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순옥 작가론: 내 섬세함에서 섬세한 우리의 존재로

 세상의 끝과 조우하기를 꿈꾸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그 꿈을 위해 무엇을 할까? 작가 우순옥은 헤어조크(W. Herzog)의 다큐멘터리 <세상 끝과의 조우>에서 남극의 한 펭귄이 여느 펭귄 무리와는 달리 바다 쪽이 아니라 육지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을 두고 ‘그것이 바로 작가'라고 해석했다. 이를 누군가는 낭만적인 예술가상, 즉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길을 거슬러 내면에 침잠하는 고독한 예술가 모델로 풀이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우순옥이 이제까지 해온 작업을 비춰보건대 대륙의 중심을 향해 걷는 ‘펭귄-작가'는 자신에게 익숙한 ‘바다-환경’을 등지고 ‘세상의 끝-타자의 세계’와 조우하고자 하는 이이다. 현재까지 그녀의 작품들은 대부분 작가 주체의 주관적이고 주정적인 내면을 외부로 투사/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사물/객체로부터 자신이 부단히 새롭게 받아들이는 어떤 영향(“빛”)을 구체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우순옥이 세상의 끝과 조우하는 방법은 자신이 아닌 존재(他者)와 지각의 깨어있는 상태로 만나는 미술을 행하는 것이고, 그 미술이 또한 일종의 매체로서 어떤 이를 세상의 끝과 만나도록 이끄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일단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의 미학’이라는 주제어를 꺼내놓자. 그리고 우순옥의 작품이 감상자와 세상의 끝을 매개한 구체적 사례부터 보기로 하자.

아름다움의 의도치 않았던 면모

우순옥의 동료작가 한 사람이 2002년 우순옥의 대림미술관 개인전 <장소 속의 장소>를 감상하던 중 샹들리에 작품 ―미술관으로 개조하기 전 가정집이었던 그 장소에 오랫동안 매달려있던 “빛바랜” 샹들리에가 <Portable Light>라는 조각 설치로 “다시 일렁이며” 선― 앞에서 조용히 길게 울었다. 이전에도 그 동료는, 삼청동의 한옥을 하나의 설치작품이자 장소 특정적 전시로 주조한 우순옥의 <한옥 프로젝트-어떤 은유들>(2000)에서 비슷한 미적 반응을 보였다. 작가는 방 내벽에 있던 창을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정갈하게 다듬고 그 밑에 두 개의 작은 사각구멍을 만들어 감상자가 벽 안으로 두 손을 넣어 맞잡을 수 있도록 했는데(<따뜻한 벽>), 예의 동료가 작품에 정말 손을 집어넣고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우순옥 미술의 무엇이 그 자신 예술가로서 뛰어난 심미성과 높은 자존심으로 다져져 있었을 그 동료 작가를 흔들었을까? 그토록 깊게 마음을 움직였을까? 얼핏 그 답은 우리가 찾아내야 할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비록 우순옥의 작품이 촉발시켰다고는 해도 그 사람의 미적 감상은 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영역의 문제인 것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 미학이 보르헤스(J. L. Borges)의 ‘상호텍스트성’, 바르트(R. Barthes)의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을 환영한 이래로 감상의 키잡이를 작품보다 감상자/독자의 편에 쉽게 쥐어주는 만큼, 저 눈물의 깊은 동기이자 원천이 그이의 정서와 지각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순옥의 미술에서 감동은 결코 작품이 감상자의 감상성(sentimentalism)을 건드리거나 그에 의존해서 빚어지는 사태가 아니다. 그 미술로부터의 감동, 혹은 미적 지각과 경험은 이중의 상호주관성을 바탕에 깔고 있다. 즉 한편으로 작가 우순옥과 그녀를 둘러싼 세계의 사물들/질료들/존재들이 맺는 상호주관성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작가와의 상호주관성을 통해 예술작품으로 존재가 변모한 그것들이 감상자와 맺는 상호주관성이 있는 것이다. 흔히 미술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감각과 의식을 행사해서 변화시킨 대상 및 질료의 결과물내지는 창작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순옥의 경우에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일방적이거나 목적 지향적이지 않다. 이 작가는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에서처럼 객관만을 절대적 실체로 상정해 정신과 분리하거나,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에서처럼 오직 주체의 사유만을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주관과 객체/객관의 현상학적 조우내지는 상호작용을 긍정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우순옥의 미술이 ‘상호주관성의 미학’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인데, 그 단초는 명시적으로 작가가 2003년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단지 예술을 통해 서로간의 대화를 할 수 있을 뿐”이라고 자신의 예술론을 밝힌 대목에서 드러나는 바이다. 하지만 그 말보다 더욱 분명하게 감상자가 상호주관성의 감각적 지각을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은 당연하지만 그녀의 작품들이다.

주체의 주관적 독단이나 감상성을 가능한 한 유보하고 대상의 있음(存在)을 섬세함의 가장 섬세한 차원에 이르기까지 수용하려 할 때, 그렇게 해서 주체가 주관성이 아니라 상호주관성의 상태에 있을 때 출현하는 것은 ‘의도치 않았던 미’다. 우순옥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 의도치 않았던 미의 세계를 자기 미술의 기조로 구축한 경우처럼 보인다. 예컨대 “갑자기 눈앞에 피어난 꽃봉오리”나 “아무 것도 아닌”이라는 문장을 트레싱지 위에 연필로 쓴 그녀의 드로잉. 텅 빈 유리 장, 텅 빈 검은 쟁반, 아주 작은 산처럼 쌓인 흰 광물가루더미, 흰 레이스로 이뤄진 그녀의 설치작품(이상 2009년 개인전 <달과 친구들>). 이것들이 모두 작가/주체 우순옥의 ‘의도를 벗어나려는 의도’를 말해주며, 그 이율배반적 기조로부터 산출된 극히 섬세한 객체의 미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꽃의 봉오리가 스르륵 피어나는 찰나, 아무 ‘것’도 아니지만 여전히 완강하게 무엇인 ‘것’이 작가와, 그리고 감상자와 조우하는 것이다. 그런 우순옥의 미술에서 의도치 않았던 미와 상호주관성의 미학이 가장 다매체적으로, 동시에 역설적이지만 가장 구체적인 작가의 개입을 통해서 실현된 경우는 단연 2011년 개인전 <잠시 동안의 드로잉>일 것이다.

