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자는 아카이브의 드문드문함 사이에서 없던 길을 터야 하고, 아카이브의 더듬거리는 답변과 불언으로부터 없던 질문을 만들어내야 한다. 만화경은 눈앞에서 자꾸만 형태를 바꾼다. 한순간 눈앞에 나타난 이미지는 명확한 가설로 굳어지기 전에 사라진다. 영롱히 빛나는 이미지는 순식간에 다른 이미지가 되어 다르게 빛난다. 다른 이미지가 나타나는 데는 아주 작은 흔들림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카이브의 의미는 바로 그런 만화경 이미지처럼 역동적이면서 무상하다.
―아를레트 파르주, 『아카이브 취향』, 김정아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20), 116.
1.
⟪카운트다운⟫(문화역서울 284, 2011) 도록 중 정서영의 작품을 소개하는 지면에는 정서영이 쓴 「유들유들한 덧셈」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 글과 마주친 일이 엉뚱하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도판과 작가 소개 등 상투적인 도록 구성에 유독 성격이 다른 글이 하나 끼어 있었던 연유였을 것이다. 가족 앨범을 보는데 누가 찍은 것인지도 언제 찍은 것인지도 모를 풍경 사진 하나가 발아래로 툭 떨어진 것 같았달까? 위상 공간이 깨지며 사물들의 관계 전체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하는 어떤 순간. 여하간 어딘지 어색하게 자리 잡은 「유들유들한 덧셈」은 이런 문장들로 시작하고 끝난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들판 저 멀리에서 누군가가 개를 부른다. 무언가 밖에서 휙 날아가는 것을 느끼고 정신을 집중해 보니 분명 그것은 길고 거무튀튀하다. 그것이다. 점점 다가오는 그것을 나눠 놓아야 한다. (중략) 아무도 구분하지 못하는 문제를 떠올려 본다. … …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이제 드디어 그것을 양손에 꼭 쥘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가능하면 서로 멀리 떨어지도록 힘껏 던지도록 하자. 원래 하나였다는 건 애시당초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라면 거짓말인 줄 알아라. 난 그것을 본 적도 없다.”1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릴 개인전 제목이 ⟪오늘 본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불현듯 이 글이 생각났다. 왜냐면 나는 이 글이 ‘오늘 본 것’에 관한 것이라고 줄곧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아마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오늘 본 것”이라는 말을 쓴다면 그것은 대개 어떤 대상이나 사건을 특정하기 위해, 그러니까 포위망을 좁히듯 그것이 다른 어딘가로 빠져나가고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꽉 붙들어 놓기 위해서다. 어린이들의 일기는 이처럼 현행된(actualized) 것과 언어 사이의 관계를 건설하는 훈련법이다. 하지만 「유들유들한 덧셈」에서 글쓰기는 ‘오늘 본 것’을 재현하기 위해서 도입되지 않는다. 이 글은 내가 무언가를 본 것이 ‘오늘’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그 시간 동안의 일만일 수가 없고, ‘보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엄습하는 불길함, 먼 곳으로부터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떠나길 반복하는 상념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이란 그래서 단지 그렇게 보였던 그것으로만 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거의 붙잡힐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붙잡기보다는 “점점 다가오는 그것을 나눠 놓아야” 한다. “원래 하나였다는 건 애당초 거짓말이다.” 언뜻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결코 그것만으로는 축소되지 못한다. 오히려 ‘나’의 참여로 인해 ‘오늘’과 ‘보기’와 ‘그것’이 각각 ‘오늘’과 ‘보기’와 ‘그것’으로부터 모두 초과한 현실이 등장한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과 ‘보기’와 ‘그것’에 얽혀 있던 믿음이 깨지며 ‘오늘 본 것’은 다른 합의로서 다시 현실에 자리 잡는다.
집중하면 할수록 커져만 갈 뿐인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 쓰기다. 「유들유들한 덧셈」이라는 텍스트를 조직하는 것은 충실한 재현, 현행된 현실을 언어를 써 모방하고 이러저러하게 이어 붙여 말이 되게끔 하는 봉합의 의지가 아니라, ‘오늘 본 것’ 즉 현실의 복잡성을 총체적으로 탐색하고 회복하여 인식하려는 의지이다. 문장들의 연결은 문장들 사이의 의미론적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전체를 동분서주 바삐 오가는 관찰자의 발걸음을 좇는 데 집중하는 것으로 읽어내야 한다.2 그 자취가 보여주는 것은 현실이라고 이를 만한 이미지나 서사가 아니라 현실의 ‘구체성’ 그 자체인데, 여기서 구체성이란 눈에 보이는 ‘모양’의 세밀함이 아닌 ‘움직임’의 개연성이다. 여기서 ‘움직임’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 글쓰기의 주체가 가시적인 현행성만이 아닌 가상성(virtuality)까지를 포함한 폭넓은 범주를 ‘현실’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에 또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들쑥날쑥 요철 진 이 텍스트는 그런 읽기를 요구하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일상의 리듬에 동화된 주체성으로는 독해되지 못하는 것이기에 일상적 삶을 위해 필터링되곤 하는 다양한 진동에 귀 기울여야만 한다. “그것”에 집중해 놓고는 “아무도 구분하지 못하는 문제를 떠올려 본다”라거나 “난 그것을 본 적도 없다”라고 말하는 이에게 현실이 불연속적인 것들의 배치로 등장했다가 순간 다시 사건의 연속으로, 그리고 다시 불연속으로 등장하길 반복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건지도 모른다. 아니, 자연스럽다는 말은 여기서 틀린 표현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주체가 방문하는 장소는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급류의 한가운데와 엇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화법에서 벗어나 있어서 그렇지, 「유들유들한 덧셈」은 어쩌면 아주 단순한 진술이다. “‘그것’은 움직인다”는 것이다. 여기서 움직임이란 몸짓이나 위치의 이동보다 폭넓고 중층적인 개념이다. 형학(形學)에만 머무르지 않는 형학이다. 물질은 스스로 생동한다는 물활론과도 다르며 변신 이야기를 넘어선다. 움직임은 사물이 가진 관계 전체의 (운동 없음 또한 포함하는) 쉼 없는 운동에 가깝고, 그 관계에는 운동을 여러 속도로 여러 장소에서 인식하는 ‘나’ 또한 반드시 포함된다.3 예컨대 정서영의 두 채널 영상 [도판 1]〈세계〉(2019)는 순전히 움직임을 관찰하고 재생산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화면 안 부서진 호두 모형은 부동하지만, 부동은 그림자의 요동을 매개해 보여준다. 리듬 없는 소리는 이 요동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미세한 차이들을 생성하는 운동과 관련한다는 것을 암시한다.4 다르게 보면 이 작품은 사물-현실이 다양한 힘들의 작용과 교차로 구성된 네트워크라고 가정하고 그것의 속도와 방향을 측정하는 실험실의 실험 같기도 하다. 