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生角-살아있는 각

구민자_김승현_우수진_이재환展2009_0701 ▶ 0722대안공간 반지하_BANJIHA대전시 서구 갈마1동 갈마공원7길 47cafe.naver.com/halfway
작가와의 만남
2009_0701 ▶ 0708 / 김승현_이재환
2009_0715 ▶ 0722 / 구민자_우수진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상을 움직이는 우리, 끊임없이 변하는 우리의 생각을 '생각生∠' 을 통해 바라본다. 날이 선 살아있는 각, '생각生∠'은 머물러 있지 않는다. 우리를 살아있게 만들고 증명하며 바쁘게 변화한다. 바쁜 '생각生∠'을 4인의 생각을 통해 잡아놓은 작품을 만나보자. 
https://neolook.com/archives/20090705g
https://djartdom.tistory.com/210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구민자 작업비평
구민자의 작업은 '끝'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영화가 끝난 후 검은 화면을 배경으로 흐르는 엔딩 크레딧이나 마라톤의 최후 주자가 완주했을 때 그를 위한 격려의 박수 등 일반적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곳에서 작가의 작업은 시작한다. 우리가 평소에 알아채지 못한 공간들을 작업을 통해 보여주는데 작업을 살펴보면서 그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야 범위 안으로 그 공간을 옮겨놓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주장하거나 내세우는 것이 아닌 묵묵히 본디의 장소에서 행하면서도 그 대상들을 시야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 작가가 취하는 방식이다.
2004년 작, <세상의 끝>에서 작가는 한 공간에 있는 모든 틈을 메운다. 시간을 분, 초로 잘게 나뉜 시간이 본디 연속된 것처럼, 무수히 많은 구획지어 나뉜 공간들 역시 연결되어 있음에서 시작한 이 작업은 입구를 제외한 모든 틈을 막음으로써 세상의 끝을 만든다. 이 ‘세상의 끝’은 ‘끝’이 아니다. 이 끝을 경험한 이들은 다시 문을 벗어나면서 이곳을 세상의 처음삼아 세상을 만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며, 작가가 ‘세상의 끝’이 이곳만은 아니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다른 곳에서 관람객들은 또 다른 ‘세상의 끝’을 만날 수도 있다. 이 작업에서 작가의 ‘끝’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작가가 보여주고 있는 ‘세상의 끝’은 단절된 ‘끝’이 아니다. 공간이 갖는 모든 틈을 메움으로써 역설적으로 ‘끝’이 갖는 끊임없음을 드러낸다. 이런 경향들은 <하늘높이 아름답게>, 그리고 <990> 작업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하늘높이 아름답게>는 운반을 위해 사용한 비닐봉지가 그 용도를 다한 뒤 ‘담는 것’이라는 기능을 끝내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 봉지에 헬륨가스를 넣어 풍선으로 만들어 새로운 기능을 부여한다. 작가의 할머니가 비닐봉지들을 차곡차곡 모았던 그 습관을 대물림한 작가는 비닐봉지를 ‘남겨진 구체적인 물건’이면서 동시에 ‘덧씌워진 정서’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하늘높이 아름답게>그 기억들과 헬륨풍선이 갖는 상징적 의미의 교차점에 있다. 와 <990>에서는 끝이 완성의 일부가 된다. 시작과 끝이라는 사이클이 온전히 하나가 아닌 이전의 ‘끝’이 다음 사이클의 일부로 활용하는 작업은 일회용 커피컵을 매장에 돌려주면 환경부담금 50원을 환불해주는 것에서 착안, 39개의 컵을 모아 새로운 커피 한 컵을 받아 다시 39개를 모으는 순환형태의 작업이다. 남겨진 비닐봉지가 헬륨봉지가 된 것처럼 남겨진 39개의 컵은 온전한 커피 1컵으로 변한다. 그리고 다시 38개의 빈 컵들과 함께 반환되어 새로운 시작을 만든다. <990>에서 작가는 커피믹스의 설탕조절부분에 든 설탕을 오랜 기간 동안 모아 1kg의 커피를 만들어 ‘상품’으로 둔갑시켜 진열대에 버젓이 놓아둔다. ‘조절’은 필요에 따라 일정량을 취하는 것으로 특히 커피믹스의 경우 남겨진 설탕은 버려지기 마련인데 이것들을 990원어치로 만드는 작가의 작업은 자칫 무의미해질 수 있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의 연장선에서 파악할 수 있다. <작은 태양> 역시 외부의 빛이 차단된 전시 공간에 거울을 이용하여 외부의 빛을 유입시킴으로써 하나의 빛을 만들어 내는 작업으로 커피믹스의 설탕처럼 특정 목적에 의해 버려지거나 차단되는 것들을 모아 의미를 부여해준 작업이다.
작가의 일련의 작업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테마-끝, 남겨짐, 재탄생-에 대한 천착에서 재미있는 것은 작가의 행위, 즉 일상생활 속에서 쉼없이 지속하는 형태의 작업이 많다는 점이다. <42 .195="">에서 작가는 30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마라톤을 완주한다. 시작점을 출발해서 도착지점까지의 시간을 측정하는 마라톤의 경우 그 성적에 상관없이 완주한 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장거리로 이어지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의미의 찬사인데, 이는 어떻게 보면 ‘마라톤은 최선을 다해서 뛴다’라는 전제가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마라톤은 시작점에서 끝점까지 닿는 하나의 연속, 즉 마라톤을 지속하고 있다는 ‘의미의 연속’이다. <42 .195="" vol.2="">에서 작가는 이전의 작업에서 확대하여 집 앞의 출발선으로부터 8일간 다니며 42.195km를 기록했다. 이 측정의 시작으로부터 시작해서 42.195km가 될 때마다 무수히 많은 횟수로 끊임없이 지속되는 작업이다. 시작과 끝을 문질러 불명확한 모습으로 만들면서도 그 작업을 통해 순간, 혹은 순간 속에 묻혀버릴 수 있는 사물들에 새로운 시작을 부여하는 데에서 작가의 순환에 대한 주제 의식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순환은 일상적으로 반복된다는 의미의 순환이 아니다. 마치 공간의 틈을 메워 끝이면서도 시작인 공간을 만들어 낸 것처럼 작가는 의미의 재조명, 다르게 보기라는 방식으로 순환 속에서 ‘다른 형태로 동작하는 순환’을 만든다.
어느 소설에서처럼 ‘ 흔적을 남기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충돌하려는 의지와 집요함이 아직 완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던 시대’, 다시 말해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아무도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 존재가 사라져버리는 그런 시대를 상상해 본다. 그런 세상에서는 비닐봉지에 과일을 담아 집에 도착해서 과일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봉지를 구석에 밀어 넣는 순간, 그 봉지는 존재를 잃게 될 것이다. 모두가 어떤 대상을 외면한다면 그 대상 역시 세상에서 존재를 감출 것이다. 이러한 현실 불가능해 보이는 세상은 다르게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여준다. 외면하고, 관심을 갖지 않고 무심코 밀어낸다면 마치 사라져 버린 것처럼 되버리는 많은 것들. 구민자가 우리의 시야 범위 안으로 가져와 다루는 작업들은 익숙함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상투적인 반복, 무비판적인 수동적 태도들을 가만히 되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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