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소: 삼성미술관 플라토
전시기간: 2014. 7. 24 - 10. 12
참여 작가: 경현수, 길종상가, 김범, 미나와 Sasa[44], 슬기와 민, 오인환, 이동기, 이미혜, 이주리, 이형구, 정수진, 정지현, 지니서, 홍영인
삼성미술관 플라토는 리움 개관 1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현대미술의 현주소를 새롭게 조망하는 기획전 <스펙트럼-스펙트럼>을 개최한다. 이 전시는 리움의 대표적인 전시 프로그램으로 지난 2001년 이후 5회의 전시를 통해 총 48명의 신진작가를 배출한 <아트스펙트럼>을 모티브로 한다. <아트스펙트럼> 출신작가 7명이 새로운 작가 7명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진행한 <스펙트럼-스펙트럼>은 리움의 지난 10년의 성과를 기념하는 것은 물론, 플라토의 확장된 시각을 더한 일종의 메타(meta-) 전시로서 하나의 전시모델이 발전하고 지속 가능한지를 실험해보는 전시이다.
김범-길종상가, 미나와 Sasa[44]-슬기와 민, 지니서-홍영인, 오인환-이미혜, 이동기-이주리, 이형구-정지현, 정수진-경현수 등 총 14명(팀)의 작가들은 오늘날 미술가들이 마주하는 현실에 대해 깊이 사유하면서 다양한 자구책과 해법을 모색한다. 삶의 난해함을 퍼즐풀기로 헤쳐나가거나, 고정된 역사에 다수의 대안을 제시하여 대체 가능성을 모색하고, 예술활동을 비즈니스로 치환하는 등, 다양한 시각적 매체와 작가들 스스로 생산한 텍스트를 통해 풍부한 볼거리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환상’ 또는 ‘유령’이란 말과 어원을 공유하는 빛의 ‘스펙트럼’이 두 번 교차되는 양상을 개념화한 <스펙트럼-스펙트럼>은 전시를 통해 주제와 변주, 기원과 확장, 반복과 차이의 메커니즘을 실험하면서 리움과 플라토의 관계를 재설정한다. 원천으로부터 파생된 지류가 더 큰 생동감을 확보하는 것처럼 작가들의 주체적인 참여로 확장된 이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의 현재를 폭넓게 조망하는 의미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http://www.art114.kr/FineArtExibition/22786
한국현대미술 3.0의 스펙트럼 / The Spectrum across Korean Contemporary Art 3.0
강수미 (미학, 동덕여대 회화과 교수)
우리가 삼성미술관 플라토의 《스펙트럼-스펙트럼》전을 주목하는 배경은 그 전시가 한국현대미술의 가까운 과거와 현재를 압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한국현대미술인가? 꼭 집어 말해 1999년에서 2005년 사이 한국미술은 ‘현대미술(contemporary art)’의 외관과 성격을 갖추기 시작했다. 패션계처럼 취향과 경향의 흐름을 타면서 새로움과 파격을 표방하는 작품들, 대중문화영역처럼 끊임없이 이슈를 생산하고 신진작가를 발굴해 프로모션 하는 미술기관들, 그런 영역의 사람들처럼 무목적의 고독한 창작 대신 다자간 협력과 참여를 기반으로 한 아트이벤트 또는 프로젝트를 통해 활동을 이어가면서 아티스트/큐레이터/이론가로서의 이름이 곧 브랜드가 되는 젊은 미술 인력들. 