이처럼 사물이 움직임이라는 것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면, 사물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은 한순간 세계 전체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과 다르지 않은 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각가’로서 정서영이 수행해야만 하는 일은 사물이라는 움직임을 물질 속에서 다루어야 하는 비극적인 숙명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을 비극이라 이를만한 건 움직임은 생성과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고 물질은 사라지는 것에 대해 극히 무력하여 끝내 다다를 수도 정복할 수도 화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5 이 비극이 가장 선명히 표현된 작업이 바로 [도판 2]〈유령, 파도, 불〉(1998)일 것이다. 불, 파도 모양의 유토와 유령 모양의 도자, 역시 유령처럼 보이는 모양이 에칭(etching)된 유리창과 먹지 드로잉 넉 점으로 구성된 이 작업에 대해 정서영은 “정해진 형태도 크기도 없으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을 조각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6이라고 밝히는데, 김장언은 이와 같이 “고정된 형상이 없는 대상”, “비정형적인 에너지의 흐름”을 조각화 한 것을 통해 정서영의 조각에 대한 유령론(hauntology)을 전개하기도 했다.7 그러나 김장언이 〈유령, 파도, 불〉에서 환영으로서의 조각과 그 조각이 만들어 내는 거리(distance)를 중요하게 말했다면, 내가 이 작업에서 흥미롭다고 생각한 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형상화된 방식이다. 유령과 파도와 불은 〈유령, 파도, 불〉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가장 전형적인 유령과 파도와 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유령은 유령처럼 보이고 파도는 파도처럼, 불은 불처럼 보인다. 하필이면 지나칠 정도로 통속적인 이 모습은 내게 유령과 파도와 불을 가능한 한 충실히 재현한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유령과 파도와 불의 재현 불가능성을 끝내 선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얼추 타협할 바에야 하지 않기를 택한다. 기만적으로 말할 바에야 말하지 않음을 통해서 말해지는 진실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여기서부터 조각은 조형과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조각이 형태를 완성, 완결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도판 3]〈유령, 파도, 불〉의 먹지 드로잉 넉 점은 모두 ‘유령’이라고 이를 만한 어떤 것의 존재감이 천을 통해 매개돼 있다. 분명 무언가가 있는데, 커튼을 열어젖혀 보아도 그것은 도저히 인식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다. 하지만 거기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있음을 말하고 보여주는 것이 불가능할 뿐. 우리가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더라도 거기에는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다. 조각은 그 움직임의 시간에 육박한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을 물질로서 다루어 보고자 한 의지와, 결국 남은 이 통속적 이미지 사이에서 나는 수없이 거듭된 실패를 발견한다. 사람들은 정서영의 조각의 심오한 깊이를 들여다보고 싶어 하고 이 조각이 어떤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기를 기대하곤 하지만, 나는 종종 그것이 지닌 실패의 시간과 자신의 한계(marginal)를 진술하는 장면을 본다. 그 장면은 불안에 휩싸여 있고 또 무력감을 토로하지만, 나는 불안과 무력을 두고 그것이 일상에서 가지는 의미처럼 부정적이라거나 패배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조르주 아감벤이 비평의 근원적 의미에 대해 말한 것과 같은 “앎의 경계”에 대한 적극적인 탐색처럼 보인다.8 바로 그 앎의 경계에서, 자신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자신이 떠나온 사물로부터 어긋난 것을 조각하고 그것의 자리를 마련한다. 여전히 모르는 것들을 향해 몸을 기울여 두면서 말이다. 사물로 향하며 다다른 한계가 어디인지, 어디까지 갔다가 돌아왔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유령, 파도, 불과 같은 통속적 형상이 일상의 그것과는 다른 문제를 위한 형(形)으로서 다시 현실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그가 기나긴 여정을 했다는 것은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사물은 그가 가로질렀던 시간과 장소의 너비와 부피를 미약하게 증언한다. 그렇지만 정서영이 종종 내어놓는 사물이 통속적인 물건처럼 보이더라도 그가 모든 물건에 관심을 두고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로 하여금 여정을 떠나게 했던 사물이 가끔 통속적인 것일 때가 있을 뿐이다.
내가 정서영과 그의 작업에 관해 얘기하며 ‘현실’이라는 용어를 계속 쓴 건 그가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도 얘기했지만, 정서영에게 있어 ‘현실’이라는 것이 우리가 일상적인 수준에서 인지하고 또 구성하는 현실과는 다른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만 한다.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그를 두고 리얼리스트라고 이르는 것은 현실을 모든 가능한 수준에서 가능한 방식으로, 무엇보다 의미심장하게는 불가능성의 경계까지 나아가 관찰하고 인식하려 한다는 측면에서 그렇지 관찰된 사물을 그대로 재생산하는 것을 규준으로 삼은 작가라는 뜻은 아니다. 그의 리얼리즘은 현실들을 가로지르는 제3의 장소를 만드는 것으로 향한다. 여기서 정서영의 제3의 장소란 미래나 바깥과 같은 건축적 의지에 기반한 장소가 아니라 현실 사이의 어느 틈, 사물의 실재가 여전히 발견되지 않은 채 잠자고 있는 가느다란 틈이다. 때문에 그의 조각에 대해서 얼마나 현실과 일치하는지, 혹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논하는 것은 거의 무의미하다. 정서영은 가늠할 수 없이 복잡하고 폭넓은 실재라는 운동을 사물이라는 것을 통해 파악하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물의 편에 가담하여 추측하게 된 현실 속에서 예술가로서 발화해 낼 만한 어떤 것을 찾고 조각으로서 문제화한다는 것이다.9 그렇기에 비로소 그를 조각가라고 이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조각은 언제나 사물이면서도 문제 제기인데, 이는 일종의 중언부언이다. 왜냐하면 사물은 이미 하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 인터뷰에서 밝히듯, 정서영에게 있어 예술은 “첨예하고 비타협적인 상태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며 “비타협적 태도는 절대 가치를 위한 작가주의라기보다는 사물과 현상을 섬세하게 구분하는 체계를 작동시키기 위한 것”10이다. 그러므로 이 조각에 조금 더 적확한 자리를 찾아준다면, 그것은 ‘유령’이 아니라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언급하고 스베틀라나 보임(Svetlana Boym)이 역설한 “짧은 그림자”에 가까울 것이다.11
2.
