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yZ City

타임스퀘어 지하2층 특설전시장www.timessquare.co.kr
 2010_1101 ▶ 2010_1229



참여작가: 백승철_안세권_유병욱_이강우_이득영_이장섭_전민조_차주용_최원준_화덕헌
전민조_도시의 밭갈이, 압구정동_1976

도시에 사는 우리들은 점점 더 도시를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도시가 나빠서도 아니고, 도시에 살기 싫어서도 아니었다. 도시의 공기가 나빠서도 아니었다. 차와 관광객이 잔뜩 몰려 복작대는 울릉도 도동항의 공기가 종로 한 복판의 공기보다 나쁘면 나빴지 결코 더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견딜 수 없는 것은 도시가 우리에게 가하는 밀도였다. 단지 차가 많다거나 빌딩이 너무 많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도대체 이 놈의 도시는 매일 같이 엄청난 정보를 쏟아내 좋건 싫건 우리에게 퍼부어 주고 있었다. 물론 이동성 통신이 발달한 요즘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어느 시골에 가도 도시 못지 않게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다. 그러나 도시에 있는 모든 물건들, 즉 차, 건물, 구조물, 각종 사인물들, 그리고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너무나 다양하고 착종적인 스타일의 옷들, 음식들은 모두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다. 


미래의 고고학자가 오늘날의 도시를 발굴한다면 단 하나의 유물에만 해도 너무나 많이 담겨 있는 정보 때문에 당혹해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논문 쓸 거리가 많다고 좋아할 지도 모른다. 신라시대의 능을 발굴하다가 불에 탄 쌀알이 나오면 고고학자는 '신라시대에 쌀을 먹었음'이라고 간단하게 기술하면 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식당터를 발굴하던 미래의 고고학자가 거기서 출토된 메뉴를 보게 되면 쌀도 그냥 쌀이 아니라 리조또, 프라이드 라이스, 찰밥, 누룽지 등 다양한 형태로 된 것들이 나올 것이며, 그에 맞는 건축양식도 같이 나오게 될 것이다. 허름한 토속식당에서 리조또가 나올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리조또를 먹는 곳은 대개 건물의 외관과 내관이 서양식으로 세련되게 디자인돼 있다. 그러니 미래의 고고학자는 오늘날의 도시를 발굴할 때 거기 살던 사람은 어떤 건축양식에서 어떤 음식을 먹었고 거기서는 어떤 언어가 통용되는지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리조또를 먹는 곳에서 "아줌마 여기 술 좀 더 주슈"하고 소리칠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도시는 이렇게 정보로 넘쳐난다. 만약 그 고고학자가 건물 전체를 발굴한다면 그는 박사논문을 수 십 편을 쓰고도 남을 것이다. 일층에는 편의점, 이층에는 치과, 삼층은 당구장, 사층은 까페, 오층은 안마시술소 등등으로 돼 있으니 그 각각의 층에서 하는 일들의 본질과 그 실행방식들, 거기 얽혀 있는 문화적 층위와 관습, 오는 사람들의 이념과 감각 등 도대체 건물 하나가 들이붓는 정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런데 종로 하나만 보더라도 빌딩이 한도 끝도 없이 줄지어 있다. 이래서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들은 정보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고 도시는 그 욕망을 맹렬히 부추기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정보가 추상적인 데이터로 돼 있으면 무시하면 그만인데 매일 같이 건축물의 형태, 그 사이를 비추는 햇살, 건물과 건물이 얽혀서 나타내는 추상적인 아름다움,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천변만화의 모습 등, 신체적이고 실존적이며 감각적으로 다가오니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가들이 나선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이 도시를 샅샅이 사진으로 기록해서 실존과 욕망의 착종을 풀어내는 살풀이를 하자고 말이다. 사진은 기록도 아니고 표현도 아니며 예술은 더더욱 아니다. 사진은 외부조건이 자신에게 가하는 압력에 대응하여 건딜 수 있도록 해주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무언가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마치 동물이 위협을 받으면 독을 뿜듯이, 사진가는 사진을 내뿜어서 도시의 스트레스에 대적한다. 이때 '선생님의 사진 스타일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이다. 그것은 풍뎅이에게 '당신의 날개짓은 누가 고안한 것입니까?'라고 묻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질문이다. 풍뎅이는 자연이 자신에게 부여한 본능에 따라 날개짓을 하는 것이다. 그 구조는 풍뎅이가 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정하는 것은 자연의 힘과 풍뎅이의 실존 사이의 어떤 관계이다. 그 사이에 공기역학도 있을 것이고 운동생리학도 있을 것이며 곤충심리학도 있을 것이다. 

