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RDING PROGRAM: Like a landscape

 

김상길 사진展

갤러리 정미소 

2003_1229 ▶ 2004_0125

도망쳐! 표정이야! 

사진의 제목은 「애니콜」이다. 그가 걸터앉아 있는 1990년대 말 스타일의 정자는 색깔이 유난히도 빨갰다. 19세기의 전통을 20세기말에 되살린다는 것이 이리도 힘들단 말인가. 정자의 재료로 쓰인 나무의 주름결은 유난히도 정교하여, 그 결 하나하나를 읽지 않으면 이 사진은 밤에 꿈속에까지 따라 올 것 같다. 자기를 읽어 달라고 울부짖으며 말이다. 사진이 그런 것 하나하나를 다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니 얼마나 무서운 노릇인가. 때로는 우리는 그저 보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도 많은데 말이다. 그러나 아저씨는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전화를 걸고 있었고, 그의 다른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는 아주 가볍고도 단단하고 탄력 있는 나무로 되어 있었다. 아마 야구방망이를 만드는 데 쓰이는 물푸레 나무가 아닐까 싶다. 누구도 그 지팡이를 건드릴 수는 없어 보인다. 건드리려 했다가는 그걸로 한 대 얻어맞던가, 지팡이를 강제로 선물 받던가 둘 중의 하나인 사태가 벌어질 것 같아서이다. 지팡이의 생김새가 독특해서라기보다는 아저씨가 지팡이를 잡고 있는 모습이 하도 결연하고도 유연해서다. 정자라기보다는 대피소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아 보이는, 네 다리의 길이가 다 다른 기이한 운명의 이 정자는 산꼭대기에 있는데, 그 위치는 서대문 어디쯤인 거 같다. 아파트가 아주 많은 것으로 보아 대한민국의 어떤 도시인 것만은 확실하다.

김상길_Any Call_컬러인화_2001

아파트들이 다 같아 보여도 도시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의 아파트가 지겹다면 부산의 아파트는 숨이 막힌다. 반면, 가평의 아파트는 아주 심심하다. 들판 한가운데 아파트가 딱 한 채 있으니 심심할 밖에. 부산의 아파트가 숨이 막히는 이유는 산 근처가 공기가 좋다고 일부러 산꼭대기 벼랑 끝에 아파트를 지어 놓았기 때문이다. 저 아래로 내부순환도로가 내려다보이는 것으로 보아서는 홍은동 근처의 어떤 산인 것 같다. 평소에 산이라면 어떤 산이던지, 어떤 각도에서 사진 찍은 것이든지 귀신 같이 맞추는 나였는데 이 사진에서는 어떤 산인지, 어떤 위치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을 보니 김상길의 사진이 보통 사진의 코드를 벗어나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래도 한 가지 마음이 놓이는 것은, 이 정자가 놓여 있는 산꼭대기의 바위는 여전히 바위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용이거나 호랑이거나 토끼이거나 전통이거나 무당이거나 하지 않고 그저 바위라는 사실이 마음 놓이게 한다. 사실 우리는 바위가 아닌 바위들 때문에 얼마나 심한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가. 눈고생도 더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한국사람들은 유럽의 고성이 아닌 유럽의 고성 때문에 즐거움이 아닌 즐거움을 누려야 하고, 콤플렉스 아닌 콤플렉스에 짓눌려야 하는데, 이 사진의 바위는 그저 바위라서 좋다. 이 바위는 어떤 함축의미도 띠고 있지 않아서 좋다. 그런데 사실 이 사진에서 코드를 벗어나 있는 것이 산의 모습만은 아니다. 이 아저씨가 한 손에는 지팡이를, 다른 손에는 애니콜을 움켜쥐고(grasp) 있지만 왜 그걸 쥐고 있는지는 파악하기(grasp) 쉽지 않다.

김상길_Like a landscape/office for rent, Seoul-Diasec_컬러인화_2002

사진가 김상길을 파악해 보자. 김상길은 나이가 많은 작가는 아니지만 그의 사진에서는 끝 간 데 모를 깊이가 느껴진다. 그 깊이는 작가의 연륜이나 작품의 아우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진의 깊이 그 자체이다. 그 깊이란 사진 속에 들어 있는 뭔가 알 수 없는 기이하고 낯설은(uncanny) 어떤 것에서 온다. 기이함과 낯설음은 분리에서 오는데, 겉으로 보이는 것은 뻔한 이미지이지만 그 뻔함의 표면 뒤에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숨어 있는 그 분리 말이다. 그의 사진을 보면 누구나 "이게 뭐야, 기껏 텅 빈 가게 찍어 놓고선~"하는 실망감을 감추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익숙한 세계다. 우리가 다 아는 가게 매장, 지하주차장의 세계다. 그러나 그 다음의 세계는 그 앞의 세계와는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매장은 매장인데 매장이 아니고, 지하주차장은 지하주차장인데 지하주차장이 아니다. 마치 무슨 선문답 같은 이런 말장난이 김상길의 사진에 들어 있는 분리와 분열의 축이다. 그런데 이런 분리와 분열에서 오는 기이함과 낯설음은 사실은 사진에서는 아주 기본이다. 사진이 단순히 사물의 외관을 베끼는 기술이 아니라 예술이 되는 것도 이런 기이함과 낯설음 덕분이다. 그러나 김상길의 사진은 다른 예술사진과 다르다.