뒤늦게 말하자면 이 글의 1부는 3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의 정서영의 지난 기록 자료들을 뒤적거리며 아카이브 작업자로서 2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던 내가, ⟪오늘 본 것⟫을 보며 그의 조각 작업에 관해 다시 생각해 본 것을 정리한 내용이다. 사물을 통해 실재라는 움직임을 추측하고 문제화하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성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불가능성은 또한 필연적으로 조각의 조건이 된다는 것, 그렇기에 조각은 언제나 모든 것과 어긋나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이런 생각은 아카이브 작업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아카이브 작업자로서의 시간 때문에 나의 전시 관람은 기이하게 뒤틀려 일반적인 것이 아니게 되었다. 보통의 관객이라면 작품을 자신의 현재와 관련해서 감상할 것이고, 아카이브 작업자는 자신이 다루는 문서 속 대상을 실제로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든 글이든 문서 속 기록이 사물로 등장했을 때의 낯섦과 으스스함, 기록된 당대에서 형성했던 것과는 다른 콤퍼지션12으로 사물이 등장했을 때의 당황스러움, 그러니까 그건 기록물과 사물 사이를 널뛰는 분열증과 사물들 간의 다른 시간성이 중첩되고 충돌하고 경합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기도 했다. 이를 통해 알게 된 건 장소는 그저 예술 작품이 놓이는 환경이 아니라 예술 작품의 존재론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부연하자면, 아카이브 작업이란 단순히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가공하는 일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남겨진 자료들 속에서 텍스트를 발견하고 해석하여 리얼리티를 구성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구성은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나 의지에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무엇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13내가 만약 그저 명시적이고 가시적인 요소를 기준으로 기록물을 분류하고 가공하는 일만을 했다면 ⟪오늘 본 것⟫을 당황스럽게 여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먼 곳에 사는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 같은 감정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내가 했던 일은 기록물을 뒤적거리며 그 속에서 단서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발판 삼아 정서영이라는 예술가와 그의 작업의 의미를 형성해 줄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일이었다. 네트워크는 언뜻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무엇과 무엇이 연결되기 위해선 (무엇과 무엇을 연결하지 않거나 네트워크에서 무언가를 제외하기 위해선) 그 근거와 힘이 작동하는 방향성의 설정이 필요하고 여기서 그 일은 작품과 작가의 실천 전체에 대한 해석에 의해 산출된다. 예컨대 한 작품을 기록한 무수히 많은 엇비슷한 사진들 중 하나를 골라내는 일은 여러 사고 과정을 거쳐야 가능한데, 대표되는 하나의 그 이미지에서 무엇이 보여야 할지에 대한 판단은 피사체인 작품의 가장 주요한 면모 혹은 지금 보여야 할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인지를 가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 장의 사진이 다른 한 장의 사진 혹은 글과 어떤 관계를 형성할지에 따라서도 선택이 달라진다. 선택된 값들이 형성하는 전체적인 형상 속에서도 한 작품 혹은 작가의 실천에 대한 의미가 순차적으로 드러나기를 기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은 한 장 한 장의 사진과 한 줄 한 줄의 문장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비교하고 해석하는 시간을 필요로 하며, 나는 이것이 예술 작품에 관한 편집 행위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14 편집은 허구로부터 다시 하나의 허구를 구성하는 행위이므로, 나는 작업하면 할수록 작품 그 자체의 존재 양식으로부터는 멀어져만 갔던 것 같다. 작품의 잠재성들 사이에서 헤매던 나와 작품의 살덩이와의 마주침은 자연스럽게 납득할 만한 순간은 아니었다.
특히 예술 아카이브 작업을 한다는 것의 의미와 그 복잡함, 한계에 대해 내가 생각해 보게 된 계기는 한 장의 사진을 통해서였다. 그 사진은 정서영 작가가 참여했다는 ⟪젊은모색 2000: 새로운 세기를 향하여⟫(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해 뭔가 쓸 만한 정보를 얻기 위해 뒤적거리던 도록의 마지막 부분에 있었다. 수십 장의 흑백 사진은 개막일의 전시장처럼 보이는 곳의 풍경을 담고 있었다. 전시의 출품작들은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와글와글 모여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서 역시나 자신감에 가득 찬 듯 놓여 있었고, 군상 속에는 드물게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내가 알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중 한 사진이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이 전시에 출품된 정서영의 작업 [도판 4]〈발코니〉(2000)가 절반쯤 찍힌 것이었다. 당연히 캡션이나 부가적인 설명은 없었다. 이 작품 옆으로 기차놀이하듯 줄지어 가는 다섯 명의 사람 중 네 명은 반대편의 다른 작품을 보며 걷고 있었고 가장 앞의 한 남자만이 걷는 와중 〈발코니〉를 보고 있었다. 그 남자가 〈발코니〉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는 정말 궁금했지만, 그건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작품을 보지 않고 있는 네 명이 오히려 〈발코니〉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고 그 남자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사진을 통해서 내가 〈발코니〉라는 작품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 바는 없다. 하지만 사물로서의 예술 작품의 삶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 사진은 〈발코니〉의 온전한 모습을 담고 있지 않았기에 대표 도판으로는 쓰일 수는 없었지만, 나는 확신할 수 없는 이유로 이 지면을 스캔했고 자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고민을 하다 ‘전시-젊은 모색 2000: 새로운 세기를 향하여’ 폴더에 이 사진을 추가했다.
[도판 4] ⟪젊은모색 2000: 새로운 세기를 향하여⟫(국립현대미술관, 2000) 전시 도록.
