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과학은 만만한 것이 됐나?

2019 대전 아티언스 서문

이전에 나온 아티언스 도록에 실린 글을 읽어보다가 깜짝 놀랐다. 평론가들이 쓴 글의 첫 줄부터 과학적 지식이 틀려 있었다. 평론가들은 자신들이 쓴 과학지식이 틀린 줄도 모르고 버젓이 과학이 이런 거네 저런 거네 하고 떠들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아티언스의 도록에는 어줍잖은 과알못들의 글은 싣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고 지금 이 글을 쓰는 필자가 과학을 잘 아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과학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이해가 가능한 것이고 우리는 정말로 과학을 알고 있는가, 과학적인 태도로 살고 있는가에 대해 궁금하고 항상 알아보려고 하는 사람일 뿐이다. 필자는 적어도 과학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과학적 태도는 지식을 끊임 없이 회의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자세에 있지, 무조건 이것이 옳다고 내세우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자세는 단 한 번의 선언적 명제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한 명제의 뒤에 필연적으로 따라나올 명제의 논리적 연쇄를 항상 예상하고 고민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소리의 속도는 초속 340미터다“(실제로는 이보다 복잡한 공식으로 표현된다)고 단 하나의 사실을 말 하는 것은 과학적 태도가 아니다. 소리에 속도가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가, 측정값은 어떤 조건에서 어떤 식으로 달라질 수 있는가를 계속해서 끝없이 따지며 묻는 것이 과학적 태도의 기초이다. 나아가 1초라는 시간의 길이는 어떻게 정해졌는가, 미터란 어떻게 정해졌는가를 따지는 것이 과학적 태도이다. 과학사학자 장하석은 <Is Water H2O; 물은 H2O인가?>라는 매우 흥미로운 책을 썼는데, 우리가 중학교 때 배우는 이 단순하고 자명해 보이는 사실을 그는 역사적으로, 철학적으로 어렵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또 <온도계의 철학>이라는 책도 냈는데 이 역시 우리가 일상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쓰는 섭씨, 화씨 같은 기준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역사적으로 끈기 있게 파헤쳐서 쓰고 있다. 단순해 보이는 과학적 지식의 기초 단위가 이럴진데, 비행기가 나는데 기초가 되는 원리인 베르누이의 정리나, 자동차 엔진의 기초 원리인 열역학의 원리, 나아가 자이로 센서에 쓰이는 사냑 효과 등등은 천배, 만배 복잡하고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 왜냐면 과학은 한도 끝도 없이 넓고 복잡하고, 아니면 아주 작은 자연을 설명하는 원리이며, 그 원리의 깊이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관심 있는 것은 과학을 예술에 적용하는 것도, 과학과 예술을 융합하는 것도 아니다. 둘 다 불가능하다. 물론 현실에서 과학지식을 적용하여 다양한 기술적 수단들이 쓰이고 있으나, 예술과 관련해서는, A라는 과학지식을 적용하여 B라는 작업이 나오는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벤츄리 효과에 따르면 유체는 흐르는 곳의 단면적이 줄어들면 유속이 빨라지는데, 이는 개울에 놓인 징검다리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느리게 흐르던 개울물은 징거다리의 돌 사이를 지날 때는 폭이 좁아져 유속이 빨라진다. 이 효과를 응용하여 물이 흐르는 속도를 조절하는 신기한 장치를 만들었다고 해서 곧바로 예술작품이 되지는 않는다. 무엇이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하는 문제는 개별 예술가에 따라 다르고, 한 작가라 해도 개별 작품 마다 다르며, 한 작품 안에서도 터치 마다 다르기 때문에 통일적인 원리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 세상에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원리나 매뉴얼 같은 것은 없다. 수많은 원리나 매뉴얼의 사이사이에 있는 좁은 틈새들을 따라 솔솔 빠져나가서 새로이 생겨난 세계가 예술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예술이 된다는 것, 어떤 사람이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그 사물이나 사람이 평범한 세계를 벗어나서 존재의 독특한 양상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말 한다. 그 독특함 역시 과학 만큼이나 설명하기 어렵고 상상을 초월하는 이질적인 세계에 속하는 것이므로 간단히 설명하기 어렵다. 그런데 자꾸만 예술, 알고 보면 별거 아니다,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사기꾼들의 담론 때문에 예술도 만만한 것이 돼버렸다. 그래서 예술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이 처음에는 취미로 그림을 그리다가 욕심이 생겨 갤러리를 여는 경우가 있는데, 그 분들의 노고는 아깝지만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냥 예술 흉내를 내는 취미활동일 뿐이다. 그런 분들이 ‘그러면 도대체 예술이 뭐가 잘났길래 나는 안 되는 거냐? 예술과 예술 아닌 것 사이의 경계가 뭐냐?’