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속냉각하듯…보이지 않는 걸 조각하려는 욕망

정서영 개인전과 전소정 개인전의 공통점숨쉬는 공기를 연장으로 두드린다니. 이런 놀라운 생각을 한 조각가가 있다. 정서영(56). 대학을 졸업하고 1990년대 미술판에 뛰어든 그를 세상은 ‘X세대’라 불렀다. 그를 비롯해 박이소, 이불, 최정화 등 풋풋한 30대 작가들은 당시 주류 모더니즘 회화(단색화)와 민중미술의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술 언어를 모색했다. 서울대 조소과 출신의 정서영도 흙, 청동, 돌 같은 전통적 조각 재료를 집어 던지고 스티로폼, 합판 등 일상의 사물을 조각의 재료로 끌어안았다. 그런 신선함이 인정받아 2003년 황인기, 박이소와 함께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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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공기를 두드려서’라는 화두를 들고 4년 만에 국내 개인전을 한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바라캇컨템포러리에서 하는 동명의 개인전에서다. 전시는 제목이 시사하듯 보이지 않은 것을 시각화하는 데 집중한다. 정확하게는 조각화 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우선 눈에 띄는 것은 흰색 좌대와 그 위에 둔 A4용지처럼 얇은 도자기판. 거기엔 학교 다닐 때 자를 사용해 표어 글씨를 쓴 듯한 흔적이 있다. ‘우주로 날아갈 때는 코를 빼놓고 간다’. 수수께끼 같은 문장은 몇 년 전 DMZ에서 열렸던 미술프로젝트에서 참여했던 경험을 담은 것이다. 자로 쓴 문장은 잉크가 번져 얼룩져있는데, 당시 몸이 불편해 자에 의지해 글씨를 썼던 작가의 기억이 배어있다. 섬광처럼 사라지는 찰나의 과거를 급속냉각시켜 보존할 수 없을까. 작가는 글씨가 적힌 A4용지를 도자기 형태로 구워 좌대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도자기의 단단하면서 매끄러운 표면에는 추억조차 고체처럼 만들어 영구화시키는 힘이 있다.
정서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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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대가 도열해 있는 너머에는 합판으로 만든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 안에는 ‘피, 살, 뼈’를 뜻하는 영어 단어 ‘BLOODFLESHBONE'이라는 글자가 투박하게 조각되어 있다. 그는 작가 노트에 뭔가를 끄적거리는 습성이 있는데, 어느 날 이 단어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언어는 회화보다 선명하고 직설적이다. 작가는 단어를 흙이나 청동 같은 조각의 재료로 다루고 싶었다. “세 단어가 가진 강도를 드러내고 싶었어요. 말이 조각의 몸을 가지고 자신의 존재를 뾰족하게 드러내는 상태 말이에요. 그런 목적이라면 안내판 형태가 나을 거로 생각했어요. 이정표를 들여다보듯, 사람들은 안내판 위의 글을 집중해서 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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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영 작, '피, 살, 뼈'. 2019년 작, 나무작가에겐 그렇게 문득 눈에 띄는 사물이 많다. 사람의 뇌처럼 쪼글쪼글한 호두의 형태가 재밌어 오랫동안 들여다본 작가는 자신이 느낀 흥미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작가는 호두를 조각처럼 캐스팅한 뒤, 조립 모형 로봇처럼 인공적인 느낌의 초록색을 색칠했다. 그렇게 플라스틱 느낌이 나는 호두를 조각해서는 더 눈에 띄게 하고 싶어 장식장 안에 넣었다. 심지어 호두에 반한 그 순간에 대해 명상해보라는 듯 동영상으로 만들었다. 동영상 속에는 호두 하나가 오롯이 노출되는데, 하잘것없는 호두는 그렇게 유아독존 숭배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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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영 작, <호두>, 2020년 작, 폴리우레탄, 나무, 유리, 페인트.독일에서 유학한 뒤 처음 그가 선보인 작업은 일상의 물건을 엉뚱하게 배치함으로써 생기는 조각적 아름다움이다. 의자 위에 나무 막대기를 세운 뒤 천을 걸치는 식이다. 맥락이 닿지 않은 그 조합이 의외로 발산하는 조형적 아름다움을 그는 예술이라 호명했다. 이번 작업도 그가 늘 질문했던 조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새로 찾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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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소정 작가정서영의 한참 후배인 30대 전소정(38) 작가의 신작 역시 보이지 않은 것을 급속 냉각하듯 조각화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역시 서울대 조소과를 나온 전소정은 지금까지 영상 매체를 주로 했다. 그러다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수상 기념전인 ‘새로운 상점’전에서 전공인 조각으로 오랜만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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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소정 작, <조직, 무릎>, 2020년 작, 플라스틱이상의 시 ‘건축무한육면각체’에서 영감을 얻은 이번 전시에서는 상점의 진열장처럼 구조물을 설치한 뒤 신작 조각품을 진열했다. 커다란 얼음 조각 안에 푸른색 보석이 들어있는 것 같은 작품이다. 안을 들여다보면 제조 일자까지 선명한 초록 페트병 등 폐플라스틱이 들어있다. 소비 만능의 끝에 일어나는 환경재앙을 그는 이토록 고혹적으로 경고하고 있다. 전소정의 개인전은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아틀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다. 두 전시 모두 7월 5일까지.

국민일보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2020.06.12
https://n.news.naver.com/article/005/0001331057?fbclid=IwAR0wfBAgs1JskvT3n_nemlXDH7GMVJ-0s9jRnKBcgwZ_6_gG62Adhgclu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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