김상길_Like a landscape/office for rent, Seoul-Diasec_컬러인화_2001

그의 사진은 오늘날 첨단기술의 위상에 대한 것이다. 첨단기술 하니까 벌써 인터넷이니 아니티니 이런 거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첨단기술은 그런 게 아니다. 서울의 어느 임대사무실, 널찍한 공간에 시원한 창문과 벽, 자동으로 공기조절도 되고, 광통신이니 이런 것들로 가득 찬 사무실이다. 사무실 벽에 스위치들이 쪼로록 달려 있는데, 이 스위치들은 이 사무실이 너무 첨단인 것이 싫었는지 줄이 안 맞는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이 사무실에는 삐뚤한 것들이 많다. 라지에타 밑에 댄 나무판들도 삐뚤하고, 방바닥과 벽이 닿는 부분의 판들도 삐뚤하다. 그렇다고 해서 김상길이 이 사진을 찍을 때 첨단기술에 대해 악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도 첨단기술 덕분에 누구한테 술 먹으러 가자고 이메일도 보내고 사진도 번들번들하게 훌륭하게 뽑지 않았던가. 그는 단지, 첨단기술이 좀 인간적이 되려면 뭔가 어수룩한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사진을 찍어서 자세히 보니까 삐뚤한 구석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사실 김상길이 그런 것을 발견했는지 인격체로서의 김상길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김상길의 카메라와, 그것의 표상체인 사진이 발견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김상길은 자신의 주관의 좁은 한계를 넘어선 보는 장치를 발명했다. 그것은 「첨단기술에 가려진 허수룩하고 삐뚤빼뚤한 구석 관찰기」 정도로 이름 붙일 수 있는 장치이다. 누군가는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를 읽고 이런 것을 사진의 풍크툼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진의 풍크툼은 사진의 세부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때 있었던'이라는 시간 속에 '드러나' 있다. 이 사무실이 지금쯤은 뭐가 되어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사실, 지금쯤은 도살장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알 카에다의 테러 공격을 받아 폭삭 무너져 없어져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도시공간에 대해 학문적인 관심이 있는 일단의 연구자와 관찰자들이 조용히 창 밖을 응시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게 사진의 풍크툼이다. 이 사진에 대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사진에 나타난 이 상황과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 사이에 존재론적으로 아무 연관이 없다는 사실, 이게 사진의 끔찍한 풍크툼이다.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오래 전부터 알던 절친한 fire egg 친구가 어느 날 돈을 꾸러 왔다. 그 친구는 과거의 끈끈한 관계를 생각하여 당연히 내게 왔는데 나는 그를 완전히 모른 척 한다. 이럴 경우 그는 엄청난 트라우마에 빠질 것이다. 실제로 5공 시절 대통령 영부인의 고딩 동창이 영부인이 자기를 못 알아본다고 충격을 받아 신경정신과의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그게 바로 사진의 풍크툼이다. 과거와 현재는 철저히, 존재론적으로 단절돼 있다는 것. 그러므로 원래는 사진의 풍크툼에 대해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진으로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사진 속의 이 사무실에는 폭포수 같은 하얀 빛이 떨어지고 있다. 참으로 고마운 빛이다. 빛이 없었더라면 김상길은 카메라의 셔터도 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빛은 하얀색이다. 그런데 하얀색의 빛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신 밖에 없다. 그러므로 김상길의 사진에 나오는 흰 빛은 사진의 빛, 가상의 빛이며, 쉽게 말하면 원래는 사진에 희게 나올 수 없는데 희게 나오도록 꾸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진가는 감히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창 밖의 어둠이 잘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밝고 가벼운 흰 빛에 목욕을 하고 있는 동안 창 밖의 어둠은 백설공주를 시기의 눈으로 바라보는 마귀할멈의 눈동자처럼 시기의 눈빛을 하고 밝은 빛을 노려보고 있다. 사물에 표정이 있다면 바로 그런 것이다. 김상길의 사진은 사물의 표정에 대한 것이다. 인간은 너무나 잘 난 나머지, 사물의 표정을 무시하고 살아왔다. 인간은 사물을 의인화하고, 성격을 부여하고, 용도를 부여하여 나름대로 활용만 했지, 사물의 표정을 잘 보려 하지 않는다. 만일 사물의 표정을 똑바로 보게 된다면 『링』에서 텔레비전에서 나온 귀신의 눈빛에 죽은 주인공처럼 우리도 죽게 될 것이다. 김상길은 얼마나 용기 있는 작가인가. 사물의 표정을 똑바로 보고도 아직 살아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덕분이다. 사실은 그의 덕분이 아니라 그의 카메라 덕분이다.