라고 역정을 내시면 바로 그렇게 묻는 순간, 그 질문 때문에 당신은 예술을 모른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이 자리가 예술의 정의나 경계의 문제를 따지자는 자리는 아니므로 이 문제는 이 정도로 접어두기로 하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술도 과학 못지 않게 어려운 것인데 어찌어찌 하다보니 마치 쉽고 만만한 것처럼 호구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호구’는 학술용어도 아니고 비평용어도 아니다. 그냥 속어일 뿐이다. 아티언스라는 거창한 행사의 서문에 그런 속어를 쓰는 이유는 오늘날 예술이 그 정도로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되는 것처럼 위상이 땅에 떨어졌음을 말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문제는 이거다. 어쩌다 과학에 무지한 평론가들도 자신이 과학을 안다고 착각하고 함부로 글로 쓸 정도로 과학은 만만한 것이 됐을까? 일반인들이 과학을 만만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경우는 딱 한 가지 밖에 없다. 필자는 미술사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지만 아무도 필자를 이박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필자 주변에도 인문, 사회 계통의 박사들이 많지만 아무도 그들을 박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과학전공한 분들은 꼭 박사라고 부른다. 아마도 사람들 뇌리에 과학을 한 박사만 진정한 박사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주소년 아톰을 만든 강하다 박사에서부터 백투더퓨처에 나오는 브라운 박사에 이르기까지, 공상의 박사들도 과학을 하면 박사라고 부른다. 과학분야의 박사를 박사라고 부르는 경우를 제외하면 사람들은 과학에 별 관심도 없고, 과학을 별로 존중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는 상당 부분 과학 자체의 특성 때문이다. 현대, 혹은 현대 이후의 삶은 굳이 과학의 원리를 알지 않아도 기술적 수단들을 작동시킬 수 있을 만큼 편해졌다. 컴퓨터의 원리를 몰라도 누구나 윈도우즈 프로그램을 쓸 수 있으며, 스마트폰에 들어 있는 20가지의 센서의 원리를 몰라도 스마트폰으로 온갖 일들을 할 수 있다. 과학이 워낙 사용자 친화적으로 되어 온갖 물건들에 스며들어 있다 보니 과학의 존재는 사라져 버리고 디자인만 보이게 됐다. 필자가 컴퓨터를 처음 쓰던 1980년대말만 해도 도스 시스템을 썼는데, 이는 명령어를 일일이 텍스트로 쳐넣어야 했다. 한글을 쓰고 싶으면 hpw.exe라고 쓰고 엔터를 쳐야 했고, 파일을 삭제하고 싶으면 del.파일이름.hwp라고 쓰고 엔터를 쳐야 했다. 윈도우즈에서는 정말로 폴더 모양의 아이콘에다 파일을 끌어다 넣으면 폴더 속으로 들어가지만 도스에서는 디렉토리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활용하여 정리해야 했고 어떤 디렉토리에 있는 파일을 찾거나 활용하려면 디렉토리의 계통을 다 알고 있어야 했다. 당시의 컴퓨터 사용자는 유저나 소비자라기 보다는 오퍼레이터에 가까웠다. 즉 기계의 구조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어디를 작동시켜야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논리적으로 알고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컴퓨터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도 아이콘을 클릭만 하면 쓸 수 있는 요즘의 컴퓨터에서 필요한 능력은 직관력이다. 컴퓨터가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과학기술의 산물인 컴퓨터는 일반인에게는 과학기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화장품이나 초코파이 등의 소비품과 같은 반열의 물건이 되고 말았다. 컴퓨터만 아니라 자동차, 티비, 냉장고 등 온갖 과학의 산물들도 직관적으로 쓸 수 있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과학은 뒤로 숨어버리게 됐다. 사실 모든 산업제품에 반드시 따라오는 AS라는 꼬리만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기계가 고장 날 때 마다 근본원리에서부터 각 부분의 구조와 기능들을 끙끙 거리며 공부해서 고쳐야만 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쓰는 사물들을 가능케 하는 원리의 4분의 1은 과학이, 4분의 1은 주술이, 4분의 1은 우연이, 4분의 1은 감정이 지배한다면 차라리 과학을 더 인정해 줄지 모른다. 주술로 작동하는 물건은 신기 있는 사람에게만 쓸모가 있을 것이며, 우연이 지배하는 물건은 언제 작동할지 아무도 모르니 믿을 수 없을 것이며, 감정에 따라 작동하는 물건은 사람 마다, 한 사람도 아침이냐 저녁이냐에 따라 다 다르게 작동할 테니, 조건과 상관 없이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과학의 물건이 가장 신뢰를 얻을 것이며 사람들은 과학이 대단하다고 인정해 줄 것이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과학의 사물은 스위치만 켜주면 항상 작동하니까 사람들은 과학이 자동기계인 것처럼 착각하게 됐다. 과학을 만만하게 보지 않게 하려면 과학이 구현돼 있는 사물들을 대하는 조건을 까다롭게 하면 된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운전하기 위해 운전자가 열역학을 아는지, 피스톤과 실린더와 크랭크축과 밸브의 재료에 대한 재료공학을 아는지, 자동차가 달릴 도로에 대한 도로공학을 아는지 시험을 봐서 붙은 사람만 운전하게 하면 된다. 전화기, 티비, 냉장고, 세탁기 등의 사물들에 대해서도 일일이 시험을 보게 하면 사람들은 과학을 알려고 애 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시험에 떨어질 것이며, 그러면 산업제품들은 팔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시험은 있을 수가 없다.
