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말 서울 중앙공보관에서는 희한한 볼거리가 벌어졌다. 우산을 쓰고 앉은 여성의 주위를 촛불을 손에 든 청년들이 빙빙 돌면서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부르다가 우산을 찢은 '비닐 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은 다양한 해석을 불렀다. 오광수씨가 기획하고 청년 미술작가들이 참여한 이날의 행위는 한국 최초의 '행위예술', 일명 '퍼포먼스'로 기록된다. 이듬해 봄 홍대 미대를 나온 작가 정강자가 주축이 됐던 '투명 풍선과 누드'는 논란을 더 키웠다. 삼엄하던 군부독재시절 음악 다방에서 토플리스 차림인 정강자의 몸에 풍선을 붙인 이 퍼포먼스는 '퇴폐', '불온' 등의 수식어를 달고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상당기간 '해프닝'이라고 불렸던 우리나라 행위예술은 숱한 스타작가와 에피소드를 낳았다. 지난해 타계한 백남준은 빼놓을 수 없는 작가다. 예술적 동지였던 요제프 보이스가 사망하자 1990년 보이스의 펠트모자와 한국의 갓을 함께 태우며 펼쳤던 추모굿을 비롯해 바이올린에 줄을 매달아 끌고 다니거나 피아노를 뒤집어엎고, 넥타이를 자르고, 샬럿 무어먼의 몸을 첼로삼아 펼친 퍼포먼스는 백남준을 괴짜 예술가로 각인시켰다.
1990년대에는 여성작가 이불(43)이 누드 퍼포먼스로 시선을 끌었다. 썩어가는 생선에 반짝이를 붙여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펼쳐놓았던 퍼포먼스는 그를 세계무대에 알리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에서 행위예술이 시작된 지 40년이 된 것을 기념해 24일 시작하는 전시 '한국의 행위예술 40년 1967-2007'은 회화나 조각 등 전시가 끝나도 작품이 남는 다른 시각예술 분야와 달리 기록으로만 존재해온 행위 예술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한 전시다.
시기를 ▲1967-1979년 '해프닝에서 이벤트로' 넘어가는 시기(강국진, 김구림, 김순기, 성능경, 이강소, 이건용, 이승택, 정강자, 제4집단) ▲1980-1993년 '행동의 드라마' 시기(김용문, 신영성, 윤진섭, 이불, 이상현, 하용석) ▲1994년부터 현재까지 '행위-변주'의 시기(김아타, 박이창식, 조습, 박혜성, 고승욱, 이윰, 낸시랭, 황신혜밴드)로 구분했다. 주로 작가들이 소장하던 사진자료와 관련 보도내용 등을 소개한다.
https://www.yna.co.kr/view/MYH20070824006600355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2007/08/24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 展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시(詩)’를 흔쾌히 예술의 한 분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시는 예술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두 가지 덕목을 결여하고 있었다. 우선 시는 대리석을 쪼아 조각상을 만드는 것과 같은 물질적 의미에서의 제작이 아니었고, 우연에 가까운 영감에 의해 쓰여질 뿐 어떤 특정한 규칙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르스와 테크네, 그리스인들은 미주알고주알 따지기를 좋아하던 사람들이었다.
물론 시에 대한 이런 태도는 후대로 내려가면서 확연하게 개선되었다. 화가이자 시인이었던 영국의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는 “남자나 여자가 시인, 화가, 음악가, 건축가 가운데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다. 그대는 아버지와 어머니, 집과 나라를 떠나야 한다. 그들이 예술의 길을 가로막는다면”이라고 말하며 시를 그림, 음악, 건축과 함께 4대 예술의 하나로 한껏 치켜세웠다. 기원전 4세기 플라톤이 시는 이성(理性)의 산물이 아니라 비이성적인 영감의 산물이라며 열등한 모방 예술의 범주에 포함시키던 때로부터 2000여년이 흐른 뒤였다.
