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말하는 이미지에 관한 단상_ 김범의 ‘눈치’를 중심으로

2010년을 고작 두 달 정도 남겨 놓은 지금, 올 한 해 진행되었던 미술 전시들을 돌아 보면 단연 ‘언어’를 주제로 한 전시가 유달리 많이 등장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성곡미술관에서 열렸던 <언어놀이>전이 있었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언어의 그늘>전이 열렸다. 아르코미술관에서는 이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씨의 출발>이라는 전시가, 공간해밀톤에서는 <직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라는 제목으로 이상과 텍스트를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이러한 전시는 언어 그 자체를 하나의 재료로 삼거나, 혹은 조형 언어와의 관계항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파생시키는 도구로 기능하는 언어에 대해 다루고 있다. 미술에서 때 아닌 언어의 범람이 진행되는 가운데 필자는 문자 언어를 사용하지만 앞선 전시에서 소개된 작품과는 조금 다른, 어찌 보면 미술보다는 문학의 구조에 더 가까워 보이는 작품이 곳곳에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지난 여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렸던 김범의 개인전에 소개된 작은 책 《눈치》로 이 짧은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눈치》는 한 마리의 특이한 개에 관한 이야기이다.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눈치’라는 이름을 가진 개에 대한 1인칭 화자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작중 화자는 우리가 이 개를 입양할 수밖에 없도록 도덕적 의무를 강조하고 설득한다. 그리고 글을 통해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기도 하고 책 속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때로는 눈치가 바로 독자 앞에서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움직이지도 않고. 그리고 그 개는 천천히 우리를 향해 다가 온다”(김범 《눈치》 p.18)는 것처럼 상상의 공간 속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인다. 때로는 어설프게 그려진 개의 집 모양이라던가, 혹은 화자와 독자 사이에 존재하는 가상의 경계선을 집어 넣어 독자의 상상을 돕는다. 사실 문자나 텍스트를 사용하는 미술은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지만, 책장을 하나씩 넘기며 왠지 낯선 기분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이것은 미술이라고 불리기에는 지나치게 문학에 가깝다. 그렇다면 왜 현대문학이라는 표제가 붙은 서가가 아닌, 바로 이곳 전시장 복도의 의자 위에 놓여 있는 것일까?

눈치 Noonchi, 2009
Book in English and Korean version
18x12,7cm, 61 pages, b/w
Published in Seoul