여기서 과학이 만만하게 보이게 만든 두 번째 요인이 등장한다. 오늘날 과학이 구현되어 있는 물건들은 구하기도 쉽고 쓰기도 쉽다는 점이다. 즉 과학이 구현돼 있는 사물들이 소비품이 됐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과학도 소비품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주방세제건 USB메모리 스틱이건 과학의 산물은 소비품이 될 수 있으나 과학 자체는 소비품이 될 수 없다. 왜냐면 과학은 단순한 몇 가지 사실이 아니라 자연을 설명하기 위한 지식의 체계이며 끊임 없는 비판과 회의에 기초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자연의 원리를 알기 위해 탐구하는 태도의 산물이며, 이는 앞에서 썼듯이 논리의 연쇄적 체계로 돼 있다. 과학은 지식의 체계이자 그 지식을 찾아내고 구현하기 위한 실천의 체계이고 그것들의 산물들의 체계이다. 그 복잡한 체계와, 그것을 유지해주는 태도는 써서 없애버리는 소비의 태도와는 맞지 않는다. 만일 초코파이 하나 먹기 위해 영양학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거나 KTX 한번 타기 위해 궤도공학에서부터 전기공학 시험을 봐야 한다면 아무도 탈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지구를 뒤덮고 있는 생활방식은 소비이다. 소비는 마침내 과학의 지식 마저도 집어삼켜, <알기 쉬운 00과학> 류의 책들이 넘쳐난다. 정말로 양심 있는 저자라면 과학이 쉽다고 외칠 것이 아니라, 과학이 왜 어려운지, 그 장벽은 어떻게 넘을 수 있는지, 넘을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밝혀야 할 것이다.
과학도 만만한 것이 아니고 예술도 만만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쉽게 만날 수 있겠는가? 성급하게 과학을 불러내어 무엇을 시키기 전에 우리는 과학 앞에 겸허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과학은 무서운 것이니 말이다. 과학이 무서운 이유는 과학자가 무서운 사람이거나 원자폭탄이 무서운 물건이어서가 아니다. 과학은 자연의 원리를 밝히는 천기누설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공부 잘 하던 사람들이 죽어라고 연구해서 발표 하면 달려들어서 비판하거나 보충하거나, 아니면 토머스 쿤이 말 한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서 지식의 체계가 바뀌는 것이 과학의 세계다. 그러니 과학을 불러내는 것도 쉽지 않다. 예술가가 과학을 불러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고등학교 때 배운 과학을 다시 상기해낸다. 입시 끝나고 다 잊어먹었겠지만 고등학교 수준의 과학만 해도 상당히 어렵다. 필자는 생물시간에 배운 크렙스 사이클이나 지구과학 시간에 배운 케플러의 법칙, 수학시간에 배운 미분적분이 상당히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그것들을 아직도 알고 있었더라면 필자는 이미 천재가 되어 노벨상 심사 하고 다녔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고등학교 때 배운 과학을 다시 상기해 낸다면 엄청난 과학지식을 갖출 수 있다. 그것은 고등학교로 퇴행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 받은 과학지식의 선물상자를 열어보지도 않고 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찾아서 아름다운 과학의 선물을 다시 누리는 것이다. 즉 비가역적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되돌이킬 수 있는 부분을 되살려내는 것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나 기억 속에서는 일부나마 돌이킬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을 불러내는 두 번째 방법은 과학적 태도를 갖추는 것이다. 과학적 태도란 자연과 사물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어떤 것도 믿지 않는 태도다. 과학자라기 보다는 유물론자라고 할 수 있는 필자는 믿지 않는다.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다’라는 말의 뜻을 사전에 찾아보면 “1.의심하지 않고 그렇게 여기다 2.절대적으로 받들고 따르다”고 돼 있다. 두 정의 다 과학에 반대 되는 태도다. 과학은 사람들의 생각과 진술을 끊임 없이 의심하는데서 출발한다. “짜게 먹으면 살 찐다는데 정말 그럴까?” “아폴로 11호를 달에 보낸 새턴5 로켓의 추력이 3450톤(34MN 즉 34메가뉴턴)인데 3000톤이나 되는 로켓을 어떻게 우주공간에 쏘아 올릴 수 있을까?” 등등 의문은 끝이 없다. 지구온난화의 문제를 그냥 덜컥 믿어버리는 사람과, 끊임 없이 의심해 보고 스스로 추론해 보고 확인해서 아는 사람은 천지차이다. 과학의 의심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합리적 추론에 바탕한 의심이다. 우리가 과학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아무 것도 믿지 않고 지식의 바닥까지 파고 내려가서 비판적으로 검토해온 과학자들 덕분이다. 과학자에게는 대학이나 연구소 같은 과학의 제도, 16세기의 과학혁명 이후로 쌓여온 과학지식, 나아가 그것들을 계속 뒤엎으며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꿔 온 역사 등 다양한 종류의 지식의 굴삭기가 있다. 그러나 일반인에게는 지식의 바닥 까지 파고 내려갈 굴삭기가 없으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파고 내려가 볼 수 있다. 과학자의 굴삭기 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요즘은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지식들과 자료들이 일반인을 위한 굴삭기 노릇을 할 수 있다. 그 덕에 일반인도 과학적 태도를 어느 정도는 갖출 수 있다. 제도와 지식과 합리적인 비판적 태도로 이루어진 복잡한 지식의 굴삭기 앞에 ‘믿다’의 두 번째 정의인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다”는 통하지 않는다. 과학자는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만일 누군가가 ‘과학을 믿는다’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틀린 말이다. 과학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상대성이론이건 줄기세포에 대한 이론이건 과학의 명제는 의심과 비판의 대상이다. 아니면, 바로 위에 썼듯이, 과학을 믿는 경우는 합리적 의심에 의해 끝없이 파헤쳐 보고 남은 결과에 대한 인정일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과학이론은 그런 과정들에 시달리며 살아남은 것들이다.
