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부적절한 만남 2016 - moment Untimely Encounter 2016 – moment展

참여작가
한국 / 고승욱_구민자_김재범싱가포르 / 카이람 Kai Lam_루즈한 Loo Zihan_바니 하이칼 Bani Haykal일본 / 류다이 타카노 Ryudai Takao_사토코 네마 Satoko Nema
퍼포먼스 Performance2016_1216_금요일_05:00pm카이람_Washing Machine Concert No.3(After Huang Yong Ping)바니 하이칼, 부르스 퀙_artificial sweeteners(for potentially bitter things)루즈한_Subject to Shame으로의 초대2016_1217_토요일_03:00pm루즈한_Subject to Shame구민자_로컬 로컬 ; con-temphe-rary2017_0112_목요일_05:00pm클로징 퍼포먼스 / 김재범_Unbreakable
아티스트 토크+워크샵 Artist Talk + Workshop / 2016_1218_일요일_03:00pm
기획 / 이병희_마유모 이노우에 Mayumo Inoue_부르스 퀙 Bruce Quek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_Singapore International Foundation_Nomura Foundation
대안공간 루프 ALTERNATIVE SPACE LOOP, Seoulwww.galleryloop.com
2016_1216 ▶ 2017_0112
이 프로젝트는 아시아의 현대성에 대한 성찰적 프로젝트이자, 현대의 상황에서 '충동'이 어떻게 신자유주의_글로벌라이제이션의 결탁으로서 탄생한 '생명정치'에서 작동하는지를 살펴보는 프로젝트입니다. 충동은 정서(정동)의 응집과 소멸, 전이와 혼란에 따라서 '생명'에 대한 통치가 집단적 절멸로 치닫을 것인지, 아니면 근본적인 변화로 이끌 수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예술가의 활동을 광의의 의미에서의 '퍼포먼스'라고 보고, 그 활동의 생산물, 결과물, 잔여물이 각종 매개하는 현장을 전시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먼트라 함은 일종의 '갈라짐의 순간'이며, 그 순간에서 양가적으로 돌발하는 정서(정동)의 충동 차원과 그것의 이동을 주의깊게 보고 있습니다. 
참여 작가들은 주로 멀티미디어 아티스트들로서, 싱가포르의 퍼포먼스 아티스트들과 일본의 사진 작가들, 그리고 한국의 멀티미디어 아티스트들입니다. 지난 3년여간 기획자는 일부 작가들과의 현장 리서치, 싱가포르 현지에서의 작가와 현대미술 리서치, 일본의 학자와의 지속적인 토론 등을 실시하였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세대별 차이, 작품간의 차이, 작업 방식의 차이, 살아가는 스타일의 차이 등으로 보이는 것을 들여다보면 그 차이들은 비슷한 것들의 나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체를 위한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주목하는 것은 어떤 대체 불가능한 것입니다. 가령 사회의 정서에 있어서 충동의 차원이 혐오로 흐르느냐, 아니면 행위로 흐르느냐의 문제는 양단간에 선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의 행위에 있어서 죄책감과 수치심의 내기또한 그렇습니다. 
반복이라는 메카니즘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닙니다. 비판의 대상이 계속 비판의 대상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둘러싼 판타지가 아직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복은 판타지를 제거하고, 탈신비화시켜서 그 대상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즉, 그리하여 반복은 어떤 생산의 자리를 만들어줍니다. 그것이 어떤 잠재성의 자리라면, 강요나 의무가 아닌 '충동'은 여기에서 그것을 발현의 기제가 됩니다. 그리하여 이 프로젝트에서는 충동이 증상적으로 드러나는 현장, 사건들, 그리고 그것의 지속가능성을 주목해보고 있습니다. 한 예로, 이 가능성은1990년대의 휴먼에 관한 것(윤리적 인간, 다문화주의의 리버럴한 인간, 건전 글로벌 시티즌)이 지금 2010년대에 지금 (의사)반복 혹은 회고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여기에 걸린 내기들을 살펴봄으로써 점쳐볼 수 있을것입니다.
