 성과위주 사회가 되었습니다. 미술계 역시 세계화라는 유령 같은 욕망을 좇고 있습니다. 과연 오늘날의 예술, 창작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김) 오늘날 동시대 예술은 희생양을 향한 통곡의 장이 되어 버린 듯합니다. 특히 과도한 타자에 대한 집착은 병든 사회를 증명하는 듯합니다. 서구의 피의 역사는 늘 희생양을 통해 구원을 찾았지요. 이제 심지어 동양성, 정신, 혁명, 슬픔과 연민까지 사회적 상품으로 변질되는 것만 같아요. 이런 현상이 자본주의와 잘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제가 주식에 관한 전시와 이번 전시에서 ‘시장 너머’를 다루는 것은 바로 이 사회에서 예술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는 겁니다. 예술은 저항입니다. 이는 오늘날 거의 모든 유무형의 자산들이 금융자본, 상품, 시장성이란 가치로만 평가되는 거대한 파도로부터의 저항을 의미합니다. 또한 습관이나 전형화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지요. 바보 서도처럼 말이죠.
정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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