어찌어찌 하여 과학적 태도를 갖추게 됐다고 치자. 그러면 어떻게 예술과 융합할 수 있을까? 두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첨단으로 가는 것이다. 포항공과대학의 방사광가속기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전자가 ‘빛의 속도’에 도달하면 빛을 내는데 이 빛을 방사광(synchrotron radiation)이라고 한다. 전자에 높은 전압을 걸어 가속하여 방사광을 만들어내는 장치가 방사광가속기이며 의학, 철강산업, 환경공학, 반도체제조 등 여러 분야에 응용될 수 있다. 방사광가속기의 능력은 마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만 들자면 공명 비탄성연X선 산란장치를 쓰면 인공광합성용 광촉매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을 페인트의 형태로 만들어 칠하면 어떤 물건의 표면에서도 광합성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광합성을 하는 건물이나 자동차나 볼펜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자체가 예술 아닌가. 실제로 과학자나 공학자들은 실험이 잘 되어 결과가 잘 나왔을 때, 혹은 복잡한 설비가 잘 설치되어 잘 작동할 때 “예술이다”라는 말을 한다. 물론 이때의 예술이라는 말이 엄밀한 의미의 예술개념에 얼마나 부합하느냐고 따지고 들면 넌센스가 될 것이다.
첨단과학의 수준에서 과학과 예술이 융합한 사례로 영국의 나노 테크놀로지 회사인 서리 나노시스템즈가 개발한 반타 블랙을 이용한 아니쉬 카푸어의 작업을 들 수 있다. Vertically aligned carbon nanotube arrays의 약자인 Vanta black은 이 세상에서 가장 검은 물질이다. 반타 블랙은 이름 그대로 탄소 나노튜브를 수직으로 배열하여 마치 대나무 숲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나노 사이즈의 튜브들이 촘촘히 배열돼 있기 때문에 빛은 그 안에 들어가면 다 흡수되어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흡사 블랙홀처럼 빛이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제일 검은 물질이 된 것이다. 들어오는 빛의 99.999퍼센트를 흡수한다고 하니 빛을 잡아먹는 괴물이라고 할 만 하다. 얼마나 검은가 하면 연탄이나 검은 물감을 옆에 놓으면 허옇게 보일 정도다. 그래서 반타 블랙 도료를 물체에 칠 하면 검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검은 구멍처럼 보인다. 값이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아주 비싸서 일반인은 살 수 없다고 한다. 반타 블랙 도료를 물체에 칠하면 초현실적으로 검게 보이기 때문에 예술작품에 활용하면 주제고 개념이고 떠나서 무조건 초현실적이고 신비로와 보인다. 아니쉬 카푸어는 서리 나노시스템즈와 계약해서 반타 블랙을 쓰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쓸 수 없도록 독점계약을 맺어서 비난을 받았다. 그는 시카고에 설치된 자신의 작품 Cloud Gate에 반타 블랙 도료를 발랐는데, 이 작품은 원래는 고광택으로 빛나는 것이었다. 빛나는 유에프오 같던 이 작품에 어느날 반타 블랙이 칠해졌을 때 유에프오는 갑자기 날아가고 그 자리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구멍이 생긴 형상이 됐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반타 블랙을 쓰는 것이 나노기술과 예술의 좋은 융합일까? 아니쉬 카푸어는 원래 초현실적이고 숭고미 넘치는 작업으로 유명한 작가다. 그의 작품에는 주제 같은 것은 중요치 않고 오로지 극단적으로 섬세하게 처리된 물질만이 있을 뿐이다. 그의 작품을 보는 관객은 깊은 심연에 빠져 들 듯 오로지 ‘저게 뭘까?’하는 의문에 빠져 들 뿐이다.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예술작품은 은폐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알쏭달쏭하게 말했는데, 아니쉬 카푸어가 딱 그렇다. 그의 작업은 침묵하게 만든다. 그에게서 과학기술은 침묵하게 하는 방법, 혹은 길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은 예술가로서 할 말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남들을 침묵하게 만들어 놓고 자신이 말을 많이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아티언스의 작가들은 침묵을 깨고 나오려 한다. 과학에 대한 무지 때문에 생기는 침묵, 질문 해도 되는데 감히 질문 못해서 생기는 침묵을 깨야 아티언스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요구 받는다. 과학자와 무엇에 대해 어떻게 대화 했는지, 자신의 과학경험은 어떤 것이었는지, 이번에 작품을 만들면서 어떤 과학이론에 대해 새롭게 배우게 됐는지 말 할 것을 요구 받았고 그 결과는 이 도록에 실려 있다. 말은 이해로 이어진다. 아티언스는 예술을 통해 과학기술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이해는 예술의 영역이 아니지만 아티언스에서는 이해가 중요하다. 과학은 감각이나 직감으로 해결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티언스의 작업들은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더불어, ‘이해를 중요한 전제로 하고 있는 예술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도 직면하고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식의 답변은 아티언스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과학은 은폐된 것을 가차 없이 벗겨서 드러내는 지식활동이기 때문에 아티언스의 예술가는 동시대 예술의 난해한 껍질 속에 숨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모든 것을 반타 블랙의 절대적인 어둠 속에 은폐해 놓고 어떤 질문의 가능성도 열어두지 않는 아니쉬 카푸어의 경우는 훌륭한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과학과 융합한 훌륭한 사례라고 볼 수는 없다. 