김상길_Like a landscape/Migliore shopping mall, Seoul-Diasec_컬러인화_2001

임대사무실에 비하면 밀리오레나 월마트의 공간은 한층 깔끔하다. 스위치도 가지런히 달려 있고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다. 그 이유는 뭘까? 그 공간들은 보여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무실은 보여지는 곳이 아니라 인간들끼리 서로 시선을 주거 받거나 회피하는 곳인 반면, 매장은 공간 자체,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 자체가 보여지는 곳이다. 그러므로 매장의 표면은 시선에 대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윤을 내고 있으며, 모든 부속장식물들은 군기가 바짝 들어 부동자세로 있는 중이다. 얼마나 큰 차이인가. 당장 바닥만 봐도 임대사무실은 그 흰 폭포수 같은 빛이 바닥의 울퉁불퉁함을 민망할 정도로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반해, 매장의 바닥은 제 아무리 폭포수 같은 빛 속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평평함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 이렇게 엄청난 물리적 공간을 만들어 내고, 그 공간의 이런 상태를 만들어낸 것이 인부들의 노동이나 손길이나 기계가 아니라 시선이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은가.

김상길_Like a landscape/E-Mart, Seoul-Diasec_컬러인화_2002

그리고 바닥의 평평함은 깊숙이 파고 들어간 공간감으로 인해 더 강조되고 있으며, 마치 그 공간을 연극무대처럼 우리가 체험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루전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이곳은 매장이 아니다. 여러분이 이 사진을 보는 지금쯤 이 공간은 더러운 쥐떼로 가득 차 있을 수도 있고, 수백년 후 미래의 고고학자에 의해 발굴되어 21세기의 자본주의의 신전이며, 상품 판매대는 신전 안의 제단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의 공간과 미래의 공간이 존재론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여기서도 당연한 진리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이 공간을 매장이라고 사진 찍고, 매장이라고 해석하고, 매장이라고 느낌을 가지는 것은 전적으로 자의적인 일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사진을 보면서 그 안의 대상이 무엇 무엇이라고 인식하는 바로 그것이 알고 보면 상당히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물론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열심히 사진을 찍을 리가 없다. '찰칵!'하는 셔터소리와 함께 사물과 공간의 확실성은 다 사라져 버렸다. "모든 단단한 것(혹은 구체적인 것)은 대기 속으로 사라진다(Everything solid melts into air)."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물화된 의식에 대해 했던 말인데 오늘날 김상길의 사진에 어찌 그리 딱 들어맞는지. 결국 뭐가 남는가. 풍크툼에 덜덜 떠는 가련한 관객만이 남는 것 아니겠는가.

김상길_Like a landscape/Biz Art, Shanghai-Diasec_컬러인화_2001

아직 얘기가 끝난 것이 아니다. 김상길의 사진들을 찬찬히 보니 공통적인 주제가 흰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는 흰 빛을 말했는데, 사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흰색이라는 기표가 흰 빛을 대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흰색은 이 사진들을 대표하는 으뜸기표가 되고 있다. 그것은 한국의 대형할인점의 실내나, 샹하이의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나 공통적으로 보이는 색이다. 왜 흰색인가? 김상길이 흰색에 대해 물신적으로 집착하는 희귀한 종류의 정신병이리도 걸렸단 말인가? 그건 알 수도 없고, 알아봐야 지금 이 사진을 해석하는데 별 도움이 되는 요인이 아니고, 문제는 흰색이 하는 작용이다. 흰색은 모든 것을 균질화하고 있다. 한국의 대형할인점이나 안경매장이나 샹하이의 지하주차장이나 갤러리나 다 똑같이 보이지 않는가. 흰색은 의미를 지우고, 공간을 탈맥락화하고, 중립적으로 보이게 만들고, 모든 노이즈를 제거하여 고요하게 만든다. 사물의 흔적도 당연히 사라진다. 그러면 누군가는 그럴 것이다. "이 세상에 중립적인 게 어딨어! 자세히 분석해 보면 흰색에도 의미가 있다구. 트리스탄 짜라는 밀가루조차 탐욕을 뜻한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물론 이건 사진으로부터 거리를 최소한 7미터는 두고 보았을 때 얘기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아까 말한 차이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여기서 쓰는 얘기는 사진들을 원거리에서 보았을 때 스스로 자기들끼리 정리하고 줄 맞춰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 이미지에 대한 것이다. 단, 원근법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얘기는 달라진다. 멀리서 보면 김상길의 사진들은 다 똑같고, 가까이서 보면 다 달라 보인다. 그러니 둘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누구도 보는 이에게 사진을 가까이서 보라거나 멀리서 보라거나 하는 식으로 명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명령자다. ■ 이영준

https://neolook.com/archives/2003122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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