또는 이와는 달리 학계나 시민사회영역처럼 사회 전반의 다양한 문제에 비판적으로 접근한 연구와 담론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그 연구와 담론을 예술 정체성, 유무형의 작품, 전시기획, 프로젝트로 발전시키는 미술, 기관, 구성원들. 우리가 자기 지시적이고 자족적인 모더니즘미술을 과거사로 돌리고, 국내외 현대미술, 즉 동시대미술의 특성을 이같이 정의할 때, 한국미술에서는 앞서 말한 시기가 그 형성기다. 나는 이를 ‘한국현대미술 버전 1.0’이라 정의하고 싶다. 성격상 그것은 이전의 미술과는 달리 다양한 관심사에 입각해 매체를 복합적이고 자유롭게 쓰면서 관람자의 적극적 문화리터러시(cultural literacy)를 지향하는 미술이다. 당시 한국미술계는 굵직한 기획전을 통해서 그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1.0버전의 미술을 견인했다. 대표적으로 광주, 부산, 서울의 비엔날레와 국립현대미술관의 ≪젊은 모색≫전, 삼성미술관의 ≪아트스펙트럼≫전이 그랬다. 또 그런 기획전들에 빈번히 초대된 젊은 작가들, 예컨대 김범, 김홍석, 서도호, 오인환, 이동기, 이불, 이수경, 이형구, 임민욱, 정서영, 정수진, 정연두, 지니서, 함경아, 함양아, 홍영인 등이 1.0세대로서 그 미술의 실체를 채워 넣었다. 그런데 2006년경 갑자기 미술시장(art market)이 미술계 전 분야를 압도하기 시작하더니 2008년 국제금융위기로 거품경제가 꺼지기 직전까지 작가들의 예술적 상상력은 물론 시스템 전반을 뒤흔든다. 자세히 논할 여유는 없으나 이를 ‘한국현대미술 2.0’이라고 구분한다면, 그 특성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더라도 ‘순수미술’이라는 이상적 관념에 매여 있던 그간의 미술에 경제논리와 비즈니스마인드가 필수 요소로 등극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럼 이 글의 제목인 ‘한국현대미술 3.0’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한국현대미술 3.0은 앞선 1.0버전이 미술의 시장화라는 2.0버전을 거친 후 오늘의 상태에 이른 것을 뜻한다. 버전 1.0이 현실적 이해타산과 결과보다는 아트 피플의 도전과 실험, 그리고 시스템의 혁신 활동 자체에 열중함으로써 놓칠 수밖에 없었던 것들은 시장경제의 냉혹한 체제와 반(半)자율적 절차라는 대가를 치른 후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구조를 갖췄다. 동시에 2.0의 와중에 순진하다거나 비상업적이라는 이유로 평가 절하됐던 예술 동기와 가치, 창작의 공동체성, 이해득실을 넘어선 미적수용의 가능성 같은 것들이 그 구조와 함께 좀 더 단단하고 명확하게 자리 잡았다. 이런 점이 내가 생각하는 한국현대미술 버전 3.0의 업그레이드 내용인데, 여기에는 결정적인 작용인(人/因)이 있었다. 요컨대 위에서 예를 들었던 1.0세대 작가들이 창작과 미술계 활동을 지속해오면서 스스로 미술의 버전을 갱신하고 발전시켰으며, 그 내적 연속성으로 의도했든 아니든 자신들의 다음 세대와 새로운 미술 버전을 자극하고 이끌어냈다는 뜻이다. 《스펙트럼-스펙트럼》에서 그 단면을 볼 수 있다.