아티언스가 지향하는 것은 과학과 예술의 대화이지 한 쪽이 한 쪽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다. 설사 그 대화에 답이나 결론이 없어도, 혹은 서로 엇나가는 방향으로 나가도 양자의 대화는 중요하다. 예술가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별 생각 없이 사용하던 과학기술의 수단이나 재료에 대해 근본원리부터 생각해 볼 수 있고, 과학자는 역시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쉽게 논문에 썼던 과학지식을 예술가의 질문을 받고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쉬 카푸어 보다는 훨씬 이해의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을 하는 올라푸어 엘리아손은 어떤가. 그가 2003년 테이트 모던 미술관의 거대한 터빈홀에 설치한 <Weather Project>는 큰 공간에 인공태양을 만들어 관람객들의 얼을 빼놓았는데, 태양처럼 보인 것은 수백개의 단파장 램프였다. 단파장 램프는 아주 좁은 파장대의 빛만 내기 때문에 노란색과 검은색 외의 색은 사라져 버리고 모든 것이 두가지 색으로 된 모노톤의 풍경으로 변해 버린다. 마치 신이 아직 색을 만들기 전인 것처럼, 관람객들은 태초의 세계로 돌아간 듯한 신비감에 빠진다. 그 사이로 미세한 안개가 계속 스며들고 있으니 마치 원시의 공간에 들어온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인공태양의 환상을 만들어낸 이 작품에서 과학이란 어디 있는 것일까? 우선 이 작품을 창출해낸 엘리아손의 아이디어와 그의 스튜디오의 스마트한 스탭들에게 있다. 그들은 어떤 작품을 만드는데 필요한 기술수단에 대해 잘 알고 적절히 활용한다. 그리고 과학은 과연 태양은 뭐고 날씨라는 것은 뭔지 생각하게 만드는데 있다. 과학이란 막연하게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추론에 바탕을 두고 사물의 이치를 파고 드는 것인데, <Weather Project>는 과학이라기 보다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주술에 가까웠다. 필자가 덴마크에서 본 개인전에서 그는 카메라 렌즈용 코팅이 된 유리를 전시한 적이 있다. 사실 작품 자체는 지극히 단순하다. 코팅처리에 따라 다른 빛을 반사하는 몇 장의 유리가 반원형으로 가공되어 벽에 붙어 있었다. 렌즈 유리 코팅은 과학이지만 관람객이 보는 것은 예쁜 색으로 빛나는 몇 장의 유리였을 뿐이다. 몇 년 전 한국의 어느 갤러리에서 했던 개인전에서 그는 사인, 코사인 등 각종 함수 그래프들을 종이에 프린트하여 전시했는데, 그래프들은 예뻤다. 그러나 <수학의 정석>을 손에서 놓은지 오래 돼는 관람객에게 함수 그래프는 기껏해야 곡선이 아름다운 그림일 뿐이었다. 아마 고등학교 때 수학 때문에 치를 떨었던 사람에게는 그 그래프는 트라우마의 곡선으로 보였을 것이다. 엘리아손의 세계는 카푸어의 세계보다는 더 이해의 문을 열어놓으려 애쓴다. 그러나 관객이 어안이 벙벙한 채로 감각의 폭격 앞에 놓인다는 점에서는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과학과 예술이 융합 하는 두 번째 방법은 시간을 거슬러 첨단의 반대로 가는 것이다. 즉 과학과 예술이 분리 되기 이전의 시대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일단 옆으로 치워놓고 생각해 보자. 왜냐면 과거로 가는 방법이 꼭 비싼 타임머신 밖에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과 예술이 분리되기 이전의 시대에는 테크네가 있었다. 테크네는 규칙에 대한 지식에 따라 일정한 기술에 입각하여 쓸모 있는 것을 제작하는 모든 활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테크네의 범주 안에는 제작에 필요한 기술이나 규칙에 대한 지식도 포함된다. 그 규칙은 합리적인 것이어야 했다. 따라서 우리가 합리성 보다는 감정과 상상력, 혹은 도취에 기반한 음악과 춤, 연극, 시는 테크네에서 빠졌다. 회화, 조각, 건축, 의술, 용병술, 항해술, 웅변술, 기하학 등 오늘날 과학기술의 분야라 할 만한 것들이 포함돼 있었다. 테크닉과 테크놀로지의 어원인 테크네는 어떤 것을 잘 만드는 기술이다. 미학에서는 흔히 테크네가 예술의 기원이라고 하는데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예술은 18세기 프랑스의 관학 즉 아카데미에서 생겨난 beaux arts 즉 실용적인 가치는 없고 오로지 감상용으로 만들어진 기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오늘날의 예술은 미술관이나 예술교육기관 같은 제도, 보들레르에서부터 랑시에르에 이르는 온갖 예술담론들, 예술에 종사하는 작가, 비평가, 큐레이터, 딜러 등의 특수한 직업들로 이루어진 성좌를 이루고 있다. 테크네라는 말이 쓰이던 고대 그리스에 그런 것들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위에 쓴 예술의 조건들이 모두 근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계보학적으로 보면 오늘날의 예술은 수 많은 조건들과 제도들이 가지 쳐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테크네는 예술의 먼 가지 중의 하나일지는 몰라도 기원은 아니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테크네에 구현된 기술은 무조건 손 끝으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지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기술의 기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고대 그리스와 현대는 엄연히 다른 시대기 때문에 테크네 역시 과학기술의 기원이라기 보다는 먼 가지 정도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테크네라는 개념에서는 어떤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재주와 효용성 있게 만드는 재주는 하나였다. 