왼쪽에서 두 번째 줄 위에서 두 번째 장면에 정서영 작가의 작품 〈발코니〉 부분이 찍혔다.
되돌아보면, 나의 아카이브 작업 전체는 이 사진 한 장을 통해서 구조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이 사진은 당시 정서영의 작업이 어떤 사회적 관계, 문화적 분위기 속에 있는지를 언뜻 비춰 보여주었고, 그러면서 나는 다른 자료들 또한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살펴보기 시작했으며, 이내 하나의 예술적 작업이란 특정한 조건에서, 특정한 관계들 안에서, 특정한 장소에서 비로소 어떤 사물로서 등장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15 하지만 이 사진 기록은 ‘어떤 조건’이 있었음을 말할 뿐 그 조건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섣불리 증언하지 않는다. 미술관에서 사람들이 어떤 말들을 주고받았는지, 여기를 채우고 있던 냄새나 소음은 어떠했는지, 낙관과 절망이 어느 정도로 뒤섞여 있었는지, 누가 환희했고 누가 배제를 경험했는지, 이 전시는 젊음을, 새로움을, 시대를, 예술을 어떻게 규정하면서 작품을 드러내었는지, 작품은 사회에 어떻게 기입되었는지…16 하지만 그때 거기에서의 움직임은 사라진 지 오래다. 작품이 ‘있었음’은 명료해졌지만 그 작품이 품은 개연성은 오직 추측만 될 뿐이다. 사진 한 장이 그 자체로 아카이브였다. 아카이브는 무언가를 더 알려주는 것 같지만 동시에 무언가가 생각보다 많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무언가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 같다가도 어느 한순간 완전히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17 거긴 필연적으로 한참을 헤맬 수밖에 없는 곳이다. 허구 없이는 회복시킬 수 없는 것에 대한 반복되는 상실감과 상실에 맞서기 위해 도입되는 편집으로 산출하는 미학적인 것의 출현이 영원히 반복될 것만 같았다. 아카이브 작업은 현실을 붙잡는 일에 대한 불가능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정서영의 조각 앞에 선 내가 느끼는 어떤 상실감, 구멍이 숭숭 뚫린 현실을 보는 듯한 막연함은, 사물의 실재를 가능한 좇는 그의 조각이 현실에 대해 가지는 아카이브의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아카이브 작업 경험은 무시할 수 없는 관람 조건이 되었고, 이 얽힌 상황 자체를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편으로 이건 억울한 일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특권이기도 했다. 여기서 특권이라 함은 내가 정서영의 작업에 대한 유일한 아카이브 작업자라서가 아니다. 아카이브 작업이 정서영의 조각과 맺는 특권적 관계 때문인데, 그 관계성에 대해 이해하고 쓰기를 시도할 수 있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카이브 작업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모든 예술 작품에 대한 경험에 같은 강도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정서영의 조각의 경우 그 영향은 매우 강도 높은 것이었는데, 아카이브 작업의 경험은 정서영의 조각에 대해서 알려주는 바가 있었고 정서영의 조각은 아카이브 작업의 의미에 대해서 알려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이 두 영역은 예상치 못하게 상호적이었다.
우선 [도판 5, 6, 7, 8]⟪오늘 본 것⟫ 전시장을 방문했을 때 작품으로부터 멀리서 확인할 수 있었던 아주 단순한 사실부터 말해보자. 무언가가 ‘여기 있다’는 사실보다 더 강하게 환기된 건 무언가는 ‘여기 없다’는 사실이었다. 전시장에 현실화한 건 내가 기억하는 자료화된 아카이브 목록에서 몇몇 이름뿐이었다. 그러므로 이건 누군가의 선택에 의한 결과다. 왜 무언가는 나타났고 무언가는 나타나지 않았지? 다음으로, 이 장소는 조정되고 조율된 상태라는 사실이다. 전시란 원래 그런 것이기에 특별한 건 아니다. 문제는 조정되고 조율된 방식이다. 이 전시장에서 일어난 조정과 조율은 오직 작품들 사이의 관계만을 변수 삼아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다. 크게 네 개로 나뉜 영역 중 전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한 긴 직사각형 모양의 영역이 이 사실을 가장 강력히 표명하는데, 이 영역은 공들여 제작된 흰색 선으로 명확하게 작품의 자리가 마련되어 내외부가 구분되어 있고, 작품들은 구획 안에서 이웃들과 씨름하는 것에만 열중했다. 나는 다가갈 수 없이 흰색 선 바깥을 맴돌며 그 시합을 관람해야 했다. 작품들의 배치 상태를 ‘시합’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마 그것들이 긴장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조정과 조율을 위해 만든 흰색 선은 하나의 관람 조건이자 기획을 실행하기 위한 장치이다. 사물의 수많은 잠재성 중, 바로 여기서 문제 삼아 보고자 한 것은 작품 간의 관계성이라는 기획이다. 하나의 사물이 언제나 중층적이라고 한다면, 한 사물 옆에 다른 한 사물을 놓는다는 것은 그 중층성들을 헤집고 특정한 긴장을 유도한다는 것을 뜻한다.18 여기서 하나와 그 옆에 놓인 하나의 관계를 수학 문제 풀 듯 답을 찾아나가도 될 것이고, 관계들의 총체를 유기적으로 하나의 상으로서 파악해 봐도 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다면, ‘선택’이란 바로 이 관계성,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저마다의 이유로 태어나 조우할 일 없이 살아가던 이 사물들을 하나의 가시적인 네트워크 안에서 결속시켜 보겠다는 의도에 따른 것이라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의 네트워크에 위치시키기 위해서는 이질적인 것들을 통합하기 위한 프로토콜이 필수적이다. 이것들을 꿰고 있는 건 뭐지?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사물들로부터 몇 걸음 더 뒤로 물러나야만 한다. 뒤로 물러나면 사물은 점점 더 물질로서의 존재감을 잃고 이미지가 되어가고, 그러면 어느 순간 사물들의 수다스러움보다는 사물들 사이를 흐르는 흐름의 풍경이 등장한다. 흐름이 있다. 어쩌면 이 전시에서 조각이라 이를 만한 건 개별 작품이 아니라 개별 작품들의 배치를 통한 저 흐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개별들의 잠재성보다는 개별들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통해 무언가를 보여주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나는 가만히 서서 흐름의 역동을 구석구석 살피게 된다.
