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46) 정서영 작가]
“조각은 설명없이 나타나 잊을 수 없게 지속된다”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기자 2020.06.12
필자에게 정서영의 작업은 미궁과 같다. 작품들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의 종착지가 쉽게 보이지 않아서이고, 그 과정에서 생성되는 생각의 실타래가 쉽게 정리되지 않아서이다. 물론 모든 작품은 다양하게 감상되고 해석될 수 있다. 동일한 작품이라 하더라도 감상자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상황 속에서 마주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경험될 수 있다. 그런데 정서영의 작업은 그와는 조금 차원이 다르다. 생각을 멈출 수 없는, 설렘과 긴장의 순간이 이어지는, 무한히 확장되는 열린 영역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조각에 대한 사유는 예술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그리고 본다는 것, 경험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자체를 고민하게 한다. 마치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텍스트 드로잉’이 그렇듯,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실타래를 언어로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담아내고 끝없이 생성하는 작업이다. 어쩌면 미궁의 출구는 하나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어렵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정서영 작가와의 대화
*아래의 내용은 정서영 작가와 서면으로 이뤄진 인터뷰를 옮긴 것입니다.
‘텍스트 드로잉’은 텍스트이자 드로잉이며 덩어리(조각)로 인식된다.
특히 언어가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시각화되어 조각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역으로 생각하면 이는 텍스트도 아니고 드로잉도 아니며 조각도 아닌 무언가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이다.
‘텍스트 드로잉’뿐 아니라 정서영 선생님의 다른 작품들도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미술의 경계를 해체하는 혹은 넘나드는 방식을 보여주면서 조각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어 양가적이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최종적으로 전달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궁극적인 작업의 지향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또한 선생님께 조각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듣고 싶다.
‘무엇의 본질’이라는 것이 있다는 믿음은 대개 누군가를 얕보고 공격한다는 것, 사람은 애초에 ‘최종’이라는 것을 감히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이것이 정말 사실임을 궁극적으로 알리고 싶은데 마침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조각이다. 나에게 조각은 세상의 모든 사물처럼 설명 없이 나타나 어디서든 그 자리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지속되는 것이다.
현재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 ‘공기를 두드려서(Knocking Air)’의 전시 안내문에 적힌 “‘사물과 언어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사유하면서 이를 조각적 상태로 끌어들이는” 작업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셨으면 좋겠다.
사물과 언어의 관계를 통해 나의 작업에 대해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다. 사물, 언어, 관계, 조각 중에서 제일 중요한 말은 아무래도 조각이다. 그다음은 관계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관계, 조각은 사물이나 언어보다 조금 더 주의 깊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사물과 언어는 관계, 조각보다 조금 더 포괄적인, 이른바 현대 예술의 문제이다.
미술의 역사에서 조각은 오래되었으나 특별한 선택이다. 오래된 것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시 나타나고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특별해진다. 그것을 어떻게 나타나게 할 것인지를 고민할 때, 그때의 시간을 반영하는 것이 사물과 언어이다. 그리고 그 사물과 언어를 고난이도의 시험대에 올리는 것이 조각이다.
‘노란색, 그것’(2020), ‘검붉은색, 그것’(2020)에서 사용된 ‘그것’이라는 대명사는 그 자체로 특정한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에 그 안이 비어있는, 그래서 더 많은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단어이다. 이와 같은 제목은 정답이나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고민하고 생각하게 유도하는 선생님의 작업 경향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제목을 짓는 남다른 방식이나 기준이 있는지, 기호학이나 언어학적인 부분도 염두에 두시는지 궁금하다.
매우 직관적으로 제목을 만든다.
그리고 직관은 오래 겪은 시간을 잊지 않되 절차적으로 기억하면 발생하지 않는다.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호두와 열쇠는 각각 이전의 작품에 존재했던, 그러나 확인할 수 없었던 대상이다. 존재하는 동시에 부재함으로써 상상력을 자극하던 대상이 눈앞에 나타남으로써 관객은 허구(상상)와 실제가 공존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동시에 눈으로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 사이의 간극도 확인하게 된다. ‘뼈와 호두’(2016), ‘증거’(2014)를 제작하실 당시에 호두와 열쇠를 시각화하지 않으셨던 이유는 무엇인지, 이번에 그것을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인지 듣고 싶다.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등장했던 모든 문제가 시각화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중요한 문제를 작품에 드러나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그것이 반드시 시각적이지만은 않다는 이야기이다. 작품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 속에 어떻게, 언제 그 문제가 활발해질 수 있는지 살펴본다.
선생님의 작업은 무심한 척하면서 극도의 정교함과 치밀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작업을 진행하실 때에 우연성이나 즉흥성이 어느 정도 개입되는지 궁금하다. 이와 같은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 완벽하게 계획하고 진행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리고 작품의 시각적인 부분에서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도 듣고 싶다.
우연과 즉흥은 언제나 발생하고 그건 너무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잘 알아보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우연히 눈을 가진 사람이 다수인 세상에서 그 눈도 잘 사용하고 싶어지게 하는 역할을 나의 작품이 좀 해냈으면 좋겠다.
선생님의 작업은 미술을 전공하지 않는 관객들에게 매우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선생님의 작품을 만나는 관객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다면 말씀해주시기 바란다. 또한 관객이 작품을 보다 즐겁게 감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 답변 부탁드린다.
작품을 감상하는 법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평소에도 매 순간 ‘하필이면’ 자신이 그 장면을, 사람을, 사물을 보고, 거기에 있다는 특별한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그 의미는 남이 적어준 문자로만 읽어내기에는 어렵다. 사실 문자로만 읽어내고 말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이 남는다. 그 순간도, 거기에 있는 누군가도 끊임없이 움직이기에 생겨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고 즐거울 수도, 이런저런 기억이 날 수도, 불쾌하거나 아주 싫을 수도, 우스꽝스러울 수도, 어이없을 수도, 곤혹스러울 수도 있고 그저 그럴 수도 있는데 이 감정들 사이에 우열은 없다. 작품을 깊게 감상한다는 것은 미술 전공의 유무에 따라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품과 함께 하는 스스로의 시간을 따른다고 생각한다.
https://m.aaart.co.kr/m/m_article.html?no=7108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