만일 이 시대로 되돌아 간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원시적인 수준에서 과학과 예술이 통합된 상태를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테크네의 시대 보다는 훨씬 요즘에 가까운 르네상스로 가보자.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대리석 산지 카라라의 대리석을 썼는데, 높은 산에서 대리석을 캐서 내려오는 과정은 위험하고 힘들었다. 모든 것을 사람의 힘으로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대리석 기둥을 만들다가 그만 기둥을 받친 쇠사슬이 끊어지는 바람에 기둥이 쓰러져서 깨져 못 쓰게 된 적이 있다. 대리석은 부피가 클수록 운반이나 가공이 힘들기 때문에 값은 크기의 세제곱에 비례하여 비싸진다고 한다. 비싼 대리석을 잃은 미켈란젤로는 조수에게 비통한 심정으로 편지를 썼다. “1519년 4월20일, 피에트로에게, 일이 틀어지고 말았어. 토요일 아침 대리석 기둥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세우고 있었지. 세부적인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이야. 30미터 쯤 올렸을 때 기둥을 묶은 사슬의 고리 하나가 끊어져서 기둥은 강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나고 말았네. 대장장이 라체로에게 사슬을 주문한 것은 도나토였는데 튼튼하기만 했다면 그런 기둥 네 개는 버틸 수 있었을 거야.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었어. 의심할 여지도 없었지. 사슬이 끊어진 다음에 보니 불량이었더군. 안쪽이 단단하지도 않았고 칼자루 보다도 가늘었어. 그간 어떻게 그리 오래 버텼는지 신기할 정도였어. 그 근처에서 일하던 우리들의 목숨도 위태로웠던 거고 아름다운 석재는 망가지고 말았지. 금년 축제 때는 집에 못 가고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애. 신이 돕는다면 다시 작업할 수 있겠지.“ 미켈란젤로를 도와야 했던 것은 신이 아니라 쇠사슬의 강도를 측정할 수 있는 과학기술의 방법이었다. 오늘날 많이 쓰는 초음파나 레이저를 이용한 비파괴검사의 기술이 있었더라면 그는 아까운 대리석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첨단기술까지 가지 않더라도, 대장장이 라체로가 평소 만들던 튼튼한 쇠사슬과 같은 퀄리티의 쇠사슬을 계속 만들 수 있는 지속성만 유지했어도 미켈란젤로는 대리석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라체로가 만든 모든 쇠사슬이 불량은 아니었을 테니 어떤 조건에서 튼튼한 사슬이 나오고 어떤 조건에서 약한 사슬이 나오는지 정확히 비교해서 그 조건들을 분석하고 튼튼한 사슬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들을 찾았더라면 미켈란젤로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라체로에게 필요했던 기술은 첨단기술이 아니라 자신의 쇠사슬 제조 방법을 스스로 분석하고 성찰할 수 있는 객관적 능력, 즉 과학기술의 완전 기초가 되는 능력이었다. 혹은 라체로의 근태를 관리하는 인간관리술(human management)이 있었더라도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게으름을 피우는 조건을 분석하여 게으름을 피우지 않게 관리할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이런 상상은 다 부질 없는 것이다. 초음파니 레이저니 인간관리니 하는 것들은 다 20세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카라라의 계곡에는 미켈란젤로가 작업에 쓰려고 비밀표시를 해둔 대리석이 있다는 전설 같은 소문이 있는데, 그것들도 비파괴 검사를 해보면 속에 균열이 있는 불량품인지도 모른다.
아티언스의 작가들은 첨단기술을 가진 미켈란젤로들이다. 그들은 미켈란젤로가 사용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온갖 첨단기술을 사용한다. 하지만 드넓고 깊은 과학기술의 바다 앞에서 무지하다는 점에서는 미켈란젤로 보다 나을 것도 없다. 하지만 아티언스의 작가들은 무지를 그냥 두지 않는다. 그들은 끊임 없이 질문한다. 부질 없어 보이는 질문들이 쌓이면 과학과 예술 사이에 다리가 생겨서 마침내 무지의 강을 건너게 해 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질문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질문의 내용과 형식이 다 문제가 될 수 있다. 과학자는 과학적으로 질문하는 법에, 예술가는 예술적으로 질문하는데만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남녀가 처음 만나서 양가집이 첫 상견례를 할 때 양가 부모님들은 많은 고민을 한다. 어떤 음식점이 분위기도 좋고 음식도 좋을까. 미래의 사돈 어른과 무슨 대화를 해야 결례가 돼지 않을까, 옷은 어떤 것을 입어야 할까 등등. 말하자면 프로토콜에 대한 고민이 많은 것이다. 과학과 예술이 만나는 경우도 프로토콜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제까지 과학과 예술이 만날 때 어떤 프로토콜이 있어야 하는지 아무도 정해주지 않았다. 이제까지 프로토콜 없이 만났기 때문에 무리가 좀 있었고 기대한 성과가 나오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이쪽에서는 프로토콜이라고 생각했는데 상대에게는 결례가 된 경우도 있었고 프로토콜이 암호가 되어 이해가 안 된 경우도 있었다. 아티언스는 갑자기 성과를 내는 행사가 아니라 그런 프로토콜을 하나씩 마련하는 자리가 되야 할 것이다.
