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영의 사물들, “위대함은 그대들의 것이니까”

 

정서영(1964~)은 199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현대미술이 ‘동시대 미술’로서 새롭게 자리 잡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작가이다. 독일 유학 이후 귀국하여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한 그는 특히 한국 사회의 현실적인 구조가 빠르게 재편되면서 생겨난 잉여 생산물이자 ‘사회적 증거’로서의 사물을 조각적인 사유로 제안했다. 


“사물적인 것 외에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다. 사물을 사유하는 것은 진정코 금지되어 있기만 한 것일까? 객관적 진술 그 너머에 자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무의식적이면서도 필연적인 가치 부여를 허락하는 것이다. 목적한 바 없으나 지향하게 되는 것으로서의 투사를 행하는 것이다. … 모르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유와 시선, 정신의 교조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 등이 바로 그것이다” 1)

사물을 바라보는 정서영의 낯설고 독특한 관점은 서울대학교 시절 그의 석사학위 논문에서도 발견되는데, 그는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사물이 지닌 낯섦과 혼돈 속으로 나아간다. 정서영은 사물을 사유하고, 더 나아가 조각가로서의 조형적 책무를 더하면서 ‘사물을 통해’ 당시 여전히 한국 미술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가부장적인 사유와 예술적 권력에 대해 비평적 관점을 제안했다. 그의 작업세계에서 ‘사물’은 조각의 주재료이자 주제일 뿐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들의 동등함에 대한 작가의 선언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그는 한국의 산업 사회에서 생산된 사물 그 자체가 지닌 강력한 존재감을 인식하면서 이를 조각적인 방법론을 통해 해결해 나가고자 했다. 

먼저 그 시작점으로 정서영의 초기작 <-어>(1996)를 살펴본다. 이 작품은 돌과 철 같은 무겁고 단단한 재료를 만들고, 깎고, 붙이는 전통적인 조각의 방법론과는 다소 먼, 오히려 한없이 가벼운 재료로 만든 작품이다. <-어>는 1990년대 당시 작가가 자주 사용하던 재료 중 하나인 노란색 민속 비닐 장판 위에 궁서체로 ‘-어’를 쓰고 장판 주변을 나무 액자처럼 두른 것이다. 작가는 감탄사 ‘어’ 앞에 붙임표 ‘-’를 추가하는데, 이는 작가의 구체적인 생각을 모으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지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세계를 관찰하면서 모아진 정서영의 추상적인 생각이 어떠한 유형의 ‘조각’으로 변모되는 순간의 과정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작가의 모든 작업은 사물을 바라보는 오랜 사유에서 시작되는데, 이러한 시간을 통해 정서영은 사물이 본래 지시하던 객관적 지표와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시도하고, 사물을 향한 낯선 시선과 혼돈으로 나아갔다. 

또 다른 작품 <유령, 파도, 불>(1998)에서 정서영은 인간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회자되지만 정작 형체는 없는 ‘유령’ ‘파도’ ‘불’이라는 대상을 끌고 와 작가가 선택한 재료와 형태, 크기로 붙들어 놓았다. 널찍한 노란 비닐 민속 장판이 깔린 전시장 바닥 위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진 채 유토로 빚어놓은 파도와 불의 형상이 서로를 마주 보고, 전시장 벽에는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유령’ 형상의 조각이 벽에 걸린 채 ‘파도’와 ‘불’을 바라보고 있다. 그 옆 벽에는 이 세 작품의 드로잉이 걸려 있다. 정서영은 “정해진 형태도 크기도 없으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을 조각으로 만들고자 시도”함으로써 당시 한국 사회 곳곳에서 흔히 발견되던 리놀륨 장판, 스티로폼, 플라스틱, 스펀지, 합판과 같은 산업 재료들 자체를 조각의 재료로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면서 정서영은 사물과 그것의 안팎을 둘러싼 세계와의 변화된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사물의 사회적 조건을 예민하게 탐색했다.

2000년 아트선재센터에서의 개인전 《전망대》에서 선보인 <전망대>(2000), <수위실>(1999), <꽃>(1999)은 <유령, 파도, 불>과 같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아파트 ‘수위실’, 수영장의 ‘전망대’ 그리고 빨간 고딕체로 ‘꽃’이라 쓰인 거리 간판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령, 파도, 불>이 비가시적 존재를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면, <전망대>, <수위실>, <꽃>은 실재하는 사물과 작가와의 물리적 거리를 조정하는 가운데 발생한 형이라고 할 수 있다. 친구가 보내 준 엽서에 등장하는 엄지손가락 크기만한 수영장의 ‘전망대’와 건축물도 조형물도 아닌 애매한 크기의 아파트 ‘수위실’ 그리고 길거리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빨간 고딕체로 쓰인 꽃집 간판 ‘꽃’을 어느 정도의 규모로 키울 것인지의 문제였다. 이는 단순히 시각적인 대상으로서의 규모가 아닌 작가의 기억 또는 상상이라는 지극히 내밀하고 사적인 공간과 실제 자신 앞에 놓인 물리적 조각 사이 손에 잡히지 않는 새로운 공간을 예민하게 인식한 것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정서영의 1990년대 조각들은 재료의 직설적인 상태를 드러내면서도, 형태는 매우 함축적으로 제시되어 급진적이고 강력한 힘을 갖게 되기 시작했다.

