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준
영어 속담에 “끓는 물을 쳐다보고 있으면 늦게 끓는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이 맞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실험을 했다. 실험은 아주 간단했다. 물을 끓이면서 쳐다볼 때와 안 쳐다볼 때 끓는 시간을 쟀다. 실험의 조건을 맞추기 위해 물의 양과 화력은 동일하게 조절했다. 물 1리터를 끓이는 데 드는 시간을 재보니 쳐다볼 때는 1분 38초가 걸렸는데 안 쳐다볼 때는 1분 12초가 걸리는 것이었다. 이런 차이가 왜 나는지 알아보기 위해 관련 문헌을 찾아보니 쳐다볼 때 눈에서 나오는 관심 에너지가 물 분자들 사이의 결합력을 높여 끓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주1) 물이 끓으려면 분자들 사이의 결합이 느슨해지고 거리가 멀어져서 자유로이 유동할 수 있어야 하는데 관심 에너지는 이를 막는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애가 기껏 공부 잘 하고 있는데 엄마가 자꾸 간섭하면 공부하기 싫어지는 것과 유사한 이치라고 키스밴더는 설명한다. 그런데 눈에서 나온다고 추정되고 있는 관심 에너지라는 것은 아직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다. 키스밴더의 연구에서는 그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가정하고 있으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학자들도 많다. 수렌 비르자와니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주2) 그는 빈달루, 마살라, 비르야니 등 다양한 인도의 커리들을 예로 들면서 이들 음식을 만들 때 인도 사람들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초탈한 상태에서 조리를 하기 때문에 사람의 신체와 정신에서 어떤 에너지도 음식에 투여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논란 속의 관심 에너지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방 안에 사람을 놔두고 옆방에서 관심을 두는지 안 두는지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측정해 봤다. 실험 대상자의 눈 깜빡이는 빈도, 혈류량의 변화, 뇌파, 심장박동, 선입견에 대한 의존도,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뢰 등을 측정한 결과 옆방에서 관심을 보일 경우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1차 실험에서는 방과 방 사이의 벽의 두께가 얇아서 사람의 숨소리나 체온, 뇌파 등이 미약하나마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 두께 2미터의 콘크리트로 분리된 방에서 실험했는데 역시 영향은 어느 정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 사람은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였으며 지역, 학교, 취향이 다 다른 사람으로 골랐다. 한 사람에게 자신이 가장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취미에 대해 생각하도록 했고 옆방의 사람에게 그 열정이 전달되는지 측정하는 식으로 실험은 진행됐다.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이 홀인원 했을 경우를 떠올리며 짐짓 흥분하자 떡볶이를 좋아하는 옆방의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입안에 매운맛이 고이며 역시 흥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이 끓는 현상은 철저히 물리적 현상이기 때문에 사람의 심리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므로 쳐다본다고 해서 빨리 끓는다는 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과제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관심 에너지의 실체를 더 알아본 결과 요즘 인문학에서 한참 논의가 되는 정동(affection)이 개입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동이란 대상에 향하는 관심과 애정의 에너지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충동을 제어할 수 없는 에너지의 문제로 봤는데, 따라서 심리와 에너지는 상당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중병이 나서 시름시름 앓던 사람도 자기가 좋아하는 밴드가 공연을 오면 벌떡 일어나서 헤드뱅잉을 하는 것을 봤을 때 심리적 에너지가 헛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정동이란 텔레파시처럼 남을 움직이는 에너지이지만 신비롭거나 헛된 것은 아니다. “저기 있는 우산 좀 갖다줘”라고 했을 때 그 말에 정동이 실려 있으면 갖다줄 것이고 정동이 안 실린 채 말로만 하는 것이면 안 가져다줄 것이다. 정동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결국은 몸까지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해서 흑인 인권운동의 불을 댕긴 것, 탈옥수 지강헌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해서 많은 범죄자의 심금을 울린 것은 모두 정동의 힘을 잘 말해주는 사례들이다. 그렇다고 정동의 에너지가 무작정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물이 끓는 데 관여하려면 아무 물이나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아무에게나 관심이나 애정을 주지 않고 특정하게 인연이 있는 사람이나 대상에게 그렇게 하듯이, 물도 뭔가 연관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물을 상당히 까다롭게 고르는 편이다. 삼다수에서 에비앙까지 다양한 물들이 나와 있고 가격도 천차만별이라서 어떤 물을 먹어야 몸에도 좋고 가격도 적당한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관심 에너지가 방출되고 그 에너지는 물속에 침전된다. 그 물로 달걀을 끓인다든지 찌개를 만든다든지 할 때도 관심 에너지는 물속에 투영된다. 사실 관심 에너지의 양이 많은 것은 아니다. 즉 물이 끓는 속도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관심 에너지가 작용하는 요리화학적 메커니즘이다. 일단 관심 에너지는 물 분자들 간의 결속력을 강하게 만들어 준다. 이는 관심 에너지가 물 분자를 이루고 있는 수소와 산소 사이의 연결 끈의 길이를 짧게 만들어주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주3)