1990년대에 직전 시대의 파시즘적 네셔널리즘과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으로써, 정치적 올바름, 다문화주의에 대한 찬양, 건전한 글로벌 시민으로서의 역할 강조, 문화다양성의 거품 등이 생겨났다고 한다면, 2000년대는 그것의 신자유주의적 상품화와 푸코식의 통치성(governmentality)이 효율적으로 먹혀들어간 시기로서, 지금껏 우리가 리버럴-파시즘적 상황에 처한, 베어라이프의 대두와 극단적 상황들이 만연함을 목도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2000년대에 배태된 네오 파시즘적 상황에 저항하면서 한편으로1990년대의 글로벌라이제이션과 다문화주의의 허황됨을 비판합니다. 이 비판이 지금의 상황에서는 2000년대식 비판(낭만적인 인텔리들이구만), 2010년대식 비판(거품 속에서 결국 네오 파시즘을 불러왔잖아)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전지구화가 실패했음을 인정하라라고 종용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전지구화 자체가 우스꽝스러워지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제 더이상 재미 없는 (판타지가 기능하지 않는) 차원이 도래함으로써 진정으로 다른 차원으로 뒤바뀔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증상들의 일례로, 정서의 전환이 있습니다. 가령 가만 보면 지난 2000년대를 통해 배태된 '지침', '무기력', '비아냥과 냉소', '혐오' 등과 '도착'적 양태들이 있었습니다. 변화의 터전인 '충동'이 혐오와 같은 차원에 휩쓸려 있었던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충동은 그리고 아주 강렬하게 이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것과 변화에 대한 열망'에 대한 것임은 분명합니다.
구민자_Pasta Nowadays_퍼포먼스_2016 
구민자_untitled project_영상_2016





https://issuu.com/jaebumkim/docs/______________________517c794c1ccb97

예술매체 속에서 제가 충동적 차원을 불러일으키는데 뽑고 있는 것이, 'shame', '증상적인 것들', '개별 주체 몸의 우연한 어떤 측면들-행동 속도, 표정, 목소리' 등등입니다. 그리고 이것의 전개 양상은,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폭력_놀이_유희', '농담', 괘변', '에피메랄리티_지속_시간성' 등에 의해서입니다.
이제는 비천해지기와 숭고해지기 사이에 예술이 있지 않습니다.정서적 껄끄러움과 시간적 차원에서의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보이는 중첩 사이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술은 새롭게 추상성을 획득하며, 시간매체로서 '사라지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작가들의 행위를 우리는 예전에 작업, 프로젝트 등으로 불렀습니다만, 이제는 '퍼포먼스'라고 하는게 낫겠습니다. 그리고 전시는 그것의 잔상 혹은 남겨진 잔여물이라고 하는게 낫겠습니다. 물리적으로는 곧 소멸될 퍼포먼스의 잔여물은, 그 어떤 값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겠지만, 결코 역사속에서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마치 산죽음과 죽음의 관계처럼요. 즉 그것은 거래불가능한 예술입니다.
□ 퍼포먼스와 워크샵1. 카이 람 Kai Lam 「Washing Machine Concert No.3 (After Huang Yong Ping), 2016」세탁기를 이용하여 예술관련 서적과 팜플랫을 세탁합니다 카이람은 이 퍼포먼스를 '콘서트'라고 명하면서, 카이람 특유의 '오작동', '실패', '서투룸' 과 더불어 루핑looping-라이브live 방식으로 사운드 퍼포먼스 즉흥성과 파괴적 인상을 극대화시키고자 합니다. 이 작업의 착상은, 1987년 뉴욕의 워커아트센터에서 있었던 중국작가 황용핑의 The History of Chinese Painting and The History of Modern Western Art Washed in The Washing Machine for two Minutes(1987/1993)입니다. 2. 바니 하이칼 Bani Haykal 「artificial sweeteners (for potentially bitter things), 2016」바니 하이칼은 원격 라이브 공연 방식으로 싱가포르와 서울을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실제 작가나 조작자가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관람객으로 하여금 '소리' 와 공간, 설치 자체에만 집중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변수로 등장시킵니다. 이 '변수'가 퍼포먼스 자체를 수행하게끔 하고 있습니다.3. 루즈한 Loo Zihan 「Subject to Shame , 2016」먼저 12월 16일 전시 오프닝에서 작가는 다음날인 17일에 있을 관객참여형 퍼포먼스를 준비합니다. 이때 작가는 전시장에 모인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미리 마련해 놓은 오브제와 그와 관련된 사건들을 중심으로 'Shame 수치심'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17일에 관람객들을 위한 공유 세션을 마련하고, 초대합니다. 4. 구민자 「로컬로컬 : con-tempeh-rary」(가제)17일에 구민자는 참여자들과 일반관객들을 위하여 요리를 할 예정인데, 그 요리 제목이 con-tempeh-rary 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템페 요리입니다. 템페는 인도네시아의 일종의 발효 콩 튀김 요리로써, 구민자가 2014년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 아티스트 리서치로 방문하여서 이수한 쿠킹클래스에서 시도하였던 요리이기도 합니다. 작가에 의하면, 템페는 두번의 전지구화 과정을 다 보여줍니다. 전지구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떤 독특성의 차원과 로컬리티의 차원에서 발견된 '템페'가 일궈낼 이야기들이 무엇일지, 아마도 우리는 우선 같이 시식을 하면서 생각을 해봐야할듯 합니다. 5. 김재범의 퍼포마티브 토크 「Unbreakable」(2016 in Loop)클로징 퍼포먼스로 2017년 1월 12일 5시에 실시될 예정입니다. 이 토크는 김재범이 사진작업들과 함께, 프란시스 예이츠의 『기억의 기술』(Frances Yates, The Art of Memory, 1960 출판, 1999년 재판본)과 관련하여 작성한 그의 노트를 읽는 토크가 될 것입니다. ■ 이병희