지금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회장의 초입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신문스크랩과 사진으로 남아 있는 지난 1967년 중앙공보관에서 있었던 행위미술 ‘비닐 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의 기록이다. 전시회장의 팻말처럼 올해는 이 땅에 최초의 행위미술이 베풀어진 지 꼭 40주년이 되는 해다. 그러나 소란한 관람객들 틈에 섞여 전시를 둘러보던 나는 문득 행위미술을 바라보는 관람객들의 시선 한편에는 아직 옛날 그리스인들이 시를 대하던 것과 같은 미심쩍음(이게 예술이라고?)이 남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과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행위미술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너무도 흔하게 사용되어 이제는 일상 용어가 되다시피 한 행위미술(예술)이라는 단어는 사실 상당히 재미난 조어(造語)다. 작위와 부작위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붓을 들든, 먹을 갈든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그릴 수 없다는 점에서 사실 모든 미술은 행위미술이다. 그러나 행위미술이라는 단어는 무엇인가를 재현하고 창조하는 수단으로써의 행위가 아닌,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그림을 그리고 돌을 쪼는 것과 달리 행위미술은 행위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회화나 조각 같은 결과물을 남기지 않는다. 즉 아무런 소산(所産)이 없다. 허무하다. 이벤트, 해프닝이라는 말이 붙는 까닭이다.
행위미술은 20세기 초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전위예술의 한 장르로 발생했다. 본래 시각예술에서 비롯되었어도 행위미술의 특성은 공연예술에 가까운 것이었다. 미술관 벽에 걸린 유화를 감상하는 것과 달리 행위미술은 현장에서 일어나는 행위자의 행위로 관람객들에게 미적 쾌감을 선사하는 특이한 장르였다. 예술이 베풀어지는 공간에 현재성이라는 이름으로 더해진 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1회성의 예술, 그것이 바로 공간과 시간을 아우르는 행위미술의 특성이었다. 대중의 참여가 필수적이라는 점에서도 행위미술은 관객의 위치를 수동적인 감상에서 능동적인 참여로 끌어올린 20세기적인 장르이기도 했다. 작가에 의한 일방적인 시혜가 아닌 감상자의 적극적인 참여(관람객들은 백남준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넥타이를 희생했다)와 동참이 필요한 최초의 미술 장르였다. 지난 세월 미켈란젤로에서 피카소까지 모든 화가와 조각가들은 감히 보통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신화, 혹은 살아있는 전설의 존재였지만 행위미술의 작가들은 바로 관객들 눈앞에서 생생하게 웃고 떠들며 넥타이를 자르는 현실의 인간이었다. 20세기 마침내 예술은 탈신화화(化)를 이루어낸 것이었다. 신화에서 현실로, 가상의 공간에서 현실의 공간으로 행위미술은 미술을 일상의 한 장면으로 끄집어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미술관의 입장에서 이런 행위미술은 참으로 난감한 존재다. 행위미술이 미술의 한 장르라면 마땅히 그것이 머물러야 할 장소는 미술관이다. 하지만 행위미술은 관객의 눈앞에서 완성되고 박수와 함께 흩어져 멸(滅)하는 1회성의 예술이다. 미술관은 행위미술의 무엇을 보존하고 수장해 기록으로 남길 것인가? 전시장의 ‘비닐 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 역시 이제는 40년 전 신문스크랩의 낡은 기록뿐 그 날의 모습을 전하는 것은 몇장의 사진이 전부다. 형체는 이미 흩어졌고 자취는 묘연하다.
‘희미해져가는 기억 속의 편린들을 다시 한번 아로새겨보고자’ 특별전을 기획했다는 미술관 브로슈어 문구에서는 이런 우리나라 행위미술의 40년을 회고하는 전시회를 준비해야 하는 학예사의 고심이 역력하다. 그러나 학예사의 말마따나 20세기 현대미술의 격랑 속에서 행위미술이 차지하는 위상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한때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갑갑했던 우리 현대사에 신선한 도발과 충격의 바람을 불어넣어줬던 고마운 숨구멍이었고, 또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사진과 비디오 등으로 꾸준히 그 매체를 확장해가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우리와 함께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행위미술이다. 전시는 1부 ‘1967~79:해프닝에서 이벤트로’와 2부 ‘1980~1993:행동의 드라마’, 그리고 3부 ‘1994~2007:행위-변주’의 세가지 시대별 섹션으로 구성된다. 전시 기간 매일 오후 2시와 4시에 전시 설명회가 개최된다. 입장료 3000원. 10월28일까지.
문화공간 읽기이장현 문화에세이스트
https://www.khan.co.kr/article/200709130954441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