물질과 비물질은 하나

‘잠시 동안의 드로잉’은 말 그대로 작가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행한 드로잉일 수도 있고, 세속의 시간 속에서 태어남과 살아감과 죽음을 경험하는 우리 인생의 궤적 전체를 은유하는 주제어일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드로잉’이란 최초의 생각이며 움직임이며 과정이다. 우리의 삶도 한편의 드로잉이 아닌가.”라고 말하는 우순옥과 작품들이 그 가능성을 긍정하고 포괄한다. 우순옥은 <잠시 동안의 드로잉>전에서 국제갤러리 1층을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삶을 사는 존재와, 언제나 어디서든 복제될 수 있는 존재들이 함께 기거하는 일종의 ‘삶-드로잉의 정원’으로 재탄생시켰다. <신기루>라는 제목의 이 설치작품에서는 제각각의 속성과 모양을 지닌 화초와 나무들이 유일무이한 생명체들로서 12개의 작은 생태계 군집을 이루고 있다. 동시에 그 군집들 하나하나에 1대씩 설치된 모니터에서는 작가가 수십 년간 애호해온 12편의 영화로부터 매우 정교하게 발췌한 특정 장면들이 반복 상영된다. 예컨대 홍죽, 멕시칸 세이지, 황칠나무, 이끼, 닥나무 등 고유한 낯빛과 자태를 지닌 식물에 둘러싸여 안토니오니(M. Antonioni)의 영화 <여행자>가, 비스콘티(L. Visconti)의 <베니스의 죽음>이, 헤어조크의 <세상의 기원으로의 여행>과 <세상 끝과의 조우>가 펼쳐지고 접히고 하는 것이다. 그 소박한 자연물들과 작가의 개입을 통해 선별된 기성영화의 푸티지는 언젠가 그리고 여전히 우순옥에게 자체의 존재-빛을 던지는 것들로서 인생의 ‘잠시 동안’ 마다 이 작가의 어떤 생각과 움직임에 조응하며 삶의 드로잉을 생산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감상자가 설치작품 <신기루>와 조우할 때, 그 조응 관계 또는 상호주관적 관계는 이자 관계에서 삼자 관계로 확장된다. 이를테면 <베니스의 죽음>에서 마지막 장면, 즉 바다 위에 떠있는 해를 향해 나아가는 미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죽어가는 흰 양복의 음악가 이미지는 우순옥의 미적 세계에 극도로 섬세하고 연약한 순간의 미학 같은 것을 일깨웠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한 장의 연필 드로잉으로, 한 공간에서의 영상설치작품으로 제시돼 감상자로 하여금 가느다란 몸의 실루엣과 연필의 가느다란 선이 공유하는 독특한 촉각을, 풀 먹인 흰 천과 1970년대 영화 화질에 공존하는 서정적인 질감을 마치 처음처럼 경험케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작가가 그 설치작품에 <신기루>라는 제목을 붙인 사실을 염두에 두면 그것은 ‘물질도 비물질도 아닌 존재의 상(像)’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이는 말장난이 전혀 아니다. 애초 신기루가 ‘빛의 이상 굴절로 인해 예기치 않은 곳에 이미지가 나타나는 현상’을 일컫는다는 점에 비춰볼 때, 우순옥의 식물과 영상이 한 데 어우러진 작품은 비디오의 빛 속에서 물질적 삶이, 풀과 나무의 초록빛 속에서 비물질적인 감성이 서로 교통하며 출현하는 장으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감상자가 그 작품과 조응하면서 경험하는 미적 존재가 신기루 같이 물질적인지 비물질적인지 판가름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우순옥은 언젠가 독일어 단어 ‘materiell’과 ‘immateriell’을 언어유희하면서 “물질과 비물질, 그들은 하나”라는 주장을 작품화한 적이 있다. 1993년 개인전 <물질비물질-하나의 방>이 그것이다. “물질 비물질 materiell immateriell; 물질속의 물질 materiell im materiell; 물질비물질 materiellimmateriell” 단지 철자를 어디서 띄어 쓰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전혀 다르게 변주하는 저 말들의 배열 속에서 우리가 새삼 깨닫게 되는 사실은 두 가지다. 첫째, 물질과 비물질의 차원을 나누는 일이 매우 섬세한 감각을 요구한다는 점. 둘째, 그 두 차원은 끊임없이 서로를 쪼개고 합치는(切合) 변성의 과정에 있다는 점. 그 철학적 깨달음을 우순옥은 2011년 11월 기술복제이미지인 영화 장면의 재생과 매순간 다른 존재로 변모하는 식물의 생장이 서로를 향해 굴절되는 작품으로 관객에게 건넸다. 그리고 감상자/관객은 잠시 동안 그 작품 앞에서 재생과 생장의 순간을 같이 겪고, 다음 순간에는 그것을 떠난다. 우순옥이 LED 빛으로 쓴 텍스트 작품 “우리는 모두 여행자”가 담은 깊은 뜻이 거기, 즉 서로를 타자에게 실어 나르는 상호주관성과 이행가능성에 있을 것이다.

강수미 (미학), 월간미술 201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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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

naseasterwood s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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