사실 심리적 상태인 정동이 어떻게 물질들의 구성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이제 막 시작된 단계이다. 그간 과학자들은 심리적 에너지와 물질적 에너지는 완전히 별개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연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과 몸을 가르는 이원론이 철폐되고 수많은 철학자들이 몸의 사회문화적 구성에 대해 논함에 따라 과학계도 이에 반응하여 서로 다른 계(界) 사이를 에너지가 오가는 현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요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적절한 연구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인간의 활동으로 만들어지는 산물 중 가장 신체와 물질 사이의 접촉이 세밀하고 정교하며 온갖 문화적 취향과 역사적 선택과 결정이 다양한 층위에서 작용하는 것은 요리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요리는 식탁의 스케일로 축소해 놓은 중화학 공장이라고 할 수도 있다. 공장에서 엄청난 파이프라인을 통해 화학물질이 전달되면 그것을 분해하거나 뭔가 첨가하고 가열하여 화학제품을 만드는데, 요리는 그것을 아주 작은 스케일로 식탁에서 해낸다. 차이라면 중화학 공장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화학물질은 먹을 수 없는데 반해 요리는 궁극적으로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점을 향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맛있게 먹을 수 있어야 한다’를 전제로 하고 있다. 물 조절을 잘못해서 질게 된 밥은 똑같은 쌀 성분이라 하더라도 제대로 된 음식이 아니라서 먹기에 적당치 않다. 결국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음식이 인간의 소화 회로의 생화학적, 취향적, 문화적 조직에 잘 스며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세밀한 과정 속에 관심 에너지가 스며들 수 있는 작은 구멍들이 생긴다. 물이 끓는다는 것은 열로 인해서 물 분자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분자들 사이의 거리가 늘어나는 현상인데 관심 에너지의 작용으로 분자 사이가 가까워지고 결속하게 되면 물이 끓는 데 시간이 걸린다.
사실 문화적 구성물인 음식은 어느 정도는 주관적인 물질이다. 같은 라면도 어디에서 어떤 상황에서 먹느냐에 따라 맛이 완전히 다른 것이 그런 주관성의 좋은 예이다. 라면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상황은 군대에서 쫄병 시절에 밤에 몰래 끓여 먹는 것이다. 금지된 음식의 맛은 미각을 최고로 자극하여 라면의 분자들이 혀에서부터 위에 이르는 소화의 여러 과정에서 가장 잘 분해되게 만든다. 이때 금지는 관심 에너지를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는다. 어떻게 하면 금지의 벽을 뚫고 그 너머에 있는 행위를 해 볼까 하는 간절한 바람은 극도의 관심으로 결정화되고 그 과정에서 관심 에너지의 레벨도 대폭 올라간다. 그 에너지는 라면의 면발과 국물에도 작용하여 분자들 간의 간격을 아주 좁혀 놓는다.(*주4) “끓는 물을 쳐다보고 있으면 늦게 끓는다”는 공리에 따라, 분자들 간의 간격이 좁아진 라면의 성분들은 조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당직사관이 오기 전에 빨리 라면을 끓여 먹어야 하는 사병의 마음을 졸이게 만든다. 안 끓는 라면을 쳐다보는 사병의 눈에서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관심 에너지가 충만하게 되고, 라면은 더 안 끓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그러면 라면에 투여되는 관심 에너지는 더 수준이 올라가게 되고 라면은 더 안 끓는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라면은 푸아그라를 능가하는 극상의 맛을 내게 된다.
그런데 모든 진지하고 맛있는 요리는 다 관심 에너지의 결과물이다. 재료의 선택에서부터 향신료의 조합, 불 조절에서부터 완성된 음식물의 배치 등 여러 단계에서 관심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요리는 완성되는 것이다. 고든 램지가 남의 주방에 가서 쌍욕도 많이 하지만 직접 조리하는 장면을 보면 자신의 재료와 물, 불, 칼, 자신의 손과 정신에 대해 극도의 관심 에너지를 기울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손놀림은 무척이나 빠르지만 그도 관심 에너지 때문에 길어진 조리 시간을 참아내야 한다는 점에서는 관심 에너지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고든 램지는 티브이에 나와서 돈도 벌고 유명세도 타지만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크고 작은 식당의 요리사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요리한다. 그는 식당의 핵심이지만 손님의 입장에서 보면 주변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주방에 처박혀 관심 에너지와, 그것 때문에 길어진 조리시간, 그 시간 동안 타거나 쫄아 붙을 재료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아는 사람 중에 요리를 아주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불 앞에서 보내는 시간을 참지 못한다. 카레를 만드는 데 3초 정도 휘젓더니 지루하다고 내팽개치는 것이었다. 음식을 만든다는 것은 재료들이 적절한 상태가 되는 시간을 같이 있어 주는 것이다. 요리는 결코 재료를 가공하고 조작해서 억지로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가 아니다. 요리는 관심 에너지가 재료의 분자 속으로 스며 들어가기를 기다려주는 시간이다.