권위적 밀집 대신 중첩과 이산의 아트, 스펙트럼
《스펙트럼-스펙트럼》은 삼성미술관 리움의 주요 전시프로그램인 《아트스펙트럼》에 참여했던 작가 48명 중 7명을 선정해, 그 작가가 자신이 추천한 다른 작가와 동반 참여하도록 한 플라토의 기획 전시다. 주최 측에 따르면, 리움의 《아트스펙트럼》을 “모티브”로 삼고, 그것을 통해 “하나의 전시모델이 확장되고 지속 가능한지를 실험”하고자 “자매기관”인 플라토가 나섰다고 한다. 여기서 사람들은 우선 삼성미술관 내부 리움과 플라토라는 두 미술관의 내적 상호작용을 볼 것이다. 그러나 사실관계보다 더 주목할 점은 2001년 이후 다섯 번의 《아트스펙트럼》 안에 축적된 한국현대미술의 범위(spectrum)가 7개로 선별됐고, 그것들이 다시 《스펙트럼-스펙트럼》이라는 다른 프리즘을 통해 새로운(《아트스펙트럼》 바깥의) 범위들과 조우하면서 한국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이 일정 정도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동력은 참여 작가다. 요컨대 과거 《아트스펙트럼》에 참여했던 김범, 미나와 SaSa[44], 지니서, 오인환, 이동기, 이형구, 정수진이 지난 십여 년 간 각자의 미술을 지속하고 변화시켜 오면서 한국현대미술의 버전 업을 구축한 덕분이다. 다른 한편 기획에도 중요한 요인이 있다. 즉 이 전시가 기존 참여 작가들이 자유롭게 다른 작가를 선정하고 서로 원하는 방식으로 소통 및 창작하도록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두 개의 스펙트럼, 나아가 14개의 스펙트럼이 중첩하면서 이산(離散)하도록 기획 틀을 짠 덕분인 것이다. 이는 한 주제 아래 일사불란하게 작품들이 밀집하는 전시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성공시켰다.
첫째, 김범-길종상가, 이동기-이주리, 이형구-정지현, 정수진-경현수의 경우에서 보듯이 서로 다른 세대에 속하는 작가들이 겹치고 분화하면서 1.0-2.0-3.0으로 변화한 한국현대미술의 이행 양상을 가시화한다. 둘째, 미나와 SaSa[44]-슬기와 민, 지니서-홍영인, 오인환-이미혜는 속한 세대, 미적 관심사, 구사하는 미술 언어의 상이성보다는 오히려 공속성을 갖는데, 이들의 짝짓기 참여로 전시는 그간 한국미술이 디자인, 건축, 공연, 과학, 산업, 사회적 이슈비평 등과 접속하며 자체를 다변화해온 상황을 비출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같은 점들이 한데 모여 그동안 미술이라는 단독자의 영역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전반의 감수성과 의식, 감각과 사고가 어찌 변했는지 감상자 입장에서 체감할 기회를 제공했다(관객 대중보다는 지난 십여 년의 문화예술 궤적과 디테일을 꾸준히 관찰해온 이들이 알아챌만한 것으로, 전시가 그것을 리포트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김범과 길종상가의 작업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미술에 대한 일견 비슷하면서도 매우 다른 자기이해다. 둘은 미술계라는 특정 영역 내부에서 권위적으로 굳어진 미술 형식, 태도, 목적 따위를 저항 대신 유머, 변칙, 용도 변경 등으로 우회한다는 점에서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김범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을 하나의 단독성(singularity)으로 긍정한다면, 길종상가는 오히려 그것에 상업의 옷을 입혀 여러 가지 실용성을 발휘하도록 한다. 이를테면 전자가 ‘인지적 그림’이라는 개념 아래 미로 퍼즐처럼 패턴을 그린 초대형 회화 <무제(친숙한 고통 #13)>은 몬드리안이나 프랭크 스텔라처럼 회화의 향방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과시하지 않지만, 평면과 이미지와 가시성의 관계를 ‘회화’를 중심으로 탐구한 ‘작품’이다. 반면 후자가 플라토의 아트샵과 연결된 계단 공간에 설치한 작품, 즉 금속과 유리로 만든 조립식 선반에 기성품 램프, 앤티크 촛대와 그릇, 식물 등을 배열하고 사운드를 부가한 그것은 상황에 따라 전시 또는 판매 가능한 <아 귀에 걸면 다르고, 어 코에 걸면 다르다>는 유연한 서비스의 ‘제품’이다.