그런 프로토콜의 기본은 묻는 것이다. 과학과 예술의 공통점이 딱 하나 있다면 묻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근본에 대해 묻는다. 어떤 질문이 과학적인 것이 되려면 몇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그것들을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과학의 맥락에서 할 만한 질문인가?’하는 것. ‘인간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는 과학적인 질문이 아니다. 둘째로는 ‘질문이 너무 광범위 하지 않고 특정 범위로 한정돼 있는가?’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기를 다 없애는 방법에 대한 질문은 과학적이지 않다. 모기도 종류가 많고 생활습성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입증가능한 질문인가?’도 중요한 조건이다. 블랙홀의 맨 밑바닥에 뭐가 있는가 하는 질문은 궁금한 문제이긴 한데 현재의 과학으로 알 수 없는 문제이므로 입증 가능하지 않다. ’질문과 가설이 서로 연결되는가?‘도 중요한 조건이다. ’만약 지구상의 공기가 다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은 공기가 사라진다는 가설을 전제로 하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므로 의미가 없는 질문이 된다. 문제는, 예술가가 이런 과학의 프로토콜을 가진 질문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제 간신히 프로토콜의 조건을 따지고 있는데 융합이니 협업이니 하는 말들은 상견례 자리에서 가족계획 얘기 꺼내는 것처럼 성급한 말들이다. 상견례는 상대방이 나와 맞는가 눈치 보는 자리다. 그러면서 프로토콜을 확인하는 자리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질문해야 한다. 그 초심의 상태가 테크네이다. 실제로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으나 과거의 태도를 돌이켜 볼 수는 없다. 과학과 예술이 하나였던 시대는 어떤 시대였을까를 상상하면서 묻는다면 과학과 예술이 공통의 지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아티언스가 딱 그런 자리다.
결국은 그간 온갖 이유로 만만하게 보인 과학을 다시 제자리에 놓고 신중하게 공부하며 접근해야 한다. 우선 해야 하는 것은 과학에 대한 잘못된 표상을 바로 잡는 것이다. 과학에 대한 잘못된 표상은 너무 많지만,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사례는 진화에 대한 것이다. 인터넷에 ‘진화’ 혹은 ‘evolution’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 보면 항상 원숭이가 점점 커지고 손과 발이 발달해서 사람이 되는 과정의 그림이 나온다. 즉 진화를 어떤 것이 점점 개선돼 나가는 과정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무슨 기술이 진화하여 이러이런 기능을 갖게 됐다’는 식으로 말 하는 경우도 많다. 원숭이가 점점 발달하여 사람이 되는 그림이나, 이런 말들은 진화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다. 생물종의 진화는 점진적인 개선이 아니라, 수 많은 종들이 살다가 환경에 맞는 것은 살아남고 맞지 않는 것은 멸종하는 과정이다. 환경에 맞는 것이 살아남는다고 해서 환경이 의도를 가지고 어떤 종은 남겨 놓고 어떤 종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종 간의 상호작용의 결과일 뿐이다. 그래서 진화를 제대로 그림으로 나타내려면 나무 모양으로 그려야 한다. 가지 끝에는 각각 생물종들이 있어서 어떤 가지는 사라지고 어떤 가지는 남는 식으로 그려야 하는 것이다. 진화론에 대한 오해가 워낙 보편적이라서 (창조론은 제외하고 말 하는 것이다.) 아마 이 그림을 바로 잡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과학에 대한 잘못된 표상의 또 다른 유명한 사례는 비행기가 뜨는 원리다. 흔히 비행기가 뜨는 원리는 베르누이의 정리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긴 경로(longer path)’이론, 또는 ‘동시 통과(equal transit)’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베르누이의 정리를 간단히 말 하면 ‘유체의 속도가 높은 곳에서는 압력이 낮고, 속도가 낮은 곳에서는 압력이 높다’는 것인데, 이를 항공기의 양력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온갖 오해가 생겨났다. 비행기 날개의 단면을 보면 위쪽이 굽어져 있어 아래쪽보다 경로가 더 길다. 이 때 앞쪽에서 날개에 의해 갈라진 공기는 뒤쪽에서 같은 시간에 다시 만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더 긴 경로를 거치는 공기가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즉 날개의 위아래로 갈라져 흐르는 공기는 날개 끝에서 서로 만나야 진공이 생기지 않으므로 위쪽의 공기는 더 빨리 뛰어서 아래쪽 공기와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위쪽의 유속이 빨라지고 결과적으로 압력이 낮아져서 날개가 위로 뜬다는 것이 ‘긴 경로’ 이론 혹은 ‘동시 통과’ 이론이다. 이런 오해는 20세기 초 독일의 한 교과서에서 시작되어 얼마전까지도 수 많은 조종교범과 항공전문서적에도 퍼져나갔다. 요즘은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이런 오해를 바로 잡고 양력의 원리를 설명한 것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만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진짜 양력이 발생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바로 뉴턴의 제2법칙과 제3법칙에 의해서이다(가속도법칙, 작용-반작용법칙). 앞에서 뒤로 흐르는 공기는 날개를 지나면서 위에서 아래방향으로 속도가 변한다. 이는 공기가 날개에 의해 가속되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날개와 공기사이에는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적용된다. 공기의 흐름을 아래쪽으로 바꿨으로 날개에는 위쪽 방향의 힘이 작용하게 되는 셈이다. 바로 이 힘이 양력이며, 비행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실제로 비행기의 날개는 위와 같은 공기의 흐름을 만들기 위해 "받음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날개의 앞면이 진행방향에 비해 약간 들려있음으로써 생기는 각도이다. 비행기 날개는 받음각을 통해 공기의 흐름을 아래쪽으로 변형시키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날개에는 위쪽방향의 힘이 작용하는데 이것이 양력이다.” (https://rksi.tistory.com/7)