흘렀던 것은 무엇일까? 이것에 대답해 보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다시 사물에 가까이 가 본다. 멀리 물러나 있던 발걸음을 전시가 허용하는 한 작품에 가까이 옮겨가 보면 작품들의 구체적인 얼굴이 보인다. [도판 9, 10, 11, 12] 나는 생경한 면면들에 대한 관찰을 핸드폰 메모장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파도는 기억보다 크고 전망대는 기억보다 작다. 가벼운 조각적 신부. 녹아내릴 듯 번들거리는 싱크대. 조야한 손과 어설픈 손잡이.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고무줄 통. 다 시들어 가는 가짜 파초. 먹선이 번진 –어. 수족관의 파란 바닥. 축축한 가죽.”
물질성의 구체적인 특징들을 발견해 버렸던 것이 아카이브 작업자로서 내가 당황한 이유 중 하나였다. 사진이나 글이 질감이나 규모, 부피감, 무게감 등을 알려주지 않았다가 그걸 확인해서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구체성들이, 어딘지 어긋나 있는 시간성을 드러내 버렸기 때문인 것 같다. 두 번의 시대착오가 동시에 감지된다. 처음은 저 사물이 당대의 세계에 대해 가졌을 시대착오. [도판 13, 14]〈싱크대〉(2011)의 “녹아내릴 듯 번들거리는” 표면이 싱크대의 재현이 아니라 〈싱크대〉가 조각으로서 등장했던 당대를 향한 하나의 문제 제기로서 시대착오적인 어긋남의 시간성을 표현한다면, 동시에 지금 여기 놓인 저 “녹아내릴 듯 번들거리는” 표면은 또한 그 당대와 지금 여기 사이의 거리감으로부터 발생하는 시대착오이기도 하다. 저 표면이 관여했던 움직임은 더는 여기 없다. 두 번째 시대착오. 작품에 한없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막아 놓은 것은 바로 두 번째 시대착오를 의식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보는데, 말하자면 모든 하나하나의 작품들이 제각각의 이유로 정서영의 조각 실천의 서사 속에서는 여전히 역동적인 관계성을 형성한다고 하더라도, 가까이 다가가야만 확인할 수 있는 물질적 구체성은 지금 여기 이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공간적 조건과는 이제 관련이 미약하기에 우리를 그것으로 안내하지 않는 것이다. 유념할 것은 이것이 과거 작품에 대한 부정이나 폐기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외부와 연결된 여러 통로 중 하나를 그저 임시로 닫아둔 정도뿐이라는 것이다. 작품이 표면이나 물질성만으로 수렴하는 것은 아니니까.
[도판 13] 정서영, 〈싱크대〉, 2011, 싱크대, 돌, 페인트, 78x162x143cm. ⟪사과 vs. 바나나⟫(현대문화센터 내 구 아파트 모델하우스, 2011. 기획: 킴킴갤러리) 설치 전경. 제공: 정서영.
반면 훼손되어도 무방하다는 것처럼 저지선 없이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있게 한 [도판 15]〈말 그대로〉(2022)는 공중에 매달려 거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얇은 철망 구조물 〈평범한 날〉(2022)과 함께 놓여 있다. 이 영역은 마치 유령이 벗어놓은 껍데기들이 모인 양 허약하고 희미한 물질만 남아있다. 여기서 나는 보이고 만져지는 것이 이제 “매미의 허물”처럼 여겨진다며 오늘날을 숙고하던 작가의 말을 떠올렸다. 물질은 더 이상 당대를 증언하는 중요한 텍스트가 아니며, 당대에 위력을 발휘하는 힘을 추적하는 건 유령의 옷가지를 뒤적이는 일이 아니라 떠나간 유령의 행적을 조사함으로써 시작한다. 〈말 그대로〉와 〈평범한 날〉 옆에는 〈세계〉가 반복 상영 되고 있었다. 세계의 끊임없는 움직임이 호두를 둘러싼 그림자 속에 비친다.
[도판 16]⟪오늘 본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조각이다. 작품들뿐만 아니라 작품들과 지금 여기의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고 조율함으로써 조각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사색하고 미래를 타진해 본다. ⟪오늘 본 것⟫을 만드는 일은 조각가 자신의 위치와 나아갈 방향을 조정하는 일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정서영이 그간의 전시에서 우리를 사물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했다면, ⟪오늘 본 것⟫에서는 우리를 사물로부터 멀리 뒷걸음질 쳐 보라고도 제안했다. 사물로부터 멀리 그리고 또 가까이 오가는 발걸음 속에서 조각의 의미가 등장한다.19 그리고 나는 사물을 둔 이 선택과 조정을 통해서 아카이브 취향의 작업자로서의 정서영과 그의 작업의 아카이브적 면모를 발견한다. 이는 작가 자신 또한 스스로 작품의 외부자라는 것을 알려주기도 하는데, 사물 혹은 세계를 향한 그의 완강한 비타협적 태도에 비추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정서영은 사물과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사물 속에서 사물과 관련한 현실의 총체적인 유동성을 발견하고 그 유동성 속에서 조각가의 문제를 도출하기에 그의 사물은 계속해서 시대의 가시적 흐름과는 어긋나는 운동성을 형성한다. 때문에 정서영의 조각은 구체적인 역사적 텍스트이면서도 역사에 소요되지 않고 오히려 역사를 지연시키는 것이다. 구체적인 현실의 움직임을 증언할 뿐이지 역사를 투사하지도 역사를 쓰려 하지도 않는다. 아카이브가 역사에 소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으로 역사를 끊임없이 재구성하도록 종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정서영의 조각 앞에서 (아니 모든 사물 앞에서) 우리는 사물을 대상화하는 권위적인 관람객이 아니라 아카이브를 헤매는 아카이브 취향의 보행자가 되어야 한다. 사물은 해석될 것이 아니라 불가능성 속에서 발견되고 추측됨으로써 자신이 품고 있는 진실을 내비칠 것이기 때문이다. 파르주의 말을 바꾸어 보자면, 사물의 의미는 “역동적이면서도 무상하다.”