얼추 세대 차이가 이들과 비슷한 이동기-이주리의 경우에서는 양상이 또 다르다. 90년대 중반 회화와 만화의 접목을 때 이르게 시도한 이동기는 현재 획일성을 강제하는 현대미술, 즉 대중문화코드를 차용하거나 반대로 지적 게임으로 포장된 공허한 미술에 대한 비판을 바탕에 깔고 일부러 가볍게 기성이미지를 변용 및 조합하는 그림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리고 아직 이십대로, 현대미술의 특정 경향을 물신처럼 받드는 2000년대 한국의 미술교육환경에 노출됐던 이주리는 오히려 근대 초현실주의나 표현주의처럼 내면, 감정, 꿈, 무의식 등을 긍정하면서 주관성을 극대화하는 회화를 실험하고 있다. 이들에게서 보이는 현대미술의 값어치는 창작의 시대착오적 시간성과 예술 하는 동기의 개별성이다.
다른 한편, 지니서와 홍영인은 자신의 미술을 적어도 한 번 이상 큰 틀에서 변화시키며 한국현대미술 버전 1.0~3.0을 형성한 작가들이다. 나는 그 변곡점을 조형예술과 건축공간의 역동적 삼투(지니서), 사회적 의식을 상수로 한 창작행위(홍영인)로 정의하는데, 흥미롭게도 이전에 서로 낯설었던 두 작가는 이메일로 대화하는 와중에 자신의 미술을 상대방을 통해 선명하고 풍부하게 이해 받았다(여기서 작가들 간 상호이해의 가치를 본다). 지니서의 경우 2003년부터 색다른 질료를 조형적으로 변용해 기존 공간의 건축적 속성 및 사람들의 공간 경험을 확장시키는 설치미술을 한다. 해서 이번에는 플라토의 견고한 유리 파빌리온에서 갈색과 짙은 회색의 가죽 띠가 <강물>처럼 스펙터클하게 흐르도록 했다. 홍영인은 사회적 이슈, 즉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 대한 집단의 기억과 현재적 성찰을 위해 관련 이미지를 천에 자수로 놓은 대형 회화와 십대 소녀들이 미술관에서 즉흥적으로 춤을 추는 퍼포먼스를 작품으로 제시했다. 두 작가는 그렇게 해서 한국현대미술이 3.0까지 전개되는 동안 새로 부가하거나 네트워크를 만들어온 조건들, 지점들을 다시 보게 한다. 그 중 가장 최근 각광 받는 지점은 협업을 통한 춤 또는 안무, 좀 더 포괄적으로는 미술관에서의 퍼포먼스다. 이번 전시에서만 해도 홍영인을 포함해 이형구와 오인환의 작품에서 퍼포먼스는 주요 축을 담당한다. 요컨대 그간 신체 변형 및 증강 기구를 작품화해온 이형구는 말의 뼈와 근육, 관절운동 등을 의태한(mimic) 기구를 제작해 착용하고 미술관에서 마장마술을 하듯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리고 자신의 성적 정체성이 소수자 위치에 처하는 현 사회 상황에서 꾸준히 여러 타자관계를 탐색해온 오인환은 미술관 경비원과 아티스트로서 ‘친분 만들기’를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한 후 전시장에서 홀로 춤을 춘다.
그렇게 홍영인, 이형구, 오인환의 퍼포먼스/춤은 문화에 대한 작가의 독자적 읽기를 가늠할만한 미적 지표가 된다. 하지만 댄스나 퍼포먼스가 전시의 우세한 흥행요소가 된 현대미술 현장에서 그것은 너무 자주 상연되는 군무처럼 취급될 수 있다. 지면의 한계로 이 글이 전시 전체를 다룰 수 없는 마당에 이와 관련해 짚고 싶은 점은 《스펙트럼-스펙트럼》이 한국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만이 아니라 미래로도 우리를 이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답이기보다는 우선 고민이다. 잠재적 가치를 지닌 어떤 것이 현대미술의 익숙한 수사, 휘발성 강한 테크닉, 일시적 효과의 소도구로 굴절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SPACE, 2014_09, Vol. 562, pp. 10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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