요즘 마트의 진열대를 채우고 있는 산업화된 음식의 문제는 인체에 해로운 첨가물이 들어가 있다거나 중국에서 온 비위생적인 재료로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다. 본래 인간의 영역이었던 관심 에너지가 산업화되고 기계화됐으며 그 결과를 우리가 자연스럽게 먹는다는 것이 오늘날 공업화 내지는 산업화된 음식의 가장 심오한 의미이다. 즉 엄마가 음식에 쏟아야 할 관심 에너지는 기계와 시스템의 에너지로 대체됐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오늘날 엄마 노릇을 해 주는 것은 젖을 먹여주는 어떤 인간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삶의 모든 국면을 세세하게 채워주는 여러 가지 종류와 레벨의 관심 에너지들이기 때문이다. 백화점 점원이 정말로 고객을 사랑해서 웃는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점원을 웃게 만드는 것은 백화점이라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백화점이 고객 하나하나에 공평하게 나눠주는 관심 에너지가 점원을 웃게 하고 고객은 그 관심 에너지의 힘을 느껴 물건을 사게 된다. 그러면서 백화점이라는 시스템이 조작, 가공해낸 산업화된 애정을 흠뻑 느끼며 살아간다. 이제는 한우에서 문화까지 삶의 모든 국면들이 산업화돼 있고 우리의 욕구도 산업에 의해 채워진다. 세세하고 친절한 산업화 덕분에 우리는 편하게 살아간다. 한우를 먹기 위해 한우 잡는 날 골라 시골에 가서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이제 관심 에너지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산업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이 하도 정교하고 사람을 잘 헤아리는 바람에 우리는 거대하고 무뚝뚝한 산업이 우리들 하나하나를 잘 배려해 준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맨 앞의 문제로 돌아가서, 산업의 경우도 “끓는 물을 쳐다보고 있으면 늦게 끓는다”고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간단치 않다. 가정에서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려놓고 쳐다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관심 에너지가 산업에서 발휘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로 식품을 만드는 산업에서는 관심 에너지 때문에 가공 시간이 늦어지는 것은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대규모 식품 생산라인의 중간 중간에는 촉매제(catalyst)가 들어간다. 촉매제는 전기 자극인 경우도 있고 포타슘 사이아나이드 같은 화학약품인 경우도 있으며 진동과 교반 같은 물리적 자극인 경우도 있다. EBS 교육방송에서 하는 「극한직업」이라는 프로에서 막걸리 만드는 것을 보여줬는데 큰 막걸리 통을 밤새 저어줘야 막걸리가 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작업자의 땀방울이 계속 막걸리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EBS 교육방송의 카메라는 크게 클로즈업해서 보여줬는데 이 땀방울이 관심 에너지 때문에 늦어지는 숙성 시간을 줄여주는 촉매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땀 속에 들어 있는 염분과 단백질, 때 등의 성분이 작용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촉매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에 작용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식품이 있어도 소비자가 그것을 구매하기까지 10년이나 고민을 했다면 식품은 이미 유통기간을 넘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식품을 보자마자, 아니 시장에 나오기도 전에 이미 구매 의사 결정을 내리도록 촉진하는 촉매제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그래서 브랜딩과 포장디자인과 광고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래서 세상이 살기 편하고 평화로워졌는가? 산지 직송으로 신선한 식품을 항상 쌓아놓고 있는 대형 마트와 재래시장은 안락한 소비생활을 보장해 주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 뒤에는 보이지 않는 싸움들이 펼쳐지고 있다. 그 싸움은 소비자와 산업이 관심 에너지를 놓고 줄다리기를 벌이는 한판 승부다. 그 사이에 마케팅과 유통과 패키징과 브랜딩 등 온갖 요소들이 끼어 있다. 거기서 지면 호갱이 되든가 망한 기업이 되든가 한다. 식품은 이 세계가 보이지 않는 전쟁을 펼치고 있는 싸움터가 됐다. “끓는 물을 쳐다보고 있으면 늦게 끓는가?” 세상은 이런 한가한 질문 던질 때가 아니다. 식품 산업이 끓어오르고 있는데 소비자는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궁리해야 할 때다.
주
1. Kiesbander, “The Thermodynamics of Boiling Water: New Insight into its Mechanism,” *International Journal of Molecular Physics*, vol.2, 2013.
2. Birjawani, *The Legitimacy of Affection Energy: Legends and Myths*, Boston: Rawalpindee, 2014.
3. Hasok Chang, *Is Water H2O? Evidence, Pluralism and Realism*, Dordrecht: Springer, 2012.
4. 이 간격의 함수에 대해서는 Hill and Wang, “On the Distance Function of the Molecules Influenced by Affection Energy,” *International Journal of Molecular Physics*, vol.3, 2014 참조.
http://guminja.com/index.php?/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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