***
몇 걸음을 더 물러나 보면, 정서영의 조각은 다른 형태의 지식을 생산하는 실천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유령을 유령이라 부르는 것에 그치지 않기 위한 일. 캐슬린 스튜어트(Kathleen Stewart)의 『투명한 힘(Ordinary Affects)』은 체계 혹은 구조로는 포착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여 사회를 구성하는 힘 중 하나인 일상적 정동을 인류학적 연구 대상으로 삼고 이 정동이 포착되는 상황을 글로 재구성하길 시도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 작업의 어려움이 어느 정도일지를 이 책의 한국어판 번역자 신해경의 「옮긴이의 말」에서 가늠해 볼 수 있다. “돌덩이는 남고 안료는 사라지고, 그릇은 남고 음식은 사라지고, 뼈는 남고 살은 사라진다. 실체 있는 것도 그러한데, 하물며 실체 없이 흐르고 쇄도하고 출렁이는 것들은 어떠하겠는가. (중략) 고대의 건축물, 조각상, 그릇, 무기들은 남아 있지만, 더 부드러운 것들, 음식, 옷가지, 체온을 지닌 살덩이 같은, 우리 일상에 더 가까웠을 것들은 남아 있지 않다. 그보다도 더 삶 자체에 가까웠을 기쁨과 슬픔, 공포, 죄책감, 분노, 의심, 미움과 같은 감정, 집단적/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매일 겪었을 정서적 부침과 그 궤적은 글로 박제된 것 말고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그리고 글에서는 언제나 많은 것이 누락된다.”20 어떤 인류학자가 사람들 사이를 흐르는 힘을 찾는다면, 어떤 조각가는 사물을 통과하는 흐름을 본다. 캐슬린 스튜어트가 그 힘을 사회적 요소로 위치 지으며 우리 현실을 설명하려 한다면, 정서영은 다시금 사물 속에서 문제를 만든다. 둘의 공통점은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것, 흐르고 변하는 것,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힘을 발휘하여 정말로 문제적이라고 할만한 것을 발견하기 위해 비교적 견고하고 가시적인 것을 경유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진실은 가능함의 비전보다 불가능함의 비타협성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글은 정서영 개인전 ⟪오늘 본 것⟫(서울시립미술관, 2022)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유들유들한 덧셈」의 전문은 다음 링크에서 읽을 수 있다. http://chungseoyoung.com/ko/texts/cheeky-addition. ↩
구체적인 현실을 가능한 한 낯설게 인식하고 다시 총체적으로 재생산한다는 측면에서라면, 「유들유들한 덧셈」과 관련하는 작업은 〈낮잠〉(2014) 일 것이다. 〈낮잠〉은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2014⟫의 커미션으로 제작된 작업이다. 〈낮잠〉을 위해 류한길, 홍철기, 이옥경 세 음악가는 이틀 동안 DMZ 일대를 녹음기를 들고 배회하며 ‘본 것’을 즉각적으로 말로 뱉어냈다. 당연히 말들은 무엇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다음의 말들과 접 붙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본 것을 말로 뱉어내는 순간 이미 본 것은 사라지거나 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짧은 순간 화자는 말을 멈출 것인지, 거짓말이라도 할 것인지, 봤던 기억을 말로 윤색할 것인지 등 수없이 많은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중요한 건 그럼으로써 말에 뒤섞이게 되는 머뭇거림이나 웅얼거림, 확신을 주지 못하는 말의 세기 같은 음향들이다. 이를 듣고 있으면 청취자는 화자가 말을 꾸려 내는 동안 속절없이 흘러가 버리는 화자 주변 세계의 속도를 알아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낮잠〉은 흐르는 세계를 보는 것에 대한 작업이고 여기서 우리는 말만을 들어서는 세계의 이미지를 제대로 구성해 낼 수 없다. 말이 아닌 말의 음향적 요소, 말의 구멍들 사이를 채우는 음악가들이 움직이는 소리, 움직이며 나는 소리가 공간에 반향 된 소리, 악기의 연주 소리까지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거기서 묘사나 설명이 아니라 긴장을 발견하게 된다. ↩
사물을 끊임없는 흐름으로 이해한다면, 어렵지 않게 ‘나’ 또한 사물과 관련하는 유동적 변수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물에 참여하는 일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움직임 또한 발명해야 하는 일을 숙명처럼 요구한다. 정서영은 단 한 번도 인간 된 조건을 벗어난 적 없다. 사물을 ‘비인간’으로서 쉽게 화해시키기보다는 인간으로서 가능한 사물의 편에 서는 일을 반복해 왔을 뿐이다. 사물을 ‘비인간화’하는 담론 속에서 사물은 역설적으로 지나치게 말끔하고 미학적인 대상이 된다. 한편, 사물에 관하여 움직임이 보다 의미심장하게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의 전시 ⟪책상 윗면에는 머리가 작은 일반못을 사용하도록 주의하십시오. 나사못을 사용하지 마십시오⟫에서부터인데, 〈자전거 빛〉(2007), 〈손전등의 빛〉(2007), 〈아이스크림 냉장고, 케이크 냉장고〉(2007) 등에서 작가는 빛을 재료로 썼고 〈얼룩〉(2007)은 액체인 커피의 흔적을 바닥에 남긴 작업이었다. 이후 2010년대에는 자주 몸, 소리, 영상 등 움직임을 매개하는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조각을 수행했다. 사물의 재료와 형태가 세계에 관한 텍스트로서 가진 위상이 달라졌음을 직감한 것에 대해 작가는 종종 “매미의 허물”을 비유 삼아 얘기하곤 한다. 어느 시점부터 그에게 보이고 만져지는 것이 더 이상 이 세계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껍데기로 여겨진다는 것이었다. ↩
〈세계〉의 소리 작업을 한 음악가 류한길에게 작곡이란 이미 있는 안정화된 소리를 이러저러하게 구성하고 배치하는 일이 아니다. 그는 디지털 장치를 통해 소리의 최소단위가 되는 웨이블릿(wavelet)을 디자인하고 그것이 진동하는 규칙을 만드는데, 그러므로 작곡은 가상성의 세계를 설계하는 일이 되고 연주는 그 세계를 생성함과 동시에 복잡화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호두를 보며 세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과, 웨이블릿으로 세계 전체를 형성하게 하는 것은 거의 같은 일처럼 보인다. 그렇게 정서영과 류한길의 작업은 가상성의 차원에서 마주치며, 〈세계〉는 그 구체적인 마주침의 장소로서 움직임을 전면화한다. ↩