This is a project that reflects on the modernity of Asia and examines the role of biopolitics that appears as the capture of the drive in neoliberal globalization. It asks whether this global biopolitics will lead to collective catastrophes or open up the possibilities for a radical change. In this context, I propose, the artist's practice can be seen as a "performance" in its broad sense. With this in mind, this exhibition has been organized as an event not simply for introducing artists and their works to the audience but for showing remainders artists' performances have left behind. Referring to the artist's disjunctive mode of survival as the split moment, I explore when and where these moments emerge in each artist's work and in each period. What we usually recognize as differences between generations, between artworks, between modes of working, and between life-styles are in fact measurable and calculable ones as these differences are based on the replaceability of different things. But this exhibition draws our attention to something irreplaceable between different things. For instance, there is no such thing as replacement between the drive's flow into the feeling of disgust and its flow into that of ethical act. Similarly, replacement is unthinkable between the sense of guilt and that of shame. Repetition is not that of the same or similar. If the object of critique remains the same, this is because its underlying fantasy is sustained. By removing its underlying fantasy and demythologizing it, however, repetition makes the object a nothing, thus creating room for the emergence of potentialities and the manifestation of drives as other than duties. In this regard, it deserves noting the scenes and incidents where drives are persistently and symptomatically expressed. For instance, it should be important to think in what ways humanism of the 1990s—and its themes of the ethical human, the multicultural liberal human, and the healthy global citizen—is repeated or recollected in the 2010s. If in the 1990s, political correctness, multiculturalism, and the healthy global citizen were highlighted as a resistance to fascist nationalisms and authoritarianisms, in the 2000s, they have been subsumed under neoliberal commodification and Foucauldian governmentality while at the same time political subjects have been reduced to bare life. And this shift has resulted in the emergence of neo-fascist tendencies all over the globe. In this way, we find ourselves resisting neo-fascist situations while at the same time criticizing globalization and multiculturalism of the 1990s. This criticism does not simply mean that globalization is demonized but it has become ridiculous and ordinary. This shows how this sense of boredom and the non-existence of fantasy sets up a condition for globalization and multiculturalism to become something else. For instance, we can consider an affective change that we have seen recently. All the way through the 2000s, we had been affected with feelings of lethargy, frustration, cynicality and disgust. The drive had been invested with feelings such as disgust. Of course, this indirectly expressed hopes for something new and radical changes. However, in recent years, we have also seen an alternative tendency in contemporary Asian art that can run counter to this affective tendency of the drive. The drive is changing its libidos into feelings of shame, something symptomatic, contingent aspects (including gestures, speeds, facial distortions, voices, etc.) of a singular body, and so on. And they are expressed in terms of violence, play, joke, sophistry, ephemerality, duration, and temporality. Art no longer exists between something ridiculous and sublime, but rather between affective friction and temporal asynchrony. Art thus obtains a new abstraction and begins to serve as a "vanishing mediator." In the past, we called the artist's practice a "work" or a "project," but now it would be better to call it a "performance" and call its exhibition its "residues" or "remainders." The remainder of the performance, though physically being at the brink of disappearance, cannot be bought at any price but it does not disappear in the history. As a kind of the undead, it is an irreplaceable and unmeasurable art.  Lee Byunghee
"Con-Tempeh-Rare" Performance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를 거쳐 벨기에에서 만날 수 있게 된, 템페라는 발효 콩 음식을 요리
Cooking Tempeh - Indonesian(and around) fermented soy product, and talk about Tempeh's 'Journey' to the Netherlands and then Belgium.
Thanks to Pedro Moraes ,  Jonathan Paepens and Lukas Verdijk for sharing your Tempeh Reci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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