‘미술사 속의 텍스트’와는 다른 《눈치》의 형식

미술 작품이 처음 출판물 형식으로 등장한 것은 196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이미 50여 년 전부터 작가들이 이 같은 방식을 실험했던 것이다. 당시 플럭서스와 팝이 융합된 로버트 모리스의 <카드 파일>이 있었고, 에드 루샤는 <26>를 찍어 인쇄된 책의 형식으로 배포하기도 하였다. 한편 1960년대 후반에는 조셉 코수스, 로렌스 와이너 같은 작가들이 등장하여 텍스트를 이용해서 미술이라는 기본 개념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와이너는 <의도의 진술>에서 작가는 작품을 구성할 수도 제조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꼭 만들어질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며 작품을 오브제 중심이 아닌, 보다 언어화된 개념적인 그 무엇으로 확장시켰다. 코수스는 1980년대 이후 <하이퍼카텍시스> <영과 무>와 같은 작품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텍스트를 사용하되, 그것을 시각예술이 갖는 형상성을 해체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텍스트를 사용한 앞선 예술가들, 넓게 보면 개념미술가들이 사용했던 언어는 이미지를 해체하거나, 모방이나 재현에 대한 거부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데 이용되었다. 아니면 지시적인 언어의 성격을 이미지와 함께 끌어들이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때문에 비록 그들이 시각적 경험보다는 순수한 개념, 사고, 이성을 중요시하는 풍토를 조성하고, 미술이라는 분야에서 텍스트의 사용을 보편화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하더라도 《눈치》와 같은 이야기가 전시장에 등장하는 이유를 모두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시각성에 대한 비판을 직접적으로 제기하거나, 혹은 사진이나 그림, 오브제와 함께 등장시킴으로써 시각성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미술은 근본적으로 시각성에서부터 시작하는 장르이므로 개념미술가들이 지나치게 언어화된 것은 이 영역 밖으로 벗어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미술의 역사에서 당당히 한 흐름을 차지할 수 있었다.
분명 앞에서 언급한 작가들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눈치》가 전시장에 있는 것이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시 책 속의 이야기를 꼼꼼히 읽어 보면 이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일단 루샤의 경우 책의 형태를 빌렸지만 사진집에 더 가까우니 열외로 친다고 하더라도 텍스트를 이용한 다른 작가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그 차이가 보다 두드러진다. 코수스와 견주어 볼 때 그의 작품 속 언어가 언어의 형상성을 이용해 재현을 부정하는 데 이용되었다면, 《눈치》에서의 텍스트는 언어의 재현적 요소를 매개로 하여 관람자의 상상 속으로 이미지의 장을 확장시키는 데 더 초점을 둔다. 또 다른 예로 들었던 와이너의 경우, 오브제를 만들어 나가는 어떤 상황을 지시하고 설명함으로써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오브제에 다시 속박당한다는 점에서, 현실 속에서는 존재하지도 일어나지도 않은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고 있는 《눈치》와는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눈치》는 미술이 아닌 문학에 더 가까운 것인가? 
문학과 미술의 차이에 대해 가장 직관적이고 분명한 주장을 한 사람은 바로 고트폴트 에프라임 레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레싱은 문학이 시간적인 예술이며 회화는 공간적인 예술이라는 근본적 차이가 존재하는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였다. 《눈치》를 살펴 보면 표지를 여는 순간부터 덮는 순간까지의 시간, 병렬되는 언어 기호가 발생시키는 의미 작용과의 관계를 통해서 미술보다는 문학에 가까운 형식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문학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아직 이르다. 《눈치》의 13페이지 끝에는 점선 모양의 그림이 있고 다음 장에서 화자는 이와 같이 말한다. “당신이 만일 그 경계를 넘고 싶지 않았다면 이 책을 더 이상 읽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미리 알려드렸듯이 당신은 이미 그 개의 영역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독자는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페이지를 넘김과 동시에 경계를 넘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언어를사용한 것은 1차원적이기보다는 2차원과 3차원을 바라 보게 하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26페이지의 한 구절을 들 수 있다. “지금 눈치는 당신의 발치에 엎드려 있다.” 이 문장에서 독자는 현실 공간에 개입하고 상상을 통해 이미지를 만들어 나간다. 이러한 방법은 레싱이 말하는 문학과 미술의 공간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히려 레싱이 극복하고자 했던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ut pictura poesis, 그림처럼 시는)의 전통에 더 부합하는, 각각의 장르를 서로 모방하며 혼재된 공감각적인 차원으로 돌아간다.