사진가는 도시가 자신에게 부여한 힘과 정보와 감각의 과잉에 대응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그는 발터 벤야민이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대하여"에서 말해 유명해진 할 일 없는 산보자, 즉 플라느(flaneur)와도 다르다. 오늘날의 사진가는 이놈의 도시를 어떻게 처리하고야 말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벤야민의, 혹은 보들레르의 플라느가 할 일 없이 산보함으로써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는 군중들의 저 끔찍한 욕망과 목적성, 나아가 맹목적성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진데 반해, 오늘날의 도시 사진가는 도시 속에 푹 자신을 담근다. 그는 도시의 구조 속에서 자신만의 사진실천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곳을 잘 살펴 찾고, 무슨 사진을 펼칠지 가늠해 본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사진가는 산보자 보다는 낚시꾼에 가깝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알고 있고 기다릴 줄 안다. 도시는 아무 때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참을성을 가지고 참을 수 없는 도시를 보아낸다. 그리고 사진으로 처리해 낸다. 그 결과가 『XyZ City』이다. 3차원 공간을 이루는 축은 xyz 세 개가 있는데, 한국의 도시에서는 단연 z축이 가장 압도적이다. 오로지 수직 상승을 꿈꾸는 한국의 도시에서는 x축과 y축이 만들어내는 평면의 좌표는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z축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도시인들은 이런 엄청난 공간의 불균형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듯이 일을 하고 휴식을 하고 번식을 한다. 외국 사람들은 한국의 도시들이 다이내믹해서 좋다고 하는데 약간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입장에서는 좀 아찔하고 아슬아슬하다. 현기증이 나지 않을까, 옥상에서 누군가 뛰어내리지 않을까, 정보의 과잉은 일어나지 않을까. 도시의 z축은 상당히 바쁘다.

최원준_방어선 #4, 의정부_2007

화덕헌_성령치유대성회_2008
이득영_압구정 현대_수직_2009

사진가들의 탐구심 어린 카메라는 이런 도시의 구석구석을 훑으며 도시의 축들이 만들어 놓은 궤적을 따라간다. 사실 도시는 무척이나 크고 복잡하기 때문에 사진으로 찍기 힘들다. 도시를 찍은 대표적인 사진가가 1930년대의 뉴욕을 찍어 『변화하는 뉴욕(Changing New York)』이라는 제목의 책을 낸 버레니스 애봇(Berenice Abbott)일텐데, 그녀의 카메라는 도시를 훑어 볼 수 있는 지점에 올라가 매우 요약된 방식으로 뉴욕의 스펙터클을 정리해내고 있다. 그녀가 찍은 뉴욕은 수평의 좌표축과 수직의 좌표축이 매우 다이내믹하게 얽힌 매력적인 공간이다. 위지의 사진에 나오는 살인 사건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멋진 근대의 공간이다. 그녀의 사진 중에 가장 돋보이는 것이 맨하탄의 빌딩을 찍어서 아주 길게 세로로 만든 사진이다. 근대적 빌딩의 늘씬한 선은 이 사진 속에서 생동한다. 이 사진에서 도시는 z축이 살아 숨 쉬며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공간이며, 그게 뉴욕의 매력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사진가는 도시의 z축에 반응한다. 어떤 이는 나날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수직으로 치솟는 x축에 대한 반대급부로 x, y축은 어떤 과정을 통해 압살당하고 있나 힘겹게 사진 찍었다. 마치 숲속의 나무들 사이에 싸움이 나서 참나무와 물푸레나무들은 다 멸종하고 독을 뿜는 소나무만이 독야청청하여 애국가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도시의 z축은 다른 축들의 희생 위에 버티고 서 있다. 벤야민이 ‘문명의 기록 치고 야만의 기록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한 것처럼, x, y축의 희생 없이 이루어진 z축의 발전은 없다. 나날이 위세를 떨쳐 가는 z축은 자연의 한계에 도전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높이가 300미터가 넘는 오늘날의 사치급 주상복합 건물은 실제로 구름 보다 높이 서 있는 경우도 있다. 무슨 멈출 줄 모르고 치솟는 z축의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사진은 표상을 통해 경고한다. 너 너무 높이 올라갔어.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에게는 파멸만이 있을 뿐이다. 한국의 도시가 바벨탑처럼 될 수도 있다. 그런 경고의 모습은 서울에서만 아니라 부산에서, 탄광촌에서, 교회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섬을 메워 만든 신도시에서 다 발견된다. 사진가는 그것을 너무 일찍 보아버린 걸까. 우리는 사진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Z축에 대응하는 또 다른 방법은 아예 헬리콥터를 타고 높이 놀라가 버리는 것이다. 더 이상 구조물의 xyz축이 없이 오로지 빈 공간만 있는 하늘에서 보면 구조물이 가진 xyz축들은 다 앙증맞은 시각적 기호로 변해 버린다. 그 높이에서는 도시가 가하는 일상적 스트레스는 보이지 않는 반면에 도시 전체가 이루고 있는 지형의 관상(physiognomy)이 드러난다. 거기서는 매연도 안 느껴지고 차도 안 밀리고 사람들이 싸우지도 않는다. 그 대신, 영등포구 혹은 서초구라는 관상이 드러난다. 그것은 땅위에서 사는 사람은 느끼지 못하지만 항상 잠재해 있는 어떤 것이다. 옛날의 철학자나 심리학자는 어떤 사태의 이면을 탐구하기 위해 상징이나 내면, 근원형상 등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공간으로 들어갔지만 오늘날의 도시 사진가는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하늘로 올라간다. 거기에 도시의 본질이 감춰져 있었던 것이다. 

