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가 예술을 만났을때

작가 주재환씨(59)에게 작업 중인 모습을 촬영하고 싶다고 하자 그는 완성된 작품의 ‘오브제’를 뚝 떼어내 정말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당황한 기자에게 “괜찮아, 내용만 전해지면 되니까”라며 태연했다. 그러니까 그의 작품은 컬렉터의 리스트에 오를 만한 ‘물건’이 아니라, 그냥 저냥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시비 걸기’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존재론적인 물음 대신 가라앉은 기억을 휘저으며 “어이, 이거 잊었나?”라고 묻는다. 
요절한 민중화가 오윤이 한때 살았던 벽제의 농가로 그는 넉달전 쯤 옮겨 왔다. 요즘 그는 내년 7월 열릴 첫 개인전을 준비중이다. 그가 민중미술의 한 시발점이 된 ‘현실과 발언’ 창립 동인으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 온 것을 고려한다면 너무 늦은 데뷔전이다. 
“개인전 한번 했지. 73년 쯤 광화문에 있는 ‘쪽샘’이란 민속주점에서 사진콜라주 한 50개 했지.”
당시 반응은 어땠을까.
“반응이고 뭐고 없는 거지. 학교 동창들이랑 술 먹으려고 한 거니까. 동창들한테 미리 ‘작품값’을 걷어서 그걸로 청계천 고서점에서 재료 사서 작품 만들고 다 나눠줬는데, 요새 다시 찾아보려니까 없네.”
그는 1960년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으나 ’객기와 생활고’로 한 학기만에 그만뒀다. 그리고 행상, 외판원, 방범대원 등 안해본 것 없이 다 해봤다고 했다. 월급쟁이 생활도 해봤다. 월간 ‘독서생활’ 편집장, 한국자수박물관 연구원을 거쳐 83년에서 96년까지 그는 도서출판 미진사의 주간을 지냈다. 
“뭔가 삶이 그로테스크해졌지. 집에서 창씨개명해 준 이름으로 중학교에 가고 해방되고 피란다니고 대학 1학년 때 4·19를 맞았지. 그리고 유신,  80년대가 있었어. 내가 쉰살이 넘어서야 유화물감 갖고 작업을 했는데, 젊은 작가들이 형상 작업하는 것과는 아주 달라. 무의식 속에 딱지처럼 덕지덕지 붙어있는 온갖 삶의 기억들을 끈적한 물감으로 녹여내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올해부터 다시 가벼운 매체들 갖고 작업하기 시작했지.”
80년 ‘현실과 발언 창립전’ 이후 그는 각종 단체전에 ‘당일치기’ 작전으로 작품을 만들어 낸다.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시가 있으면 작품 제작에 매달리는 식이다. 그렇게 해서 ‘도시와 시각전’(81) ‘반고문전’(87) ‘현발 10년전’(90) 등에 작품을 냈고,  87, 88년에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를 맡으면서 민미협 전시에도 계속 참여했다. 결국 80년대 내내 민족 민중 미술운동의 태풍 한 가운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언제나 그 중심 밖에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참 웃기지. 민미협 대표까지 했는데 내가 한 것 중에 민중미술의 대표작이 없으니까.”

‘현실과 발언’ ‘민미협’ 등 참여 민족민중미술 이끌어
미술운동이 정점에 달한 80년대 말 발표된 ‘미제껌 송가’(성조기 앞에 ‘쥬시 후레시’ 껌종이를 붙임)나 ‘몬드리안 호텔’(차가운 몬드리안의 추상에 군중을 그려넣음)에는 당시 ‘금기시’됐던 유머와 유희(!)적 감각이 넘쳐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오늘의 작가와 비평가들이 그를 다시 발견하게 된 이유다. 그래서 ‘포럼A’같은 미술 담론지는 그를 ‘민중미술-한국 모더니즘 대립의 틀로는 전혀 담을 수 없는 작가이며, 반대로 양자 모두의 핵심에 닿아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작가이자 미래의 작가’라고 설명한다.
“미술 사조든 무슨 주의든 정의도 잘 모르고 관심도 없지만 자본주의가 욕망을 가진 인간들의 한계겠지. 자장면은 배고플 때 먹음직스럽지만 먹고 난 그릇은 혐오스러워. 그렇게 먹고 싸고, 계속 반복되는 거지.”
자본의 소유에 저항하는 몸짓으로 제도권 미술의 사랑을 받는 젊은 미술인들에 비하면 그의 반권력적인 성향은 체질인 것 같다. 그는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도시와 영상전’에 ‘칼 막스’라는 작품을 냈다. 그는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지는’ 미술계를 거슬러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 분리수거통에 누가 자본론 원서를 버렸더라구. 그런 거 이제 필요 없어진 거지. 액자도 하나 주워서 거기에 책을 붙인 거야.”
그는 요즘 자신의 작업을 ‘천원 미술’이라고 부른다. 재료는 광고전단지, 쓰레기통이나 길거리에서 주운 잡동사니들이고 풀, 본드, 종이같은 것만 돈 주고 산다. 그의 ‘잡동사니 사랑’은 길에서 주운 옷핀, 망가진 압정, 명함광고 등 “난지도에도 못가는” 잡동사니를 어여삐 여겨 의상대사의 법계도에 맞춰 견출지에 붙인 작품으로 1000원밖에 들지 않았다. 

“생활? 정기적 수입은 없지. 이젠 깡으로 버텨.”
미술 기자였던 부인 성금자씨가 작은 미술학원을 운영하므로 그가 “깡으로 버틴다”고 한 것은 생활이 아니라 예술일 것이다.  그는 팔아보겠다고 작품을 해본 적이 없다. 또 그의 작품 대부분이 잡동사니로 만든 것이라 팔릴 리도 없다.  얼마전 그는 ‘미학’ 3부작을 완성했다. 유화 작품이라서 컬렉터들의 눈길을 끌 만도 했지만 작품이 워낙 시니컬해서 그 역시 ‘장사’와는 무관한 작품이 될 듯하다. ‘미학’의 첫번째는 외계에서 바라본 지구, 두번째는 지구의 인간 무대다. 세번째는 작품을 전시 중인 조물주. 그는 “조물주의 작품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 것 같아?”라고 묻고는 쿡쿡 웃는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조물주도 버린 것들 뿐이다. 벽에는 그가 쓴 시가 붙어 있다. 
‘하늘엔 밤하늘엔 샛별들이 총총/ 바닥엔 길바닥엔 잡동사니 총총/ 버림받아 길바닥에 버림받아/ 내가 버린 네가 버린 그가 버린/ … 길바닥에 눈길 주어/ 꿈을 찾고 소망담아 사랑으로/ 범블래기 범블래기 하하하/ 징글래기 징글래기 찰찰찰.’(주재환, ‘잡동사니 사랑’)

1999년 김민경 기자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s_plus/news200/np200kk0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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