과학에 대한 잘못된 표상이 만연하는 이유는 우리가 과학을 만만하게 보기 때문이다. 이 글의 맨 앞에 썼던, 과학이 만만하게 보이게 된 이유 즉 ‘과학이 너무나 보편화되어 숨어 버린 것’과, ‘과학을 구현한 물건들이 너무 싸게 보급되어 사람들이 쉽게 대하게 된 것’으로 되돌아가 보자. 이런 이유들을 거꾸로 뒤집어야 과학은 만만한 모습을 벗고 본래의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즉 과학은 어떤 것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과학이 실제 사물에 구현되려면 수 많은 사람들의 과학적인 노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검증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과학은 가설을 검증하는 체계지만, 과학 자체도 검증의 대상이다. 과학자들은 남의 학설을 검증한다. 과학자가 아닌 일반인들도 누가 어떤 진술이 과학이라고 내세울 때 무조건 믿을 것이 아니라 검증해야 한다. ‘정말 그런가? 과연 그게 가능한가?’ 하는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실험하는 태도로 살아야 할 것이다.
이번 아티언스의 주제로 삼은 ‘실험을 실험하다’라는 말은 과학과 예술이 융합 할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근본적으로 재검토 한다는 뜻이다. 양자가 만난다고 했는데 과연 만난 것이 맞는지, 서로 다른 얘기를 했는데 통했다고 오해한 것은 아닌지, 과학자가 예술가에게, 예술가가 과학자에게 하는 요청이나 요구가 정당한 것인지 근본부터 검토하자는 것이다. 만일 예술을 과학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생각한다든지, 반대로 과학을 예술의 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아티언스의 태도가 아니다. 양자 간의 협업의 전제는 실험 하는 태도가 공유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실험 하는 태도는 어떤 것도 적당히 넘기지 않는 태도다. 실험설계에서부터 실험에 쓰이는 장비의 셋업, 실험에 참가하는 사람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어떤 것도 허투루 해서는 실험이 안 된다. 에디슨은 자신의 회사 제너럴 일렉트릭이 추진하고 있던 직류 전기 시스템을 채택시키기 위해 웨스팅하우스가 추진하던 교류가 위험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콜럼비아 대학 실험실을 빌려 개에 전기줄을 연결하고는 개가 죽을 때까지 전류를 흘렸다. 그리고는 교류는 위험하니 직류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의 몸무게도 재지 않고 전압도 재지 않고 그저 개가 죽을 때까지 전류를 흘린 것이다. 이런 것은 실험이 아니다. 개를 그런 식으로 마구 죽여서는 안 된다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개의 몸무게가 얼마일 때 직류 전류 몇 볼트를 얼마의 시간 흘렸더니 개가 죽더라’는 데이터가 정확해야 실험이다. 지금은 그런 시절로부터 140년 이상 흘렀기 때문에 이런 터무니 없는 실험은 더 이상 없다. 하지만 연구윤리나 과학자의 진정성 같은 더 큰 문제가 실험을 둘러싼 큰 프레임 노릇을 하고 있다.
예술에서도 이런 식의 실험하는 태도가 갖춰져 있을까? ‘실험적 예술’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그것은 ‘실험하는’ 예술은 아니다. ‘실험하는 듯한 분위기를 보이는’ 예술일 뿐이다. 실험은 가설을 세우고 그것이 실제로 들어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조건 아래에서 객관적인 측정을 실시하는 일이다. 즉 실험의 요체는 가설-측정-객관성-확인인데, 필자가 아는 한 전세계의 어떤 예술작업도 이런 경로를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제까지 예술에서 ‘실험적’이라고 하면 뭔가 독특하고 새로운 시도 정도일 뿐이지 가설을 내세워서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식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예술에서 말 하는 실험이란 단지 은유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장 보드리야르가 “요즘은 단추로 전쟁하는 시대다”라고 말 했을 때 그럴싸 하게 들리긴 하지만 단순한 팩트의 차원에서부터 틀린 말인 것처럼 (단추로 전쟁할 수 있는데 논산 훈련소에서 유격, 각개, 화생방, 행군, 피알아이는 왜 하며 아들을 훈련소에 보낸 엄마들은 왜 우나? 단추 누르러 갔는데), 실험적 예술이란 말은 그럴싸 하게 들리지만 실체가 없는 말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하고자 한다. ‘실험’은 과학용어다. 과학용어는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고. 그렇다고 과학이라는 말 앞에 벌벌 떨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과학적이 되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정도는 생각하고 과학이란 말을 붙이자는 것이다. 결국 ‘실험을 실험하다’라는 말은 이제까지 실험이라고 부른 것이 정말 실험이었나를 겸허히 반성하고 새로운 실험의 조건은 어떤 것이 돼야 할지 생각해 보자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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