물론 이 비극은 움직임에 관해 현재의 인간 문명 전체가 처한 상황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다양한 기록 도구와 재생산 장치는 움직임에 ‘맞선다.’ 때문에 이 과정에는 반드시 번역과 편집이 필요하다. 매개 없이는 우리에게 움직임 또한 없다. 우리의 문명은 물질에 기반하고 물질을 다루는 기술의 발전과 관련한 신화에 의해 전개됐다. 이와 같은 기술의 신화 위에서 움직임을 사유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누군가에게는 모순된 것일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역사적 시기의 등장일지도 모른다. 동시대적 예술은 이러한 모순을 껴안으면서 가능해진, 그러니까 전승되던 하나의 신화가 어긋나기 시작한 곳에서 나타난 독특한 역사적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파도〉(〈유령, 파도, 불〉 중 일부)에 대한 작가 노트. http://chungseoyoung.com/ko/works/wave. ↩
김장언, 「정서영: 유령과 더불어」, 『공기를 두드려서』(서울: 바라캇 컨템포러리, 2020), 33. ↩
“하지만 비평이라는 단어가 서양철학의 한 용어로서 등장했을 때 그것이 의미했던 것은 앎의 한계에 관한 연구, 정확히 말해 가정할 수도 없고 규정할 수도 없는 것의 한계에 관한 연구였다. 비평이 이와 같이 앎의 경계를 추적하기 때문에 우리의 눈앞에 “진실의 세계”를 “자연이 불변의 경계 속에 가두는 하나의 섬”으로 펼쳐 보인다면, 비평은 어쨌든 “폭풍우에 휩싸인 드넓은 대서양”의 끊임없는 유혹에, 항해사를 그가 거부할 수도 없고 끝낼 수도 없는 모험 속으로 끊임없이 끌어들이는 유혹에 노출되어 있어야 한다.” 조르조 아감벤, 『행간』, 윤병언 옮김(파주: 자음과모음, 2015), 9. ↩
이는 정서영이 이미 석사 논문에서 사물에의 “가담”과 “투사”라는 개념으로 언급한 자신의 조각적 방법론이기도 하다. 정서영은 “가담”을 “사물의 편에 서는 방법”으로, “투사”를 “나의 무의식적이면서도 필연적인 가치 부여를 허락하는 방법”이라고 제안하며 자신의 조각이 형성되는 과정을 도식화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보라. 정서영, 「사물에의 가담과 투사에 의한 조각 작품 제작 연구」(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9); 이 논문은 다음에 수록되어 있다. 장지한, 『그것이 그곳에서 그때』(서울: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 2021). ↩
정서영, 「Ms.C와 정서영의 인터뷰」,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서울: 현실문화, 2013), 138. ↩
벤야민은 「짧은 그림자들」에서 그림자가 사물의 “날카로운 검은 모서리”가 되는 정오의 시간에 대해 사색하는데, 보임은 사물의 명백함도 그림자의 쾌락도 아닌 이 짧은 그림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그것들은 우리가 너무 근시안적이 되거나 너무 큰 날개를 달지 않도록 주의를 준다. 우리가 사물들의 짧은 그림자를 경시하고 너무 가까이 사물들에 다가갔다가는 그것들을 없애버릴 위험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림자들이 너무 커지게 내버려둔다면 우리가 그것들에 휩쓸려 들어가 즐기고 있게 될 수도 있다. 짧은 그림자들은 우리가 가까움과 멀어짐 사이의 균형을 점검하도록, 사물의 본질을 말하는 자들과 음모론적인 가장(simulation)을 설교하는 자들 모두를 믿지 않도록 촉구한다.” 스베틀라나 보임, 「오프모던 선언문」, 『오프모던의 건축』, 김수환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23), 117. ↩
콤퍼지션은 예술 작품이 무엇인지에 대해 규정하는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철학적 용어로, 그는 하나의 예술 작품은 재료, 모양, 표현된 아이디어 등 어느 요소로도 환원되지 않으며 이 요소들을 묶어주는 콤퍼지션 자체라고 말한다. 하나의 예술 작품은 고유한 콤퍼지션, 자신의 법칙에만 지배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급진적으로 자율적이라는 것이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주장이다. 정서영의 작업을 콤퍼지션 개념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특히 유용해 보이는데, 왜냐하면 정서영에게 있어 조각이란 콤퍼지션을 수행하는 것과 엇비슷한 개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오늘 본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콤퍼지션은 요소들을 결합하는 공식으로서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역량으로서 끊임없이 그때그때의 현실적 조건에 따라 결과를 새로이 산출한다는 것이다. 반복하여 말했든 정서영은 사물을 오브제 단위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조각이라 이를 때 그에게 콤퍼지션의 요소는 오브제의 외부 전체까지를 아우르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보라. 마르쿠스 가브리엘, 『예술의 힘』, 김남시 옮김(성남: 이비, 2022). ↩
아를레트 파르주가 『아카이브 취향』(김정아 옮김, 서울: 문학과지성사, 2020)에서 말하는 ‘아카이브 취향’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아카이브라는 제도나 장치에 대한 특성과 규범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아카이브는 ‘아카이브 취향’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어떤 행위성 혹은 능력이 발휘되는 곳이다. 그 능력이란 사물을 총체적으로 관찰하고 해석하고 재생산하는 일련의 신체적-지성적 행위로, 실제와 허구 전체를 적극적으로 껴안으며 그 상호성 속에서 진실을 탐구하는 일이다. 예컨대 아카이브 속 어떤 자료가 거짓된 증언을 보여주고 있을 때, 아카이브 취향의 작업자는 그것을 거짓으로서 치부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거짓을 통해서 현실이 어떻게 모순적일 정도로 복잡하게 (혹은 비극으로서) 형성되었는지를 추정하고 규명하는 일을 한다. 아카이브 취향은 과장해서 말하자면 숨을 참고 바닷속을 헤엄치며 바닥에 가라앉은 쓰레기들을 통해 해류뿐만 아니라 문명 전체를 사유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르주에게 아카이브는 바로 이러한 주체성과 행위성을 촉발하는 매우 특수한 장소인 것이다. 더욱 과장해서, 가시적인 세계를 하나의 아카이브라고 여긴다면, 어떤 사물은 자명한 사실을 증언할 것이고 어떤 사물은 음흉하고 비열한 거짓말을 속삭이고 있을 것이고 어떤 사물은 침묵할 것이다. 이 사물들을 경청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나름의 질서를 구성하는 몇몇 드문 예술가들을 우리는 아카이브 취향의 작업자로서 이해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자료에 대한 해석을 기반으로 작품과 전시, 작품과 전시가 아닌 부수적인 것들이 총체적으로 역동하는 웹상의 네트워크라는 것은 아카이브 작업 초기 단계에서 상상하고 추구했던 바였지만, 결국 그건 작업자인 나의 역량이 모자라 현실화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 작업은 가시적인 단위들의 명시적인 연결만이 남은 구조물의 형태로 매듭짓게 되었다. 웹사이트 개발 작업은 강문식 디자이너, 민구홍 개발자와 협력하여 이루어졌다. http://chungseoyoung.com. ↩