시각적 재현을 넘어서는 정신적인 환영
루돌프 아른하임은 시각 매체의 가장 큰 장점이 언어의 1차원적인 연속과 비교해서 형체를 2차원과 3차원의 공간으로 표시한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1차원에 속한 언어는 각 유형에 선명하고 분명한 표지를 마련해 주고, 따라서 지각적 심상이 시각 개념의 목록을 안정시키도록 한다. 다시 말하면 언어는 지적 개념의 연쇄 작용을 일으켜 상황에 대한 이미지를 마음 속에 그리게 하며 동시적 상호작용을 발생시킨다. 아른하임은 레싱이 말한 회화와 시의 구분은 시의 언어가 공간을 다루는 회화의 영역을 지나치게 침범하는 상황에 대한 묘사를 할 경우, 오히려 독자의 마음에서 이미지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방해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곧 언어가 이미지 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인간이 사고를 할 때 시각적 연상 작용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아른하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언어가 불러일으키는 사고의 심상이 꿈이나 회화가 이루지 못한 일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꿈이나 회화가 보여 주고 제시하는 이미지는 이미 완성된 것이지만, 인간의 생각 속에서 존재하는 심상은 감각을 지각하는 상태에서 여러 개별적인 추상성의 수준을 결합해 이미지를 증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른하임의 지적은 김범의 《눈치》가 왜 미술인가에 대한 해결의 단초를 제공한다. 전시장 복도에 앉아 《눈치》를 읽어 내려가면서 느꼈던 낯설음은 언어로 쓰인 이야기가 언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지시하는 상황과 공간에 대한 이미지가 마음의 상에 투사됨으로써, 볼 순 없지만 머릿속에 분명히 그려지는 특정한 상을 그려 내기 때문이다. 김범은 실제로 “물감으로 그리지 않는 회화를 만드는 것이 나의 진정한 의도는 아니다. 천착해 온 것은 이미지와 이미저리(Imagery)의 의미와 예술 작품의 구조이며, 이것은 결국 관람자에게 속한다. …기본적으로 ‘텅 비어 있음’은 관람자의 마음 속 이미저리를 위한 스크린이 될 수 있다.”(《김범》 p.22에서 재인용)라고 말한다. 물리적 실체나 작가가 제시하는 고정된 장면이 아닌 마음 속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미지의 환영을 보는 것은 다소 낯설지만, 이미지와 환영에 관해 다루어 온 미술의 가장 근본적 질문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해석임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김범의 2009년 작 《눈치》를 중심으로 텍스트의 형식을 빌려 이미저리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이러한 예는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함양아의 <넌센스 팩토리>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작가는 이야기를 만들고 전시장에 텍스트를 놓아 둔다. 관람자는 전시장에 와서 텍스트를 읽고 그 공간을 상상한다. 그리고 관람자는 전시장에 들어가서 작가가 관람자의 상상을 돕기 위해, 혹은 작가가 하는 이야기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드로잉이나 설치 작품을 통해서 상상을 더욱 구체화시켜 나간다. 결과적으로 이야기와 파편화된 이미지는 관람자의 상상 속에서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 나가고, 각자의 마음 속에 확장된 세계를 담아간다.
또 다른 예로 강태희가 기획하고 다양한 작가들이 참여한 <책 속의 도서관> 시리즈인 《향》 《모래》 《공항》도 있다. 이는 작가들이 각각의 제목을 모티프로 이야기를 써내려 가거나, 때로는 관련 드로잉 작업을 모아 놓은 것이다. 작가가 이미지를 사고하고 그것을 그림 혹은 다른 형태로 완성하여 관람자에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만들어지는 초기 상태로 환원시켜 이미지가 완성되기 이전, 작가가 만들어 내는 상상의 영역으로 관람자를 초대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드로잉은 작가가 만들어 내는 세계를 완성하는 도구가 아니라 관람자의 상상을 보조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관람자, 혹은 독자는 다른 어떤 시각적 매체보다도 확실하게 상연되는 마음 속의 이미지를 바라볼 수 있다.
플라톤은 문자가 참된 지식이 아닌 지식에 대한 가상만을 가져다 주거나 혹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상기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이 참이라면, 문자가 전달하는 의미가 비록 거짓이거나 허황된 것일지라도 우리는 분명 그 속에서 무언가를 그려낼 수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작가들이 책 속으로 들어가 문자로 된 언어로 말을 거는 것은 사실주의적 환영이나 시각적 환영을 만들어 내는 회화가 아닌, 보다 정신적인 환영을 만들어 내는 회화로 기능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그것이 비록 가상의 이미지이거나, 새로운 것이 아닌 이미 본 어떤 것을 마음 속에 떠올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짧은 이야기 속에서 수없는 이미지의 환영을 만난다. 그것은 때로는 과거의 기억과 연관되기도 하며, 충족될 수 없는 상상의 영역과 관계되기도 하는 불확실한 그 무엇이다. 그러나 복제된 이미지가 원본을 대신하고, 실체 없는 가공된 이미지가 실제 삶을 점령하며, 그 어떤 이미지도 진실함을 보장할 수 없는 현 시대에서 가장 확실하고 진실된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우리 마음 속에 그려지는 심상, 즉 이미저리(Imagery) 바로 그것일 수 있다.
글|박 경 린

art in culture가 주최하는 신진 평론가 발굴 프로젝트 
‘New Vision 미술평론상’
미술평론상’. 올해는 현실적인 공모 시스템이 절실해진 현 미술계의 흐름에 따라 기존 공모 진행 방식을 대폭 수정, 더욱 보완된 방법으로 새 평론가 찾기에 나섰다. 3인의 파이널리스트가 각각 3개의 과제 원고를 작성하는 것으로 본선 프로그램을 진행한 가운데, 그 마지막 과제가 지금 막 완성됐다. 바로 ‘자유주제 평론’이다. 전시 리뷰와 작가 인터뷰 등 특정 형식의 과제가 주어진 지난 1, 2차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파이널리스트 3인이 각자 쓰고 싶은 주제를 정하고 30매 분량의 평론문을 작성했다. 각자의 비평적 사고와 기량을 맘껏 드러낼 수 있는 기회였다. 최종 1인 당선자 선정이 코 앞에 다가온 지금, art는 지난 3개월 간 미술 평론의 새 지평을 열고자 최선을 다해 참여해 준 파이널리스트 3인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http://www.artinculture.kr/content/view/7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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