XyZ축에 시간의 축을 더하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사진가도 있다. 1970년대의 서울은 Z축이 다른 축들을 막 압도하기 시작한 때였는데, 이때의 사람들은 도시에서 밭을 갈고 진흙바닥을 걸어 다녔으며 큰 길에서 축구를 했다. 흡사 그들은 오늘날의 도시와 완전히 다른 도시에서 살았던 것 같다. 물론 1970년대의 도시는 오늘날의 도시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당시에는 스타벅스도 와이파이도 YF쏘나타도 악플도 없었다. 그 자리에 '1970년대'가 큼지막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독재가가 호령하고 인권이란 말은 외국어였던 1970년대가 말이다. 그런 도시의 생존자가 자신의 생존의 수단으로 자랑스럽게 내놓은 것이 그때의 사진이다. 그는 1970년대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2010년을 위해 1970년대를 만들고 있었다. 이제 그 과일이 익어서 딸 때가 됐다. 1970년대는 이제야 익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야 우리는 그때를 독재의 시대라고, 근대화의 성장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사진을 통해.

이장섭_G.Nr_38 B.D 17_2010
이강우_사북 야경, 폐광촌_2006

그런데 도시는 꼭 밖으로 나가서 힘들게 사진으로 찍어야 제 모습을 드러내는가? 이미 도시에 대한 많은 자료들이 있다. 사실 도시는 건물이나 도로 같은 물질적인 것들의 집합체일뿐더러 정보와 기호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도시를 살아간다는 것은 물질적인 사물의 질서를 따른다는 것도 되지만 정보와 기호를 읽고 따르는 것도 포함한다. 그리고 비물질적이고 추상적인 정보와 기호의 위력은 날로 커간다. 교통신호등이나 고층건물의 냉난방, 방범을 유지하는 것은 사람의 근육이나 부릅뜬 눈의 명령이 아니라 정보의 명령이다. 그런 정보들이 스마트해지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무장해 가는 요즘 도시의 네트웍은 더 이상 종로, 을지로, 청계천, 몇 번 버스, 지하철 몇 호선이 아니라 와이파이, 아이폰, 안드로이드폰이 되간다. 도시는 점점 탈물질화 되어 가고, 도시의 표상도 도시의 길거리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는 사이버 공간에 둥둥 떠있다. 그 정보의 표상이 아무데나 착륙하면 그게 우리의 정보 단말기이다. 단말기는 걸어다니므로 도시의 표상도 우리를 졸졸 따라다닌다. 그게 오늘날 인간과 도시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잡으면 그게 서울의 모습이다. 그래서 어떤 사진가는 정보 공간에 있는 도시의 모습들을 채집하여 도시의 표상으로 내놓기도 한다.

백승철_송도 신도시_2010
유병욱_icairport_2010

이제 도시가 좀 참을만 해졌는지? 도시는 매력적이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하다. 우리는 도시의 공기가 나쁘고 인심은 사납고 범죄가 들끓고 환경이 안 좋다고 투덜대면서도 도시의 교육과 쇼핑과 문화를 쫓아 꾸역꾸역 몰려든다. 사람들은 도시의 콘크리트 건물이 흉하다고 하면서도 비싼 돈을 주고 사고, 차가 많아서 죽겠다면서도 비싼 돈을 주고 차를 사서 도시에 끼어든다. 도시는 분명 스트레스의 온상인데도 사람들은 그 스트레스의 한가운데로 몰려든다. 아무리 맑은 자연을 묘사한 예술작품이라도 그것이 소통되는 공간은 도시이다. 설악산 마등령 사진을 찍어서 마등령에 걸어놔 봐야 빛이 안 난다. 1930년대 미국의 남부 시골의 참상을 찍은 사진도 뉴욕, 시카고, 엘에이 등의 도시에 전시됐지 그 시골에 전시되지 않았다. 사업도 금융도 범죄도 문화도 다 도시에서 일어난다. 도대체 도시가 무엇이길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자석 노릇을 하는 걸까. 그런 점에 대해 사진을 통해 알아보자는 것이 『XyZ City』라는 전시의 목적이다. 이제는 슬슬 도시를 떠나도 될 것 같다. 

■ 이영준

https://neolook.com/archives/20101102g

수직 상승을 꿈꾸는 도시 ‘서울’을 주제로 한 전시회 『xyZ City』와 함께 발간된 책. 
탐구심 어린 카메라로 1970년대부터의 서울을 신랄하게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서울에 얽매인 실존과 욕망, 그리고 희생의 착종을 풀어낸다.

250 × 255mm / 200쪽 / 무선 소프트커버 / 2010년 11월 1일 발행 / 20,000원 / ISBN 978-89-94207-04-9 03600

워크룸프레스 발행

이영준 외 지음


xyZ City / 이영준

도시의 텍스트들(Texts on City) / 서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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