여기에는 당연히 미술계가 포함될 것이고 보다 복잡하게는 ‘사회’까지를 포함한다. 주의할 것은 ‘사회’란 사회적 실재를 뜻하지 역사 서술 속에서 표상된 사회를 뜻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오늘 본 것⟫의 도록에 수록된 김성환과 정서영의 대화를 보면, 정서영은 20세기 후반 당대의 대표적인 표상들을 경계하며 자기 자신의 사회적 실재를 주시하고 거기에 머물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보라. 김성환, 정서영, 「대화」, 『오늘 본 것』(서울, 밀라노; 바라캇 컨템포러리, 스키라, 2023), 188-206. 이미 표상된 사회를 작품의 실재와 연결지음으로써 미술사는 종종 스스로 공회전을 초래하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근 과거에 잠깐 유행했던 1990년대에의 회고다. 대부분의 기획은 기존의 지식을 버젓이 따르거나 재생산하는 것에 그쳤을 뿐, 작품에 근거해 사회적 실재를 재구성해보는 허구 능력은 발휘되지 않았다. 이때 한 시대는 역사 쓰기의 소여가 아니라 그저 소비의 대상이 된다. 사회적 실재는 작품의 실재로부터 추측되어야 하고, 추측됨으로써 비로소 새롭게 표상되어야 한다. ↩
예술의 개념은 매우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생성되고 변화하는 유동적인 것이다. 나는 종종 예술의 개념을 도서관에 비유해 생각하곤 하는데, 예컨대 100권의 책이 꽂히는 서가가 각각의 내용과 서로 간의 관계를 통해 ‘예술’이라는 개념을 정의한다면, 어떤 책 한 권이 다른 책 한 권으로 대체될 때마다, 책의 순서가 뒤바뀔 때마다 예술의 개념은 요동할 것이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서는 그 요동을 통해서 예술의 개념을 끊임없이 새로이 정의할 것이고, 게으른 사서는 구성이 바뀔 때마다 100권의 책을 목록화하여 공지할 것이며, 본질주의자는 지금의 목록을 비난하며 과거의 어떤 한 목록만이 가장 타당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100권의 책으로 서가를 구성하고 또 이용하는 일을 큐레토리얼로 이해한다면, 작품은 그 사이에 끼어 있거나, 혹은 서가와 벽 사이에, 혹은 서가 앞에 떨어져 있는 찢긴 종이 같은 것이다. 하지만 도서관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협잡꾼은 그 종이만을 손에 쥐고 시장을 돌아다닌다. ↩
이미지 자체가 사물이다. 정서영은 종종 사진적 이미지를 조각의 시작으로 삼거나, 작업에 포함시키곤 하는데, 그건 어떤 이미지가 순간적으로 사물의 현실을 등장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해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작업에 들여오는 사진적 이미지가 사진기의 비인간-자동주의적 가능성을 타진했던 초현실주의자들의 사진적 이미지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
정서영의 작업을 두루 돌아보면, 자주 하나와 다른 하나를 가까이 두는 일을 한다. 이것은 마치 한 자기장이 다른 자기장의 도입을 통해 제3의 자기장을 형성하는 형국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나에 다른 하나가 도입되면 급격하게 상황은 복잡해진다. 바꾸어 말하면, 사물은 그 자체로 본질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관계적이며, 사물의 의미는 여러 관계성에의 탐구와 실험, 그 변화들을 총체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비로소 도출된다는 것을 뜻한다. 사물을 관계적으로 탐색해왔던 이가 선택과 배치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수행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
멀리에서 보기와 가까이에서의 보기를 반복하는 건 정서영이 조각이라는 일을 시작하는 과정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의 석사 논문 「사물에의 가담과 투사에 의한 조각 작품 제작 연구」의 4장 ‘작업 전개 방법’의 첫 번째 순서에 자리한 것이 바로 ‘바라보기’에 관한 것이다. “바라보기의 시선 방식은 가능한 한 과열되지 않은 침착한 시선을 가지고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작업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들)에 관심하고자 함에 의한 것이다. 또 그것은 가담과 투사라는 두 사유 방식에 의한 행위가 일으키는 현상을 중간항의 세계에서 통찰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중간항의 세계란 손쉽게 그 의미를 추적당할 수 없으며 어느 한 쪽에만 몰입되어 있지 않은 곳, 과열되지 않은 지점을 말한다. (중략) ‘바라보기’의 시선 방식은 어쩔 수 없이 사물로부터 거리를 취하게 만든다. 사물의 모습을 떨어져서 관조함으로써 객관적으로 진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동적인 태도는 능동적 체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사물에 가까이 접근하여 여러 가지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 그리고 다시 떨어져서 바라보는 행위가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정서영, 「사물에의 가담과 투사에 의한 조각 작품 제작 연구」, 188. ↩
캐슬린 스튜어트 지음, 『투명한 힘』, 신해경 옮김(서울: 밤의책, 2022), 10. ↩ (출처: 멀리에서 가까이에서)
http://semacoral.org/features/hanbumlee-from-far-and-near-review-of-chung-seoyoung-what-i-saw-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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