이후 2000년대 중반부터 정서영은 사물에 내재한 비물질적 요소를 드러내는 데 집중하여 조각, 설치, 드로잉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영상, 사운드로 작업 세계를 확장해 나갔다. <괴물의 지도, 15분>(2008)은 작가가 전 세계에 분포된 괴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한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시작되었다. 괴물 역시 유령, 파도, 불처럼 신화에 자주 등장하지만 그 형태는 끊임없이 변한다. 정서영은 시대를 거듭하면서 괴물과 같은 생명체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인간의 심리를 그의 사유 작용을 통해 풀어내 보고 싶은 목표를 세우고, 이를 실행하고자 작업실 근처를 15분간 땅바닥만 보며 돌아다녔다. 이 후 작업실로 돌아와 15분간의 시간을 잘게 나누고 그 시간 동안 마치 무언가를 본 것처럼 픽션을 쓰게 된다. 이 텍스트를 바탕으로 작가는 <괴물의 지도, 15분>이라는 드로잉 작업을 완성했다. 

<괴물의 지도, 15분>은 알 수 없는 이미지의 조합이나 부조리극과 같은 텍스트로 구성된 25점의 드로잉이다. 드로잉은 작가가 자를 지지대 삼아 종이 위에 대고 잉크로 그렸기 때문에 작품 위에는 자의 이동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작품이 이상하고 낯선 단어나 문장, 이미지의 조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어지지 않는 단어와 단어 또는 상황 묘사 사이의 빈 간극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허구의 공간을 생성하게 된다. 바로 이 수행적 순간, 구체적으로 이해되거나 파악되지 않지만 우리의 인지 작용을 자극하거나, 어떤 상황이 발생하도록 하는 이 지점이 바로 작가가 추구하는 “평범한 사물에서 조각으로 변하는 비범한 순간”이다. 

언어와 사물의 관계, 조각이 발생하는 경로 혹은 사물이 조각으로 변모하는 비범한 순간을 사유하며 매체 확장을 시도한 정서영은 2010년 <괴물의 지도, 15분> 드로잉 연작 일부를 독립적인 작업으로 발전시킨 영상 <미스터 김과 미스터 리의 모험>을 제작한다. 이 작품은 LIG 아트홀의 공연장, 분장실, 대기실을 가로지르며 펼쳐진다. 본래 두 시간의 공연으로 출발한 이 작품에는 9명의 퍼포머와 한 마리의 개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할머니 분장을 한 젊은 여자, 모나미 볼펜을 돌리는 젊은 남자, 요괴 분장을 한 남자 등 하나의 정체성으로 고정되지 않는 인물들이다. 공연으로 초연될 당시, 개를 산책 시키는 퍼포머 외 다른 퍼포머들은 두 시간 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멈춰 있도록 지시를 받았으며, 이들과 달리 관람객들은 무대, 분장실, 대기실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마치 사물처럼 그 자리에 멈춰 있는 인물들 사이로 여전히 흐르는 시간을 통해 정서영은 단단한 ‘조각’ 매체를 넘어 그의 사물/조각이 세계에 등장하기 위한 전후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모으길 시도한다. 

최근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의 전시 《공기를 두드려서》(2020)는 사물과 조각의 관계를 탐구하면서도, 조각 자체의 자율적인 미학 언어가 활성화되는 점이 두드러졌다. 이를 위해 정서영은 언뜻 관련이 없거나, 기존 의미 체계로 접근할 수 없는 사물들의 조합 가운데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온 미지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가시화했다. 그는 사회란 결국 헐거운 언어로 세워진 공통의 신화임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조각적 사물이 현실 세계의 이해 가능한 논리적 언어에 함몰되지 않도록 힘써왔다. 2)

작가는 존재하는 사물에 쉽사리 이름을 붙이거나 그것을 의미의 망 안에 넣으려 하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이 세계에 무수한 타자들을 만들어냈다고 이야기한다. 오히려 그는 “사물에 대한 추측과 오해, 그리고 발견을 일삼으며 그것이 세상의 모든 다른 것과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것임을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기존 의미 체계로는 포획할 수 없으나 하나의 고유한 현실로서 그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작업 세계를 펼치고 있다. 이로써 정서영의 사물은 사회와 역사의 공식적 공간 안에 수렴되지 않고 유령처럼 그 사이의 공간을 떠돌아다니며 말한다. “위대함은 그대들의 것이니까” 3)

김민정(1985~),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바라캇 컨템포러리 큐레이터
1)   정서영, 『事物에의 加擔과 投射에 의한 조각작품 제작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9. 김정란, 「사물들과의 조금 까끌까끌한, 움직이는 관계–조심스럽고 사랑스러운 불안」, 금호갤러리 도록, 1995, p. 2에서 재인용
2)  《정서영: 공기를 두드려서》, 전시 서문, 2020, 바라캇 컨템포러리
3)  김정란, 앞의 도록, 1995, p. 6.
http://www.daljin.com/column/19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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